국제금융의 숨은 거인, 수출신용기관

2019-02-28     옌스 말링 l 언론인

수출신용기관은 지금까지 대중의 감시 밖에 있었다. 그러나 경제학자 델리오 지안투르코에 의하면, 수출신용기관은 국제금융의 ‘숨은 거인’이다.(1) 정부가 수출촉진을 목적으로 설립한 공공기관(때로는 국가를 위해 일하는 민간기업)인 수출신용기관은 국가산업을 지원하고 국제무역을 활성화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미국의 수출입은행, 프랑스공공투자은행(Bfifrance), 독일의 율러헤르메스, 중국수출신용보험공사(Sinosure) 등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수출신용기관은 번유니언(유럽 4개 수출보험기관이 모여 창립한 세계수출보험연맹-역주)에 가입해 있다. 

번유니언이란 세계 주요 수출신용보험 및 투자보험 기관들이 모여 1934년 창설한 조직이다. 번유니언 회원기관이 2017년 발행한 보험 및 금융상품 규모만 무려 2조3천억 달러에 육박한다. 이는 서비스와 재화를 전부 합친 전체 국제교역액의 무려 14%에 해당하는 수치다. 국제무역의 중요한 주체로 활약 중인 수출신용기관은 두 가지 위험을 보장하는 역할을 한다. 

첫째는 상업적 위험, 둘째는 정치적 위험이다. 먼저 전자의 경우 서비스나 상품의 주문·납품·결제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재정적·기술적 문제들을 의미한다. 가령 해상에서 화물이 소실되거나, 해외고객이 결제를 거부 및 연체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그리고 후자는, 타국 정부의 정책이나 정치적 상황이 거래에 악영향을 끼치는 경우를 뜻한다. 가령 환전 중단이나 국유화, 수출허가 취소, 내전 등이 이에 해당된다. 대개 첫 번째 위험은 단기금융 장치를 통해 보장하며, 두 번째 위험은 중장기 대출 및 보증에 의존한다. 후자에 특화된 수출신용기관은 2017년 전체 신규 신용화폐 발행의 절반, 액수로는 연 9천2백억 달러 규모를 차지했다. 이는 전 세계 연간 공적개발원조 지출액의 무려 6배에 달하는 수치다.(2)

수출신용의 역사는 20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9년 영국 정부는 제1차 세계대전 기간 몰락한 러시아에 대한 수출을 진흥할 목적으로 수출신용보장과를 설치했다. 1934년 창설된 미국연방정부의 수출신용기관에 해당하는 미수출입은행은 정국이 불안해질 위험이 큰 지역으로의 수출을 꺼리는 미국기업들을 널리 지원했다. 가령 1940년대 라틴아메리카, 1950년대 유럽, 최근에는 신흥국가가 주된 대상이었다. 1960년대 말, 대부분의 OECD 회원국들도 비슷한 제도적 장치를 갖추었다. 1990년대 이후 비OECD 회원국도 같은 대열에 합류했다. 가령 2001년 중국, 2011년 러시아가 대표적인 예였다.

2008년 수출신용기관은 중대한 역할을 맡게 됐다. 수출입 거래의 80~90%가 보험 및 신용금융서비스에 의존 중인 상황에서, 재정위기의 여파가 국제무역으로까지 번질 위험이 컸던 것이다. 정부의 요청에 따라, 고비용의 거래만 보장하려는 민영보험사들의 역할을 대신할 구원투수로 수출신용기관들이 떠올랐다. 유럽의 여러 정부들은 수출신용기관이 단기시장에 개입할 수 있도록 이들의 정관을 뜯어고쳤다. 2010년 수출신용기관은 경제위기 전 약 15%에 그쳤던 단기신용 규모를 30%까지 확대했다.

“수출신용기관이 제공하는 무역자금과 수출 신용보험은 경제위기가 발생한 동안 유동성 문제를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는 한편, 국제무역을 지속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 이 분야에 정통한 극소수 전문가 중 한 명인 파멜라 블랙먼 펜실베니아 주립대학 교수가 설명했다. 사실 이런 종류의 공공개입은 여론이 눈치채기 어렵다. 반면 정부가 유동성 위기에 빠진 은행에 재자본화에 필요한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경우는 금융위기의 여파를 자신들이 책임지고 있다는 납세자들의 불만을 야기할 수 있다. 

블랙먼은 설명했다. “많은 수출신용기관들은 (납세자가 채워야 할) 부족한 유동성을 해결해줬다. 이런 상황이 정치적으로 가능했던 것은 일반인들은 수출신용기관의 존재를 잘 몰랐기 때문이다. 덕분에 기업들은 사후 여파를 염려하지 않고도 공적자금을 자유롭게 퍼다 쓸 수 있었던 것이다.”(3) 유동성 위기가 해결된 뒤에도 수출신용기관들은 이런 활동을 꾸준히 확대했다. 번유니언의 대표 토피 베스테리는 “은행들은 자사의 대차대조표를 과거와 같은 위기(2008년 위기 등)에 노출시키기를 꺼리는 경향이 있다”고 연례보고서에서 기술했다.(4)

 

수출신용기관의 금고를 채워준 ‘빈곤퇴치프로그램’

수출신용기관이 자금을 조달하는 무역프로젝트의 경우, 주관 국가의 납세자들도 손실을 상쇄해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세계빈곤퇴치기구 덴마크액션에이드에서 일하는 라르스 코흐가 설명했다. “사업주관 국가는 수출신용에 대해 공적 보증을 해준다. 다시 말해 개발도상국의 민간기업이 대출금을 상환할 수 없는 경우, 정부가 대신 책임지고 비용을 물어주는 것이다.” 
개발도상국이 유럽국에 대해 진 채무의 80%는 수출신용보증 대상에 해당한다. 유럽개발부채네트워크(EURODAD)는 5개 수출신용기관을 대상으로 벌인 연구조사를 바탕으로, 2005~2009년 탕감된 양자 간 채무의 85%가 수출신용보증에 의한 것이라고 밝혔다.(5) 아주 편리하게도 공적개발원조 항목으로 책정된 이 자금은, ‘빈곤퇴치프로그램’이라는 본 목적보다는 수출신용기관의 금고를 채우는 데 이용된 것이다.

수출신용기관이 지원하는 수많은 사업은 환경이나 개발에 악영향을 미치거나 인권침해를 초래하기도 한다. 일례로 수하르토 독재정권 시절(1967~1998년) 인도네시아에 판매된 독일 군함이 대표적인 예다. 1995년 인도네시아에 판매된 노르웨이산 파력발전소처럼, 일부는 채 완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탈리아 수출신용기관인 SACE의 지원으로 건설된 에콰도르 다울페리파 댐처럼, 어떤 사업은 심각한 사회적 여파를 몰고 오기도 한다. 

2009년 이후, 중국의 수출신용기관격에 해당하는 중국수출입은행은 함반토타 항구건설 사업을 목적으로 스리랑카에 10억 6천 4백만 달러 규모의 자금 대출을 2건이나 허용했다. 대신 스리랑카는 항구건설 작업에 차이나 하버 엔지니어링 회사를 채용하겠다고 약조했다. 2017년 말 채무 상환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던 스리랑카는 결국 중국에 90년에 걸친 항구 운영권을 내주는 신세가 됐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국가의 주권을 위험에 빠뜨렸다는 비판을 하기도 했다.(6)

OECD 회원국 정부들은 자신들이 신흥국에 비해 경쟁력이 뒤떨어질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수출자금 지원을 엄격히 규제하기란 어려운 일이라고 주장한다. OECD 소속 한 전문가가 걱정스럽게 지적한 것처럼, 중국 3개 수출신용기관(시노슈어(중국수출보험공사), 중국수출입은행, 중국개발은행)이 “수출자금 지원을 급속히 확대”(7) 중이기 때문이다. 번유니언이 보유한 자료에 의하면, 미국은 지금도 단연 최고의 수출지원금 제공 국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미국이 발행한 중장기 신규 신용화폐 규모는 200억 달러가 넘는다. 이 뒤를 인도(140억), 카타르(80억), 영국(50억) 등이 쫒고 있다. 

공식적으로 중국의 신규 대출액은 최대 30억 달러로 발표됐지만, 이는 실상 저평가된 금액이다. 중국 정부가 이 수치에 상당히 민감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중국의 수출신용기관 중 번유니언에 가입한 기구는 시노슈어가 유일하고, 다른 2개 기관의 활동은 어둠에 휩싸여 있다. 그럼에도 그 2개 기관은 현재 중국의 중대 국책사업인 ‘신 실크로드’ 사업 분야에서 매우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또한 수십 개 국가의 인프라 구축 사업에 함께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최근 보고서에 의하면, 수출입은행은 중국정부가 수출지원을 위해 약 3천 4백만 달러 규모의 중장기 신용을 공여한(빚을 낸)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또한, 미국의 영향력이 점차 감소하고 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중국 정부는 지금도 여전히 수출지원금 규모를 국가기밀로 삼고 있다. 하지만, OECD 국가들은 수출신용기관의 투명성을 요구하는 비정부기구들이 늘어남에 따라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야만 하는 상황에 부닥쳐 있다. 2015년 미국 수출입 은행은 의회로부터 사업갱신 승인을 받지 못해, 7~12월 모든 신용공여가 동결되는 사태를 맞기도 했다. 또한 2018년 3월에는 5명의 이사 중 마지막 이사의 임기가 종료됐음에도, 일부 공화당 의원들의 지연작전 때문에 의회가 새 이사를 임명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사실상 일부 공화당 의원들이 수출입은행의 보조금 지원이 원활한 시장운영을 방해한다는,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사안들에 대해서도 그렇듯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 문제에 대해서도 의견을 번복하며, 수출입은행을 무역적자 해결을 위한 강력한 도구로 삼겠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아르메니아의 무분별한 자원채굴주의

아르메니아는 인구(약 300만 명)로 보나, 면적(약 29,400km2)으로 보나 가장 작은 구소련 국가에 속한다. 그럼에도 아르메니아는 무려 32개의 금속광산(금, 구리, 철, 몰리브덴 등)을 보유하고 있다. 그중 정식허가를 받고 다양한 단계로 개발이 진행 중인 곳이 25개에 달한다. 여기에 개발허가를 받은 비금속 광산도 무려 479개에 이른다. 사실상 아르메니아는 광산에서 채굴한 광물이 전체 수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국가다.   

그러나 정부가 소유한 광산은 단 한 곳도 없다. 정부가 광산으로부터 얻는 수입은 이용 수수료 정도다. 25개 광산 개발권 중 13개가 외국인 투자자들(독일, 미국, 러시아, 영국, 호주, 캐나다, 중국계 회사)의 소유이고, 나머지는 아르메니아 소수 재벌들의 차지다.(1) 테그아웃 광산이 대표적인 예다. 발렉스 사의 대부분의 지분은 바로 아르메니아의 신흥 재벌 발레리 메즐루미얀이 보유하고 있다. 

이 아르메니아 광산업체는 ‘조세탈출의 미로’로 통한다. 리히텐슈타인과 키프로스 두 곳에 조세회피처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광산 개발의 두 거물은 독일과 캐나다계 기업이 차지하고 있다. 그 뒤는 러시아계 회사인 지오마이닝과 발렉스가 바짝 뒤쫓고 있다.

 

(1) Armine Ishkanian, ‘Challenging the gospel of neoliberalism? Civil society opposition to mining in Armania’, 『Research in Social Movement, Conflicts and Change』, 제39호, 에메랄드 그룹, 브래드퍼드, 2016년.
 

 

글·옌스 말링 Jens Malling
언론인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Delio Gianturco, 『Export Credit Agencies: The Unsung Giants of  International Trade and Finance』, Quorum Books, 웨스트포트(코네티컷), 2001년.
(2) 『2018 Bern Union Yearbook』, 런던, www.berneunion.org
(3) Pamela Blackmon, 『The Political Economy of Trade Finance: Export Credit Agencies, the Paris Club and the IMF』, Routledge, 애빙던, 2017년.
(4) (2)에서 언급한 책.
(5) Atradius DSB(네덜란드), Export Credits Guarantee Department(ECGD, 영국), EKN(스웨덴), Credendo(벨기에), Export Risk Insurance(SERV, 스위스). Øygunn Sundsbø Brynildsen, ‘Exporting goods or exporting debts? Export credit agencies and the roots of developing country debt’, Eurodad, 브뤼셀, 2011년 12월.
(6) Kai Schultz, ‘Sri Lanka, struggling with debtm hands a major port to China’, <The New York Times>, 2017년 12월 12일.
(7) Lennart Skarp, ‘Chinese export credit policies and programmes’, OECD, 파리, 2015년 3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