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비상태의 알제리 좌파

2019-02-28     아레즈키 메트레프 l 기자

오랫동안 영향력을 행사해온 알제리 좌파가 이제 힘을 잃어가고 분열되기 시작했다. 과거에 활동했던 유명한 좌파 관계자들, 혹은 여전히 좌파를 대표하고 지지하는 이들을 만나봤다.

“반자본주의 좌파는 여전히 알제리에 존재합니다.” 알제리 기자인 엘 카디 이산의 주장이다. 알제리 수도, 알제 중심부에 위치한 오스만 스타일의 건물에서 그를 만났다. 이 건물에는 이산이 운영하는 인터넷 사이트 ‘마그랩 에메르장’ 같은 미디어들의 사무실이 있다. 알제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그는 인터넷신문의 기자이자 편집자로, 1980년 ‘베르베르의 봄’(1) 저항운동에 참여했다.(2) 이로 인해 그는 투옥됐고, 비밀결사조직인 공산주의혁명그룹(GCR)에 합류했다. 

GCR는 파블로주의(본명은 미칼리스 랍티스, ‘파블로’라 불림) 노동조합 활동가들과 학생들이 1974년에 설립한 조직이다. 미칼리스 랍티스는 알제리 전쟁(1954~1962) 기간 민족해방전선(FLN)에 조력했고, 이후 아메드 벤 벨라 대통령의 고문으로 활동한 그리스 출신 트로츠키주의 지도자였다.(3) 1989년 GCR는 노동사회당(PST)이 된다. 오늘날 PST는 작가(극작도 겸하는) 카테브 야신(1929~1989)과 긴밀한 관계였던 데브자(4)에서 활동한 마무드 라셰디가 이끌고 있다. 

엘 카디 이산은 극좌파가 반드시 정권과 대립하는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반자본주의자들은 루이자 아눈이 이끄는 노동당(PT)의 경우처럼 권력에 동조할 수도 있습니다.” 루이자 아눈은 1980년대 차들리 벤제디드 정권에 의해 투옥됐던 페미니스트 활동가였고, 오늘날 또 다른 알제리 트로츠키주의 정당의 대표다. 그녀는 모든 상업주의 정책, 혹은 알제리가 세계화 흐름에 가담하는 것에는 반대하지만, 압델라지즈 부테플리카 대통령의 4선 연임에 대해 반대한 적은 없다. 

1962년의 독립에서 1989년의 복수정당제 채택에 이르기까지 알제리는 다른 모든 세력들을 비밀리에 처단해온 단일정당(FLN) 체제였다. 그동안 알제리에서 좌파는 트로츠키주의 조직들, 특히 프랑스 식민지 시대에 이미 존재했던 알제리공산당(PCA)을 계승하는 사회주의 최전선(PAGS)이 주도해왔다. PAGS의 과거 활동가였던 모한드 바키르는 알제리 정치 체제를 시초부터 정의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사회변혁 진영과 해방운동 진영을 규정하는 것은 훨씬 더 힘들다고 보면서 ‘알제리 좌파’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를 자문한다. 

알제리 독립운동을 계기로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사회주의와 혁명주의 등 다양한 좌파 이데올로기를 지닌 정치 세력들은 FLN으로 결집했다. 전쟁을 전후로 이 거대한 결집세력은 (반 민족주의적인) 마르크스주의 좌파들을 불법화하기에 이르렀다. FLN은 보수주의에 속하는 민족주의적‧종교적 정치 신조들과 함께 좌파의 경제적‧사회적 요소들을 결집했다. 독립이후 벤 벨라 정권은 과거 식민지 시대의 농업 분야를 농민들이 관리하도록 했고, 소규모 산업들을 공유화했으며, 알제리공산당을 불법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국가들, 특히 쿠바와의 관계를 최우선으로 삼는 등, 역설적인 사회주의를 시행했다. 

1965년 6월 19일, 후아리 부메디엔 대령의 쿠데타를 반동적인 권력행사로 여긴 공산주의 좌파들은 민중저항조직(ORP)을 창설하게 되고, 1966년 2월 ORP는 PAGS가 된다. 이후 5년간 알제리 정부는 ‘혁명가들의 메카’로 평가되면서 전 세계 혁명가들을 지지하고 망명을 받아들였다. 그런 반면, 국내 좌파 활동가들에게는 투옥, 고문, 박해를 가하는 기이하고 역설적인 상황이 이어졌다.(5) 

1966년부터 1989년 합법적인 정당으로 인정받기까지 비밀결사조직이었던 PAGS는 이론의 여지 없이 알제리 좌파 투쟁의 선봉대였다. PAGS에 대한 정권의 금지와 억압에도 불구하고 1969년부터 부메디엔 대통령 정부를 ‘비판적으로 지지’했다. PAGS는 부메디엔 대통령이 농업혁명, 기업의 사회주의적 경영, 의료비 무상 지원과 같은 진보적인 선택들을 통해 국가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특유의 방식으로 정치를 이끌었다고 평가했다. 1980년대 들어 PAGS는 차들리 벤제디드 대통령을 계속해서 지지했다. 그러나 차들리 벤제디드 대통령은 PAGS를 계속해서 탄압했고, 경제적으로는 자유주의 노선으로, 사회적으로는 보수주의 노선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그는 여성들에게 불리한 상당히 퇴행적인 가족법을 1984년에 도입했다.  

정부를 계속해서 지지하던 PAGS는 사회 격동기의 새로운 요구들에 직면하게 됐다. 1980년대에는 알제리의 언어 및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고려는 물론, 복수정당제를 비롯해 그때까지 서구 중산층의 가치로 여겨졌던 인권,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같은 개념들을 재구축해야 했다. 또한 PAGS는 이슬람구국전선(FIS)으로 등장한 이슬람주의의 거대한 흐름도 고려해야만 했다. PAGS는 다른 마르크스주의 혹은 자유주의 좌파들의 비밀결사조직 정당들(사회주의세력전선, 사회주의혁명당, 알제리민주화운동)과 함께 1989년에 합법화됐으나, 1990년대 초 내부붕괴로 결국 소멸하고 말았다.

 

PAGS 소멸을 바라보는 여러 시각들

PAGS 소멸의 원인으로는, PAGS가 이슬람주의와 투쟁하는 가운데 권력에 의해 도구화됐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무엇보다 구소련의 붕괴로 야기된 혼란으로 인해 당의 불안정이 가속화됐습니다.” 합법화되기까지 PAGS를 이끌어온 알제리 공산주의 운동의 역사적 인물인 사덱 하제레스의 설명이다. “그러나 특히 당의 단합을 보장하고, 여론의 지지와 존경을 샀던 기본원칙들을 지킬 수 없었다는 게 드러났습니다.”(6) 그는 만약 당이 정치적이고 파벌적인 대립에 가담하기를 거부했더라면, 그리고 심각한 문제들을 평화적인 방식으로 해결하기 위해 싸웠더라면, 정부와 이슬람주의자들 사이의 내전에 따른 혼란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으로 봤다.

사실 PAGS가 소멸한 이유는 다른 상당수의 정당들과 마찬가지로 정부의 강한 압력에 따른 지도부의 분열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PAGS는 결국 이슬람구국전선(FIS)에 유리할지도 모른다는 구실로 사회적 투쟁들을 금지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PAGS의 소멸에 대한 좀 더 일반적인 설명으로, 엘 카디 이산은 “다양한 내부 세력들 속에서 좌파가 정부에 협력한 것이 유감스럽게도 당의 이미지를 흐리게 만들었다. 따라서 자율적인 정당으로서의 정치적 영향력은 전혀 없었다”고 지적했다.

사실상 PAGS의 내부 붕괴 이후, 더 이상 알제리 좌파를 이어갈 사람이 없다. 1990년부터 2000년까지 일어난 알제리 내전의 ‘암흑의 10년’은 이슬람-보수주의 대 진보-공화주의라는 전통적인 이데올로기의 양상에서 벗어나는 또 다른 유형의 분열을 야기했다. 이 기간 중 계급투쟁의 주체(적어도 불평등에 대한 투쟁)라는 좌파의 정체성을 잃게 됐다. 오늘날 좌파 세력들이 공통의 당면과제를 되찾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이는 좌파연합의 추진력을 가로막는다. 세속화 민주당(PLD)의 뮬레 쉔투프 대표에게 있어서 정치적 분열은 단순히 좌파와 우파의 갈등을 의미하지 않는다. 문제는 1990년대부터 공화주의 국가를 신정주의 국가로 변화시키려는 정부의 방향성이 위기의 본질이라는 점이다.  

정치학자인 아센 아마루슈는 이런 관점에 동의한다. 그는 “1999년 부테플리카의 대선 이후 또 다른 분열이 생겨났다”고 덧붙였다. 한편으로 석유자본에 직간접적으로 접근 가능한 이들, 그리고 권력과 이해관계를 함께하는 이들은 국책은행에서 거의 무제한으로 대출을 받아서 부의 왕국을 수립할 수 있다. 한편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정치적 관점과 상관없이 직업에 따라 사회적 지위가 어느 정도 정해지는 이들이 있다. 좌파가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영역은 두 번째 범주에 해당하는 이들이다.”

우리는 과거 PAGS의 공식 기관지인 ‘민중의 소리’ 편집실로 사용됐던 알제 지역에서 1996년 설립된 민주사회운동(MDS)의 대변인인 야신 테귀야를 만났다. 그는 PAGS와 MDS의 창립 멤버인 쉐리프 엘하슈미(1939~2005)의 분석을 인용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알제리 좌파에게는 이슬람주의 및 석유자본과의 ‘이중의 분리’가 필요하다. “우리는 석유자본에 의지하면서 일종의 신자유주의를 시행하는 국가의 횡포를 막아야 합니다. 여기서 신자유주의적 전횡과 생산적 경제에 근거한 민주적인 국가건설 계획이 충돌합니다.” 

한 좌파 활동가는 분열의 원인을 완전히 다른 곳, 진부한 현실에서 비롯된 것으로 봤다. “부테플리카 대통령 시대 이래로 알제리는 쉬야틴(비굴하게 아부하는 사람들)이라 불리는 권력 추종자들의 나라가 됐습니다. 이들은 좌파, 우파, 세속주의자 혹은 이슬람주의자일 수 있고, 부테플리카 대통령에 반대하는 이들로부터 그의 지지자들에 이르기까지 누구든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터뷰한 대부분의 이들은 좌파에 대해 말하면서 자신을 이슬람주의와의 관계에서 자리매김했다. PST 당사에서 만난 하쉬디는 PAGS의 소멸과 이슬람주의의 등장을 동시에 이루어진 현상으로 분석했다. 그에게 있어서 이슬람주의에 대한 입장은 이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됐다. PST는 이슬람구국전선(FIS)과의 협상을 반대하는 ‘척결주의자들’ 혹은 ‘협상주의자들’, 다시 말하자면 알제리의 위기상황에 평화적인 해결책을 위한 ‘플랫폼’을 표방하는 이들을 마주 대하게 됐다. 1995년 1월 로마에서 국제카톨릭공동체인 산테지디오의 조정하에 FIS, FLN, FFS, PT의 여러 정당들이 평화의 해결책에 서명했다. 하쉬디의 설명에 따르면 PST는 이 진영들 중 어디에도 속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비록 우리의 목소리가 크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는 산테지디오의 행보에 반대하고, 밥엘웨드(이슬람주의가 매우 우세한 알제 구역)를 폭파시키기를 원했던 척결주의자들에게 대항하는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니라는 이런 논리는 확실한 관점을 제시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어쨌거나 일관적이었습니다. 심지어 민중들 한가운데서 이슬람주의에 대항해 싸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최선의 투쟁 방식은 사회적 권리 획득을 위해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프랑스에 거주하는 사회학자 라와리 에디가 기억하는 것처럼 이슬람주의 운동은 사실상 1980년대 이래로 ‘빈곤한 하층민의 대변인’으로 스스로를 내세웠다. 알제리 오랑에 거주하는 그의 동료 아메지안 망쇠르에 따르면, 혜택 받지 못한 이들, 가장 가난한 이들,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들을 대변하는 PAGS의 주장을 이용하면서 이슬람주의자들은 입지를 확장해 나갔다. 그러나 PAGS의 목표와는 반대로 이슬람주의자들은 그 주장을 왜곡하고 이탈하면서 조직화, 동원, 의식화 운동에만 이용했다.

정부와 그의 추종자들이 개시한 신자유주의와 석유자본의 일탈이 수많은 국민들을 위협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상당수의 알제리 좌파가 동의한다. 그러나 어떻게 그것을 저지할 수 있을까? 상당수가 과거 좌파활동가였던 이들은 비밀결사조직에서 획득한 현장 경험을 활용해서라도 집단으로 혹은 개별적으로 방안을 찾고자 하지만 쉽지 않다고 고백한다. 

“과거의 좌파에서, 그리고 PAGS에서 우리가 생각해왔던 알제리라는 국가는 가장 취약한 계층, 노동자들, 공무원들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던 사회주의 국가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알제리는 무분별한 착취와 지하 경제에 자리를 내주고 있는 중입니다.” 과거 PAGS의 간부였던 압델카데 반포다가 한탄조로 말했다. 알제리 오랑에서 만난 그는 70대의 전직 노동조합 활동가로,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불굴의 좌파로 손꼽힌다. “2005년에서 2007년 사이에 우리는 일종의 좌파민주주의연합을 설립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 시도는 2년간 지속됐지만 어떤 결과물도 남기지 못했습니다.”

 

SNS가 좌파의 부활책이 될 수 있을까?

과거의 활동가들 외에도 PAGS의 소멸은 모든 알제리 좌파에게 씁쓸함을 남겼다. 이는 낙관적인 이탈리아 역사가 엔조 트라베르소가 잘 묘사한 ‘좌파의 우울감(멜랑콜리)’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살려내고야 말겠다는 부채감과 부담감을 안긴 패배한 전쟁이라는 비극적 측면”을 되돌아보자고 제안했다.(7) 하지만 다양한 시도들이 감행됐으나 대부분 낭패감만을 남기고 중단됐다. “필요한 것은 집단지성입니다.” 1988년 10월에 투옥되고 고문당했던 PAGS 활동가인 사이드 카테브가 말했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전국 차원의 MDS와는 구별되는 MDS 오랑(Oran) 지파 활동을 계속하려 한다. 

우리가 인터뷰한 몇몇으로부터 미래의 좌파를 설립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혁명으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예기치 못한 발언들이 나왔다. “오늘날 우리는 1954년(알제리 독립전쟁이 시작된 연도) 바로 직전에 있습니다.” 시디벨아베의 변호사이자 법학 교수인 메사우드 바바지의 견해다. 그는 문화민주주의연합(RCD, 세속주의)에서 한동안 활동하기 전에 PAGS에서 투쟁했다. 

“우리의 임무는 단순합니다. 우선 석유자본에 문제제기를 하고 생산적 경제를 위해 투쟁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으로 민주적 자유와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모스타가넴에서 노동조합운동을 하는 무스타파 고브리니 또한 ‘1954년 11월의 정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본다. 그는 ‘전국적 규모의 운동과 해방전쟁의 관점’에서만 알제리 좌파가 재창설될 수 있다고 본다. “우리는 이런 역사적 도정을 떠날 수 없습니다. 새로운 조건에서 보다 큰 상상력을 발휘해 1954년 11월의 투쟁을 계속해야 합니다.”

오랑 대학의 사회학 교수이자 PAGS의 간부였던 아브델크림 엘라이디가 지적한 것처럼, 좌파 재구축의 장애들은 사회적 측면에서도 존재한다. “1989년, PAGS가 합법화될 때, 당 내부에서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역할은 제한적이었습니다. 활동가들은 대부분 관리직이나 중산층 출신들이었습니다. 저를 비롯해 중산층에 속한 이들은 민중의 관심사와 멀어졌습니다. 민중들에게 무관심하지는 않았지만, 우선적으로 자신이 속한 계층과 국가의 거대 담론들에만 몰두했었지요.” 

또 다른 어려움은 ‘암흑의 10년’ 시기에 발생한 분열과 정치, 종교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인식들이다. PST 활동가이자 기자인 카림 메트레프가 말한다. “과거에는 모든 것이 분명했습니다. 작가 타하르 쟈우트(1993년 무장그룹에 의해 암살됨)가 말했던 것처럼 그때는 앞서가는 이들과 뒷걸음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한쪽은 좌파들이었고 다른 쪽은 이슬람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 사이에 이 둘을 조금씩 이용하는 권력이 있었습니다.” 

내전이라는 폭력이 개입하자 분열은 더 심해졌다. “이 둘 사이의 균열은 깊게 남아있습니다. 2011년 ‘아랍의 봄’ 사태에서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튀니지의 민주주의자들은 엔나흐나 정당의 이슬람주의자들 옆에서 행진했습니다. 이집트 민주주의자들은 무슬림 형제들 옆에서 행진했습니다. 모로코 좌파는 ‘2월 20일 운동’에서 모로코 이슬람 정당인 정의와자비(Al Adl Wal Ihsane)와 함께 했습니다. 알제리에서는 FIS의 전 대표인 알리 벨하즈가 시위대 무리 속에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은 흩어졌습니다.”

젊은 층에서는 이런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 독립 이후의 세대들은 그들 부모가 해방전쟁에서 겪은 트라우마를 이해하지 못한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1990년대 내전의 상처를 공감하기 어렵다. 오랑 대학생인 30세의 아드낭 모리의 부모는 PAGS에서 활동했다. 그는 부모의 영향으로 좌파 쪽에 속하게 됐고, 인터넷의 영향으로 2000년대에 시작된 탈세계화를 맞이한 세대이다.

SNS가 좌파의 부활책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만약 하제레스와 같은 좌파 원로가 인터넷상에 등장해서 ‘세계적으로 생각하고, 국가적으로 행동하자’라고 지시한다면, 과거의 활동가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엘라이디는 “그들 대부분은 SNS에 대해 적대적이다”라며, 설명을 이어갔다. “그들은 매우 원시적인 방법으로만 인터넷을 사용하고 있어요. 2018년 병원 레지던트 파업에서 본 것처럼,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영역에서의 투쟁을 위해 인터넷을 사용합니다. 휴대폰 문자나 인터넷이 없었다면 그들이 그토록 빠르게 모여서 조직을 만들어내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그는 과거 활동가들이 비관적인 이유는 그들이 투쟁하고 조직화하고 자료를 찾는 새로운 방식들을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본다. “인터넷, IT기술, 세계화, 탈세계화는 우리를 국경 너머로 데려갑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게 되고, 과거 세대처럼 단일정당 체계에서 만들어진 시야에 완전히 갇히지 않게 됐습니다.” PST에서 활동했던 30세의 티니난 마카시의 의견이다. 그녀는 페미니즘 단체(Tharwa n Fadhma n Soumer)의 대변인이다.

현재로서 좌파에 속한 이들이 행동하고 고려하는 핵심사항은 테러에 반대하는, 보다 폭넓게는 이슬람근본주의자들에게 반대하는 투쟁을 지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투쟁이 노동자 파업, 실업자들의 시위(특히 알제리 남부에서 대규모로 진행되는 운동들), 셰일가스에 대한 환경주의자들의 투쟁을 규합하는 사회 운동의 등장으로까지 이어지기란 어려워 보인다. 정치 분야에서 좌파의 부재는 권력층과 경영자들에게 더 이상 적이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는 심각한 결과를 야기한다. 사회 문제들이 조직화되지 않은 폭동의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상당수의 알제리인들은 좌파와 관련해 비관적이다. 그러나 아메지안 망쇠르가 지적한 것처럼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패권과 권력층의 일방적 행보에도 불구하고 ‘불평등의 문제가 지속되는 한 좌파의 사상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30년간의 알제리 복수정당제

1936년: 알제리공산당(PCA)이 프랑스공산당에서 분리됨. 

1946년: 민족주의 지도자인 메살리 핫지가 1937년에 설립된 알제리인민당(PPA)을 대체하는 자유민주주의승리운동(MTLD)을 설립했으나, 1939년 프랑스 식민정권에 의해 금지됨. 한층 자유주의적이고 온건한 페르하트 압바스는 자유선언주의자(AML)를 대체하는 알제리독립선언민주주의동맹(UDMA)을 설립함.

1954년: MTLD로부터 분리된 민족해방전선(FLN)은 모든 알제리인들의 참여를 촉구하면서 독립전쟁을 개시함.   

1955년: PCA의 정치적 자율권 행사에 FLN이 합의함. 알제리공산당원은 FLN에 개인적으로 합류할 수 있었으나, 정치 단체로서는 참여할 수 없었음. 

1956년: 메살리 핫지와 그의 지지자들이 1954년 설립한 알제리민족운동(MNA)과 FLN이 처음으로 격렬하게 대치함. 

1957년: PCA에 가까운 대부분의 무장독립운동가들이 FLN에 합류함.

1962년: 알제리 독립이후 아메드 벤 벨라에 협력한 FLN의 전투분과인 민족해방군(ALN) 수뇌부가 알제리공화국임시정부(GPRA) 대신에 실세를 차지함. FLN의 역사적 인물이었던 모하메드 부디아프는 반대노선으로 돌아서고, 사회주의혁명당(PRS)을 설립함. 

1963년: 제1차 헌법이 하나의 정당(FLN)만을 인정함. FLN의 또 다른 역사적 인물이었던 호신 아이트 아메드는 복수정당제 금지에 반대함. 그는 사회주의세력전선(FFS)을 설립하고 반란을 시도했으나 결국 체포됨. 

1964년: 그때까지 묵인됐던 PCA가 불법화됨. 

1966년: 비밀결사조직인 사회주의최전선(PAGS)이 설립됨.

1989년: 1988년 10월의 폭동 이후 헌법개정으로 복수정당제가 허가되고, FFS나 PAGS와 같은 비밀결사조직들이 합법적인 정당으로 인정됨. 문화민주주의연합(RCD)과 이슬람구국전선(FIS)과 같은 새로운 정당들이 설립됨.

1990년: 지방선거에서 FIS가 과반수 의석을 차지함.

1992년: FIS의 승리를 막고자 두 차례의 총선 사이에 군이 개입해 FIS를 불법화함. 이때부터 내전이 시작됨. 

1997년: 몇 주 전에 설립된 민족민주연합(RND)이 강권 행사로 치러진 6월 총선에서 승리함. RND는 FLN 및 다른 정당들과 함께 ‘대선연맹’의 중추를 형성하고 정권을 독점함. 

2012년: 야당인 질자디드(새로운 세대)와 알리 벤플리스 전 총리의 탈라이우 알후리앗(2015) 등과 같은 여러 신생 정당들을 합법화하는 법안들이 가결됨. 

2017년: FLN-RND 연정이 총선에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함. 알제리민중운동이 3.7%의 득표로 13석(전체 462석)을 차지했고, 노동당은 3%의 득표로 11석을, 그리고 사회주의세력전선은 2.4%의 득표로 14석을 차지함. 
 

 

글·아레즈키 메트레프 Arezki Metref 
주요 저서로 『미국의 내 사촌들(Mes cousins des Amériques)』
( Koukou Éditions, Alger, 2017) 등이 있다. 

번역·권정아
프랑스 브레스트 대학교 심리학 박사. 공역서로 『피부자아』가 있다.

(1) 북아프리카 토착민인 베르베르인들의 언어 및 문화적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저항운동 -역주.
(2) Ali Chibani, ‘Les populations amazighes croient en leur printemps’, Lettre du Maghreb,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블로그, 2011년 7월 28일자, https://blog.mondediplo.net
(3) 파블로주의자들과는 반대로, 피에르 랑베르(본명은 피에르 부셀)로부터 시작된 랑베르주의자들은 FLN의 경쟁상대인 메살리 하지의 알제리국가운동(MNA)을 지지했다. 
(4) 데브자(Debza): 1979년 알제의 학생조직에 의해 창단된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표방하는 사회참여 극단 -역주.
(5) 기니 및 카보베르데 독립을 위한 아프리카 정당(PAIGC)의 설립자인 아밀카 카브랄은, 1968년 알제의 연설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바티칸으로, 회교도들은 메카로, 그리고 혁명가들은 알제로”라고 주장했다.
(6) Sadek Hadjerès, ‘Le PAGS et le pays: cinquante années plus tard’, <Socialgérie>, 2016년 1월 28일자, www.socialalgerie.net
(7) Enso Traverso, 『Mélancolie de gauche. La force d’une tradition cachée(XIXe-XXIe siècle)』, La Découverte, Paris,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