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릿한 진실의 거울

2019-02-28     제라르 모르디야 l 영화감독

전통적으로 기독교 성화에서 예수 십자가상은 하나 같이 요한복음의 내용을 바탕으로 했다. 오로지 요한복음만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러 죽음을 확인한 군병의 일화를 소개하며,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게 되리라”(요한복음 19장 37절)라던 예수의 예언이 - 참고로, 예언의 출처는 여전히 확인되지 않았다 - 훗날 예수의 부활을 통해 정말로 실현될 것임을 예고했다. 사실 십자가 위에서 예수가 죽은 것을 진짜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게다가 복음서의 저자들도 이미 40~50년이나 지난 이후에야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신학적 문제, 더 나아가 엄밀한 의미의 정치적 문제들이 담긴, 일종의 문학적 요소가 가미된 작품에 해당한다고 봐야 한다. 우리는 요한복음 19장에서 이런 구절을 확인해볼 수 있다. 

“그날은 안식일(다시 말해 금요일)을 준비하는 날이었다. 안식일에는 시체를 십자가에 그대로 매달아둘 수 없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매달린 자들의 다리를 꺾어 빨리 죽게 해서 시체를 내리게 해달라고 빌라도에게 청원했다. 그래서 병사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던 첫 번째 이의 다리를 꺾고 또 나머지 이의 다리도 꺾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께 다가가서는 그분이 이미 숨을 거두신 것을 보고는 다리를 꺾지 않았다.”

기독교 성화 속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는 항상 왼쪽에는 강도, 오른쪽에는 또 다른 누군가와 함께 못 박힌 채로, 자신은 그림의 정중앙에 그려지곤 한다. 예수의 양옆을 차지한 자들의 모습은 히브리 성서(구약-역주)에서 아말렉 사람들과 싸울 때 십자가 모양으로 두 팔을 벌린 채 두 명 사이에 자리 했던 모세의 일화(출애굽기 17장 12절에 “아론과 훌이” 각기 모세의 양쪽에 서서 “모세의 두 팔을 붙들어 올려주자, 해가 질 때까지 모세는 팔을 내리지 않았다”는 구절이 나온다)를 떠올리게 한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군병들이 십자가형에 처한 첫 번째 죄인의 다리를 꺾고, 두 번째 이의 다리도 꺾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 앞에 이르렀을 때는” 예수의 “다리를 꺾지 않았다”고 적었다.  

하지만 “마침내 예수 앞에 이르렀을 때”라고 했는가?

화자의 말대로라면 대부분의 성화 작가들이 묘사한 것과 달리 예수는 정중앙 자리가 아닌, 맨 끝자리에 매달렸었다는 소리다! 그러나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이 성경 구절의 묘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구절은 우리에게 꽤나 유익한 해석을 선사하기도 한다. 가령 우리가 언제든 산만한 관객, 산만한 독자일 수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눈앞에 놓인 것을 제대로 읽지 못한다거나, 화면에 비친 모습이나 혹은 우리의 소소한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온전히 알아보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언어 -혹은 이미지- 는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조차, 우리의 시선을 홀연히 비껴가곤 한다. 가령 코란은 ‘겉보기에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하며, 십자가에 매달린 것이 예수의 이미지에 불과한지, (가현설의 견해처럼)(가현설이란 성육신한 예수가 실제로 시공간적 한계에 묶인 육체와 인간성을 갖지 않았고, 단지 환영처럼 유령의 몸을 갖고 이 땅에 임하셨다고 가르치는 이단 사상을 말한다-역주) 목격자들이 환영을 본 것은 아닌지 전혀 확인할 수 없게 한다. 

우리는 우리가 보거나 읽는 것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투명하게 드러난 비물질화 된 이미지들이나 혹은 말들이 우리의 머리를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문학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런 오독의 문제에 대해 성찰해왔다. 에드거 앨런 포의 『도둑맞은 편지』든, 혹은 헨리 제임스의 『양탄자의 무늬』든, ‘눈에 보이는 모습 대 눈에 보이지 않는 모습’은 언제나 문학생산에서 변하지 않는 상수 역할을 해왔다. 

1936년 베를린을 방문한 많은 프랑스인, 영국인, 미국인들이 아돌프 히틀러가 세운 올림픽 경기장에 환호했다. 그러나 토마스 만의 형인 하인리히 만만큼은 이 기념비적인 건축물에 숨겨진 이면을 알아차릴 눈이 있었다. “강제노역과 민중의 노예화 위에 세워진 정권, 전쟁을 준비 중인 정권, 오로지 기만적인 선전술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정권, 그런 정권이 어떻게 평화적인 스포츠를 개최할 것이며, 무슨 재주로 자유의 이상을 수호하는 스포츠인들을 존중하겠는가?”(1)

1956년, 자크이브 쿠스토와 루이 말이 찍은 해양다큐멘터리 영화 <침묵의 세계>는 그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고, 이듬해에는 할리우드에서 아카데미상(오스카상)까지 석권하는 등 눈부신 성적을 달성했다. 그러나 오늘날 이 영화를 다시 보면, 바다와 대양을 죽음의 길로 내모는 온갖 잔학행위의 전조들이 등장하는 모습에 차마 경악을 금치 않을 수가 없다. 가령 물고기 수를 파악하겠다며 산호초 틈에서 다이너마이트를 폭파해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하거나, 해양생물을 짓궂게 괴롭힌다거나, 어른 향유고래를 작살로 공격한다거나, 다친 새끼고래를 총으로 쏴 죽인다거나, 상어 떼를 다량으로 학살하는 행위 등 온갖 잔혹한 행위들이 고스란히 영화 속에 담겨 있는 것이다. 

물론 필자는 이 부분에서 쿠스토를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다. 1950년대만 해도 이런 행위들은 충분히 자연스러운 관습으로 받아들여졌다. 단지 필자는 이런 질문을 던지려는 것이다. 어찌하여 그때에는 화면 위에 펼쳐진 모습에 경각심을 느끼며 경종을 울리겠다고 나선 하인리히 만 같은 이가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일까? 지금은 모두가 눈에 거슬려 하는 것이 당시에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해양 이미지가 선사하는 황홀경으로 그만 가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 누구도 아름다움 뒤에 감춰진 추악함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마치 앨런 포의 작품에 등장하는 탐정 오귀스트 뒤팽이 도둑맞은 편지가 눈앞에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흔히 미디어에서는 유럽국들의 상황을 묘사할 때 ‘정치풍경’이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문자 그대로, 각 유럽연합 정부들을 마치 눈앞에 놓인 거대한 그림처럼 총체적으로 인식하는 태도다. 물론 어떤 화가나 사진작가를 선택할지는 각자의 몫일 테지만 말이다. 
얀 아르튀스 베르트랑(사진작가)이 하늘에서 내려다본 유럽의 풍경은 우리 눈에 가지런히 정돈된, 비옥하기 그지없는, 푸르른 들판의 모습이다. 하지만 가까이서 들여다본 이미지는 그와는 전혀 다르다. 다니엘 아라스(프랑스의 대표적인 미술사학자이자 미술비평가-역주)는 디드로(철학자)가 ‘한눈에 이해할 수 있는’(2) 그림을 이상적으로 여겼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런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전에 먼저 적정 거리를 찾아낼 줄 알아야 한다. 가령 상대 선수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법을 터득해야 하는 복서처럼 말이다. 왜냐하면 복서는 상대와 너무 가까우면 상대에게 얻어터지기 십상이고, 또 상대와 너무 멀어져도 상대에게 훅을 날리기가 어려워지지 않는가. 따라서 링 위에서, 캔버스 위에서, 다시 말해 유럽의 정치 풍경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온전히 음미할 수 있으려면, 일단 적정거리부터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한눈에’ 보길 원하는 풍경이란 실상 너무나도 잡다한 요소들의 총합에 불과하다. 그래서 전체 이미지를 분간하기도, 선명하고 명확한 모습을 파악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마치 겉보기에만 통일된 모습을 갖추기라도 한 듯 감쪽같이 우리의 눈을 속이기까지 한다.

예수가 살던 시대부터 제사장들은 언제나 글자를 꼼꼼하게 읽고 지나갈 것을 강조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눈앞에 적힌 실체를 하나씩 읽고, 마치 그 단어들이 구체적인 실체인 양, 물화된 생각인 양 유심히 바라보도록 가르쳤다. 그것은 어찌 보면 진저리칠 만큼 시시한 일처럼 느껴질지 모르겠다. 그러나 어쨌든 읽는 것이란 그런 것이다. 그리고 보는 것이란 곧 읽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에 이렇게 썼다. “지금은 우리가 거울을 통해서 보듯 희미하게만 볼뿐이다.”(고린도전서 제13장 12절) 

그렇다면 대관절 어떻게 해야 우리는 이 나르시스의 거울이 우리의 모습을 희미하게 비추는 것을 멈출 수 있을까? 오늘날 개인주의라는 허울 좋은 이름을 내세워 사회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나르시스의 거울을 디밀곤 한다. 사실 현대에 이르러 거의 신처럼 추앙받는 개인주의를 처음 예언한 사람은 마거릿 대처였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 오로지 개인들과 가족들만이 존재할 뿐이다.”(3)

오늘날 우리가 눈앞에 버젓이 있는데도 미처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무엇이 우리를 눈 먼 장님으로 만드는 것일까? 한스 홀바인이 남긴 유명한 작품 <대사들>의 경우처럼, 우리는 어찌하여 풍경 속에 담긴 저 일그러진 상의 출현에 전혀 경악하지 않는 것일까? 저 무시무시한 해골이 우리를 똑바로 응시하며, 눈 먼 장님 같은 우리의 무분별함을 보란 듯이 비웃고 있는 데도 말이다.  

 

글·제라르 모르디야 Gérard Mordillat
영화감독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Jérôme Prieur,『Berlin. Les Jeux de 36(베를린. 36올림픽)』, La Bibliothèque, coll. «Les billets», 파리, 2017년.
(2) Daniel Arasse, 『Le Détail. Pour une histoire rapprochée de la peinture(디테일. 가까이서 본 회화의 역사)』, Flammarion, coll. «Champs Arts», 파리, 2009년(1992년 초판 발행).
(3) Margaret Thatcher, 『Woman's Own』, 런던, 1987년 10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