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연재] 대중서사와 로맨스(4) - 로맨스, 사랑을 사랑하는 Neverland

2019-02-28     이정옥 l 숙명여대 교수

사랑하지 않을 권리와 로맨스 읽을 권리  

로맨스는 운명적인 사랑을 꿈꾸는 사랑의 판타지다. 하여, 오랫동안 로맨스는 모든 이의 로망으로 추앙받아왔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현대인들은 더 이상 운명적인 사랑을 꿈꾸지 않게 됐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여전히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로부터 사랑받는 상상을 하긴 하지만, 홀로 존재하고 각자 소멸해가는 각박한 현실에서 고독을 친구로 삼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사랑은 한낱 사치일 뿐이다. 

물론, 모두 다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낙관론자가 존재했듯, 온통 혼란스런 신호와 급속한 변화로 가득 찬 세상에도 사랑에 모든 것을 바치려는 낭만주의자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단언컨대,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 끝 어딘가에 있을 낭만주의자의 사랑을 더 이상 아름다운 로맨스라 칭송하지 않을 것이다. 현대인들에게 가장 버거운 일은 타인과의 관계 맺기다. 그리고 타인을 대하는 행동수칙은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기 때문이다. 

바우만은 이런 현대사회를 ‘유동하는 근대’라 진단했다. 인터넷과 SNS 등을 기반으로 가상적 관계를 맺는 현대사회에서 사랑은 상품가치로 치환됐고, 가장 은밀하고 친밀한 섹스마저도 사이버섹스로 대체됐다는 것이다. 쉽게 사랑에 빠지고 쉽게 버리는 ‘리퀴드 러브(Liquid love)’에 피로감을 느낀 현대인들은 급기야 ‘사랑하지 않을 권리’를 외치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내내 헌신과 책무가 뒤따르는 연애는 사절하고 가볍고 쿨한 ‘썸’만 타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사랑하지 않을 권리’를 외치면서도 ‘로맨스 읽을 권리’를 주장하는 독자들이 증가하고 있다. 사랑을 믿지 않는 ‘리퀴드 러브’ 시대에 로맨스물에 탐닉하다니? 이 이율배반적인 현상에 대해, 문학적 픽션이란 고달픈 현실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자들이 만들어낸 상상력의 산물이란 단언은 너무 원론적이다. 우리의 삶 속에 깊게 내재화된 낭만적 사랑과 그것을 주조하는 로맨스의 문학적 추동력을 살피는 좀 더 거시적 접근이 필요하다. 

 

낭만적 사랑이라는 신화와, 여성을 위한 로맨스    

12세기 프랑스에서 출발한 로맨스는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지고지순한 사랑을 이루고 마침내 신성한 결혼에 도달하는 낭만적 사랑을 추구해왔다. 그리하여 여성을 ‘가정의 천사’로 미화하며, 가정 유지에 필수적인 순결과 사랑을 강요하는 가부장제라는 이념의 신화가 만들어졌다. 일찍이 이를 간파한 여성들은 ‘여성을 위한 로맨스’를 읽을 권리를 주장하며 직접 로맨스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브론테 자매의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등은 지금도 로맨스의 정전으로 손꼽히고 있다.  

빅토리아 로맨스에서 출발한 낭만적 로맨스는, 고집불통의 육체파 남자와 말괄량이 여자가 만나 에로틱한 사랑에 빠지는 할리퀸 로맨스에서 정점을 이룬다. 둘 다 사랑과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 남자에 의존하는 여성의 성장 플롯을 공유한다. 오늘날의 눈높이로 보면, 가부장제가 만든 여성성의 신화에 갇혀 주체성을 망각한 현실도피의 문학으로 치부할 수 있다. 

그러나 제국주의적 가부장제가 절정에 이른 19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로맨스의 돌풍은 정략적인 결혼제도에 맞서는 신여성들의 저항이자, 자신의 취향에 따라 남자를 선택할 권리를 주장한 독립선언이었다. 특히 제인 오스틴의 주인공들은 여성들을 결혼을 통해 신분상승을 욕망하는 속물로 여기던 편견에 대항하고, 결혼에서 최고의 미덕은 진실하게 교감하고 사랑할 줄 아는 자질임을 설득했다. 할리퀸 로맨스에서는 낭만적 사랑과 결혼이 분리됐다. 타니아 모들스키는 이런 낭만적 로맨스를, 현실도피를 넘어서 가부장제 사회에서 사랑과 결별할 수 없는 여성들이 자신의 욕망에 따라 사랑의 환상을 변형시킨 ‘복수심을 품은 사랑의 문학’이라 평가했다. 


      
낭만적 로맨스와 자기계발서의 조합, 커리어 우먼을 위한 로맨스 

 

집안의 천사에서 커리어 우먼으로 거듭나면서 여성들은 더 이상 낭만적 사랑에 집착하지 않거나, 자신의 욕망에 따라 사랑의 환상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섹스 앤 더 시티』의 주인공들은 매력적인 외모에 고학력과 경제력을 겸비한 전문직 독신여성, 즉 ‘골드미스’들이다. 이들은 풍부한 수입으로 여유로운 소비문화를 향유하며, 자신의 성적 욕망과 취향에 따라 남자를 선택한다. 백화점에 진열된 상품을 쇼핑하듯 섹스 상대를 고르고, 쇼핑한 물품을 품평하듯 섹스 경험을 평가한다. 이들에게 인생 최고의 목표는 결혼이 아니라 자신의 행복이다. 이들은 주말이면 고급 레스토랑에서 친구들과 브런치를 즐기며, 우정으로 연대하는 여성공동체를 유지한다.

대도시 젊은 커리어 우먼의 일과 사랑을 그린 새로운 로맨스, ‘칙릿(Chick-lit: 젊은 여성을 의미하는 속어 Chick과 문학 Literature의 ‘lit’을 합친 신조어로 직장생활을 하는 20~30대 여성들을 겨냥한 영미 대중소설을 지칭)‘의 주인공들이 이들처럼 모두 발랄하건 아니다. ’골드미스‘의 조건을 갖추지 못한 직장여성에게 신자유주의적 자본시장은 무한경쟁의 정글이다. 유능한 커리어 우먼으로 성공하려면 자신의 상품가치를 높이기 위해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쉬지 않고 달려야 한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주인공 브리짓은 자기계발에 실패한 직장여성의 불안 심리와 분노를 유쾌하고 발랄하게 토로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브리짓에게 낭만적 사랑은 무리한 자기계발을 거부하고 진정한 커리어 우먼으로 각성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때문에 커리어 우먼을 위한 로맨스는 할리퀸의 낭만적 로맨스와 자기계발서를 결합한 자기풍자(Self-parody)의 로코 버전이다. 브리짓에 동일시한 수많은 직장여성들이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 열광했던 이유다.

 

사랑을 사랑하는 네버랜드, ‘리퀴드 러브’ 시대의 로맨스 

이런 오랜 경과를 거쳐 비로소 낭만적 사랑에서 결혼과 운명을 완전 분리하고 나니 로맨스가 다채로워졌다. 희생과 헌신으로 기울어진 사랑에서 벗어나자, 사랑을 대하는 여성들의 태도도 한층 당당해졌고 사랑할 대상도 넓어졌다. 이런 변화는 로맨스의 상상력을 무한 확장하고 인접 장르와의 혼종을 통해 로맨스의 영역을 넓혀가는 에너지원이다. 웹 플랫폼은 이런 동력에 날개를 달아주는 터전이다.   

이제 로맨스를 즐기는 독자들은 버라이어티한 모험으로 가득 찬 놀이동산에 들어선 아이처럼, 자신의 취향에 따라 로맨스를 선택하고 다채로운 사랑의 모험을 즐기기 시작했다. 독자들은 더 이상 제인 오스틴의 주인공처럼 억압적 제도에 항의하지도, 사랑에서 갖춰야 할 미덕을 설득하지 않아도 된다. 이미 로맨스의 주인공들은 사랑하기에 충분한 자질을 갖춘 알파맨이고 순정남이며, 상대를 배려할 줄 아는 미덕의 소유자들이다. 

설령 자질과 미덕이 좀 부족하더라도, 그들만의 사랑을 구경하는 재미도 제법 쏠쏠하다. 더욱이 건어물녀나 초식남이라면 평소에는 꿈도 꾸지 못하는 성적 상상력이나 포르노적 상상력을 눈치 보지 않고 즐길 수도 있다. 이토록 다채로운 사랑으로 가득 차고 사랑하는 사람들로 넘쳐나는 로맨스의 세계는, 사랑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는 환상의 네버랜드다. 

간혹, 사랑으로 가득 찬 네버랜드를 영원히 자라지 않는 아이들이 사는 동화적 판타지라 비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소확행(小確幸: 일상에서의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즐기는 N포세대를 향해 “티끌 모아 태산”이라며 충고 아닌 충고의 말을 건네는 꼰대들처럼. 다양한 관점을 인정하자면, 네버랜드의 사랑이 지각된 실재를 상기할 수는 있어도 살아있는 신체의 현전 앞에서 희미한 암시로 남는 판타지일 수는 있겠다.  

그러나 바우만이 당부했던 사랑을 믿지 않는 ‘리퀴드 러브’ 시대의 대처방안을 떠올려보자. “섣부르게 모두 함께 하는 연대를 내세우지 말고, 개인의 취향을 인정하고 개인성을 존중하라!” 문학은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개인의 모험적 상상력이고, 로맨스는 개인의 욕망에 따라 사랑의 환상을 변형시킨 문학이다. 이런 점에서 사랑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네버랜드가 번성할수록 사랑의 다양한 가치를 존중하는 세상이 좀 더 빨리 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사랑을 믿지 않는 ‘리퀴드 러브’의 시대도 변화할 것이다.   

글‧이정옥
숙명여자대학교 기초교양대학에서 조교수로 재직 중이며, 대중서사학회의 회장과 편집위원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