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역할에 대한 한국영화의 이기적 시선

2019-02-28     송아름(영화평론가)

어느 날 문득 ‘엄마’라는 호칭보다 ‘어머니’라는 호칭이 맞지 않을까 고민하는 순간. 한 번에 그 어색한 단어가 튀어나오지 않아 어머니와 어무이의 중간 어디쯤으로 얼버무리며 엄마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하는 순간. 바로 그 지점에서 엄마도 자식도 미처 느끼지 못한 채 흘려보낸 시간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자식이 몇 살까지 엄마로 부를 수 있는지를 규정해 놓은 일도, 몇 살부터 호칭을 바꿔야 한다는 원칙도 정해놓은 바 없지만 자신의 나이와 상황에 어울리는 호칭이 무엇인지에 대한 자식의 갑작스런 판단에 따라 ‘엄마’는 ‘어머니’가 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보다 약해지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내가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그래서 내가 조금 더 당신을 존중하며 챙길 수 있을 것이라는 안정감을 어머니라는 호칭에 부여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이 호칭으로 분명해지는 것은 어머니에게도 자식이 자란 만큼의 나이가 기입된다는 점이다.

 

‘엄마’와 ‘어머니’ 사이의 시간으로 쌓은 서사적 요새

이렇게 엄마에서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자식에게 흐른 시간만큼 한 여성이 짊어졌을 책임감, 불안함, 혹은 자식으로 인한 행복 등이 켜켜이 누적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만큼 이 호칭은 한 여성이 자기 자신만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와 오랜 시간 멀어져 있었다는 것을 가리키기도 할 것이다. 알다시피 여기에는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된 억압까지도 존재하기에, 어머니라는 이름은 자식에게 당연히 내줘야 하고, 자식을 당연히 이해해야 하며, 내가 좋아하는 것은 당연히 뒷전으로 미루는 것이 미덕이라는 고착화된 믿음 속에서 긴 시간을 보냈다는 것까지를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설사 어머니 스스로가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해도, 이런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어주길 바라는 자식들의 이기적인 소망은 어머니에 대한 환상을 끊임없이 재생산해낸다.

여성의 선택과 주체성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게 논의되는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은 조금 늦었다는 인상을 줄지도 모른다. 모성신화를 비판하고, 자신도 아이가 있지만 종종 아이가 밉고 종종 멀어지고 싶다는 솔직한 심정을 드러내는 것이 완벽한 금기로 간주되지 않는 지금에 말이다. 

물론 아직까지도 이에 대해 의아함을 표하는 이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적어도 강요된 모성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모성을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젠더 편향적인 일인지에 대한 비판이 늘어났고, 산후우울증의 존재와 그것의 심각성을 사회적인 문제로 끌어올릴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현 상황은 모성 신화에 대한 공식적인 비판을 더 이상 어색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엄마’에 국한된 이야기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눈물과 결합한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도 예전 그 어딘가를 헤매며 앞서 나아가지 못하며 점점 더 육중한 무게로 자리 잡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는 최근 한국영화에 등장하는 무수한 어머니 캐릭터를 정확하게 관통한다. 2010년대로 접어들면서 한국영화의 중심에는 남성영화가 있었고, 이 영화들은 그저 전시되는 몸으로 소비되는, 즉 이름도 부여받지 못한 채 지나치는 육체로서의 인물들이나, 객관화된 캐릭터를 부여받지 못하는 전문직, 문제를 일으키기만 하는 민폐 캐릭터 등으로 여성을 그리면서 무수한, 그만큼 적절한 비판에 직면했다. 이 영화들을 향한 비판은 쉽게 소비돼 버리는 젊은 여성인물들이 왜 문제가 되는지에 대해 촘촘한 담론들을 쌓아 나갔지만, 이 사이에서 대체로 아들들을 위해 그리고 자식을 남들만큼 잘 키우지 못했다는 스스로에 대한 원망으로 인해 눈물지으며 사라져갔던 중년의 어머니들에게까지는 눈 돌리지 못했다. 

남성영화에서 여성의 등장 자체를 손꼽아야 할 만큼 기능적이기만 한 젊은 여성들의 활용방식을 생각한다면 꽤 많은 영화에 등장했던 ‘어머니’들은 그 비중에 있어 분명 궤를 달리하고 있는 듯하다. 대부분 아들과 함께 등장한 어머니들은 그 비중에 있어, 그리고 인물의 서사를 구축하는 데 있어 위에서 나열한 여성들과는 다르게 캐릭터로서 확고한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부여된 서사는 오히려 어머니들을 옭아매면서 족쇄를 채우는 것으로 기능한다. 바로 여기에 깔려 있는 것이 어머니라는 이들에 대한, 즉 자식을 키우며 중년을 넘긴 여성은 으레 그럴 것이라는 강력한 믿음과 강요다.

 

최근 한국영화에서 어머니라 불렸던 이들이 등장한 영화들을 천천히 떠올려보면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어머니들은 대체로 장애가 있거나, 배운 것이 부족하고 가난하다. 때문에 자식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 스스로의 존재 자체를 미안해하는 인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깡철이>(2013)의 순이(김해숙 분)는 치매 환자이며, <재심>(2016)의 순임(김해숙)은 앞을 잘 보지 못한다. <신과 함께-죄와 벌>(2017)(이하 <신과 함께>)의 자홍의 어머니(예수정)는 말을 하지 못하며, <그것만이 내 세상>(2017)의 주인숙(윤여정)은 불치병으로 죽어가고, <희생부활자>(2017)의 최명숙(김해숙)은 죽기 전 아들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가난한 어머니였고, 죽었다 살아난 후에는 자신의 아들을 공격하는 괴물로 등장한다.

중년을 넘긴 한국영화 속 어머니들은 엄밀히 말해 여기에서 그리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예외적인 인물로 <마더>(2009)의 혜자(김혜자)나 <현기증>(2014)의 순임(김영애)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의 귀결점은 광기다). 이 어머니들은 자식들에게 짐으로, 그러니까 자신의 장애나 가난함, 무능력 등이 자식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죄인’이라는 인식이 깊게 각인된 인물들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들에서 설정한 어머니의 ‘부족함’이 자식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원인으로 기능하기에, 그 죄책감으로 스스로를 소멸시키는 것이, 아들을 위한 희생이라는 모성으로 쉽게 포장되면서 눈물과 만난다는 점이다. 이는 꽤나 폭력적인 서사이지만 눈물로의 공감이라는 격한 감정 안에서 그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깡철이>의 깡철(유아인)이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질 수 없는 것, 그리고 종국에는 조폭들에게 붙들려 죽음의 직전까지 이르는 것은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지키기 위한 필사의 노력 때문이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재심>은 현실과는 다르게, 앞을 잘 보지 못하며 악다구니를 앞세우는 순임이라는 캐릭터로 현우(강하늘)가 누구에게도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이로 냉혹한 사회 속에 던져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만이 내 세상>의 주인숙은 자신이 끝까지 돌봐주지 못하고, 발달장애를 앓고 있는 진태(박정민)까지를 조하(이병헌)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에 깊은 죄책감을 가지고 있으며, <희생부활자>의 명숙은 죽었다 살아 돌아와 자신을 죽인 이를 처벌하는 RV로 등장해 자신의 아들 진홍(김래원)을 죽이려 하고, 이로 인해 진홍은 어머니를 죽인 용의자가 된다. 이 영화 속의 아들들이 고군분투를 그칠 수 있는 방법은 명확하다. 어머니가 자신이 하는 행동을 깨닫고 사라지는 것이며, 어머니들은 그렇게 사라진다.

거의 죽음의 위기에 놓였던 깡철은 제정신이 잠시 돌아올 때마다 ‘네게 빚을 꼭 갚고 죽을 것’이라는 어머니의 말처럼 어머니의 몸에 온전히 남아 있던 단 하나의 장기인 간을 이식받아 살아난다. 조하는 어머니가 불치의 병을 자신들에게 숨기고 그것조차 미안함에서 기인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후 어머니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진태를 받아들이며, <신과 함께>의 자홍은 자신이 죽이려 했던 어머니에게 용서받으며, 자홍이 가지고 있는 죄책감마저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어머니의 형상 앞에서 오열한다. 이런 해결방식들은 쉽게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눈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 어머니들이 자식을 위해 사라지는 내면에는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가려진 죄책감 때문이다. 내가 병 때문에, 배우지 못한 것 때문에 너에게 짐이 됐다는 즉, 어머니라면 무엇을 해줘야 하고, 아픔을 받아줘야 하고, 책임을 져야 했는데 그것을 해주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자리하는 것이다. 이 영화들은 어머니라면 당연히 성취해야 한다고 믿는 것으로부터 최대한 멀어진 인물들을 그려놓고, 스스로의 존재를 부끄러워하는 이들의 소멸을 모성과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치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꽤나 잔인한 방식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상상하는 혹은 바라마지않는 강요와 결합하면서 힘을 얻는다. 어머니로서 긴 시간을 견뎌온, 그러니까 더 견딜 수 있고 견뎌야 하며 나를 아는 만큼 희생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는 어머니로서의 시간에 대한 은근한 압박은 여기에 함께 놓인다. 어머니가 지나온 시간에 대한 미안함, 혹은 그 역으로의 당연함은 자식들로 하여금 ‘불쌍한 우리 엄마’라는 감성성에 자리를 내어 주면서 그 폭력성을 밀어낸다. 이는 나이든 여성이 감내해야 할 것, 그렇게 돼도 참아줄 수 있을 것이라는 혹은 그만큼을 감수하면서도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기다리는 것이 어머니의 몫일 것이라는 점을 바탕에 둔 후 그것에 대한 애도를 표하는 방식이다. 그러니까 왜 그러해야 하느냐가 아니라 이미 그러하니 슬프다는 것, 여기에는 아무런 질문의 자리도 반성의 자리도 남아 있지 않다.

박경리는 히말라야에서 짐을 지고 가는 노새를 보며 어머니가 떠올라 눈물 흘렸다는 남성 작가를 ‘토종’이라 칭했다. 이 땅에서 나고 자란 토종에게 어머니는 그저 힘겨우면서도 묵묵하게 설산과 같은 위험 속을 걷는 이였으리라. 그가 흘렸던 눈물이 과연 어머니를 위한 것인지, 어머니를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을 위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현재 한국영화에서 그리고 있는 어머니들의 캐릭터 역시 정말로 어머니가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랬으면 하는 소망에 기댄 것인지, 그 소망은 과연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무엇을 요하는 것인지, 그 소망에 한 인간을 대하는 도덕적·윤리적 시선이 가 닿은 적이 있기나 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역시 질문이 필요하다.   

 

 

 

글‧송아름
영화평론가. 한국 현대문학의 극(Drama)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