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BI와 언론이 만든 공상영화
‘5인조’ 쿠바 간첩단

2010-11-05     모리스 르무안

“언론의 호의 유무에 따라 재판에서 유죄인지 무죄인지가 결정됩니다.” (미국에서) 언론이 정치에 미치는 영향력은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겠지만, 반(反)카스트로 망명 조직에 침투한 쿠바 요원 5명의 재판 과정을 보면 언론이 사법 분야에도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98년 9월 12일, 경찰 100여 명이 할리우드 영화를 방불케 하는 작전을 펼쳐 쿠바인 5명을 체포했다. 제라르도 에르난데스, 라몬 라바니뇨, 르네 곤살레스, 페르난도 곤살레스, 안토니오 게레로가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이틀 동안 세수와 면도도 하지 못한 채 쉬지 않고 힘겨운 심문을 받았다. 9월 14일, 옷은 구겨지고 뺨은 수염으로 거뭇해졌으며 머리는 헝클어진 채, 이들은 벌떼같이 모인 기자들 앞으로 내몰렸다. 이튿날부터 이들 악당의 ‘낯짝’이 언론을 장식했다.

9월 14일에 열린 기자회견에서 헥터 페스케라 미국 연방수사국(FBI) 지부장은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이번 간첩 체포 사건으로 쿠바 정부는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됐습니다. 미국에서 간첩 활동을 벌이려던 쿠바 정부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카스트로 테러 동향 보고한 게…

곧 ‘5인조’라고 불리게 된 이들은 실제로 1981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창립한 재미쿠바인재단(CANF)을 주축으로 하는 반카스트로 망명 무장조직에 침투해, 이들이 벌이는 쿠바 침투 시도 및 테러 준비 상황을 아바나의 쿠바 정부에 보고하는 임무를 수행했다.(1)

신문사 <디아리오 라스 아메리카스> <엘 누에보 헤럴드> <마이애미 헤럴드>, 라디오 방송국 <라디오 맘비> <라 포데로사>, 텔레비전 방송국 <카날 23> <카날 41> <TV 마르티> 등 마이애미 언론사들은 즉시 이를 앞다투어 보도했다. 여기에는 온갖 수단이 동원됐다. ‘간첩’이라는 표현이 끊임없이 사방에서 들려왔고, 상투적 어구들과 더불어 똑같은 사진들이 지겹도록 등장했다. FBI 관리들은 “수감자들이 위험한 인물”이라는 둥 거짓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가장 파렴치한 거짓말은 “간첩들이 플로리다에서 사보타주를 계획했다”는 것이다.(2)

2000년 11월 27일, 배심원 선정이 시작되자 출두 명령을 받은 이들 중 상당수가 참여를 주저했다. 이들은 “언론이 가할 압력, 그리고 피의자들에게 무죄 평결이 내려질 경우 망명 쿠바인들이 벌일 격렬한 시위가 두렵다”고 밝혔다. 재판이 시작되자 텔레비전, 권위 있는 일간지, 선정적 신문 할 것 없이 모든 언론은 ‘제임스 본드’급의 화려한 세계와 ‘슈퍼 간첩’들의 등장을 기대하며 보도전을 벌였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실망뿐이었다. 변호인단은 ‘5인조’의 목적이 테러 저ㅈ지였다고 설명했고, 이에 <뉴욕타임스>는 주재원을 불러들였다. 사소한 법정 공방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인 다른 특파원들도 짐을 싸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유럽 언론은 어떠했을까? 1994~95년 O. J. 심슨처럼 쇼비즈니스계의 스타 또는 잘 알려진 인물이라면 눈길을 보냈겠지만, 이 경우는 그렇지 못했다. 남은 이들은 마이애미 소재 언론사의 리포터들뿐이었다. 배심원은 2001년 6월 4일 심의 결과를 발표할 때까지 온갖 괴롭힘과 협박을 받았다. 기자들은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고 복도, 거리 할 것 없이 이들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심지어 자가용 번호판을 촬영하기까지 했다.

언론 선동에 배심원들 참여 주저

변호인단은 망명 쿠바 교민사회의 이면을 파헤치며 날이 갈수록 승점을 올렸고, 미군 고관들의 증언도 피고인들에게 유리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언론은 쥐 죽은 듯 침묵했다. 르네 곤살레스의 형인 로베르토 곤살레스(3)는 분개한 모습으로 법원 로비에서 <마이애미 헤럴드> 기자와 마주쳤다. 그는 이렇게 밝혔다. “나는 기자에게 ‘언론의 자유니 뭐니 말은 좋아요. 그러면서 정부의 주장에 어긋나는 무언가가 재판정에서 드러나면 이튿날 아무런 보도도 하지 않는 건 뭡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기자는 난처한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사람들이 그런 정보를 원치 않거든요. 제가 변호인단을 돕는다고 생각하는 거죠.’”

재판을 방청하지 않은 이들은 어느 피고인도  ‘미국의 국가 안보’에 해를 끼치는 정보를 취득하거나 탐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리 없다. 2001년 4월 30일 <엘 누에보 헤럴드>는 이에 관해 적절한 지적을 했다. “정부 부처는 피고인들의  간첩 활동에 관해 상당량의 증거를 확보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중략) 다수의 관측자 및 교민사회 지도자들은 ‘그토록 많다는 증거들이 대체 어디 있는지 의아하고, 변호인단이 쿠바 교민사회 전체를 피고인석에 앉힌 것 같다’며 불만을 토로한다. 사태가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면 이들 간첩은 석방될 것으로 보여 우려된다.”

하지만 이는 기우였다. 2001년 12월 도를 넘어서는 형량이 이들에게 선고됐다. 르네 곤살레스는 징역 15년, 페르난도 곤살레스는 19년, 라바니뇨는 18년형, 게레로는 10년형에 처했다.(4)

증거도 없이 10년 넘게 철창살이 중

2006년 9월 마이애미 소재 언론사(<엘 누에보 헤럴드> <마이애미 헤럴드> <디아리오 라스 아메리카스> <유니비전> <텔레문도> <카날 41> <라디오 맘비>)에 근무하는 쿠바 출신 기자 10명이 연방정부에서 정기적으로 돈을 받고, <라디오 마르티>와 <TV 마르티>(반카스트로 정책 지원을 위해 설립된 공영 방송국)의 프로그램에 참여해 암암리에 선전활동을 펼친 것이 드러났다. 이 ‘전문가들’은 기사를 통해 ‘5인조’ 사건을 둘러싼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도 기여했다. 2000년 11월 27일부터 2001년 6월 8일까지, 다시 말해 재판 기간에 피고인들에 대한 적대적 기사를 <엘 누에보 헤럴드>는 806건, <마이애미 헤럴드>는 305건 게재했다. 이 피고인들은 지금도 미국 최악의 교도소에 수감되어 신음하고 있다.

글•모리스 르무안 Maurice Lemoin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저서로 <마이애미의 다섯 쿠바인>(Don Quichotte· Paris·2010)이 있다.

번역•최서연 qqndebien@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주요 역서로 <텔레비전의 종말>(2007) 등이 있다. 

<각주>
(1) 1959년 이래 미국에 망명한 쿠바인들의 무장 활동으로 쿠바에서 3400명 이상이 사망했다.
(2) <엘 누에보 헤럴드>, 마이애미, 1998년 9월 17일자.
(3) 쿠바 출신 부모를 두고 미국에서 출생. 쿠바 혁명이 성공하자 가족이 모두 쿠바로 돌아갔다. 두 형제는 쿠바와 미국의 이중국적을 보유하고 있으며, 안토니오 게레로도 마찬가지다.
(4) 복잡한 법적 절차를 거쳐 2008년 세 수감자에게 감형 조치가 취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