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르완다, 대학살 덮고 미래로?
폭력이 난무하고 자유를 탄압함에도 지난 8월 9일 당당히 재선에 성공한 폴 카가메 르완다 대통령은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2월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프랑스와의 화해 때문에 의문이 불거지고 있다.
“대학살의 책임자를 찾아 처벌할 겁니다. 분명한 사실입니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지난 2월 25일 르완다를 방문한 자리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이번 방문은 1994년 이후 프랑스 국가원수의 첫 르완다 방문이었다. 사르코지 대통령의 이 발언으로 프랑스에서 법망을 피해 살고 있던 전범들을 처벌할 수 있을까?
알랭 고티에 ‘르완다피해자단체’(CPCR) 회장은 “지난 15년간 검찰은 한 번도 공소를 제기하지 않았다. 우리 단체가 없었다면 진행 중인 사건은 한 건도 없었을 것이다”라고 개탄했다. 고티에 회장은 프랑스에서 르완다 전범들이 아무런 제재 없이 살 수 있는 건 정치적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또 “대학살 당시 동거정부를 구성했던 우파와 좌파 모두 이 사건으로 다른 문제가 불거지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언론의 주목을 끌었던 프랑스와 르완다 간의 화해도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2006년, 학살범 영장 발부 뒤 단교
장루이 브뤼기에르 예심판사가 폴 카가메 르완다 대통령의 측근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하면서, 2006년 말 양국 관계는 단절됐다. 브뤼기에르 판사는 그들이 1994년 4월 6일 당시 르완다 대통령인 주베날 하비아리마나 대통령 전용기 테러 사건에 연루됐다고 판단했으며, 이 사건은 대학살의 시발점으로 여겨지고 있다. 불화가 있은 지 3년이 지난 지금, 양국 관계는 급속히 개선되는 듯했지만 모두가 이를 반기는 건 아니다.(1) 현재 양국 관계 개선에는 대학살 당시 인도주의 활동을 계기로 반군 지도자 카가메와 친분을 쌓은 베르나르 쿠슈네르 외무부 장관이 주도하고 있다. 프랑스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에 있는 르완다의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광물자원이 풍부한 콩고민주공화국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작은’ 르완다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카가메 대통령은 사르코지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열혈 미국 추종자다.
프랑스와 르완다가 주고받은 카드가 무엇인지는 분명하다. 르완다는 대학살에서 프랑스의 역할에 대한 진술을 묻어두고, 프랑스는 자국에 망명한 르완다 피란민 이슈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며 브뤼기에르 사건을 묻어버리는 것이다. 브뤼기에르 판사가 체포를 명령한 사람 중 한 명인 로즈 카부예 의전국장이 2008년 11월 ‘협상을 통해’ 검거되면서 르완다는 이미 이 사건의 일부 서류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 뒤 몇몇 주요 증인이 증언을 번복했고, 브뤼기에르 판사의 통역사가 전직 르완다 정보부 요원이자 ‘르완다국제형사재판소’(ICTR)가 혈안이 되어 찾는 용의자의 처남인 펠리시앵 카부가임이 밝혀졌다. 브뤼기에르 판사의 뒤를 이은 마크 트레비딕 판사도 대학살을 자행한 정치체제에 호의적이지 않은 자료를 바탕으로 심리를 진행하게 되었다.
사르코지 방문, 화해 제스처
사르코지 대통령은 ‘사법부의 독립성을 유지’할 것이라고 재차 강조했지만, 사법 기회주의의 징후는 더욱 늘어나고 있다. 그가 르완다를 방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비아리마나 전 대통령의 부인인 아가테 캉지가를 체포한 것이 일례이다. 르완다피해자단체가 제소하고 그녀의 (뒤늦은) 망명 요청(2)이 거부된 뒤 2008년 초 예심이 열렸으나, 캉지가가 숨지 않고 파리 지역에 거주했다는 점에서 두 사건 간의 연관성을 찾을 수밖에 없다. 1994년 프랑스 군대는 ‘아마릴리스’ 작전 중에 캉지가를 르완다에서 탈출시킨 바 있다.(3)
지난 1월 초 파리지방법원(TGI)에 ‘대학살 및 반인도적 범죄’ 조사단을 창설한다는 발표도 외교적 밀월관계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1994년 대학살과 관련한 많은 제소가 계류 중인 점을 고려할 때, 이런 결정은 분명히 르완다와의 관계 개선에 도움이 되었다. 외교부에서는 “다행히 매일 대학살이 일어난 건 아니고 대부분 르완다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며 진부한 행정적 ‘합리화’를 하고 있다. 고티에 회장은 여전히 회의적이다. “우리는 행동으로 보여주길 기다리고 있다.” 르완다피해자단체는 15개 소송을 제기했는데, 첫 번째 제소는 1995년에 있었다. 벨기에와 비교해보면 더욱 충격적이다. 옛 식민제국 벨기에에서는 대학살과 관련한 4건의 중죄 재판이 성공적으로 진행됐다. 특별조사단의 꾸준한 노력 덕분에 사건을 종결할 수 있었다. 이를 볼 때 프랑스에서도 유사한 조직을 창설하는 게 타당하다.
프랑스는 법적으로 르완다에서 저질러진 범죄에 대해 ‘보편적 관할권’(4)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쿠슈네르 외무부 장관과 미셸 알리오 마리 법무부 장관은 ‘대학살 및 반인도적 범죄’ 조사단 창설이 보편적 관할권을 행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못박았다.(5) 파트리크 보두앵 국제인권연맹(FIDH) 명예회장은 이런 모순은 “프랑스가 정의를 실현하기보다는 르완다와의 관계 개선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프랑스는 보편적 관할권을 권유하는 국제협약을 적용하기 위해 법제를 개편한 적이 없다. 다만, 1984년 국제고문방지협약(6)을 근거로 두 건의 소송(2005년 모리타니 장교 사건, 2009년 튀니지 공무원 사건)만이 진행됐을 뿐이다.
정의 실현보다 광물자원에 관심
프랑스법을 국제형사재판소(ICC) 법규에 부합하게 개정하는 법안이 지난 7월 13일 국회에서 채택된 사실도 국제사법 체제를 수용하는 데 망설이는 프랑스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이 법규는 모든 국가가 전범과 비인도적 범죄자, 대학살 주동자를 국적에 관계없이 처벌하도록 하는데, 사실상 제소를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용의자는 반드시 프랑스에 ‘주거주지’가 있어야 하고 검찰만 기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르완다피해자단체 같은 피해자 공동체는 제소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검찰이 르완다 관련 사안에 얼마나 소심하게 대처하는지 익히 봐왔다. 보두앵 명예회장은 “보편적 관할권을 받아들여 르완다와 코소보는 물론 모든 나라에 적용하든지, 현실 정치, 다시 말해 강대국의 법을 받아들이든지 해야 할 것”이라고 정리했다.
사법부는 르완다 사태에 늑장 대처를 해왔다. 1998년 르완다에서 프랑스의 역할에 대한 조사를 맡은 국회 대표단을 지휘한 사회주의 하원의원 폴 퀴레스는 “우리가 이 사안에 다소 안일했다”며 완곡하게 말했다.(7) 고티에 회장은 “예심판사가 자주 바뀌면서 매번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고 전했다. 프랑스 스카우트 지조르 지부 부속사제이자 르완다 친정부 신부인 웬세스라스 무녜샤카 사건은 사법부의 무능함과 당국의 소심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키갈리 생파미유 대성당의 주임신부인 그는 1995년부터 제소됐지만 2007년 르완다국제형사재판소가 국제체포영장을 발부하고 나서야 실제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 르완다국제형사재판소는 곧 이 사건(기콩고로 도지사였던 로랑 부시루타 사건도 마찬가지임)에서 손을 뗐는데, 프랑스가 이 두 사람에 대한 재판을 진행할 권한과 수단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약 10년 전인 1998년에는 프랑스 최고재판소(일명 파기원·La Cour de Cassation)도 동일한 결론을 내렸지만 거기서 끝이었다. 2004년 당시 고소인 중 한 명이 유럽인권재판소에 이의를 제기했고, 유럽인권재판소는 프랑스가 이 사건에 미온적으로 대처하고 있다며 규탄했다. 이 사건은 올해에만 3명의 예심판사 손을 거쳤다.
1994년 학살, 프랑스의 역할도 논란
1994년 르완다 임시정부의 계획부 장관이던 오구스틴 느지라바트와레 사건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가봉에 거주하면서 1998년 프랑스 외무부 면책특권부로부터 체류증으로 사용할 수 있는 특별증을 발급받았다. 르완다국제형사재판소는 1999년 8월 그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그러나 파리에서 그를 체포하려고 한 날, 그는 자택을 떠나 리브르빌을 향하고 있었다. 가봉 정부는 르완다국제형사재판소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라지도록 방치했다. 그는 2007년에야 프랑크푸르트에서 체포됐고, 아루샤(탄자니아)에 있는 르완다국제형사재판소로 이송돼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이다. 귀샤우아 동아프리카 전문가에 따르면 용의자가 이런 지원을 받는 이유는 외국 인사와의 관계, “업무적 관계가 아니라 명백하게 정치적인, 일부는 사업적인 관계”(8)가 밝혀질까 하는 우려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웬세스라스 신부 사건 등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덧붙였다.
프랑스에서 르완다 전범에 대한 기소가 결실을 맺을 수 있을까? 2008년 마요트 섬에서 (위조신분증 불법거래로) 체포된 전직 수석정보부원 파스칼 심비캉과 사건 소송은 정상적으로 진행될 것이다. 또한 프랑스는 르완다국제형사재판소에 무녜샤카 르완다 친정부 신부와 로랑 부시바루타 전 기콩고로 도지사를 소환하기로 약속했다. 이 소송은 현재 계류 상태인데, 이는 프랑스 판사가 기준과 절차가 다른 르완다국제형사재판소가 제공한 정보를 활용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1994년 르완다에서 프랑스의 역할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 데 있다. 고티에 회장은 부시바루타 전 도지사 사건을 예로 들었다. “부시바루타는 기콩고로의 도지사였습니다. 그곳에 프랑스군의 ‘터키석 작전부대’가 있었지요. 부시바루타에 대한 재판을 진행하려면 작전부대가 그곳에서 무엇을 했는지 논의해야 합니다.” 모든 재판이 결국 당시 프랑스의 정책에 대한 간접적인 조사로 이어질 것이다.(9)
글•브누아 프란시스 Benoît Francès
언론인.
번역•서희정 mysthj@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각주>
(1) 예를 들어 ‘프랑스 터키석(石)작전협회’(www.france-turquoise.fr)의 반응 등 참조.
(2) ‘프랑스 난민 및 무국적자 보호단체’(Ofpra)는 아가테 캉지가가 반인도적 범죄에 가담한 ‘확실한 증거’가 있다고 논증했다.
(3) 후투족 과격파의 많은 고관들도 마찬가지였다. 폴 퀴레스 하원의원이 주재한 정보조사대표단 보고서, n°1271, 1998년 12월 15일자 참조.
(4) 르완다국제형사재판소 설립에 관한 유엔 결의안 제955호에 부합하게 프랑스 법제를 개정하는 법(1996년 5월 22일).
(5) <르몽드> 2010년 1월 6일자 참조.
(6) 국제형사소송법 제689-2조에 삽입됐다. 국제형사소송법 제689조는 테러리즘, 핵무기 밀매, 해적, 무기 매매, 사보타주 등 다양하고 명확한 분야에서 보편적 관할권을 인정했다. 파리 항소법원은 이를 근거로 하여, 지난 1월 26일,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캄보디아에서 자행된 고문·감금·납치에 대한 예심을 다시 진행했다. 소는 1999년 제기됐다.
(7) <르데바>, <프랑스 24>, 2010년 2월 25일 방송 참조.
(8) 앙드레 귀샤우아, op. cit.
(9) 앙드레-미셸 에순구, ‘프랑스-르완다 분쟁의 뿌리를 찾아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9년 1월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