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일… 그러곤 무덤

[Spécial] 나쁜 명령과 질긴 저항

2010-11-05     다니엘 리나르ㅣ노동사회학자

지도층은 ‘변덕스러운 아이들의 무리’라고 말한다. 하지만 저항하는 군중은 ‘제도에 대한 합리적 거부’일 뿐이라고 항변한다. 프랑스에서는 이런 거부의 목소리가 1995년부터 주기적으로 표현됐다. 경제위기의 서막이 오른 지 2년이 지난 지금, 경제체제의 톱니바퀴가 고스란히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기존의 이 경제체제는 ‘개혁’, 또 개혁이란 이름 아래 유럽 사회를 살기 좋은 사회로 만들던 ‘제도’를 파괴하고 있다. 학생, 노동자, 퇴직자 할 것 없이 시위자들은 이런 퇴행에 맞서며 미래의 세계를 선취하기 위해 나서고 있다.

전국적인 대규모 시위 사태와 이에 대한 여론의 지지를 보면, 최저 정년을 60세에서 62세로 연장하는 연금 개혁안에 대한 국민의 반발이 얼마나 거센지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정년 연장은 불법행위로까지 인식된다. 또 한 가지 이 사태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있으니, 바로 ‘현대화’ 이후에 노동 세계를 대하는 국민의 의식 변화다.

이번 사태에는 노동의 고달픔이 가중되고, 노동에 대한 인식이 불가피하게 악화된 현실이 고스란히 투영돼 있다. 대다수 노동자는 노동의 불합리한 조건들을 얼마나 더 참아낼 수 있을지 의구심을 품는다.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도저히 버텨낼 수 없을 것이라며 두려워한다. 시위 행렬에서 흘러나오는 구호에도 절박한 심정이 묻어난다. “노동하다 죽느니, 지금 죽음을!”, 아니면 “노동 이후의 삶을!”…, 시위 현장에서 심심찮게 들려오는 구호들은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대다수 국민이 일상의 노동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드러낸다. 오늘날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육체의 부담은 과거보다 한층 경감됐다. 또 임금노동자의 3분의 2는 서비스 직종에서 활동한다. 법정 근로시간은 35시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직업 활동이 죽음이나 생명의 박탈과 같은 음울한 이미지로 그려지는 것이다.

 

 “노동하다 죽느니 지금 죽음을”

 

노동이 비극적으로 표상되는 것은 단순히 늘어난 2년의 노동시간 때문만은 아니다. 오늘날 노동자가 외치는 구호는 과거의 또 다른 구호들을 연상시킨다. 가령 “우리는 생존을 위해 목숨을 버리고 싶지는 않다!”와 같은 구호 말이다. 바야흐로 1968년 5월, 3주간의 총파업 기간에 행렬의 대다수를 차지한 생산직 노동자는 또 다른 삶에 대한 열망을 간절히 표현했다. 하지만 올가을 ‘68혁명’의 유명한 구호를 변형시킨 새로운 구호를 보고 있노라면 오늘날 노동자들의 심정은 그보다 더 절박해 보인다. 과거의 노동자가 “지하철, 일, 잠”이라고 외쳤다면 오늘날의 노동자는 “지하철, 일, 무덤”이라고 외친다. 대체 노동에 대한 인식이 이렇게까지 악화된 이유는 무엇일까?

프랑스 국민은 이제 더는 버텨내지 못할 것이라고 두려워한다. 수면을 방해하는 노동시간, 근육통을 유발하는 단순반복적인 업무, 악천후나 고객이 주는 스트레스, 강도 높은 노동에의 노출, 요컨대 ‘노동의 고달픔’으로 부를 만한 모든 것이 이들을 짓누르고 있다. 오늘날 (비로소) 노동의 고달픔에 관한 문제가 공론화되기는 하지만, 여전히 개인주의적 시각이라는 한계에 머물러 있다.

한편, 국민의 두려움을 부추기는 또 다른 이유 중에 잘 알려지지 않은 고충도 있다. 항상 ‘더’라는 잣대를 들이대며 끊임없이 압박해오는 노동에 맞서 충분한 대비가 돼 있지 않은 것은 아닐까, 관리자가 하급 사원의 구체적인 업무는 무시한 채 혼자 종횡무진하며 현실에 맞지 않은 방식으로 일을 부과하는 통에, 업무를 제대로 완수해내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 말이다. 노동자는 동일한 이유로 과업 실행 과정의 어려움이나 노력 정도는 반영해주지 않는 평가제도에도 두려움을 느낀다. 일을 제대로 완수하지 못하는 것, 꼼짝없이 직업상의 실수를 범하고 마는 것, 기대치의 능력을 보여주지 못해 취약한 노동자로 전락하거나 실직자 신세가 되거나 부정적 이미지를 얻게 되는 것 등 오늘날 노동자에게는 걱정스러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목표 초과, 얼마나 더 하라는 건가?

현대 경영은 권위를 확립하고 노동자를 착취 상황으로 몰아넣기 위해, 끊임없이 불안정을 조장한다. 그 방편으로 적대적인 분위기를 조성한다. 노동자는 언감생심 일터를 자기 집처럼 편안하게 느껴서는 안 된다. 자신이 일을 잘 통제한다고 여겨서도 안 되고, 행여 동료나 상사, 심지어 고객과 공모 관계를 형성하며 에너지 소모를 덜도록 만들어서는 안 된다. 끊임없이 조직을 개편하고, 노동 유연성을 강제하며, 직업 세계의 이정표를 잃어버리고, 학습된 사항을 자꾸 잊어버리도록 만들어야 한다. 언론을 떠들썩하게 했던 프랑스 텔레콤이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노동의 양상이 한층 복잡해지고, 환경은 불확실해지고, 경험 따위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제는 목표를 달성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상사의 신뢰를 얻으려면 정해진 목표를 뛰어넘어야 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문제가 대부분의 대기업에서 거의 의무화되다시피 한 직원평가의 자의적 성격이다. 목표를 초과해야 한다면 얼마만큼 초과해야 할까? 그리고 이를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취재 기간에 많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심정을 외줄타기에 비유했다. 이들은 균형을 잡기 위해 온몸의 에너지를 한곳에 집중하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그것도 혈혈단신 극한의 고독 속에서 말이다. 상사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상사의 역할이란 더 많은 속박을 가하는 것일 뿐이다. 동료 역시, 현실을 지배하는 개인주의의 기본 논리에 따르면, 경쟁자에 불과하다. 그렇게 도움의 손길도 기대할 수 없이 홀로 덩그러니 난관과 마주한 심정이라고 노동자들은 토로한다.

현대 노동의 특징 중 하나는 통제 중심의 테일러식 논리와 노동자의 주관적 참여가 공존하는 복합적인 조직 형태에 있다. 가령 전화상담센터를 떠올려보자. 그곳에서는 사전에 짜인 우스꽝스러운 각본과 일정한 통화 시간이 상담직원에게 강요된다. 하지만 보너스라도 더 받기를 원한다면, 몇 마디 말이나 다정다감하고 생산적인 조언으로 자신을 차별화하거나, 억양에 남다른 변화를 주거나, 고객에게 순발력 있게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양과 질을 조화하라, 스스로 알아서

경영은 여전히 단기의 양적 목표를 부과한다. 동시에 한층 더 유동적인 상황에 놓인 노동자에게 어떻게 하면 노동의 질과 양(전화 업무의 빈도, 처리할 서류의 양, 배달할 양 등)을 적절히 조화시킬까 하는 문제도 알아서 해결하도록 종용한다. 이런 이유로 상당수 업무는 가장 말단인 사원에게 하달된다. 그리고 이들에게 노동의 질까지 책임지도록 만든다. 목표 완수를 위한 방법이나 시간을 협의할 길이 없는 상황에서 생산성 향상까지 요구하는 이 세계에서, ‘자율적’인 노동자는 아무리 안정된 지위를 누리더라도 항상 위험하고 불안정한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다. 간부가 되어도 이런 긴장과 모순된 상황에 처하기는 마찬가지다. 업무 마감 시간은 점차 짧아지고, 자신이 어떻게 시간을 활용했는지 증명할 ‘보고서 작성 업무’ 탓에 매 순간 시간을 통제해야 한다. 어떤 때는 보고 과정이 반일 단위로 된다.

공공 부문은 민간 부문의 경영 기준이 대거 도입되면서 민간 부문과 유사하게, 혹은 그보다 더 심하게 업무나 직업의 정체성, 업무 수행 방식 등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1) 노동자에게는 변화가 개인의 근속연수에 맞게 서서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급격히 일어난다. 그러니 환경이나 고객의 변화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저마다 당황할 수밖에 없다. 주변 세계가 변화하는 오늘날, 공공기관이나 지자체에서 일하는 공무원이나 병원 직원들은 온전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하는 속박이나 굴레, 장애물에 대해 토로한다.

이런 세계에서 자신의 위상을 지키려면 무엇보다 평정심을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만 올바른 업무나 윤리에 반하면서까지 변화해야 한다는 끝없는 강박관념 속에서 살아가지 않을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 경영은 포식자다운 면이 있다. 완벽성과 완전한 참여, 심지어 맹목성까지 요구하면서 가장 잘 버티는 자, 가장 힘이 센 자만을 상대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사생활이나 가정은 무시한 채, 현대 경영은 개인에게 더 유연하게 항상 대기 중일 것을 요구한다. 그러니 대기업 직원의 연령 분포도에서 상단과 하단의 폭이 좁은 이유를 알 만한다. 현대 경영은 소모하고 쓸모가 없어지면 금방 내다 버린다.

일정 나이(50세 이전에 시작되는 이른바 ‘장년층’의 나이)가 지나면 노동자는 더 이상 버티기가 어려워진다. 또 경력이 없으면 사회에 편입하는 것도 어렵다. 선배 세대와 나란히 시위에 가담한 청년층의 모습을 보면, 이들이 얼마나 명민한지 알 수 있다. 프랑스의 청년실업은 유럽에서 가장 심각한 축에 속한다. 프랑스의 젊은이들은 오늘날 취업문을 뚫기 어려운 이유가 ‘선배 세대’들이 오래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잘 안다. 결국 경영이 부과하는 지나친 요구의 대가를 치르기는 장년층이나 청년층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고용 불안정성이 심한 직종일수록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지금 파리 거리는 ‘계급투쟁 중’

뤼시 다부안과 도미티크 메다가 2008년 27개 유럽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비교조사를 보면,(2) 프랑스인은 노동에 대한 기대가 가장 크고, 노동에 가장 중요한 가치를 부여하는 동시에, 직업에서 가장 많은 실망과 환멸을 느끼는 국민으로 나타났다. 이런 현상은 프랑스의 역사에서 기인한다. 더 구체적으로는 국가의 초석이 된 프랑스혁명이 지닌 위상에서 비롯된다. 프랑스혁명은 개인을 예속에서 해방시키고 개인이 자신의 노동력을 자유롭게 판매할 수 있도록 만듦으로써, 노동에 해방의 의미를, 그리고 열렬한 계급투쟁의 의미를 부여했다. 요컨대 노동은 프랑스 사회의 요체다. 하지만 노동에 대한 요구가 정도를 벗어나면서, 시민은 무력감의 포로가 되거나 불가해한 게임의 법칙을 향한 불신에 사로잡힌 채 전전긍긍하는 처지가 되었다. 생존 방법 문제가 늘 시민을 괴롭힌다. 프랑스 응답자의 절반 이상은 언젠가 자신이 노숙자 신세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에서 배제하지 않았다.

그동안 노동자 개개인은 약해서, 혹은 적응을 못해서 그런 거라며 자신의 고충을 억압해왔다. 하지만 연금 개혁 투쟁을 계기로, 이들은 공동의 운명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많은 시위자들이 ‘느파 플리에’(Ne Pas Plier·불복종) 협회가 제작한 ‘나는 계급투쟁 중’이라는 스티커를 착용한 모습을 보면, 현대 노동세계에 의해 강요돼온 개인주의가 깊이 잠들어 있던 해방과 투쟁의 전통과 결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글•다니엘 리나르 Daniele Linhart
노동사회학자.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CNRS) 명예연구부장. 저서로 『La comédie humaine du travail 노동의 인간희극』,(Erès, Paris, 2015)이 있다.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각주>
(1) ‘공공성 이름 아래 교묘해진 노동착취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9년 10월호.
(2) ‘유럽에서 노동이 차지하는 위상과 의미: 프랑스만의 특수성’, 고용연구센터, 작업문서, 제96-1호, 2008년 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