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와 정치, 낙후된 결탁의 틈새

[Spécial] 나쁜 명령과 질긴 저항

2010-11-05     피에르 랭베르

시위가 있는 날이면 언제나 언론의 칼럼니스트들은 시위가 곧 수그러들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그리고 그뿐이었다. 1995년, 2003년 파업 때도 그랬다. 그런데 이번 프랑스 전역을 휩쓰는 연금 개혁 반대 시위에서는 이를 다루는 언론 보도의 질적인 문제가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오랫동안 미디어 문제는 수면 아래 있었다. 지금까지 정치인에게 ‘미디어 지식인’은 거슬리지 않는 존재였다. 일반적인 정보에 대한 미디어의 통제, 주류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는 미디어의 역할, 미디어 지식인들의 위상 등은 정치권에 전혀 골칫거리가 아니었다. 그동안 정치권은 유명 미디어의 명성에 흠집 낼 말은 일절 하지 않았고, 유명 미디어들이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있게 봐주었다. 또 미디어와 관련된 민감한 사안에 대해 정치권은 정면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씩 상황이 달라졌다. 지난 9월 27일과 10월 8일에 피에르 카를의 영화 <양보는 끝났다>의 일부 장면 두 개가 공개됐다. 첫 번째 장면에서는 사회당 의원 아르노 몽트부르가 카메라가 꺼졌다 생각하고 카메라 앞에서 이렇게 말한다. “양보는 더 이상 없습니다. 이제 <TF1>을 칠 때입니다. 제가 여러분을 도와드리죠. <TF1>이 바짝 정신 들게 해야 합니다.” 이어서 부이그 그룹이 소유한 <TF1>을 가리켜 “프랑스를 갉아먹는 사상을 전파하는 방송, 개인주의 방송, 돈으로 이루어진 방송, 치안을 해치는 방송”이라고 평가했다. <TF1> 경영진이 사과를 요구해오자 몽트부르는 유머라고 둘러댔으나, 이내 생각을 바꿔 <TF1>을 계속 공격했다. 논설위원들 역시 <TF1>의 편을 들며 몽트부르를 비난했지만 몽트부르는 자신이 한 말을 취소하지 않았다(<유로프1> 방송, 10월 3일자).

 

전통적 결탁관계에 곳곳 파열음  

 

 

 

 

 

 

 

 

 

 

 

 

 

두 번째 장면에서는 좌파 정당의 창시자 장 뤼크 멜랑숑이 등장한다. 텔레비전 방송사인 <프랑스2>의 뉴스에 초대받아 인터뷰 장면을 지켜보던 그는 사회자 다비드 푸자다가 공장 폐쇄에 반대하며 투쟁하는 자비에 마티유에게 “너무 멀리 간 것 아닐까요? 폭력시위에 나선 것을 후회하지 않으십니까?”라고 묻는 것을 듣고 펄펄 뛰었다. 이어서 멜랑숑은 푸자다를 가리켜 “천박한 인간”이라고 했다. 멜랑숑의 거친 말은 곧바로 논란이 되어 사람들의 부정적인 평가가 이어졌다. 그러나 몽트부르와 마찬가지로 멜랑숑도 공격 태세로 나갔다. 지난 대선 이후 정치인과 미디어 사이의 설전은 계속되고 있다. 2006년 9월 2일 <TF1>은 1987년 민영화 이후 처음으로 정치인이 밤 8시 뉴스에서 프랑스 미디어를 좌지우지하는 대기업들을 비난했다. 이날 프랑수아 바이루 의원은 사회자 클레르 샤잘에게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했다. “금융·기업의 이익, 미디어의 이익과 연결되고 금융·기업이 정부와 은밀하게 손을 잡으면서 프랑스에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언론 신뢰 하락에 정치인들 공세

올해 초 사회당의 간부인 뱅상 페이옹은 공공미디어가 엘리제궁의 손아귀에 들어갔다고 비난했다. 멜랑숑은 방청석에서 냉소적으로 질문하는 저널리즘 전공 학생을 차갑게 대했고, 전 총리 도미니크 드빌팽은 대기업이 공공미디어를 소유하지 못하게 하는 법을 지지한다고 밝혔다(<마리안>, 2010년 10월 2일자).

과거에는 미디어를 견제하려고 미디어 통제 문제가 나왔지만,(1) 이제는 이 문제가 정치권에서 제기되고 있다. 미디어 통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문제가 제기되는 것일까? 신뢰를 잃어버린 미디어를 비판하는 척하려고 쇼를 벌이는 것일까? 2002년에는 치안 불안 문제가 과도하게 보도돼 대신 사회문제가 묻혔고, 2003년에는 정년 개혁 반대 시위가 피상적으로만 다루어졌고, 2005년에는 최근 대선 운동에 하나같이 부화뇌동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처럼 미디어의 권위가 추락하자 미디어 관계자들은 다시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자칭 권력 앞에서 독립성을 유지한다고 알려진 언론을 열정적으로 지지하는 이들도 대통령과 미디어 소유주 사이의 끈끈한 관계가 샅샅이 밝혀지는 것에는 주춤한다.(2) 정부가 공공미디어의 경영진을 선임하고 해임하는 시스템, 외무부 장관의 홍보자문 역인 크리스틴 옥크랑이 공영방송사의 책임자로 임명된 어이없는 사건, <프랑스 앵테르>에서 풍자비평가인 디디에 포르트와 스테판 기용이 퇴출된 문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비판을 하지 않는다. 미디어는 권위가 추락했을 뿐만 아니라 기술 발전과 경제위기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주요 신문의 경영진은 정부의 지원금 덕택에 자리를 지키는 경우가 많다. 2009년 언론이 받은 정부 지원금은 13억 유로(<AFP>가 받는 정부 지원금 제외)에 이르는데, 언론의 매출액 중 12% 이상을 차지하는 수치다.

언론사 대표들은 경영난 속에 엘리제궁과 가깝게 지내면서 저널리즘을 타락시킨다. 이런 이유로 미디어, 대기업, 정치권이 이루는 힘의 관계에선 정치가 유리한 입장이 된다. 야당 인사들은 미디어와 대립하고 있지만, 일종의 쇼가 아닐까? 이제 미디어는 기득권층으로 가는 관문으로 평가되지 않는가. 2004년 여름부터 종합 일간지 대부분이 새로운 경영진을 만났다. <르피가로>는 세르주 다쇼가 인수했고, <리베라시옹>은 2005년 은행 재벌 에두아르 드 로칠드가 대주주로 나서 투자를 하면서 회생했다. <레제코>는 2007년 피어슨이 LVMH 럭셔리 그룹에 매각했으며, 2009년 <프랑스 수아르>는 러시아 재벌 세르게이 푸가쳬브가 아들 알렉산드르에게 주었다. <르몽드>는 피에르 베르레, 자비에 니엘, 마티유 피가스라는 사업가 트리오가 경영을 맡게 되었다. 매각된 <르파리지앵-오주르디앙 프랑스>(50만 부 발행)는 세르주 다소의 욕심을 자극했다. <레제코>의 주주들은 <레제코>가 시장경제와 기업할 자유에 호의적이기 바란다고 강조했다(<레제코>, 2010년 6월 21일). 자유로운 기업인을 옹호하는 것인가, 아니면 자유로운 표현을 옹호하는 것인가? 구조적으로 적자를 피할 수 없는 미디어 분야를 인수한 사람들은 이윤보다는 영향력을 추구한다. 언론이 거래될 때마다 반대의 목소리도 생겨났다. 하지만 정치권은 이런 목소리에 적극적으로 맞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쇼일까 길들이기일까…

사실 그랬다. 총리관의 빌팽은 입을 다물었다. 베이루는 1994년 기업이 TV 채널의 자본을 보유할 수 있는 비율을 25%에서 49%로 높인 장관이었다. 1997년 사회당이 약속한 반집중법이 흐지부지됐을 때 국민의회에 있던 인물은 몽트부르였다.(3) 과거에 프랑수아 미테랑은 맹세를 저버리고 언론의 거물들을 좌지우지했다. 1985년 7월 그는 장관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돈의 힘을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대표하는 이데올로기가 작은 기회를 만나려면 돈의 힘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4) 

흔히 야당일 때는 미디어의 문제를 제기하지만 여당이 되어 권력을 잡게 되면 미디어의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없게 되지 않는가? 언론이 택할 수 있는 방향은 세 가지 중 하나다. 첫 번째 방향은 몇 년 동안 현상 유지를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경제가 회복되면 정부로부터 독립할 준비를 하고 방송그룹이 이끄는 시장의 흐름에 따르는 것이다. 세 번째는 정보를 공공재산으로 보고, 방송을 공공서비스로 생각하며 시장과 정부로부터 벗어난 새로운 모델을 추구하는 것이다. 차기 대선전에서는 세 번째 방향이 승리할 가능성이 있기는 할까?

 

 

글•피에르 랭베르 Pierre Rimbert
지난 6월부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부편집장으로 있으며, 미디어 분석과 비평 협회 아크리메드(Acrimed) 회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번역·이주영 ombre2@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주요 역서로 <르몽드 세계사 2>(공역·2010) 등이 있다.

 

(1) 아크리메드 협회 사이트 www.acrimed.org 참조.

(2) 마리 베닐드, ‘미디어를 장악한 소수 지배자들에게 이미 왕관을 받은 사르코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6년 9월호 참조.

(3) ‘<TF7> 혹은 프랑켄슈타인의 우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8년 7월호 참조.

(4) 자크 아탈리, <그것은 프랑수아 미테랑이었다> (Fayard·2006) pp.136~137에서 인용.

(5) 몽테뉴연구소, ‘일간지를 어떻게 구해낼까?, 2006년 8월, www.institutmontaigne.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