퀘벡민족주의
‘조용한 혁명’은 오지 않았다

2010-11-05     브누아 브레빌

주변 강대국이나 제국주의 국가의 지배 아래 있는 국가가 흔히 그러하듯, 퀘벡도 민족주의와 사회변혁을 함께 엮으려 했다. ‘조용한 혁명’이라 부르는 퀘벡의 이런 노력은 거리시위가 아닌, 퀘벡 정부의 주도로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에 시작됐다. ‘조용한 혁명’이 퀘벡에 남긴 것은 무엇인가?

2008년에 열린 퀘벡시 400주년 기념행사는 캐나다의 국가적 일체성을 만끽하는 분위기 속에서 화려하게 진행됐다. 각 정부가 내놓은 1억5천만 달러 덕분에 40여 개 범선으로 구성된 선단이 라로셸을 떠나 옛 아틀란틱해를 건넌 항해를 기념했고, 셀린 디옹과 폴 메카트니 같은 가수들의 무료 공연도 있었다. 퀘벡 역사를 담은 영화가 10여 주에 걸쳐 저녁마다 높이 60m, 너비 600m의 야외 스크린에서 상영됐다. 반면, 50주년 기념행사도 없이 지나친 역사도 있었다. 진보주의적 민족주의가 꽃피웠고, 퀘벡 사회제도의 진보를 가져온 ‘조용한 혁명’의 순간들이다. 하지만 진보적 노선 포기야말로 퀘벡민족주의의 쇠퇴를 가져온 요인이었다. 과연 역사는 다른 선택을 허용했을까?

민족주의와 케인스주의의 결합

퀘벡자유당 대표 장르사주는 극보수주의당인 국민연합당 창시자인 모리스 뒤플레시의 뒤를 이어 1960년 주총리가 되었다. 외국 자본에 크게 의존하던 퀘벡 경제는 침체기를 겪으며 실업률이 치솟았고(1960년 9.2%), 교육과 보건, 사회서비스는 정부가 아닌 교회가 전담했다. 이런 가운데 ‘우리 집에서는 우리가 주인이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새 정부는 퀘벡의 ‘근대화’에 착수했다. 이 시기 정부가 추구한 근대화란 공공서비스 부문 지출 삭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퀘벡 사회에는 ‘조용한 혁명’의 경제적 민족주의와 케인스주의가 섞이면서 영국식 복지국가 제도가 도입됐다. 의료보험공단이 의료서비스 지출을 담당했고, 연금공단이 문제가 많던 연방정부의 노후보장연금을 대체했다. 자유당 정부가 무상교육제도를 채택하면서 교육의 민주화도 진행됐다. 또한 경제 내 공공 부문의 비율을 늘리려 퀘벡주연금운용기관인 퀘벡SGF 등 각종 공기업이 신설됐다. 전력기업 국유화를 통해 신설된 하이드로퀘벡은 프랑스권 캐나다의 자긍심이 회복되는 상징으로 떠올랐다. 일련의 개혁들로 주정부 공무원과 준공무원도 급격히 늘어났다. 즉, ‘조용한 혁명’은 거리에서 시작된 민중혁명이나 사회혁명이 아니라 정부가 주도한 혁명이었고, 따라서 경제체제 전복이 목표가 아니었다. 공공 부문 확대와 더불어 봉바르디에나 퀘벡코르 같은 퀘벡 기업들이 국제적으로 성장하면서, 새로운 프랑스어권 부르주아층이 형성됐다.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엘리트층이 등장한 것이다.

‘조용한 혁명’은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았음에도 좌파 독립주의의 기반을 마련했다. 퀘벡민의 언어와 종교, 문화 수호를 내세운 교회의 전유물이던 퀘벡민족주의는 그 뒤 경제적·사회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 한 예로 1960년 창설된 ‘민족독립연합’(Rassemblement pour l’independance Nationale·이하 RIN)은 첫 좌파독립주의를 표방한 정치운동이었다. RIN은 앵글로색슨 자본에 의한 퀘벡 노동력 착취를 비판했고, 노동자 파업을 선동했다. 이들은 도미니언에어스·캐내디언집섬·암스트롱코르크·베스트에버슈즈 공장 등에서 시위에 참여했고, 정치 전단지를 돌렸다. 또한 1963년 창설된 퀘벡해방전선은 가장 극단적 모습을 보인 좌파민족주의 정당으로서, 혁명을 완성하기 위해 무력을 동원한 직접 행동을 주장했다.

1960년대 좌파독립주의 태동

한편, ‘조용한 혁명’은 지적·사회적으로도 새로운 변화를 몰고 왔다. 마르크스주의가 대학가에 유행했고, 그 결과 <파르티프리> 같은 잡지와 서적 편찬이 활성화되면서 여론 형성에 기여했다. 예술 부문에서는 퀘벡 속어를 사용한 ‘퀘벡식 언어체’ 문학이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 ‘다이렉트 시네마’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통해 퀘벡인의 삶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것도 유행했다. 이런 열기가 노동자 밀집 지역까지 확산되면서 노동자의 직접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소비자조합, 서민병원, 임차인연합 등 서민 조직이 발달했다.

사회 비판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1968년 퀘벡자유당을 탈당한 일부 정치인들이 퀘벡주권운동연합에 모여 창설한 당이 ‘퀘벡당’이었다. 퀘벡당은 창당 직전 와해된 RIN과 보수당인 ‘민족연맹’을 흡수했고, ‘조용한 혁명’을 통해 새로 등장한 프랑스어권 엘리트층의 주도 아래 퀘벡민족주의 조직을 연합하고, 독립을 위한 노동자층 규합을 추진했다. 퀘벡당의 이런 전략은 1970년 4월 주의회 선거에서 23.6%의 득표율이라는 성공으로 귀결됐고, 후보자 7명이 노동자층과 빈곤층이 집중된 지역에서 의석을 얻는 데 성공했다. 개표 뒤 저녁 연설에서 르사주 정부 시절 천연자원부 장관을 지낸 당시 퀘벡당 지도자인 르네 레베크는 다음과 같이 자축했다. “오늘 승리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가장 소외된 계층의 지지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지금껏 승리가 찾아오지 않은 이유는 가진 자와 기득권층이 그들의 특권을 잃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자본가 반발과 70년대 경제위기

지적·사회적으로 고조된 열기 속에서 좌파적 성향을 띠게 된 퀘벡당은 ‘조용한 혁명’의 기본 원칙을 넘어서는 진보적 개혁을 추진했다. 1972년 전당대회에서 퀘벡당은 노동자위원회와 노동자가 선출한 기업위원회을 창설해 당 활동 및 운영에 참여시키는 안을 논의했다. 자본주의 체제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민간 기업이 공급하는 재화의 공공 부문 이전을 추진하는 것”을 정강에 포함시키는 한편, 조합경제의 발전을 도모하려 했다. 이런 움직임은 곧 자본가 계층의 우려를 자아냈고, 기업위원회 의장인 샤를 페로는 “독립주의자들이 동유럽 국가처럼 국가가 경제를 중앙집권화하는 통제경제와 계획경제 체제를 추구하고 있다”면서 “향후 폴란드나 체코, 동독과 유사한 경제체제를 갖게 될지 모른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퀘벡당은 1976년 선거에서 쾌거를 이뤘다. 레베크는 퀘벡 총리에 오르며 임기 말 주권독립-연방연합 형태의 퀘벡 독립을 묻는 국민투표 실시를 약속했다. 그러나 정권을 잡은 퀘벡당은 현실적 문제에 부딪히자 전혀 다른 방향의 과세 정책을 채택했다. ‘조용한 혁명’ 시기의 경제학자 자크 파리조 재정부 장관은 첫 예산부터 (물가 변동에 따른 명목임금이 아닌) 실질임금에 기초한 과세 기준 연동제를 포기했다. 또한 공공지출 상한선을 설정하고 기업 수익 과세율을 낮추는 한편, 공무원 수를 동결했다. 퀘벡은 더 이상 국가 확대의 시기가 아닌 국가 활동 축소의 시대를 맞았고, 복지국가는 경제위기 앞에 무릎을 꿇었다. 4년간 재정축소 정책을 추진하면서 더 이상 사회문제를 우선시할 수 없게 되자, 퀘벡 정부는 공론을 퀘벡 독립에 관한 국민투표 실시에 따른 제도적 영향으로 몰고 갔다. 국민투표 결과, 반대가 59.5%였고 독립은 무산됐다.

독립 실패로 민족주의자와 좌파는 침체기에 들어섰고, 내부 갈등과 이념 갈등 끝에 극단주의 성향의 두 정당, 즉 노동자공산당과 앙뤼트당이 1982년 와해됐다. 한편 퀘벡당은 마거릿 대처 총리와 레이건 대통령의 경제정책에 호응해 예산 삭감으로 경제침체에 맞섰다. 실망이 거듭되면서 집단적 체제 비판은 점차 모습을 감추고, ‘개인에 치중된 이념’이 들어섰다. 개인생활, 정신적·감성적·신체적 평안과 안녕을 우선시하는 개인 중심의 이념이 광고와 상업 활동을 중심으로 확산됐다. 수십 년간 활발한 활동을 보인 지식인층은 점차 정치 무대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대학계 전문가와 정권층 자문가들이 자리를 대신했다. 퀘벡 좌파 내에서 독립은 점차 잊혀졌고, 독립주의자는 퀘벡당의 주위에 모여 사회·경제 문제는 제쳐둔 채 민족주의에만 관심을 집중했다.

독립투표 실패… 신자유주의 급선회

한편 퀘벡의 자치 확대에 고심한 나머지, 퀘벡당은 적극적으로 무역자유화를 외치게 되고, 급기야 연방정부 편에 서게 되었다. 1989년 퀘벡당은 기업들과 보수파 출신 브라이언 멀로니 총리와 함께 캐나다-미국 자유무역협정 체결을 지지했다. 1993년에는 북미자유무역협정 체결을 두고 다른 주정부들과 노동조합들의 반대 여론 속에서, 퀘벡당은 자유당 장 크레티앵 정부를 지지했다. 퀘벡당의 논리는 퀘벡주의 대미무역 의존 확대야말로 퀘벡주가 독립할 때 캐나다의 재정 보복에 대항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논리는 자유무역협정이 초래할 사회적 비용이나 문화 획일화 문제는 간과했다.

그렇다고 퀘벡당이 캐나다 연방정부와 관계를 단절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1995년 이들이 제안한 주권독립-연방연합은 북대서양조약기구를 포함해 캐나다가 체결한 모든 국제조약을 존중하고, 캐나다 달러화 사용은 물론 자유무역지대 유지를 표방했다. 다시 말해 퀘벡주의 북미 무역자유화 지대 완전 통합을 추구했는데, 이는 독립을 하더라도 국가로서 활동이 제한될 수밖에 없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1995년 9월 29일 실시된 국민투표에서는 독립 반대가 50.6%라는 극히 작은 표차로 승리했다.

퀘벡민족주의의 문화적 전환의 상징이 된 투표 부결을 두고, 퀘벡당 출신 자크 파리조 총리는 “경제적 우려와 소수 민족 표심”을 원인으로 설명했다. 실제로 독립론자는 서민층이 대부분인 신규 이민자의 표심을 얻는 데 실패했다. 고국을 떠나 몬트리올에 자리잡은 이민자들은 캐나다에서 새로운 삶을 꿈꿨고, 이런 그들에게 퀘벡 독립이라는 명분은 큰 의미가 없었다.

이민자에게 퀘벡 독립에 따른 사회적 비전을 제시하는 데 실패한 퀘벡당은 퀘벡 문화의 효용에만 호소함으로써 정체성의 한계에 부딪혔다. 또한 1996∼97년 퀘벡당의 사회보장 예산 축소에 이어, 2004년 퀘벡자유당도 유사한 정책을 제시했다. 퀘벡의 두 주요 정당이 모두 별반 차이 없는 경제모델을 추구하면서, 공론은 언어 및 문화와 관련된 문제에만 치중됐다. 이를 잘 드러내는 가장 최근 예가 2006년부터 이민과 관련해 퀘벡의 정치권과 여론을 양분시킨 ‘합리적인 타협안’(정치와 종교 분리, 이민자 사회 통합, 다문화사회와 퀘벡의 가치 수호 등 문화다양성에서 비롯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퀘벡 내 법적 타협안 마련을 둘러싼 논의를 통칭)을 두고 올해 퀘벡당이 자문위원회에 제안한 ‘세속헌장’(1)이다.

글•브누아 브레빌 Benoît Bréville
사학자, 파리1대학 20세기 사회사연구소 연구원 겸 몬트리올 퀘벡대학 교수.

번역•조은섭 chosub@ilemonde.com
파리7대학 불문학 박사. 주요 역서로 <착각>(2004) 등이 있다.

<각주>
(1)  르솔레이, 2010년 5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