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와 만난 이슬람주의
스스로 길을 찾는 인도네시아
지난 10월 초 인도네시아 경찰은 수마트라 섬 테러 조직과 연루된 것으로 추정되는 5명을 살해했다. 인도네시아 정부에 따르면, 무슬림 조직들이 규합을 주저하며 안주한 덕에 위협은 주춤한 듯하다. 그러나 인도네시아는 최근의 대통령 직접선거보다는 테러로 더욱 유명하다. <<원문 보기>>
‘무슬림은 이슬람법에 복종해야 한다.’ 이 한 줄의 문장이 신생국가인 인도네시아를 이슬람 공화국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조항은 헌법 서문에 기록됐다가 채택 직전 1945년 8월 18일 삭제됐다. 그리고 인도네시아는 ‘판카실라’(5원칙)의 국가가 되었다. 5원칙은 유일신에 대한 믿음, 인본주의, 단일국가, 민주주의, 그리고 사회정의를 의미한다. 그야말로 세속주의와 이슬람 간의 역사적인 합의였다.
자카르타에 있는 ‘이슬람과 다원주의를 위한 국제센터’ 소장인 스야피 안와르는 “인도네시아는 온건하며 미소짓는 이슬람의 본향”이라고 말한다. “2001년 9월 11일 이후 극단주의와 보수주의 경향이 증가하는 것은 사실이다. 2002년 발리 테러 이후(당시 200여 명 사망)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이슬람과 민주주의가 양립할 수 있다는 점을 알리는 것이 내 일이다.”
인도네시아는 두 시기에 걸친 오랜 독재를 거쳐 1998년에야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로 거듭났다. 첫 번째 시기는 ‘국가주의’와 ‘이슬람’, ‘공산주의’라는 3대 요소를 결합해 건국한 대통령 수카르노 정권(1945~67) 때였다. 두 번째 시기는 ‘공산주의와의 싸움’이라는 명분하에 권력을 쥔 수하르토의 독재기(1967~98)였다. 최소 50만 명을 죽음에 이르게 한 두 독재 체제의 상흔은 여전히 잔존한다.(1)
“이슬람 국가 아닌 민주주의 국가”
오늘날 인도네시아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민주주의 국가다. “서방의 논평자들은 이 점은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서방인은 우리를 최대 이슬람 국가로 규정하기 좋아한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게 생각한다.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다. 우리는 언론의 자유, 다양한 정치 활동, 역동적인 시민사회를 갖고 있다. 부패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는 어디에나 늘 있는 문제다. 또한 지난 세계 경제위기 때 주변의 여러 국가보다 잘 이겨냈고, 10년 전보다 더욱 성장했다(인도네시아는 1990년대 아시아 경제위기 때 특히 타격이 컸다).” 그는 “물론 인도네시아에는 이슬람주의자도 있고 보수주의자도 있다. 그러나 정치 발전과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이들 일부는 동화됐다”고 말한다.
인도네시아 인구는 2억4천만 명 이상이며, 그중 2억여 명이 무슬림이고 대부분 수니파다.(2) 인구의 3분의 2가 인도네시아 심장부인 자바 섬에 거주한다. 대다수 신자는 전통주의자와 근대주의자를 대변하는 양대 종교단체에 속한다. 양대 종교단체는 네덜란드의 철수와 독립 전부터 이미 생겨났다.
두 번째 단체는 ‘근대주의파’인데, 회원은 3천만 명이다. 1912년 창설된 무하마디야는 도시 기반의 지식인 계층 중심으로, 회원 중에는 학교나 병원, 대학 설립자들이 있다. “서로 해석은 다르지만 살라피스트처럼 우리도 우선적으로 쿠란을 중심 교리로 삼는다. 우리는 원칙주의자지만 관용적이다. 본보기로 삼는 인물은 무함마드 압두이지, 무슬림 형제나 마우두디는 아니다.(3) 우리는 서로 다른 종교 사이의 교류를 확고히 믿는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살라피스트보다는 NU와 더 가깝다. 인도네시아는 이슬람 국가가 아니고 일반적인 세속 국가다. 그리고 우리는 중동이 아니다”라고 무하마디야 단체의 사무총장은 설명한다.
족자카르타 가쟈 마다 대학의 연구원인 아리파 라마와티는 “이 종교단체는 하나의 가족과 같다”고 말한다. 삶의 방식이나 생각에서 진보주의자인 그녀는 오랫동안 자기 소유의 집에서 혼자 살았다. 히잡도 쓰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는데, ‘주변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고백한다. 그녀는 “무하마디야의 원칙주의적 가치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무하마디야 가족에 강한 소속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종교적이되 세속적인…
그녀의 동료인 사회학자 에릭 히아리에트는 덧붙인다. “민족 다음으로 정체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는 종교다. 자바에서 누군가를 처음 만나면 산트리(교리에 충실한 신자)인지 아반간(충실하지 않은 신자)인지를 묻는다. 그 사람이 스스로 산트리라고 말하면 두 번째로 NU인지, 무하마디야인지를 묻는다.”
섬 중심부에 있는 족자카르타의 옛 술탄 도시는 솔로(수라카르타)와 함께 아반간의 천국이다. 아반간은 자바 섬 문화에 맞는 세속적이고 교리 혼합적인 가치를 내세운다. 지난 4월 술탄 하멩쿠부워노 10세는 자신의 64번째 생일에 특별한 축제를 열었는데, 64는 신비로운 숫자인 8의 몇 배가 되는 수이기 때문이다. 도지사는 지역에 대한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한다. 그러나 그도 역시 영적 아우라를 누리고 있다. 남쪽 바다 여왕뱀의 전설과 신비롭게 결합돼 그는 ‘세계의 중심’이다. 도지사 관저(크라톤)는 지역 전통의 집결체로, 그 이미지에는 힌두교와 불교, 기독교, 이슬람의 영향이 섞여 있다. 근간은 이슬람이라고 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종교와 문화가 혼합돼 있다. 이처럼 혼합적 가치의 영향을 받아 무하마디야가 창설된 곳이 족자카르타다. 이 궁전 뒤 무슬림 구역에서 창시자인 아마드 달란이 태어났다.
여기서 60km 떨어진 솔로의 술탄 궁전에서도 이런 문화와 의식의 혼합을 찾아볼 수 있다. 남녀노소 모두 암송법이나 ‘앉은 채 걷기’(믈람파 돌록)같이 행할 수 없어 보이는 전통 자바 예법을 익힌다. 모두 바틱 나염에 긴 치마를 묶어 입는 전통의상인 자릭을 갖춰입고 있다. 여성은 여기에 몸에 꼭 붙는 긴 소매의 레이스 웃옷을 입고 머리는 공들여 올린다. 해가 질 무렵 옆 이슬람 마을인 카우만에서 들려오는 기도 시간을 알리는 소리와 가멜란 음악 소리가 한데 뒤섞인다. 이날 밤 200여 명은 궁전 주변에 모여들어 노천 공연을 즐겼다. 이 중 이슬람식 베일을 착용한 여성은 4명뿐이었다.
성복을 입지 않는 성직자, 세속에 관여
대부분의 자바인과 마찬가지로 솔로의 무하마디야 대학 홍보 책임자인 토하 루빈도 자바의 전통 가치가 이어지는 점을 높게 평가한다. “과거 왕정의 전통인 권력의 자비로운 실행과 지혜는 중요한 가치다. 무하마디야는 이런 전통 유산을 더욱 받아들여야 한다.”
NU가 창시된 곳은 섬의 동쪽인 좀방이다. 이 종교운동의 역사적인 지도자이자 1999~2000년 인도네시아 대통령을 지낸 압두라만 와히드(친근한 별명 ‘구스 두르’라고 부름)가 이곳에 안장돼 있다. 수천 명의 인도네시아인이 그의 무덤을 찾고 그의 조부가 설립한 쿠란 학교(페잔트렌) 주위를 돌며 묵상한다. NU는 모든 사람을 위한 쿠란 교육 운동에 개척자 역할을 했다. 그런 점에서 구스 두르는 자바 섬에 이슬람을 전파한 9명의 수피 성인에 견줘 ‘열 번째 성인’으로 여겨진다. 자카르타에 있는 친NU 계열의 와히드연구소 소장인 아마드 수아에디는 다음과 같은 점을 강조한다. “구스 두르는 원주민의 신앙을 가깝게 받아들였다. 그는 본래의 다양한 전통을 포용하는 이슬람을 원했다. 우리 이맘(무함마드의 후계자)은 아야톨라가 아니다. 우리 이맘은 직업을 갖고 장도 본다. 사람들은 작황과 돈 등 온갖 일상적인 문제에 대해 이맘에게 물어본다. 성직자지만 성복을 입지 않는다. 종교·문화·교육 문제에 모두 관여한다.”
이슬람화, 수하르토 체제 때 시작
무하마디야처럼 NU도 처음부터 국가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이제는 정치적 역할을 줄이고 사회 및 종교 문제에 매진하기로 했다.(4) 두 종단 모두 수많은 하부 조직이 있다(학생단체와 각종 조직). 이 중 일부는 ‘자유이슬람네트워크’(Liberal Islam Network)처럼 더욱 자유로운 사상을 지지한다. 이 점에 대해 이슬람의 이름으로 ‘관대한’ 사상을 설파하는 데 불쾌감을 느낀 구세대의 우려도 있다. 2005년 파트와에서 ‘마즐리스 울라마 인도네시아’(인도네시아 숭배 위원회·MUI)는 이들을 강하게 비난했다.
1990년대 자유 무슬림이 지속적으로 국가의 종교 성향 개혁 문제를 공론화하면서 전통 이슬람파와 자유 이슬람파 간의 간극은 더욱 심해졌다. 인도네시아의 이슬람화는 1980년대 수하르토 체제하에서 시작됐다. 중동 지역의 자금 지원으로 그 경향이 심화되면서 수많은 사원이 건립됐다. 1990년대 들어 프잔트렌에서는 교육을 받은 중산층 무슬림이 부상했다. 이런 변화는 많은 여성이 머리를 질밥으로 가리는 모습이 흔해지면서 더욱 명백해졌다. 그렇지만 니캅이나 부르카, 검은 옷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으며 극단적 신앙의 상징인 흰옷은 매우 드물다. 대부분의 무슬림 조직은 히잡 착용을 권유하지만 몸 전체를 가리는 것에는 거부한다. 그래서 압둘 무티는 “원활한 사회생활을 위해서는 여성의 얼굴을 노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대도시의 인파가 많은 지역에서는 특히 머리를 그대로 노출한다.
그러나 히아리에즈는 이렇게 기억한다. “1990년대 초 내가 학생이었을 때 60명 중 1명 정도의 젊은 여학생만 질밥을 착용했다. 유행 문제다. 캠퍼스의 젊은 여학생들은 모두가 하는 대로 따라 하려 하고 새로운 유행에 민감하다. 지금 유행은 좀더 근본주의적인 경향이다.” 1998년 설립된 ‘히즈부트 타흐리르 인도네시아’(HTI)는 개종자를 위한 단체다. 매우 짜임새 있는 조직으로, 젊은이들을 시급하게 칼리프로 회귀하도록 유도한다. 대변인인 이스마일 유산토는 “폭력은 처단해야 한다”고 단언한다. “인도네시아는 지하드의 땅이 아니다.” 이어서 덧붙인다.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또는 팔레스타인에서 문제는 다르다. 이곳의 폭력은 테러가 아니다.” 일부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주는 발언이다.
극단주의 테러 조직도 쇠퇴의 길
아체 지역의 테러 조직에 자금을 지원한 혐의로 바키르는 지난 8월 9일, 발리 테러에 이어 세 번째로 체포됐다. 여세를 몰아 인도네시아 당국은 또 다른 거물이 지휘하는 테러 조직을 찾아냈다. 그는 지역 내에서 수배 1순위 테러리스트 중 하나인 둘마틴으로, 발리 테러에 주요 역할을 한 것으로 의심받던 인물이다. 경찰은 그를 살해했고, 그의 동료 7명도 죽였다. 경찰은 2009년 누르딘 톱도 죽였다. 그는 2003년과 2004년, 2009년 자카르타에서 일어난 테러와 2005년 발리 테러에서 두뇌 역할을 한 말레이시아인이다.
잇단 테러 축출에 성공하며 자신감을 얻은 인도네시아 정부는 이제 테러 활동은 후퇴하고 있다고 결론짓는 듯하다. 국제위기그룹의 분석가 시드니 존스는 다음과 같은 점을 주지시킨다. “지속적인 분열로 ‘이슬람수호전선’(FPI) 같은 지역 조직,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와 필리핀 간의 조직망에 속한 이념가 및 테러리스트로 구성된 군사조직이 점차 약화됐다. 인도네시아에서 폭력을 사용하고 민주주의에 반하는 움직임은 바키르에 대한 동정 여론을 잃게 할 수도 있다. ‘자마 안샤루트 타우히드’(JAT)는 일부 인도네시아인에게 영향력이 있었다.”(5)
지하드의 위협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많이 약화되면서 대부분의 무슬림 종단은 안도한다. 그러나 무하마디야의 많은 신도들과 마찬가지로 압둘 무티도 걱정되는 점이 있다. “이전에 유죄판결을 받은 일부 사람들이 우리 종단에 들어오곤 했다. 우리 종단이 열려 있고 취약한 면이 있기 때문에 같은 식으로 근본주의자까지 우리 종단에 유입될 수 있다.”
일부 지방정부 쿠란법 채택했지만
FPI와 라스카르 지하드 같은 극단주의 조직은 계속 소수 종교인들에게 폭력을 저지른다. 올해 초부터 자바 섬 서쪽과 자카르타 지역에서 28건의 테러가 발생했다. 최근 사건은 지난 9월 12일에 발생했는데, 베카시에서 기독교 신자들을 대상으로 일어났다. 일부 회원은 무슬림으로 간주되는 것을 거부하는 아마디 종파까지도 2008년 6월 9일 무슬림 숭배 위원회가 내린 파트와의 대상이 되었다.
모순되게도 공공 분야에서 이슬람의 역할에 대한 요구가 거세진 것은 1998년 수하르토 체제 붕괴 이후 민주화 과정에서였다. 이때 새로운 2개 정치단체가 부상했는데, ‘초승달 및 별당’(PBB)과 ‘번영과 정의를 위한 당’(PKS)이다. 쿠란 율법을 국법에 도입하려는 수차례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뒤, 보수주의 당들은 2000년 지방분권법의 공표로 주어진 기회를 이용했다. 지방 단위에서 샤리아가 적용될 수 있도록 지역사회에 노력을 기울였다. 이들은 지방 법제에 집중해 인도네시아 500개 지방 중 50개 지역에서 쿠란법(페르다 샤리아)을 채택하게 했다.(6)
30년간의 분리주의 투쟁 뒤 2005년 8월 15일 체결된 협약으로, 특별 독립을 획득한 아체 지역은 쿠란법을 도입했고, 자체적인 이슬람 법원이 있다. 국가 전체적으로 매우 드문 경우지만(다른 지방에서는 그런 자치를 얻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아체 지역은 인도네시아 내에서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다. 수아에디는 “아체 지역의 샤리아 도입은 인위적이다. 이는 충분한 숙고(이즈티하드) 없이 중세 아랍 시대의 법을 21세기에 끼워맞춘 것과 같다”고 말한다. 무하마디야의 압둘 무티조차 회의적인 반응이다. “샤리아 법이 도입된 지 5년이 지났지만 아체 지역에서는 이렇다 할 아무런 발전이 없었다. 이 지역은 무엇보다 경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이제 사람들은 영화를 보기 위해 수마트라로 간다. 왜 아체에서는 이를 금지하는가? 샤리아 법은 종교적 획일주의를 요구하는데, 이는 이슬람 정신과도 모순된다.”
그러나 NU의 부총장인 마시쿠리 압딜라 교수는 “샤리아 법이 도입된 것은 민주주의 과정에서 결정된 일이다”는 사실을 내세우며 반대 의견을 피력한다. 그리고 NU 종단 내에서도 “돌로 쳐 죽이기와 매질 같은 형벌제도에 대해 논쟁이 있는데, 이런 관례가 판카실라에 맞는지 잘 모르겠다”는 점을 밝혔다. 그러나 사실 이는 판카실라에 맞지도 않고, 대부분의 인도네시아인은 오히려 판카실라에 반하는 것이라고까지 생각한다.
종교정당 영향력은 빠르게 약화
많은 인도네시아인에게 샤리아는 모호한 개념이다. 결혼이나 세금, 또는 상속 같은 문제를 ‘신의 계시’라고 여기는 법의 결정에 맡기는 것은 어려운 듯 보인다. 그리고 온건주의자는 범죄에 대한 형벌 선고를 이런 법원에 맡기기를 원치 않는다.
자카르타에서 20여km 떨어진 탄제랑에서는 샤리아 법을 여성에게 적용해 저녁에는 여성 혼자 외출하지 못하도록 한다. 이를 어기면 성매매로 기소된다. 수마트라의 서쪽인 파당에서는 무슬림 여부와 상관없이 공립학교의 어린 소녀 는 모두 베일을 착용해야 한다. 그러나 안달루스주 대학의 역사 및 인문학 부장은 자신의 딸은 학교 바깥에서 히잡을 전혀 착용하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이슬람법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으로 유명한 술라웨시 남쪽 마카사르 지역도 10여 년 전부터 샤리아 법을 비준하기 위해 많은 시도를 했다. 무하마디야 지소 소장이 2000년에 창설한 ‘이슬람법적용위원회’(KPPSI)의 사무총장인 H. M. 시라주덴의 관점에서 그 목적은 ‘이슬람 국가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이슬람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아체 지역은 술라웨시 지역민에게 ‘같은 법을 도입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2002년 지방선거에서 선거권자의 91.11%가 샤리아 법에 찬성했다. 같은 해 불루쿰바 지자체(카부파텐)는 술을 금지했다. 2003년에는 무슬림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여성은 공공서비스를 이용할 때 히잡을 착용하도록 했고, 자카트(빈곤층을 위한 기부금)를 걷기 시작했다. 2006년에는 아랍 문자 교육을 의무화했다. 시라주덴은 고조된 어조로 말했다. “나는 예언자 시대 때와 같은 헌법을 다시 재현하고 싶다. 이슬람 왕국의 가장 위대한 순간은 샤리아 법을 도입한 때다.”
마카사르대학 학장이자 KPPSI 회원인 아부 하미드 교수는 이같은 극단적인 비전을 완충하려고 한다. 그는 불루쿰바의 새로운 자치단체가 의무조항을 선택조항으로 바꾸는 등 개혁 흐름을 완화한 데 만족을 표시한다. 이런 관점은 현재 인도네시아 전체에서 지배적인 흐름이 어떤지를 반영한다. 즉, 지역 단위의 샤리아 법 도입을 중단하고 이미 법제가 도입된 곳에서는 완화하려는 경향이다. 페르다 샤리아는 2003년 그 개수가 정점에 달했다. 2007년에는 현저히 줄어들고, 2009년 4월 국회선거 이후 판도가 바뀌었다.(7)
그러나 서방 언론은 같은 해에 이어진 7월 8일의 공화국 대통령 선거(독립 이후 두 번째로 치른 대선)를 포함해 이런 선거 결과를 거의 보도하지 않았다.(8) 그렇지만 종교 정당의 득표율이 2004년과 1999년의 40%에서 25%로 크게 떨어진 점은 주목할 만하다. 선거에서 3개의 주요 세속 정당이 크게 득표했다. ‘정의 및 개발을 위한 당’(AKP)을 모델로 한 PKS만이 다른 종교 정당의 표를 잠식하면서 7.88%의 득표로 원내에 진입했다. 6월 의회에서 이 정당은 이슬람을 대변하는 입장을 포기하고, 다원주의와 개방 이미지 제고를 위해 “비무슬림에게도 곧 개방하겠다”고 약속했다. 여성운동가인 카말라 샨드라키라나는 낙관적으로 본다. “우리는 마침내 지난 10년간 테러리즘, 쓰나미, 경제위기, 조류독감 등 혼돈의 터널을 거의 빠져나왔다. 인도네시아는 역동적인 국가고, 우리 사회는 발전하고 있다. 판카실라의 옹호자들도 젊은이의 상상을 자극할 수 있는 이슬람화에 대해 새로운 대안을 제안할 수 있게 되었다.”
글•웬디 크리스티아나센 Wendy Kristianasen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런던
번역•박지현 sophile@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국제단체 남극보호연합 한국지부 담당관. 주요 역서로 <녹색희망> 등이 있다.
<각주>
(1) Adam Schwarz, <A Nation in Waiting: Indonesia’s Search for Stability>, Talisman, 2008 참조. Benedict Anderson, ‘Exit Suharto: Obituary for a Mediocre Tyrant’, <New Left Review>, 런던, 2008년 3~4월호(50호).
(2) 2000년의 집계에 따르면 국민 88.2%가 자신을 무슬림으로 생각하며 5.9%는 개신교, 3.1%는 가톨릭, 1.8%는 힌두교, 0.8%는 불교로 나타났다. 0.2%는 전통신앙과 기독교의 다른 종파와 유대교를 포함한 ‘다른 종교’에 속했다.
(3) 무함마드 압두: 19세기 후반기 이집트의 사상가이자 법률가. 이슬람 교리와 교육을 개혁한 인물.
아불 알라 마우두디: 종교 율법의 엄격한 적용을 옹호하는 인물이자 1941년 인도에서 ‘자마티 이슬라미’를 창설했다. 그는 인도 남쪽에서 이슬람 국가 건립을 주창했다.
(4) ‘Nahdlatul Ulama and the Struggle for Power within Islam and Politics in Indonesia’, Institute of Southeast Asian Studies, Singapore, 2009 참조.Greg Barton, Greg Fealy, ‘Nahdlatul Ulama, Traditonnal Islam and Modernity in Indonesia’, Monash Asia Institute, Clayton(호주), 1996.
(5) ‘Indonesia: Jihadi Surprise in Aceh’, <Asia Report> 189번. Crisis Group, 2010년 4월 20일자. ‘Indonesia: The Dark Side of Jama’ah Ansharut’, <Asia Briefing> 107호, Crisis Group, 2010년 7월 6일자. www.crisisgroup.org.
(6) Robin Rush, ‘Regional Sharia Regulations in Indonesia: Anomaly or Symptom?’ 참조. Greg Fealy, Sally White ‘Expressing Islam:Religious Life and Politics in Indonesia’, Rogin RInstitute of Southeast Studies, Singapore, 2008.
(7) Robin Rush, ‘Regional Sharia Regulations in Indonesia: Anomaly or Symptom?’ 참조. Greg Fealy, Sally White, ‘Expressing Islam:Religious Life and Politics in Indonesia’, Rogin RInstitute of Southeast Studies, Singapore, 2008. http://asiafoundation.org.
(8)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민주당)가 1차 선거에서 60%를 얻어 당선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