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적 대선까지 걸린 10년
코트디부아르의 새 출발

2010-11-05     미셸 갈리

마침내 코트디부아르에서 대통령 선거(1차 투표는 지난 10월 31일 치렀다)가 열린다. 지난 5년 동안 내전과 선거인명부를 둘러싼 분란으로 수차례 투표가 연기됐다. 물론 대선일 발표가 모든 문제의 해결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지만 대선으로 정권과 민주주의 안정화의 길이 열리고 있다.

“틀림없이 10월 31일이다.” 지난 8월 6일 야무수크로의 호화찬란한 펠릭스우푸에브와니 평화재단에서, 로랑 그바그보 대통령은 코트디부아르의 대선 재개 소식을 전했다. 코트디부아르에서는 2005년부터 선거인명부 확정을 둘러싼 코트디부아르인의 정체성(1) 논란과 2002∼2007년 내전의 후유증 등으로 대선 연기가 거듭됐다. 가장 최근에 치러진 2000년 선거는 유혈사태로 치달았고, 아비장의 민중시위로 벼랑 끝에 몰린 군사정부는 마침내 그바그보의 대선 승리를 인정하기에 이른다.(2) 이번 대선 소식은 갑작스럽게 보일지 몰라도 실은 대내외적으로 펼쳐온 부단한 평화 추진 과정의 산물이다.

“틀림없이 10월 31일이다.”

40년간이나 권좌를 지킨 ‘독립의 아버지’ 펠릭스 우푸에부아니가 1993년 서거한 뒤, 코트디부아르에는 그의 ‘승계자’인 앙리 코낭 베디에가 이끄는 과도정부가 들어섰다. 하지만 이 최악의 정부는 1999년 사상 최초로 군사정부가 정권을 잡는 빌미만 제공했다. 2002년 9월, 마침내 알라사네 드라마네 우아타라의 고향인 코트디부아르 북부에서 반정부 저항운동이 개시된다. ‘코트디부아르인의 정체성’에 관한 법률에 위배된다며 우아타라의 대선 출마를 금지한 것이 화근이었다. 반정부운동은 코트디부아르를 분단 상태로 몰아넣었다. 반군이 이웃 국가인 부르키나파소의 지원을 받은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외국 기관, 특히 프랑스가 주기적으로 용의선상에 오르지만, 이 전쟁의 정확한 배후세력이나 자금줄은 밝혀지지 않았다.

정치 상황을 타개하는 중요한 열쇠 중 하나인 프랑스와의 관계는 양국 정부의 노력에 힘입어 한결 개선됐다. 과거 양국 관계가 악화 일로로 치달은 배경에는 자크 시라크 대통령과 그바그보 대통령의 불화가 자리하고 있다.(3) 2004년 11월 코트디부아르 전투기 2대가 부카케 프랑스 군사기지를 폭격하면서 양국의 갈등은 최고조에 달한다. 옛 종주국인 프랑스가 코트디부아르 사태를 중재하기 위해 파병한 프랑스 주둔군은 헬리콥터와 장갑차의 공격으로 반격에 나섰고, 이로 인해 사망자 63명과 부상자 1천 명 이상이 발생했다.

하지만 과거 그바그보 대통령이 프랑스의 신경제식민주의를 맹렬히 비난하며 드리워졌던 냉전의 기운이 걷히고, 오늘날 양국 사이에 교역이 재개되고 있다. 2002년 코트디부아르를 빠져나간 프랑스 피난민 8천 명도 되돌아왔다. 양국은 상호 사면에 관한 협정을 협상 중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이번 대선전의 전산 업무를 프랑스 기업 ‘사젬’이 지휘하고, 대통령 이미지 홍보를 광고회사 ‘유로 RSCG’가 맡은 사실이다. 그바그보 대통령은 대선일 발표 이후 여론조사도 ‘소프르’(이 회사의 모든 조사 결과는 그바그보의 승리를 점치고 있다)에 맡기고 있다.

총리가 된 반군 지도자

코트디부아르 내부도 위태롭게나마 균형을 회복하고 있다. 2007년 와가두구(부르키나파소) 평화협정이 체결됐고, 덕분에 집권 여당에서 문민 야당, 반정부 야당 등을 전부 아우르는 대통합 정부가 오랫동안 정착했다. 반군 지도자인 기욤 소로는 차기 대선 출마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총리직을 거머쥐었다.(4) 일각에서는 그바그보가 임기를 마친 뒤 ‘차기 승계자’에게 정권을 이양하려는 사전 포석으로 비밀협정을 맺었다고 추정한다. 또 (카카오 수입이나 석유 사업권 등) 자원 이익을 나눠가지는 대가로 연합이 성사됐다는 비판도 있다. 각종 부패 스캔들이 터져나왔다. 그 사이 반군의 지역사령관은 통제 불가능한 ‘작은 폭군’으로 군림하며 뻔뻔스럽게 민중의 돈을 뜯었다.

아래로부터의 개혁 바람

하지만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코트디부아르 시민은 친반군·친정부 할 것 없이 부패 관행에 저항했다. 그동안 공무원이나 심지어 법원 직원까지 원칙적으로 무료인 서비스에 대해 금품을 요구해왔다. 한 예로 자녀의 취학 신청을 위해 출생증명서를 떼려는 농민은 1만~5만 CFA프랑(약 15~75유로)을 내야 하는 게 다반사였다. 하지만 오늘날 마을 주민이나 학식 있는 젊은이, 은퇴한 지식인, 고향으로 돌아온 실직자가 지도부의 부정 축재와 부정부패 관행에 맞서고 있다.

그뿐 아니라 아프리카 각국의 관계가 안정되면서 이주민이나 외국인에게 서아프리카인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을 뼈대로 한 협상이 급물살을 타고, 선거인명부를 둘러싼 논란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게 됐다. 더욱이 요즘은 과거만큼 인종 차이가 중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 물론 주요 후보자 세 명이 모두 일정한 인종 블록(그바그보는 크루족, 베디에는 아칸족, 우아타라는 디올라족)을 형성하고 있지만, 이제 그런 식의 분석으로는 코트디부아르의 정치 판도를 제대로 읽어낼 수 없다.

인구 500만 명의 거대도시 아비장의 유권자가 선거 판도에 미치는 영향도 고려해야 한다. 아비장에서는 ‘인종’ 결정론이 힘을 잃는 대신, 계급투표에 유리한 토양이 마련되고 있다. 사회학자 데디 세리에 따르면, 아비장 전체 성혼의 3분의 1이 인종을 초월한 결합(코트디부아르인과 서아프리카인의 결합)이다.(5) 그바그보 대통령은 이번 대선에서 북부와 마찬가지로 남부에서도 대대적인 규합을 가능하게 할 코트디부아르 시민의 ‘호모폴리티쿠스’로서의 면모에 기대를 걸고 있다. 또한 시민들의 ‘현상 유지 성향’과 국가기관의 자발적인 개입, 언론 통제, 적의 분열, 심지어 돈벌이 논리에까지 희망을 걸고 있다.

힘 잃어가는 인종 결정론

반대로 야당은 전체 유권자의 60%에 해당하는 북부와 동부 지역의 표를 얻기 위해 ‘인종 투표’를 기대한다. 또 그바그보로 인해 문제가 생겼지만 과거 프랑스에 짭짤한 수익을 안겨준 양국의 전략적 연합 관계에 향수를 지닌 이들, 즉 프랑스 우파 정당이나 재계와의 연대도 희망한다. 이런 맥락에서 탄생한 것이 이른바 ‘우푸에티스트 연합’이라 부르는 기묘한 연합정당이다. 2005년 파리에서 호화로우면서도 우스꽝스러운 행사를 통해 대중에게 소개된 이 정당은 우아타라와 베디에의 지지자들의 연대로 구성됐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베디에는 우아타라의 대선 출마를 좌절시키려고 ‘코트디부아르인의 정체성’이라는 개념을 창안(혹은 적용)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번 선거 1차 투표에서 그바그보가 탈락한다면, 두 야당 인사 사이의 표 이동으로 한 차례 몸살이 예상된다. 대부인 블레즈 콩파오레 부르키나파소 대통령의 영향도 변수로 남아 있다. 그바그보에게 유리하게 ‘국가 화합’을 위한 선거를 지지할 수도 있고, 대다수의 사헬인이나 북부인(부르키나파소 출신 이민자 포함)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는 우아타라 쪽을 선택할 수도 있다.

따라서 현재로선 어떤 시나리오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유혈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고, 전과 비슷한 규모로 대대적인 도시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다. 벌써 유엔코트디부아르평화유지군(ONUCI)은 추가 병력 500명을 파병했고, 그바그보 대통령도 향후 소동을 일으키는 자는 “엄하게 다스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많은 전문가들이 “현재 형식적으로 무장해제를 한 반군도 여전히 통제 불가능한 요소”라고 말한다. 퇴역군인의 사회 편입이 어려운 현실이 이런 우려를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아직은 점칠 수 없는 미래

정부가 유권자 명단을 작성하는 데 뜸을 들여온 것은 국적이나 선거인명부 등록과 관련한 선거 부정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더욱이 텃밭이나 다름없는 북부 지역에서 반군은 호적 문서를 대대적으로 파기하고 있다. 법률 자문에서 국제적인 물자 지원까지 선거 비용으로만 약 400억 CFA프랑(약 6천만 유로)이 소요되는 등 코트디부아르 대선전은 세계에서 가장 막대한 비용을 쏟아부은 선거로 기록되고 있다. 또 야당이 주체가 된 선거관리위원회(아프리카 사상 최초다)는 2000년에 작성된 선거인명부를 단순히 개정하는 대신 완전히 새로 작성하자고 주장한다.(6)

민주주의 재정착에 필요한 건 희망

따라서 선거를 둘러싼 논란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미 10월 30일이 다가올수록 여러 가지 억측이 흘러나왔다. 2001년 시의회 선거와 마찬가지로 집권당 지지자들의 선거 등록률과 참여율이 저조할 것이라는 추측도 있고, 반대로 우아타라 지지자들이 타 종족을 선거에 참여시키려 혈안이 될 것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외국인 군인은 출신 인종이 다양하지만, 그럼에도 ‘편파적’이라는 추측이 무성하다.

우푸에부아니의 서거 이후 점진적인 민주화와 언론 다양성, 그리고 현재와 같은 선거 분위기에서 어느 때보다 코트디부아르 시민들은 자유로운 발언권을 획득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때때로 편집증적인 과잉 해석이 난무할 수 있다. 과거 소련의 권력을 연구하는 ‘크렘린학 학자’가 있었다면, 오늘날에는 저명한 지식인이나 언론인이 고삐 풀린 언론의 1면 기사를 분석하며 ‘제목학’에 열중한다. 특히 <라디오 프랑스 인터내셔널>(RFI) 방송(‘라디오 프랑스 인톡시케이션’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을 분석하며 프랑스의 은밀한 공모자를 색출하기에 바쁘다. 사실 그바그보가 과거 프랑스 기업이 주류를 이루던 시장을 전세계에 개방하려고 했던 전례를 떠올린다면, 그바그보 정권이 비단 프랑스에만 친구가 있는 것은 아님이 분명하다.

모두들 남아프리카의 후기 아파르트헤이트 모델에 따라 향후 대선을 무탈하게 치르고 나면, ‘평화가 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역경제의 원동력이 돼온 이 서아프리카 국가에서 선거를 통해 민주주의가 재정착하리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시민들이 현 사태에 지쳐 있다는 게 더 큰 이유일지 모른다(코트디부아르인은 “이제 지쳤다”는 표현을 입에 달고 산다).

글•미셸 갈리 Michel Galy
정치학자. 주요 저서로 <세계의 전쟁과 서아프리카 사회>(2007) 등이 있다.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각주>
(1) 코트디부아르인에 한해 선거에 후보로 출마하거나, 단순히 투표에 참여할 수 있도록 국민의 정체성을 제한했다.
(2) ‘코트디부아르 국가 통합을 시도하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7년 12월호.
(3) 프랑스-코트디부아르 갈등에 관한 전모는 <아비장 쉬르 센여 안녕! 코트디부아르 분쟁의 내막>을 참조할 것, 오트르탕 출판사, 파리, 2008.
(4) 블라디미르 카뇰라리, ‘코트디부아르 학생단체들, 잃어버린 세대의 광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9년 11월호.
(5) 데디 세리, <코트디부아르의 변혁>, 아르마탕 출판사, 독립 50주년 총서, 파리, 출간 예정.
(6) 아우구스타 콘치글리아, ‘이민의 주효한 역할’,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7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