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량 학살은 이유를 불문하고 죄악"

2008-12-01     세르주 알리미 | 프랑스판 발행인

대량 학살·인종 청소, 조사·처리 과정의 '3 가지 오류'
잔혹성, 정치·사회적 여건, 이념 등에 따라 해석 달라
 

20세기 지구상에서 대량 학살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약 2억 명이다. 끔찍한 결과다. 당연히 이에 대해 분석하고 알아봐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인지 역사학자뿐만 아니라 법률가, 사회학자, 정치학자들도 20세기가 다 가기 전에 대량 학살 실태에 대해 나름의 조사를 벌인 것이다. 그러나 조사 과정에서 세 가지 오류를 범하고 있다.
 
 대량 학살에도 등급이 있나?
 첫째, 어떤 학살이 더 끔찍한지 등급을 매기려는 오류를 범한다. 학살의 가해자들이 추구했던 목표가 무엇이고 희생된 사람들이 몇 명이며 학살 수법이 무엇이고 역사적인 배경이 무엇인지에 따라 인종청소, 반인륜 범죄, 전범, 기타 대량 학살로 나누어 등급을 매겼다.
 이렇게 따진다면 1941년과 1945년 사이에 나치 독일이 유럽에서 자행한 유태인 학살이 적어도 서구 사회에서는 만장일치로 범죄 중의 범죄로 꼽힐 것이다. 나치의 유태인 학살로 인해 유럽에 있던 유태인 900만 명 중 6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특히 1960년대부터 해마다 증언, 영화, 연구를 통해 나치의 유태인 학살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매번 증명되고 있다.
 나치의 유태인 학살 연구에 파묻혀 다른 범죄 이야기는 모두 묻혀 버릴 정도가 됐다.
 그렇다고 나치의 유태인 학살을 계속 조사하고 기억을 환기시키는 일을 두고 뭐라 그럴 수는 없다. 중요한 건 역사학자들이 왜 다른 학살사건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갖는 것이냐 하는 점이다. 이미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거나 제대로 알려지지 않거나 은폐된 학살사건도 많다. 심지어는 억울하게 정당화 되는 학살사건도 많다.
 그런데 역사학자들이 인종청소 문제를 다룰 때는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와 이데올로기적인 의도가 숨겨져 있기도 하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끔찍한 범죄로 낙인 찍힌 인종 청소는 이런 저런 명분으로 이용된다. 특정 정권이 인종 청소를 자행했다는 사실이 증명되면 이러한 범죄에 대해 가차 없이 비판하고 끊임없이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유가족들에게 용서할 권리를 준다. 반대로 해당 정권이 인종 청소가 아니라고 반박하면 이런저런 정상 참작이 이루어지고 결국 이 사건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묻혀 버린다.
 
 사회학적·중립적 개념의 연구 등장
 두가지 상황을 비교해보자. 하나는 함부르크에 살던 유태인 가족으로 가스실에서 사망한 후 아우슈비츠 수용소 화장터에서 시신이 처리되었다. 또 하나는 이웃에 사는 독일인 가족으로 영국과 미국 연합군이 무자비하게 터뜨린 폭탄에서 나오는 뜨거운 공기에 질식한 후 결국 대피소에서 새까맣게 타죽고 말았다. 두 가지 상황에서 전자의 상황이 후자의 상황보다 더 끔찍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후자의 상황에 등장하는 독일인 가족은 그래도 인종 청소는 당하지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유태인 가족을 말살한 나치 독일과 독일인 가족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영·미 연합군은 물론 달리 취급해야 한다. 하지만 희생된 유태인 가족이 느꼈을 공포, 역시 목숨을 잃은 독일인 가족이 느꼈을 공포, 이 두 가지 공포 중 어느 것이 더 끔찍하다고 등급을 매길 수 있는 걸까?
 나치즘으로 대표되는 인종 청소는 사례로 많이 이용되었다. 흔히 구 소련의 스탈린주의를 나치즘과 동일시하여 구 소련의 이미지를 끔찍하게 만들기도 하고, 중국의 모택동주의를 나치즘과 비교하여 모택동이 지배하던 중국의 이미지를 크게 절하시켰다. 이 뿐만이 아니다. 기존의 질서를 철저하게 파괴하던 각종 혁명운동은 결국 전체주의로 변질되어 인종 청소의 싹을 키웠다. 역사학자들이 인종 청소 문제를 거론할 때 누군가에게 이익이 될 수 있다. 특정 의도를 갖고 인종 청소 문제를 자주 언급하면 그 문제는 모두에게 일반적으로 알려진다. 유태인 학살 문제도 그렇다.
 이에 이득을 얻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정치적 혹은 이데올로기적인 목적을 갖고 인종청소 문제가 다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사회학적이고 중립적인 개념을 추구하는 시도도 있었다. 프랑스 학자 자크 세믈랭은 세밀한 분석을 통해 "대량 학살은 목숨과 재산을 노리고 민간인들을 없애버리는 조직적인 과정"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자크 세믈랭은 대량 학살은 타깃으로 삼은 그룹을 복종시키거나, 아예 뿌리 뽑아 버리는 목적을 품고 있다고 말했다. 자크 세믈랭은 대량 폭력에 관한 전자사전1)을 집필하고 편찬한 당사자이므로 모호한 함정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입장 역시 문제가 전혀 없다곤 할 수 없다.
 
 백년전쟁과 나치, 두 학살 사건…
 둘째, 학살 사건 관련 희생자 및 책임자들을 임의로 선택하여 다루는 게 문제다. 우선 다른 시기보다는 20세기를 집중적으로 조사하게 된다. 20세기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전체주의  정부들이 대거 탄생하고 기술과 관료주의가 팽배해졌기 때문에 끔찍한 대량 학살이 그만큼 많이 이루어졌다는 생각에서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20세기의 마지막 인종 청소 사건은 르완다에서 일어났다. 르완다의 지배층 투치족이 피지배층 후투족에 대해 자행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르완다는 농업이 발달하고 기독교가 많이 퍼졌으며 기술은 발달하지 않은 곳이다. 1994년 4월에서 6월까지 3개월 동안 무려 9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사건이었다. 참고로 19세기에 일어난 마지막 인종 학살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수는 2억 명 정도다. 당시 전 세계 인구 중 2%에 해당하는 수치다. 이처럼 이전 시기에 일어난 인종청소 사건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수치를 하나하나 비교해 보는 방법도 있다.
 실제로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대량 학살은 세상을 피로 물들였다. 가해자와 희생자도 언제 어디서나 강자와 약자다. 이는 다음 사건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입증된다.
 1370년 7월 19일 리모주 새벽 6시. 주민 3천 500 명이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을 보호하던 성벽이 뚫리자 영국 국왕 에드워드 3세의 아들 에드워드 블랙('흑태자'라고도 불렸다) 왕자가 이끄는 군대가 물밀듯이 공격해 왔다. 에드워드 블랙 왕자는 남자건 여자건 어린이건 모두 죽여 버리라고 명령했다. 리모주의 주교 장 드 크로의 배신에 대한 보복이었다. 무자비한 학살이 이루어지면서 리모주는 피와 폭력으로 얼룩졌다. 에드워드 블랙 왕자는 군대를 대성당까지 진격시켰다. 대성당에는 300 명 정도의 주민들이 피신해 있었다. 대성당 안에서도 폭력과 학살이 이루어졌고 도시는 불에 탔다. 백년 전쟁이 낳은 희대의 학살자 에드워드 블랙 왕자는 영국 역사상 가장 잔인한 인물 중 하나였다.

 


 이제 1944년 6월 10일 오후 2시 경. 리모주에서 20킬로미터 떨어진 오라두 쉬르 글란. 나치 SS요원들이 마을을 둘러싸며 통행을 막고 있었다. 마침 토요일이고 장이 서는 날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독일군을 자주 본 적도 없었다. SS요원들은 집집마다 수색하고 장터에 모인 마을 주민들을 총의 개머리판으로 때리고, 군화발로 차며 쫓아냈고 여성과 아이들을 성당에 가두었다.
 마을 남자들은 다섯 그룹으로 나뉘어졌다. 그룹 하나 당 30~70명 씩이었다. 이렇게 다섯 그룹으로 나뉘어진 남자들은 독일군의 지시에 따라 마을에서 가장 큰 건물들로 향했다. 건물마다 입구에는 기관총을 든 SS요원들이 있었다. SS요원들은 마을 남자들을 총살했으며, 시체 위에 짚, 나뭇단, 발화 가루를 뿌리고는 불을 붙였다. 그리고 SS요원들은 현장에서 흩어져 태연히 술을 마시고 라디오를 들었다. 저녁 6시 30분 경. 학살 현장에서 겨우 살아남은 마을 남자들이 숲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이들의 귀로 여자들과 아이들이 지르는 비명 소리가 들려 왔다. 성당에서 나는 소리였는데 여자와 아이들이 살려달라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SS요원들이 연막탄을 터뜨렸고 성당 창문을 통해 수류탄을 던졌다. 그런 다음 성당 안으로 들어가 움직이는 사람은 무조건 총으로 쏴 죽였다.
 만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SS요원들은 여자와 어린이 시체 240구 위에 짚, 나뭇단, 의자를 던지고는 불을 붙였다.
 독일군은 조직적인 수색 작업을 벌여 숨어 있던 사람들, 자리보전하고 있던 병자와 노인들을 모두 찾아내었다. 저녁 7시 30분 경. 마을은 전부 화염에 휩싸였으며, 독일군은 650명의 희생자들을 뒤로 한 채 술과 음식을 먹으러 현장에서 멀어져 갔다.
 또 다른 운명의 아이러니도 있다. 전범인 하인츠 람머딩 SS 중장은 유럽 곳곳에서 악행을 벌였는데, 25년 뒤에 재판도 받지 않고 병원 침대에서 편히 세상을 떠났다. 희생자들은 대부분 로렌 지방에서 피신해 온 사람들이었는데, 이들 가운데는 어린이 42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가해자인 SS요원들은 모두 알사스 출신의 청년들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나치 독일에 징집된 프랑스 청년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나치 독일에 병합된 두 프랑스 마을 출신이었다. 그로부터 10년 뒤 이들 SS요원 프랑스 청년들은 재판을 받았고 결국 사면을 받았다.
 
 역사 이래 반복된 대량학살…
 1370년에 에드워드 블랙 왕자가 단행한 대량 학살과 1944년에 나치 독일이 자행한 대량 학살은 6세기란 기간 차이가 있고 20킬로라는 거리 차이가 있긴 해도 모두 프랑스에서 벌어졌으며 상황도 놀랄 정도로 아주 비슷하다. 가해자도 희생자도 학살 방식도 모두 비슷하다. 이 두 건의 대량 학살 사건은 모두 무방비의 민간인들이 포위되어 조직적으로 학살당하고, 여자와 어린이들이 성당에서 화염에 휩싸였고, 군인들은 약탈, 방화, 학살을 일삼았지만 죄 값을 치루지 않은 점도 똑같다.
 이 두 건의 역사적인 비극은 그 후로 세대가 바뀔 때마다 인용되어 일반인들에게 아주 잘 알려져 있다. 두 사건 중 한 사건은 14세기, 또 하나는 20세기에 일어났으나 시간을 두고 비슷한 상황을 보여주는 역사의 반복이다. 어떤 사건이 더 끔찍하다고 정할 수 있을까?  오라두 쉬르 글란에서 참극이 벌어지던 바로 그 날, 헝가리의 유태인들도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수용소에서 끔찍하게 학살되었다. 한편 1370년 아시아에서도 참극이 벌어졌다. 몽골제국의 정복 군주 티무르는 인간의 해골 수만 개로 피라미드를 지었을 만큼 끔찍한 학살로 이름을 날렸다. 30년 동안 티무르의 손에 희생된 미간인은 수 백 만 명이 넘었다. 또한 티무르는 페르시아, 인도, 소아시아, 중앙 아시아, 중국까지 진출해 도시 수십 곳과 마을 수천 곳을 잿더미로 만들고 문화를 파괴했다.
 핵무기를 제외한 대량 살상무기로 알려진 생화학 무기도 20세기의 전유물은 아니다. 우물에 독을 타는 방법은 예전부터 자행되어 왔고, 정복자들은 오랜 포위생활로 배고픔에 허덕이는 도시 주민들을 쓸어버리기 위해 전염병을 이용했다. 역사적으로 대단히 잔혹한 인종 학살로 알려진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 학살의 경우 유럽인 정복자들이 퍼뜨린 세균이 원인이었다.
 1492년에서 1650년까지 1세기 반 만에 신대륙의 원주민 90%가 사라져 버렸다. 정복자들이 가져 온 천연두, 홍역, 감기, 폐렴, 설사, 황열병, 말라리아 등과 같은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신대륙의 원주민의 수가 5천~6천만 명에서 500~600만 명으로 급감하게 된 것이다. 1천 400만 명 내지 2천만 명이었던 멕시코 원주민은 100만 명으로 줄어들었고 600~900만 명이었던 페루의 원주민은 60만 명으로 줄어들었으며 300만 명이었던 서인도 제도의 원주민은 완전히 씨가 말라 한 명도 남아 있지 않다.
 북미 대륙의 원주민들도 훗날 똑같은 재앙을 맞아 19세기 말에는 400만 명이었던 원주민의 수가 4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이 같은 원주민의 수치 변화는 부다 에트마가 저서 <범죄와 사죄. 식민 지배의 과거를 앞에 둔 서구>에서 밝힌 것이다. 세균을 이용한 학살은 미리 계획하고 훈련한 방법은 아니었다. 우연히 식민 지배자들은 세균을 사용하면 정복이 더욱 쉬워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원주민의 운명은 늘 비참했다. 콜롬버스와 그 후임자들과 만나게 된 원주민들은 자신들에게 닥칠 재앙을 예상하지 못했다.

 대량학살을 선정하는 기준은 역사만이 아니라 지리, 정치, 문화이기도 하다. 수천 년은 아니더라도 수 세기 동안 인류의 2/3는 아시아 대륙에 살고 있다. 이렇게 많은 인구가 모여 사는 대륙이니 당연히 그 못지않게 대량 학살도 많이 이루어졌다. 중국, 인도차이나 반도, 인도아 대륙, 중앙 아시아, 근동 아시아, 중동에서도 대량학살이 있었지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일어난 대량 학살이 조금씩 알려지고 있다.

 난징 대학살,'흑인노예' 문제
 아시아 대륙에서는 왕조 전쟁, 정복 전쟁, 종교 전쟁, 내전, 민간 봉기가 끝없이 일어났다. 20세기에 일어난 중일 전쟁으로 중국에서 민간인과 군인 모두 합해 2천만 명 이상이 희생되었다. 묻혀 버리거나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대량 학살 사건이 조금이나마 밝혀지고 있다.
 가령 난징 대학살은 미카엘 프라잔이 <잊혀진 기억과 부정 사이에서>란 저서를 통해 다루고 있다. 난징 대학살을 증언해 줄만한 사람들을 찾기가 힘들었다. 중국인이든 아니든 난징대학살을 다루는 소수의 연구자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지난 수십 년 동안 아프리카인, 미국계 흑인 작가, 서인도 제도 출신의 작가, 서구의 대학 교수와 역사가들이 주축이 되어 이루어진 많은 연구를 통해 유럽 출신 백인 식민 지배자들이 얼마나 잔혹한 짓을 일삼았는지 서서히 밝혀졌다. 대표적인 잔악한 행위로 흑인 노예제도가 있었다. 정확한 추정은 어렵지만 14세기 중반부터 19세기 말 사이에 적어도 아프리카인 1천 100만 명 내지 1천 200만 명이 대서양 무역을 통해 노예로 팔려나간 것으로 보인다. 이 중 2/3에 해당하는 수의 흑인 노예는 18세기에 팔려나갔다. 약 50만 명의 남녀, 어린이 흑인들이 노예 상인들에게 붙잡혀 노예선에 태워졌다. 노예선에 태워진 흑인 1천 명 가운데 30%는 초기 몇 달 동안에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납치된 흑인 100 명 가운데 50명은 그 순간, 혹은 노예선에 갇혀 시장으로 향하는 동안 목숨을 잃었다. 노예 무역으로 인해 적어도 흑인 2천 400만 명이 희생되었다. 19세기부터 활발히 전개된 연구에 힘입어 이 같은 수치가 자세히 밝혀졌다.
 반면 아랍인들이 자행한 흑인 노예 무역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7세기부터 아랍인들은 약 1천 500만 명의 흑인을 노예로 잡아간 것으로 보인다. 흑인 노예 1천만 명이 사하라를 거쳐 북아프리카, 오스만 제국으로 끌려갔으며 흑인 노예 500만 명은 인도양을 거쳐 아랍-페르시아만, 인도, 말레이시아로 끌려갔다. 아랍인들이 자행한 흑인 노예 무역으로 흑인 2천 500만 명에서 3천만 명이 희생됐다.
 이 외에도 아프리카 자체 내에서 이루어진 노예 무역도 생각해 봐야 한다. 아프리카 대륙에는 오래 전부터 노예 제도가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노예를 수출하는 일까지 일어나면서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아프리카 내에서 이루어진 노예 제도로 약 1천 500만 명이 희생되었다. 흑인 노예 문제를 다루는 아랍인, 아프리카인 연구자들, 기타 다른 연구자들은 어디에 있는가? 흑인 노예무역 역시 대량 학살 범죄와 마찬가지로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다.
 
 한국전·베트남전 대량학살의 교훈
 또 다른 대량 학살에 대해 알아보자. 20세기 후반에 발발해 가장 많은 희생자를 냈던 두 전쟁이 있었으니 바로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이다.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은 각각 200~300만 명의 희생자를 냈으며, 그 중 대부분이 민간인이었다.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미군의 희생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만, 한국인과 베트남인이 각각 몇 백만 명에 달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또한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 당시 끔찍한 대량 학살이 자행됐으며, 미군이 투척한 폭격으로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사용한 폭탄보다 훨씬 강력한 폭탄이 베트남 전쟁에서 사용되었는데, 많은 베트남인들은 사망하거나 장애를 안고 살아가게 되었다.
 대량 학살 사건에 대해 깊이 조사하지 않으면 가해자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게 되고 희생자들은 억울하게 잊혀지게 된다. 비슷한 대량 학살이 이라크 전쟁에서 일어났을 지도 모를 일이다.
 서구인들은 원주민, 흑인, 유태인, 아랍인, 아시아인들이 열등하다는 인종 차별적인 백인우월주의 사상을 품어왔다. 이 같은 사상을 바탕으로 서구인들은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인종들을 없애거나 굴복시키는 것이 정당하다는 생각을 했다. 서구인들은 대량 학살을 다룰 때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구인이냐 아니냐에 따라 태도가 달라진다. 서구인들이 이 같은 행동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지 의문이 간다.
 셋째, 대량학살을 특별한 주제로 분류하여 실제 사회 및 경제 현실과 연관시키지 않는 오류를 범한다.
 대량학살이란 게 강자가 약자에게, 부자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지배자가 피지배자에게, 권력을 잡은 소수가 다수에게 끊임없이 자행하는 폭력의 과정에서 간혹 나타나는 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인류 역사의 비극이 아닌가 하고 단순히 생각해선 안된다. 이렇게만 생각하고 넘어간다면 필요한 연구를 제대로 하지 않게 되어 가해자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고 피해자들을 잊게 된다. 그렇게 되면 피해자들은 정신적, 물질적으로 입은 피해에 대해 보상을 받기도 어려워진다.
 대량 학살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대량 학살에서 나타나는 폭력은 계속 이어져 살아남은 사람들에게까지 고통을 준다. 수 십 년 동안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겪어 온 상황은 상징적인 존재가 되고 있다. 여전히 존엄성과 정의를 가혹하게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다.
 역사학자들이 어떤 대량 학살이 더 끔찍한지 등급을 매기고 대량 학살을 선택해서 다루며 현실과 연결하지 않고 대량 학살을 특별한 문제로만 다룬다면 폭력적인 대량 학살의 역사는 한낱 이야깃거리로 전락하게 된다. 기껏 "오직 자유민주주의와 시장만이 인종 청소와 기타 대량 학살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수 있다."란 메시지나 전하는 이데올로기적 수단으로 전락한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만으로 인종 청소와 대량 학살을 방지할 순 없는 것이다.

 번역 | 이주영 ombre2@ilemonde.com *

강간후 배를 가르고, 목을 베고…
일본군의 난징 대학살, '희대의 살육극'

미카엘 프라잔 | 언론인

 "난징이 함락되던 초기에 소규모 일본군 부대가 '레지스탕스'가 숨어 있는 가정을 찾는다며 거리를 이 잡듯이 뒤졌다. 그 과정에서 여성들은 일본군들에게 잔인무도하게 강간을 당하고 고문을 받았으며 사지가 절단되었다. 그 중엔 배를 갈려 도륙된 여성들도 많았다. 이렇게 희생된 여성들의 시신에는 총검에 찔린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정말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함을 보여주는 자국이었다.
 희생된 여성들과 한 지붕에 사는 가족들은 증거 인멸을 위해 바로 처형되었다. 15세에서 45세까지2의 남성들은 체포되어 100여 명씩 죽 늘어서서 무릎을 꿇고 등 뒤에 양손을 묶인 채 일본군 앞에 있었다. 앞에 선 일본군들은 이들 남성들을 군검으로 한 명 한 명씩 목을 베거나 총살했다. 가옥들은 철저히 약탈되었고 불에 탔다. 성벽 밖에서는 대조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한 쪽에서는 일본군 장교들이 참석한 가운데 승리를 축하하는 의식이 거행되었다. 반면 다른 쪽에서는 일본군에게 총살될 20만 명의 사람들이 양쯔강변에 모여 있었다. 시신을 묻을 구덩이가 충분하지 않으면 시신은 양쯔강에 던져졌다.

 

범죄와 사죄

부다 에트마 | 언론인

 "과거 식민지 시대를 경험한 사람들이 전 세계 인구 중 2/3 이상을 차지한다. 여기에는 식민 지배를 했던 나라 출신도 있고, 반대로 식민 지배를 당한 적이 있는 국가 출신도 있다. 식민 지배는 16세기부터 시작되었다.(중략) 아메리카 대륙과 태평양 지역에서 식민지가 건설되었고 신대륙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인력을 차출하기 위해 흑인 노예무역이 이루어졌으며 아시아와 아프리카가 식민 지배를 받으면서 원주민 8천~9천만 명이 사라졌다.(중략) 식민 지배 과정에서 목숨을 잃거나 강탈을 당하거나 노예로 전락하거나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은 피해자들이 나타났다. 식민 지배는 오늘 날 세계의 불평등을 가속화시켰고 선진국과 후진국으로 갈라져 그 격차가 더욱 심해졌다. 과거에 이루어진 부당한 일에 대해 사죄를 요청해야 잃어버렸던 공평한 기회를 찾을 수가 있다.
  번역 | 이주영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전직 에디터, '세계화 관측소'창립 멤버

 

1)대량폭력에 관한 전자사전 주소 - http://www.massviolence.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