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대륙의 예외적 민주국가
소말릴란드의 작은 꿈

2010-11-05     제라르 프뤼니에

대선에서 패배한 하산 다히르 리얄레 카힌 소말릴란드 대통령은 “모하메드 아메드 시라뇨 대통령에게 엄숙하게 정권을 승계한다”고 선언했다. 1991년 독립을 선포한 소말릴란드는 현재까지 국제사회에서 공인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여러 선거를 평온한 분위기에서 치르고 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다.

지난 6월 26일 소말릴란드의 선거는 검은 대륙이 과거 수십 년 동안 체험한 선거 중 가장 민주적이었다.(1) 이 얼마나 놀라운 대조인가! 소말리아 역사가 이런 역설의 대부분을 설명해준다.

19세기 말 대영제국이 소말리아 북부 지역을 점령했을 때만 해도 제국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전략적인 홍해 항로에 프랑스의 접근을 차단하고, 아덴 인근 사막 지역에 설립한 자국의 식민지 영토에 싼값의 식품을 공급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영국인은 식민지 영토를 최소한으로 관리하며, 땅으로 수익을 올릴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다.

이탈리아가 식민지화한 남부 소말리아는 판이한 형식을 취했다. 이탈리아반도를 통합한 이탈리아는 1884년 유럽 열강이 아프리카 식민지 영토 분할을 논의한 베를린 회의 때, 서구 유럽에 비해 후진성을 면치 못한 자국의 정치·경제를 바탕으로 식민지 영토로 한몫 챙기려는 속내를 내비쳤다. 인구 유출(미국이나 특히 아르헨티나 이민)로 고통받던 이탈리아는 전리품으로 챙긴 식민지 영토로 인구를 벌충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파시즘은 이민 사태를 진정시키지 못했고, 식민지 점령은 보상 심리를 자극하는 사이코드라마로 바꿔놨다. 결국 이 드라마는 1920년대 살육과 토착민의 모든 사회통제 메커니즘 파괴로 이어졌다.

극우 민족주의가 분열 부채질

소말리아 국민은 영국령과 이탈리아령으로 분할된 뒤에도 문화적으로 결속돼 있었다. 소말리아인은 독립이 소말리아 재통합의 길을 터줄 것으로 여겼다. ‘위대한 소말리아’ 건설이 국가의 핵심 프로젝트가 되면서, 1960년 탄생한 첫 소말리아 해방정부의 보호 아래 두 식민지가 합병했다. 하지만 1963년 아프리카통일기구(OUA)가 출범할 당시, 소말리아 재통합 작전은 팽팽한 긴장을 야기했다. OUA가 식민지 시절 확정된 국경선 존중을 요구했기 때문이다.(2)

우리는 역설의 시발점을 여기서 찾는다. 두 식민지 영토는 역사의 이름 아래 분단을 봉합했지만, 작위적인 통합 감정을 내세운 모호한 민족통일주의에 직면하게 됐다. 모하메드 시아드 바레의 통치 아래,(3) 1977년 통합된 소말리아가 꿈꾸던 ‘위대한 소말리아’의 첫 주춧돌이 될 에티오피아 오가덴 지역 정복에 착수하며 전쟁의 시련이 닥쳤다. 패배로 끝난 전쟁은 세 가지 측면에 영향을 끼쳤다. 첫째는 원대한 국가 프로젝트가 종지부를 찍었고, 둘째는 전쟁 패배의 희생양을 찾느라 소말리아 부족 간 다툼이 벌어졌으며, 셋째는 시아드 바레에게 전쟁 패배에 대한 책임을 북부 부족(소말리아 영국령)에 전가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100만 명의 피란민이 에티오피아 오가덴에서 퇴각하는 군대를 따라 소말리아로 유입됐다. 시아드 바레는 이들을 무장시켜 북부 지역에 정착하게 했다. 시아드 바레는 새로운 정착민에게 광범위한 관리권을 부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들의 심각하지 않은 단순 약탈은 용인했다.

소말리아인이 항상 무시하고 싶어했던 위험, 즉 양 진영의 분리가 결국 독재의 축복과 함께 발생했다. ‘위대한 소말리아’ 프로젝트로 장기간 전쟁을 치르는 동안, 정권은 일부 부족을 부추겨 다른 부족을 굴복시키며 식민지 문화의 유산인 남북 소말리아 전선을 다시 설정했다.

1981년 북부 소말리아에서 발발한 반란은 10여 년간의 내전으로 이어졌고, 이 기간에 권력에서 배제된 모든 부족이 들고 일어나 독재에 항거했다. 하지만 1991년 독재정권의 붕괴는 소말리아 국가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체제의 조합을 건설적인 연맹으로 대체할 수 있는 부족연합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북부 소말리아는 이 기회를 틈타 독립을 선언하며, 옛 이탈리아령 소말리아가 휘말린 동족분쟁에서 발을 뺐다. 초기 몇 년 동안은 혼란스러웠지만, 1993년 보라마 지역의 부족회의가 신뢰할 수 있는 대표기관을 설치하는 데 성공하며, 민주주의의 토대를 마련했다.

소생한 소말릴란드가 빠르게 내부적으로 안정을 되찾은 반면, 남부는 혼돈에 휩싸였다. 1992~95년, 미국의 영향 아래 있던 국제사회는 ‘희망 재건’이라는 군사작전을 통해 남부 소말리아 대부분을 점령했다. 그러나 이 작전은 희망 재건과는 거리가 멀었다. 30개 이상의 군부대에서 병사 3만5천 명이 동원된 이 작전은(50억 달러의 비용이 소요됨) 아무런 성과 없이 2년 6개월 만에 끝났다.(4) 외부 간섭으로 취약해진 소말리아는 내부 갈등에도 시달렸다. 1992년부터 지금까지 14번의 정부 재건 시도가 있었지만 모두 실패했다.

분리 뒤 시작된 민주주의 실험

바로 이때부터 식민지 유산이 큰 힘을 발휘한다. 북부 소말리아, 즉 소말릴란드는 자기 부족의 과거 갈등 관리 메커니즘을 영국의 관습법에 통합시켜 고유의 민주주의를 창출한다. 그러나 이탈리아가 식민지화한 남부 소말리아는 모든 소말리아 유산이 말살돼 정치나 법적 기능에 전혀 기여하지 못하는 바람에, 통제 불가능한 부족의 갈등 현상이 독재정권을 포함한 모든 형태의 정권 출범을 가로막았다.

2004년 국제공인을 받은 과도 연방정부(TFG)는 수도 모가디슈 복판 반경 몇 블록만 통제하는 데 그친다. 그나마 그것도 6천 명의 아프리카 소말리아평화유지군(Amisom) 덕분이다. 개인 간의 세력 다툼과 부패로 분열된 TFG는 설상가상으로 지난 7월에 봉기한 이슬람 저항 세력과 맞서고 있다. 이슬람 저항 세력은 소말리아 사태를 국제 위기 수준으로 확대할 목적으로 우간다 수도 캄팔라에서 테러를 자행해 많은 인명 피해를 입혔다.

한편 국제사회는소말리란드의 공인을 거부한 채, 1960년 7월 합병을 빌미로, 명목상 국가일 뿐인 통합 소말리아를 합법 국가로 인정하고 있다. 프랑스와 영국, 미국은 국제사회가 펼치는 정책의 합법성에 의문을 갖기 시작했지만, 국제사회의 관성과 순응주의가 소말릴란드 공인의 길을 방해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이슬람이 지배하는 아랍권 지역에서 기독교 국가라 ‘외인부대’ 취급을 받는 에티오피아도 소말릴란드의 공인에 적대적이다. 에티오피아의 행보에 맞서, 이집트는 소말리아가 강력한 통합 국가로 거듭나 에티오피아에 대항하는 동맹국 역할을 해주기 기대했다.(5)

그래서 소말릴란드는 국제사회에서 꼬투리를 잡히지 않는 완전무결한 정책을 펼치는 것이 중요하다. 전 소말릴란드 부통령(지난 6월 대선 직전까지)은 “국제사회는 우리에게 다른 국가보다 더 많은 요구를 하면서 도움은 덜 줄 것”이라고 했다. 2002년 5월부터 집권한 하산 다히르 리얄레 카힌 대통령이 완전무결한 민주주의 행보를 보인 것은 아니다. 2002년 5월, 모하메드 이브라힘 에갈 대통령이 자연 서거하자 당시 부통령이던 그가 정권을 승계했다. 이후 그는 대선을 연기하고 대통령 자리를 수호하기 위해 전통적인 상원회의를 조작했다. 또 2009년 9월 대중 폭동과 의회 반란에 위협을 느끼자, 군 참모총장에게 의회 해산을 목적으로 수도 하르게이사에 군을 출동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참모총장이 고심한 끝에 친위 쿠데타를 거절하자, 대통령은 어쩔 수 없이 대선 날짜를 잡았다.

헌법상 소말릴란드는 합법적인 정당 수를 3개로 제한한다. 리얄레 카힌 대통령은 ‘공화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전임 대통령 에갈이 창당한 민주통합당(UDUB)을 이끌고 있다. UDUB의 17년 집권은 세력 확장을 위한 인기 영합정책과 친족 등용 현상을 만연시켰다. 하지만 진정한 언론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강력한 시민사회와, 때때로 부패한 면을 보이긴 해도 정권에 완전히 매수된 적 없는 입법부가 있어, 아프리카 전역에서 나타나는 인기 영합 정책과 친족 등용 현상에는 한계가 있다.

오랜 야당 생활을 해온 모하메드 아메드 시라뇨는 UDUB에 맞서 ‘평화와 발전’을 기치로 내세운 쿨미예당을 강력하고 체계적으로 조직했다. 이 게임의 조커는 패잘 알리 시라뇨의 주도로 최근 창당한 복지당(UCID)이다. 이 당의 지도자인 와라베는 여성과 소수부족에게 정당 참여를 개방하고 이슬람 원리주의에 호의적인 위험천만한 정책을 펴며 최상과 최악을 교묘히 결합하고 있다.

국제사회의 공인이 남은 과제

대선은 지난 6월 26일 원활하게 치렀다. 7월 1일 국가 선거위원회는 49%의 득표율로 시라뇨의 대통령 당선을 발표했다. 카인은 33%, 와라베는 17%의 득표율을 보였다. 등록 유권자 109만 명 중 88%가 투표에 참여했다. 특히 선거 과정에서 70명의 외국 관계자가 상징적인 역할을 수행했고, 선거는 외관상 평온한 분위기에서 치렀다.

소말릴란드의 이런 선량한 의지와 선거 기획이 이 나라가 원하는 국제사회의 공인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분명 당분간은 아니다. ‘위대한 소말리아’의 향수에 젖어 사는 이슬람 원리주의자와 보수적인 외교관 같은 적들이 많기 때문이다. 심지어 소말릴란드의 국제 공인을 지지하는 일부 우방국조차 소말릴란드의 공인이 이미 이탈리아령 소말리아에 만연한 대립을 더욱 가중시킬까 우려한다. 하지만 국제사회가 20년째 국제원조도 받지 못하는 이 땅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와 유사한 과도정부의 지위를 부여할 수는 없을까? 국제사회가 자치정부 지위를 부여해야만 이들은 법과 무역이 인정하는 혜택을 누릴 수 있다.

글•제라르 프뤼니 Gérard Prunier
전 프랑스 에티오피아(Addis-Abeba)연구소 소장

번역•조은섭 chosub@ilemonde.com

<각주>
(1) 안 세실 로베르, ‘기니의 수도 코나크리에서부터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까지, 투표는 하지만 결정짓지 못하는 아프리카인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0년 2월호 참조.
(2) 아프리카통일기구(OUA) 헌장의 4B조항은 회원국에 식민지 때 정한 국경 준수를 못박고 있다. 하지만 독립 소말리아는 영국령과 이탈리아령으로 양분되었던 두 식민지령을 통합하고 싶어한다.
(3) 이탈리아 식민통치 시절 기병대로 근무한 이 아프리카 독재자는 평생 자신의 ‘주인’이던 베니토 무솔리니를 존경해, 무솔리니의 정치 스타일을 따라했다.
(4) 필리프 르예마리, ‘워싱턴이 소말리아 전쟁을 가지고 장난칠 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7년 11월호 참조.
(5) 에티오피아가 이집트와 1959년 체결한 나일강 물 공유에 대한 조약을 이집트에 폐기 통보하며 상황을 악화시켰다. 이어 에티오피아는 대규모 반이집트 반란을 주도하며 나일강 기슭에 위치한 비(非)이슬람권 국가(우간다·부룬디·탄자니아·케냐)을 규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