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은 나의 고통을 모를 것이다”
1955년 8월, 시카고에 거주하던 14세의 흑인 소년 에밋 틸은 친척들을 만나러 미시시피 주를 방문했다가 참변을 당했다. 두 명의 백인들이 살인 용의자로 체포돼 법정에 섰다. 그러나 그들이 ‘무죄’ 판결을 받게 되기까지는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사실 이 사건이 당시로써는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1954년 미국 대법원의 인종차별 철폐 판결은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고, 격렬한 시위 도중 폭력사태가 발생하는 일도 잦았다. 에밋 틸의 경우가 특별한 사건으로 주목받을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우선 용의자가 그나마 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민들이 아들의 처참한 상태를 볼 수 있도록, 에밋 틸의 어머니가 장례기간 내내 관을 열어뒀기 때문이다. 덕택에, 애도와 저항의 물결이 미 전역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내 아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세상 사람들이 보아야 합니다.” 그녀는 설명했다. 처참하게 훼손된 에밋 틸의 모습은 미국 전체로 퍼져나갔다.
“우리의 고통을 팔아 돈을 벌지 말라”
2017년 3월, 맨해튼에 위치한 휘트니 미술관의 비엔날레에서 백인화가 다나 슈츠의 작품 ‘열어놓은 관(Open Casket)’이 전시됐다. 한 평론가는 “관 속에 누워있던 에밋 틸의 참담한 모습을 담아낸 슬픈 사진에 대한 강렬한 반응을 그림으로 표현한 작품”이라 평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인 인종차별 반대 투쟁을 도와주기는커녕, 또 다른 형태의 인종차별로 받아들여졌다. 영국의 작가 한나 블랙은 이 작품의 철거를 요구하는 공개서한을 발표하면서, 관람객들이 힘을 합쳐 항의해줄 것을 촉구했다.
그 후로도 이와 유사한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났는데, 세인트루이스에서는 1965년 셀마에서 시위를 하던 흑인들이 경찰에 의해 구타당하는 사진을 사용한 작품을 비난하는 시위가, 미니애폴리스에서는 1862년 다코타에서 인디언 38명이 교수형에 처했던 사건을 기리는 기념물 설치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그리고 이 스캔들은 대서양까지 건넜다. 2018년 2월, 휘트니 미술관의 ‘Open Casket’ 전시에 반대하는 시위에도 참여했었던 흑인 작가 파커 브라이트는, 알제리계 프랑스 작가 네일 벨루파의 팔레 드 도쿄 전시회에 에밋 틸의 사진이 포함돼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격분한 그는 “에밋 틸의 사진을 되찾아오기 위해” 크라우드 펀딩 형태로 자금을 모집했다. 벨루파는 결국 이 작품을 전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한 마디로, 1955년에는 에밋 틸의 사진을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보도록 하기 위한 집단적인 노력이 있었다면, 오늘날에는 에밋 틸과 관련된 작품을 아무도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 시위가 벌어지는 것이다. 사실, 시위대가 주목하는 것은 에밋 틸의 사진이 가지는 의미가 아니라 이를 작품으로 활용하는 작가가 누구냐다. “백인 작가들은 흑인들의 트라우마, 죽음, 고통을 이용합니다.” 기자인 제바 블레이는 한탄했다.(1) 한나 블랙은 에밋 틸의 어머니가 아들의 얼굴을 공개한 이유가 “흑인들에게 영감과 경고를 주기 위함”이었으며, “흑인이 아닌 사람들은 이런 행동을 결코 이해할 수 없고 또 결코 재생산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고, “비단 슈츠의 작품만이 문제는 아니다”라고 썼다.(2) 즉, 흑인들의 고통은 흑인 작가들만이 작품의 소재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백인이 흑인들의 고통을 이용해 경제적인 이득을 취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 다나 슈츠는 현재 인종차별 혐의로 기소된 상태인데, 에밋 틸의 살인을 옹호해서가 아니라(오늘날 에밋 틸의 살인을 옹호하는 이는 아무도 없는 만큼, ‘Open Casket’의 제작 의도도 분명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녀가 에밋 틸을 이용해 부를 얻었다는 것, 직접적으로는 아니지만(작가는 이 작품을 판매할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휘트니 미술관과 같이 높은 명성을 자랑하는 기관”에서 흑인 작가들을 제치고 한 자리를 차지했다는 이유에서였다.
파커 브라이트를 화나게 했던 부분은 자신이 “흑인 작가의 입장에서” 시작한 “예술계 내부의 뿌리 깊은 불공정성에 대한 논쟁”을 흑인이 아닌 다른 백인 작가가 “빼앗아갔다”는 점이었다. 다시 말해, “대부분 백인들이 장악하고 있는 엘리트 기관들”이 진정으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작품들을 홍보하고자 한다면, 그들의 자원을 인종차별의 희생자에게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흑인의 고통을 이용해 “경제적인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흑인이어야 한다는 논리다.
‘문화적 도용(Cultural appropriation)’에 대한 이런 주장은 문화적 자본에 대한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것들이 사유화되고 있는 오늘날의 현상을 반영하기도 한다. 인종차별 문제는 곧 불평등과도 직결된다. 이는 미국 시민권 운동에서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했던 문제다.
소수의 성공은 다수의 고통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중상류층과 엘리트층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확연히 증가해, 연간소득이 7만 5,000달러 이상인 비율은 현재 21%로, 1970년과 2014년 사이 2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연간 소득이 10만 달러 이상인 비율은 무려 4배가 증가한 13%를 기록했다. 그러나 여전히 아프리카계 미국인 대부분의 중위소득은 4만 3,300달러를 넘지 못하며, 1,100만 명은 빈곤층으로 살아간다.(3)
소수의 성공은 다수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다수에게 피해를 끼치기도 한다. 일부 흑인들, 예를 들어 휘트니 미술관에 작품을 전시하고, 명문대에서 수학하고, 중상류층에 입성한 소수의 성공한 모습이, 이와는 아무 관련 없는 흑인들 대부분의 승리로 받아들여지는 가상의 인종적 연대가, ‘인종적 정의(Racial justice)’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곤 한다.
그러나 이 같은 생각의 부조리는, 똑같은 논리를 백인에게 적용시켜보면 금세 드러난다. 휘트니 비엔날레에 작품을 전시하지 못한 백인 작가들이, 작품을 전시하는 백인 작가들이 자신들을 대표한다고 느낄까? 가난한 백인들이 부유한 백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자랑스러워할까? 당연히 아니다. 일부 백인들만이 부유하고 나머지 대부분은 가난하다는 사실은,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의 핵심이다.
그러나 한나 블랙을 포함한 여러 작가들이 “백인들은 에밋 틸 어머니의 희생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할 때, 이 문제는 기적처럼 사라진다. “흑인들은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손에서 계속 죽어나가고 있습니다. 흑인 공동체는 이 값비싼 작품이 전시돼 있는 미술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빈민구역에서 계속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덕택에 부를 축적한 백인이라면, 인종차별에서 기인한 빈곤 문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오늘날 ‘문화적 도용’을 둘러싼 논쟁은, 겉으로는 소수의 흑인 부르주아 계급만이 ‘인종적 특혜’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이런 논쟁으로 결국 혜택을 누리게 되는 것은 부르주아 계급 전체, 즉 주로 백인들이다.
관을 열어놓은 상태로 진행됐던 에밋 틸의 장례식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좌파의 경외심을 보여주는 완벽한 토템이었다. 이 장례식은 백인 작가들에게는 자신들이 증오하는 백인우월주의의 희생자를 애도할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장례식이 백인들의 주도로 치러지면서, 흑인 작가들에게 이 장례식은 에밋 틸의 죽음을 야기한 백인우월주의의 영속성을 확인시켜줄 뿐이었다. 이 두 경우 모두에서 빈부 갈등은 백인우월주의에 대한 투쟁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는 에밋 틸 살인 사건에 대한 혐오를 예술적으로 표현할 자격이 과연 누구에게 있는지를 결정하는 투쟁으로 변질됐다.
그러나 장례식에서 관을 열어놓았던 진짜 이유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역사학자인 티모시 타이슨은 자신의 저서인 『The Blood of Emmett Till』(Simon & Schuster, 2017)에서 “시민권에 민감하던 노조 UPWA(United Packinghouse Workers of America)가 에밋 틸 살인 용의자에게 무죄가 선고됐던 그 재판에 백인들과 흑인들로 혼합 구성된 참관인단을 보냈었다”고 밝혔다.
UPWA는 대규모 도축장의 혹독한 근로조건과 당시 남부 지역에서 시행중이던 흑백분리법에 반대하며 맹렬하게 시위를 벌이던 극좌파 노조였다. 에밋 틸의 죽음 소식을 접한 UPWA와 공산당의 2명은 소속 단체로부터 ‘틸 가족이 식량을 살 수 있도록’ 지원금을 받아냈고, 에밋 틸의 어머니가 아들의 시신을 시카고로 가져올 때도 곁을 지켰다.
노조원인 아를렌 브리검은 말했다. “관의 덮개가 열리자 모든 사람들이 충격에 휩싸여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기자들조차도 ‘이 사진은 못 찍겠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때 거스 새비지가 밖에 있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사진을 찍어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당시 그는 <The American Negro>라는 소규모 잡지를 발행하고 있었습니다, 에밋 틸의 얼굴 사진은 그렇게 처음으로 세간에 공개됐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 다른 매체들도 에밋 틸의 사진을 싣기 시작했습니다.”
아를렌 브리검을 포함한 노조원들은 임금을 높여달라는 요구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본주의에 반대했고, 자본주의 반대 투쟁과 인종차별 반대 투쟁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 후 냉전시대를 맞아 ‘빨갱이’ 색출이 이루어지면서 극좌파 노조원들은 처형되고 공산주의는 종적을 감췄다.
한편 2016년, 루퍼트 머독이 소유한 <뉴욕 포스트>는 당시 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였던 버니 샌더스가 시카고 대학에 재학할 당시 UPWA에서 일했다는 이유를 들어 “공산주의자가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반면, 일부 극좌파는 버니 샌더스가 인종적 정의에 충분히 신경을 쓰지 않고 경제문제에만 지나치게 관심을 쏟는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버니 샌더스를 둘러싼 이 두 가지의 상반된 평가는, 어떤 측면에서는 오늘날 사회적 투쟁의 축이 노동자에 대한 노동착취에서 공동체에 대한 문화 착취(문화적 전유)로 이동했음을 방증한다. 샌더스의 등장으로 미국 정치가 이전에 비해 (공산주의까지는 아니지만) 좀더 ‘사회주의’에 가까워졌다는 점에서, 우파도 완전히 틀리지는 않았다. 반인종차별주의를 반자본주의보다 우선시한 나머지, 모든 인구 계층을 포용하겠다는 샌더스의 욕심을 흑인에 대한 무관심으로 해석했던 좌파도, 완전히 틀리지는 않았다.
이는 결국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하는 자유주의자들에게만 희소식이 돼줄 듯하다.
글‧월터 벤 마이클스 Walter Benn Michaels
일리노이 대학교 시카고 캠퍼스 문학부 교수. 저서로 『The Beauty of a Social Problem: Photography, Autonomy, Economy』(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5) 등이 있다.
번역·김소연 dec2323@gmail.com
번역위원.
(1) Zeba Blay, ‘When white people profit off of black pain’, <HuffPost>, 2017년 3월 22일
(2) ‘The Painting Must Go: Hannah Black pens open letter to the Whitney about controversial Biennial work’, <Art News>, New York, 2017년 3월 21일
(3) <The New York Times>, 2016년 2월 1일, Pew Research Center, Washington, DC, 2016년 6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