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의 유죄를 입증해야 하는 피해자

2019-03-29     안세실 로베르 l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부편집장

법원은 오랫동안 범죄자 처벌과 사회보호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지만, 피해자들과 그들이 겪는 고통을 간과해왔다. 피해자들의 권리가 점차 인정을 받으면서, 그들이 입은 피해에 대해 한층 정당한 배상이 가능해졌다. 페미니스트 운동과 인도주의단체가 최근 20년간 여기에 크게 기여했다. 그들의 노력 덕분에 유럽평의회는 피해자들이 받을 수 있는 지원금과 배상금에 관한 여러 법안을 채택했다. 프랑스는 2000년 6월 15일 자 법으로 관련 대책을 마련했다. 캐나다도 2015년에 피해자 권리 헌장을 도입해 법 운용에 있어서 피해자들의 자리를 확보했다. 이제 피해자들은 진실규명에 기여했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힐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피해자가 피고인을 재판하는 것이, 소송의 1차적 핵심요소가 돼버렸다. 그리고 피해자는 평정심을 가지고 사실을 평가하기 어려운 위치에 있음에도, 점차 검찰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증언이 극적일수록 배심원들의 판단력을 흐리고, 한 사람의 미래가 걸린 판결에 악영향을 미칠 위험이 있다. 자크 드그랑디 전임 파리 고등법원장은, 2013년 사법년도 개시 기념 연설에서 “피해자도 당연히 소송과정에서 자리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법학자 장 카르보니에의 표현을 빌리면, 피해자를 범죄의 피행위자에서 억압에 저항하는 전사로 만들지 않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주의해야 한다. 일련의 형사재판 과정에서 피해자가 점점 중심이 되고 있다. (…) 간접적으로라도 피해자 중심의 논리를 지나치게 전개하면, 언젠가는 역으로 피해자에게 불리하게 돌아온다”고 덧붙였다.

1998년 로마 규정으로 설립된 국제형사재판소(ICC)에서 이런 형국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ICC는 소송과정에서 피해자가 증거제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게 했다. 프란체스카 마리아 벤베누토 변호사는 피해자의 개입 정도가 더 이상 사건전개를 입증하기 위한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1) ICC에서 피해자는 단서를 제출해 자신이 입은 피해를 설명하고 증명하는 것을 넘어서서, 피고인의 유죄를 입증하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피고인은 두 명의 검사를 마주한 셈이니, 재판 당사자 간 공평성은 사라진다.

사회면 기삿거리를 노리는 미디어가 자극하는 여론의 향배에 법원이 전적으로 무심하기 어렵기에 이런 분위기는 확산되고 있다. “미국이나 캐나다의 소송 진행 상황을 보면서 형사 처분과 양형 관례가 한층 가혹해지는 양상에 놀랐다. 피해자가 양형위원회의 법정형 조정 논의 자리에 직접 출석해서 입장을 전달할 수 있다”고 드니 살라 사법관은 전했다. “피해자는 ‘제가 겪은 범죄의 심각성에 비해 판결이 지나치게 가볍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동영상을 제작해 제출할 수도 있다. 이 자체는 적법한 행동이고 해당 판결에 대해 재고하는 계기가 된다”(2)고 부연했다. 고통의 표출이 정확한 사실파악이나 피고인의 책임 여부 판단에 도움을 주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법정은 피해자의 고통을 호소하는 장소가 됐다.

재판은 더 이상 한 개인이 공동체에 가져올 잠재적인 위험을 가늠하는 중요한 사회적 수단이 되지 못한다. 법정은 피해자들의 고통을 표출하고 관리하고 무엇보다 치유하는 장소가 됐다. 그렇지만 고통을 유죄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는 것만큼 소송의 공평성을 위태롭게 만드는 일도 없다. 어느 노부인에게 유일한 벗이 돼주던 고양이를 누군가가 죽였다고 하자. 아마 그 노부인의 고통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무거운 형벌이라도 그녀가 겪는 고통을 상쇄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에릭 뒤퐁모레티 형사전문변호사는 “형사 소송은 심리치료센터나 탈리오의 법칙(‘눈에는 눈, 이에는 이’ 보복 법칙)을 구현하는 장소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중죄법원은 범죄혐의가 있는 개인에게 사회가 책임소재를 추궁하고 단죄하는 곳이다. 인간공동체의 심판을 받게 된 한 인간이 형사소송의 핵심이다. 그래서 제도가 불완전할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보복행태를 대체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3)라고 설명했다. 그렇지만 피해자가 소송의 중심에 놓이고 그를 둘러싼 흥미성 언론보도가 늘어나면 사법부의 공정성을 훼손시킬 수 있다. 파리 공공정책원은 “저녁 8시 텔레비전 간판 뉴스에서 범죄르포가 방송되면, 이후 중죄법원의 해당 사건 선고형량이 평균적으로 24일 정도 연장된다”고 평가했다.(4) 실제든 추정이든 피해자는 법원판결을 왜곡시킨다. 피해자가 등장하면 거의 자동적으로 무거운 형벌이 적용되는 상황에서, 감경요건과 형벌의 개별화 원칙은 자취를 감춘다.

로익 세셰 사건은 자칭 피해자의 증언이 야기한 격분으로 잘못된 판결을 낳은 사례다. 이 농업노동자는 한 여학생이 강간범으로 지목하는 바람에 수년간 수감생활을 하다가, 이 학생이 성인이 돼 모두 만들어낸 이야기였다고 재증언하면서 무죄로 석방됐다. 여러 사람이 소아성애자로 오인 당했던 우트로 사건처럼 상상이 가미되고 극적으로 부풀려진 이야기에 휩쓸린 사법부는 미성년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근거’ 있는 우려 때문에 오판을 바로잡는 데에 큰 어려움을 겪는다.(5) 언론은 사건을 단순화시켜 보도하고 사람들은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소식이 전부인 듯 집착하고 사회관계망서비스가 발달한 현 세태도 민감한 사안을 차분하고 공정하게 다루기에 적합하지 않다.

피해자들이 느끼는 진정한 고통을 달래주기 위해 형벌의 개별화 원칙, 즉 범죄행위뿐만 아니라 그 당사자의 사연과 특성을 감안해 판결한다는 민주사회의 가치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그러나 “범죄자가 인간성을 저버렸으니, 사회도 인정을 거둘 수 있지 않겠느냐”라는 반론의 목소리도 들린다. 이 쟁점에 대해 뒤퐁모레티 변호사는 “범죄행위자를 단죄하는 것으로 피해자의 고통이 경감되지는 않는다”면서 “피해자를 애도하는 일은 법정이 아니라 묘지에서 해야 한다”(6)고 반박했다.

ICC의 재판 진행과정을 오랜 시간 살펴온 벤베누토 변호사는 국제형사재판이 점점 심리치유 프로그램과 닮아가고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재판이 사실상 “피해자가 다시 삶을 꾸려나가기 위해 꼭 필요한 단계”(7)이고, 소송 현장에서 생겨난 피해자의 새로운 자리가 “여러 트라우마를 치유하기에 적절한 첫 번째 해법”(8)이 될 것이라고 보는 법학자들도 있다.

형사소송이 정도를 벗어나게 되는 일은 심각한 범죄일수록, (10여 명의 피해자를 발생시킨 교통사고처럼) 피해 규모가 클수록 더욱 쉽게 발생한다. 피해 정도에 상응하는 체벌이 가해져야 한다고, 또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사고라고 하더라도 책임자를 찾아야 한다는 여론이 쉽게 생기기 때문이다. 자연재해의 경우 사법관할권이 미치는 범위에서 직접적인 책임자를 찾기 어려운데, 가령 지구온난화를 일으킨 주범들이 그 파장이 가장 크게 미치는 곳에 거주하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피해자들은 ‘정의’를 요구한다는 점이다. 2010년 폭풍우 ‘신시아’가 프랑스 서해안을 강타해 인명 피해를 양산한 사건에 대해 법원은 청구인들과 언론의 압박으로 피고인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건축허가를 내준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회 의원들이 사전에 예방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결국 그들이 어찌할 수 없는, 자연의 분노로 말미암은 재난의 책임까지 떠맡게 됐다. 법관들은 인과관계를 진중하게 가리지 않은 채 피해자들이 입은 피해에 역점을 두고 피고인들의 과실에 집중했다. 도덕적인 판단이 뒤섞인 평결은 무거웠다. 특히 전임 포트쉬르메르 시장은 우발적 사고로는 역대 최대인 징역 4년을 선고받았는데, 이전 기록은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였다. 최종적으로 항소심에서 ‘과실치사죄’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피해자들의 발언이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들의 형사 소송에 미치는 영향은 정부의 정치적 무책임에 따른 대가로도 받아들여질 수 있다. 대의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법원이 체제 뒤로 가려져 닿지 않았던 정치 지도자들에게 접근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제5공화국 헌법은 대통령과 집권 여당에 막중한 권력을 부여하고 있고, 2017년처럼 에마뉘엘 마크롱의 대선 2차 결선 투표 득표율이 43.61%에 불과하고 총선 기권율이 57.36%에 달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당선된 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이런 여건에서 여전히 모든 분야(조세, 사회, 안전 등)의 법들이 쉽사리 채택되다보니 불만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고위공직자 및 선출직 공직자들에 대한 문책이 선거가 아니라 형사 재판으로 넘어간 것이다. 작가 에두아르 루이가 자신의 아버지가 산업 재해로 영구 장애를 입게 만든 규정에 대한 책임을 자크 시라크 전 대통령, 알랭 쥐페 전 총리, 그자비에 베르트랑 복지부 장관에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묻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고통이 사회 질서나 한 개인의 기본권을 박탈하는 체제 논리의 문제로 귀결될 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연민이 아니라 행동이다. 시민들의 공감대가 영웅에서 피해자로 전이되는 현상은 고통 효용론이 확산된 세태와 여기에 수반된 무기력한 감정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 그들은 일상은 물론 인생을 좌우할 수단을 박탈당했다고 여기고 있기에 불행을 이겨내려고 분투하는 사람보다는 불행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더욱 동질감을 느끼고 있다.  
 

글·안세실 로베르 Anne-Cécil Robert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부편집장, 파리8대학 유럽학연구소 조교수

번역·서희정mysthj@gmail.com
번역위원.

 

(1) Francesca Maria Benvenuto, ‘La Cour pénale internationale en accusation(국제 정의 시험대에 오른 <국제형사재판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3년 11월호, 한국어판 2014년 2월호.
(2) Denis Salas, ‘Le couple victimisation-pénalisation(피해자 만들기-피고인 단죄하기)’, <Nouvelle revue de psychosociologie>, vol. 2, n° 2, 파리, 2006.
(3) Éric Dupond-Moretti (Stéphane Durand-Souffland 공저), 『Directs du droit(스트레이트 펀치)』, Michel Lafon, 파리, 2018.
(4) Aurélie Ouss & Arnaud Philippe, ‘L’impact des médias sur les décisions de justice(미디어가 법원판결에 미치는 영향)‘, Institut des politiques publiques, note IPP n° 22, 2016년 1월, www.ipp.eu
(5) Gilles Balbastre, ‘Les faits divers, ou le tribunal implacable des médias(사회기사인가 언론의 냉혹한 여론재판인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04년 12월호.
(6) <Philosophie Magazine>, n° 116, 파리, 2018년 2월.
(7) ‘Nicole Guedj: “Non, je ne suis pas inutile.”(니콜 게즈, “아니요, 저는 쓸모가 없지 않아요.”)’, <르몽드>, 2004년 9월 30일.
(8) Julian Fernandez, ‘Variations sur la victime et la justice pénale internationale(피해자에 의한 변화, 국제사법재판)’, <Amnis>, 엑상프로방스, 2006년 6월, https://journals.openedition.org/amn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