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이 러시아 대선을 조종하려 할 때
미국 사법당국이 러시아의 2016년 미 대선 개입 의혹을 수사하는 상황에서, 미국은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전복시키려 하고 있다. 미국 영토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외국의 내정 간섭을, 미국이 하면 정당화되는 것일까? 바로 이것이 1996년 러시아 대선이 던지는 화두다. 당시 미국과 미국의 동맹국들은 민주주의라는 미명 하에 병들고 추락한 옐친 러시아 대통령을 구하기 위해 모든 영향력을 발휘했다.
러시아의 내정간섭이 서구국가 대부분의 정치·사회 부문에서 관찰되고 있다. 엠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노란 조끼’ 운동의 부분적 원인이 프랑스를 불안정하게 하려는 ‘외국세력’의 사주 때문이라고 본다. 그 외국세력이 바로 러시아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스페인 카탈루냐 독립운동도, 영국인들의 ‘브렉시트(Brexit)’ 찬성투표도 다 러시아가 조종한 것이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 후보가 패한 것 역시 러시아 때문이다.
외국 세력이 이렇게 정치적 사건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미국의 권력층과 언론에 충격과 근심을 야기하고 있다. 이에 따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러시아 간의 내통 의혹에 대한 조사가 시행되기도 했다.
미 국무부 관리였던 토마스 멜리아는 “미 중앙정보국(CIA)이 1940년대 이탈리아, 1950년대 독일의 선거를 조작했다. CIA는 선거조작 외에도 1950년대 이란, 과테말라의 정부를 비밀리에 전복시킨 적도 있다.(1) 하지만 당시는 냉전시대였다. 베를린장벽 붕괴 이후에는 러시아와 미국의 내정간섭이 ‘도덕적으로 동등하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미국은 ‘외국의 민주화 과정을 강화하기 위한 프로그램들(특정선거 결과를 목표로 하지는 않음)’을 운영했지만, 러시아는 ‘혼란 조장과 정치시스템에 대한 국민의 신뢰 무너뜨리기, 그리고 사회 불안 야기라는 목적을 위해 다른 나라의 선거를 조작’했다는 것이다. 스티븐 홀 전 CIA 러시아 작전 책임자는 “미국과 러시아를 비교하는 것은, 경찰과 깡패 모두 리볼버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경찰을 깡패 취급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2) 그에 따르면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 퇴출 작전은 다음과 같은 미국의 의중을 반영한다. 미국은 ‘민주주의’를 진흥하려 하지만, 러시아는 ‘반(反)자유적인’ 독재자를 지원한다는 지적이다. 그렇지만 1996년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의 재선을 둘러싼 일련의 사건들은 이런 주장의 허구를 드러낸다.
미 선거기술자들 덕에 대통령이 된 옐친
1996년 2월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연임에 도전하겠다고 발표했을 때, 성공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1995년 12월에 열린 총선에서 친옐친 정당인 ‘우리 집-러시아’의 득표율은 10%에 그쳤다. 게나디 주가노프가 이끄는 공산당이 약 25%의 득표율로 국가두마(러시아 연방의회의 하원-역주)의 157석을 차지하면서 제1당이 됐다(이전에는 42명에 불과). 그해 10월, 파란 운동복에 신사화를 신고 병원의자에 앉은 모습으로 등장했던 옐친은 여론조사에서 겨우 3%의 지지율을 보였다. 그러나 이듬해 7월 3일에 열린 2차 결선 투표에서 옐친은 54%의 득표율로 주가노프 공산당 후보를 물리쳤다.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2003년에 개봉한 로저 스파티스우드 감독의 코미디 영화 <스피닝 보리스(Spinning Boris)>는 음지에서 활동하며 옐친 대통령을 정치적으로 구원한 미국의 정치 자문들의 역할과 더불어 옐친의 강하면서도 무너지기 쉬운 면을 대중에게 각인시켰다. 이 할리우드 영화는 조지 고튼, 조지프 슈마트, 리처드 드레스너라는 세 명의 스핀 닥터(Spin Doctor: 홍보·기획, 메시지 관리, 아젠다 설정 등의 분야에 탁월한 능력이 있는 정치홍보전문가-역주)가 옐친 측근의 초청으로 러시아에 가서, 1991년 피트 윌슨 미 상원의원을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당선시킨 전략을 러시아인들에게 전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영화 내내 돈 가방과 거구들 사이에서 스핀닥터 3인은 여론조사, 양적조사(실시간으로 유권자 패널들에게 후보의 연설을 테스트)를 기반으로 대통령이자 차기 대선후보의 홍보 방식에 계속 변화를 준다. 또한 교회를 불태우는 볼셰비키들이 나오는 스폿광고를 활용해 정적을 깎아내리도록 하는 네거티브 전략을 취한다. “우리는 늘 줄을 서야 하고, 생필품이 부족한 공산주의로 회귀할지 모른다는 공포감 조성에 성공했다. 투표하지 않으면 진다! 신은 우리를 지켜주신다! 마지막으로 식료품을 사라! 이런 슬로건들이 먹혀들었다”고 전 옐친 선거캠페인 담당자가 자축했다(2016년 7월 5일 BBC 러시아어 방송).
이 영화가 나오기 한참 전, 러시아 대선 결과가 발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의 타임지가 재선에 성공한 옐친이 팔 밑에 성조기를 끼고 웃고 있는, 이후 유명해진 캐리커처를 표지에 실으며 ‘미국의 스핀닥터들이 옐친의 대선 승리를 도운 비밀스런 역사’를 들춰낸 바 있다.(3) 스핀닥터들은 미국 언론에 이 사실을 밝히며 자신들의 성과를 드높이려 했음이 틀림없다. 옐친의 측근들에게 자신들의 성과를 자축하는 것이 이익인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스피닝 보리스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비망록은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등을 돌리기 전 그의 정치 멘토이자, 리처드 드레스너와 개인적 친분이 있었던 리처드 모리스를 통해 백악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이다.(4) 클린턴 대통령은 직접 들은 정보에 흥분하며 러시아 대통령에게 조언했다. “이번 대선기간, 우리는 전화로 더 많은 대화를 해야 합니다.” 클린턴 대통령은 그해 자신의 임기를 걸면서까지 옐친에게 전화로 제안을 했다. “(…)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전화주시기 바랍니다.”(5)
미국이 러시아 대선 과정에 직접 개입하는 정도가 높아지면서 미 국무부 관리들은 긴장상태에 놓였다. 모리스는 “(그들은) 우리가 러시아 대선승자가 누구든, 함께 일해야 한다고 말했었다. 클린턴 대통령에게 너무 깊이 개입하지 말라고 조언했다”고 회고한다. 그러자 클린턴 대통령은 “그만두게. 난 옐친에게 모든 희망을 걸 거야”라고 대답했다. 모리스는 “(클린턴 대통령은) 신중한 태도 대신, 공격적으로 깊숙이 개입하고 완벽하게 동조해 옐친의 재선에 올인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덧붙였다.(6)
옐친의 재선을 위해 음지의 전문가를 찾을 필요가 없었다. 서구국가들이 지원을 자처했고, 이들의 지원은 달러로 책정됐다. 미국에서 독일에 이르기까지, 서구국가들은 득이 될 것으로 판단되는 관계에 투자했다. 그리고 대화상대를 바꾸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알랭 쥐페 당시 프랑스 총리는 옐친이 대선 후보로 나선다고 발표한 2월 14일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쥐페 총리는 선거유세가 ‘옐친 대통령이 시행해온 개혁정책의 성과들을 돋보이게 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는 마음을 피력했다.(러시아 일간지 <이즈베스티야>, 1996년 2월 13일)
헬무트 콜 당시 독일 총리가 쥐페 총리의 뒤를 이어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5개월 만에 2번째 방문이었다. 콜 총리의 친옐친 행보를 둘러싸고 독일 언론은 불만스런 논평을 쏟아냈다. 이미 몇 주 전 독일 공영방송 ARD와의 TV 인터뷰에서 콜 총리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었다. “독일은 주가노프보다 옐친과 더 좋은 관계를 맺을 것이 분명하다. 옐친은 독일의 진정한 친구다.”
콜 총리는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독일통일 후 동독 땅에서 러시아 군대가 철수한 것을 예로 들며 ‘항상 약속을 이행한, 전적으로 신뢰할 만한 파트너’라고 옐친을 소개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4월 20일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러시아 국민이 미래를 위해 한 표를 행사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 국민의 결정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했음에도, 임기가 끝나가는 옐친 대통령 쪽으로 기울어진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옐친의 ‘민주화’, 서구의 이권 추구
옐친 돕기는 러시아가 민영화, 금융안정화 정책, 외국인투자 개방과 같은 ‘개혁’의 길을 계속 가게 하려는 완벽한 방법처럼 보였다. 따라서 이 같은 관점은 전체주의적 공산주의로의 회귀를 막으면서 옐친의 재선을 지속적인 민주화 과정처럼 보이게 하려 했다. 1991년 (쿠데타군) 탱크에 앉아 쿠데타군과 대립했던 인물이 이후 1993년에는 국회의사당을 포격하고(7) 대통령령으로 통치하는 데 익숙해지고 너무나도 잔인하게 체첸 반군과 전쟁을 벌이게 되다니 딱할 노릇이었다!(8)
옐친의 경제성적표는 참담했다. 마피아들은 러시아 산업의 이권을 놓고 거리에서 다투고, 노인들은 나라가 주는 연금으로 간신히 살아갈 수 있었다. 따라서 임기가 끝나가는 옐친이 대선에서 이기려면 급전이 필요했다. 1996년 2월, 옐친 대통령은 연임에 도전하며, 공무원 체불임금을 일부 정산하는 데 28억 달러를 쏟아붓겠다고 약속했다. 2월 20일 옐친은 클린턴과의 전화통화에서 “중대한 선거를 앞두고, 사회문제 해결과 민생안정을 위해 90억에서 130억 달러의 차관을 받을 수 있도록 IMF에 힘을 좀 써주시오”라며 매달렸다.(9) 이에 클린턴은 “알아보겠다”고 대답했다.
2일 후 미셸 캉드쉬 IMF 총재가 러시아에 3년에 걸쳐 102억 달러(첫해 40억 달러)의 차관을 제공하겠다고 발표했다. 캉드쉬 총재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많은 이들이 이를 옐친에 대한 도박 또는 돈 낭비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로선 이보다 전 세계의 번영을 위한 더 나은 방안은 없다”고 해명했다.(10) IMF는 커뮤니케이션 담당관을 통해 “차관 제공를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러시아 경제에 치명적일 것”이라고 강조해서 주장했다.(11)
4월 29일 러시아는 파리클럽(Paris Club: 채무국이 공적 채무를 정상적으로 상환할 수 없는 경우 재조정을 논의하는 채권국의 비공식 협의체로 1956년 설립-역주)에서 만기 도래 외채 400억 달러의 상환 기간을 25년 연장받았다. 4일 후 세계은행(IBRD)은 러시아의 사회서비스 지원을 위해 2억 달러의 차관을 제공하기로 했다.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 ‘재건’, ‘재편’의 뜻을 가진 러시아어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1985년 3월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 후 실시한 개혁정책-역주)의 열렬한 관찰자들조차 그처럼 지나친 일련의 과정을 보며 흥분했다.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 모스크바 특파원이 “옐친이 달을 따다 달라 했으면 아마 따다 줬을 터”라며 조롱했을 정도다(1996년 2월 22일).
한 가지 문제가 남아있었다. 러시아 국민들에게 자국이 채무국처럼 보이지 않게 하면서 옐친을 도울 방법이 무엇일까?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세력 확장은 옐친으로서는 피해갈 수 없는 러시아의 굴욕을 의미했기에 이 문제는 더욱 심각했다.(12) 클린턴 대통령은 “평화를 위한 동반자 관계(Partnership for Peace, PfP)(13) 회원국들과의 협의만이 예정돼 있지만, 모든 것은 비공식적으로 이뤄질 것”이라며 옐친을 안심시켰다. 클린턴은 이 문제에 있어 신중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목표와 관련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14)
7월 3일 실시된 2차 결선투표에서 주가노프를 누르고 연임에 성공한 옐친은 서구국가들의 따뜻한 축하를 받았다. “러시아는 전체주의적 과거에 등을 돌리며 역사적 단계를 넘어섰다. 민주주의가 승리했다. 이와 함께 미국인들이 잘 아는 교활한 속임수와 술책을 포함한, 현대적인 선거캠페인 도구들도 승리했다. 이 방법들이 항상 칭찬할 법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이 방법들로 획득한 결과는 정말 칭찬할 법하다”고 <타임>지는 흥분했다.
멜리아의 표현을 빌리자면, “민주주의가 표면상 확대된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한 사람(옐친)을 구제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미국이 옐친의 재선을 도우면서 러시아의 ‘사회 안정’에 일조했을지라도, 이는 매우 불평등한 사회를 공고히 한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서구국가들이 엄청난 영향을 미친 러시아 대선은 ‘정치시스템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무너뜨리면서’ 지속적으로 러시아에서 민주주의 이념을 훼손했다. 옐친이 총리로 임명한 데 이어 1999년 12월 대통령직을 물려준 블라디미르 푸틴이 여전히 크렘린을 장악하고 있듯 말이다.
글‧엘렌 리샤르 Hélène Richard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기자
번역‧조승아
번역위원
(1) Thomas O. Melia, ‘Russia and America aren’t mor0ally equivalent’, <The Atlantic>, Boston, 2018년 2월 27일.
(2) Cited by Scott Shane, ‘Russia isn’t the only one meddling in elections. We do it, too’, <The New York Times>, 2018년 2월 17일.
(3) ‘Yanks to the rescue’, <Time>, New York, 1996년 7월 15일
(4) James Goldgeier & Michael McFaul, ‘Power and Purpose : US Policy toward Russia After the Cold War’, <Brookings Institution Press>, Washington, DC, 2003년.
(5) ‘Memorandum of telephone conversation’, 1996년 2월 21일. 비밀해제된 문서, <National Security Archives>, www.nsarchive.gwu.edu
(6) Cited by James Goldgeier & Michael McFaul, ‘Power and Purpose’, op. cit.ㄴ
(7) Jean-Marie Chauvier, ‘Octobre 1993, le libéralisme russe au son du canon('검은 10월' 실패한 러시아식 민주주의)’ 참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4년 10월호.
(8) Karel Bartak, ‘Tchétchénie, une ‘guerre sans nom’(체첸, ‘이름 없는’ 전쟁)’ 참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1995년 5월호.
(9) ‘Memorandum of telephone conversation’, 1996년 2월 20일, www.nsarchive.gwu.edu
(10) Jeff Gerth & Elaine Sciolino, ‘IMF head: He speaks, and money talks’, <The New York Times>, 1996년 4월 2일.
(11) Michel Camdessus, ‘La scène de ce drame est le monde. Treize ans à la tête du FMI(We Had a Chance: Thirteen Years at the Helm of the IMF)’, <Les Arènes>, Paris, 2014.
(12) ‘Quand la Russie rêvait d’Europe(유럽이 되고픈 러시아의 꿈은 왜 사라졌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8년 9월호.
(13) 평화를 위한 동반자 관계(Partnership for Peace, PfP)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옛 소련 및 그 위성국들 사이에 신뢰관계 형성을 위해 동구권 붕괴 직후인 1994년에 시작된 프로젝트로, 동유럽 구공산권 국가들의 나토 가입에 전초단계 역할을 했다.
(14) James Goldgeier & Michael McFaul, ‘Power and Purpose’, op. c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