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민족은 과연 혁명적인가?

2019-03-29     에블린 피에예 l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프랑스 민족이 시위에 나서고 정치적 담화 속에 등장하게 된 계기는, 다름 아닌 프랑스 대혁명이었다. 그렇다면 ‘민족’이란 무엇인가? 국가? 민중들의 집단? 아니면 서민층? 역사학자 쥘 미슐레는 민족의 개념을 명확히 정의하지는 못했지만, 박애정신을 지닌 이상적인 대상으로서 프랑스 민족을 새롭게 그려냈다. 

 

1846년, 콜레주 드 프랑스의 역사학과 교수이자 저명한 중세 연구가였던 쥘 미슐레는 『Le Peuple(민족)』이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발간했다.(1) 이 평론집이 ‘위대한 국가사’를 갈망하던 제3공화국의 필요에 정확하게 부응하면서, 미슐레는 단숨에 국가적인 우상으로 떠올랐다. 미슐레는 고된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불합리한 상황에서는 주저 없이 봉기를 일으키는, 위대하면서도 친근한 프랑스 민족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했다. 그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개념을 등장시킨 ‘특별한 국가’로서의 프랑스를 부각시켰다.

 

쥘 미슐레를 다시 읽다

미슐레는 “말을 앞세우는 소수가 지배하는 프랑스”가 아닌 노동자, 소외계층처럼 “말 없는 다수의 프랑스”를 다루고 이해하고 찬양했던 최초의 역사학자였다. 프랑스 민족을 가장 체계적으로 규정하고 연구한 사람은 미슐레임이 틀림없지만, 프랑스인들의 민족봉기가 빛나는 역사의 순간이자, 당시 유럽 전역을 휩쓴 거대한 낭만주의 흐름의 일부로서 주목받게 된 것은 1789년 프랑스 혁명과 ‘꼬마 하사’(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별명)의 승리 이후에 나타난 정치적 회의감과 역동성 덕분이었다.

미슐레가 “자신들이 세상에서 어떤 권리를 지니는지도 몰랐던 이들”에 주목했을 때는, 1830년 7월 혁명과 그 ‘영광의 3일’을 영리하게 이용했던 루이 필리프가 ‘프랑스 국민의 왕’으로 있던 시기였다(루이 필리프는 입헌 군주제를 원하는 상층 부르주아지들의 지지를 받았다-역주). 그렇지만 당시 프랑스는 공화국 지지자들과 공화주의 세력이 사라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산업혁명의 도래와 함께 사회문제는 점점 더 심각해졌고 노동자들의 상황은 거의 한계점에 이르러 공화주의자들에게 혁명의 의지를 다시금 일깨우고 있었다. 1831년과 1834년에 리옹의 견직물 직공들이 임금삭감에 반대하며 두 차례 봉기를 일으켰다. 루이-르네 빌레르메가 조사해 작성한 <면, 모, 견 방직 공장 노동자들의 신체적 및 정신적 상태 보고서>(1840)를 보면 당시의 노동착취가 심해 아동노동에 관한 법까지 제정됐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펠리시테 드 라므네의 『Livre du peuple(민족의 책)』, 루이 블랑의 『Organisation du travail(일의 구성)』, 피에르-조세프 프루동의 『Qu'est-ce que la propriété?(사유재산이란 무엇인가?)』, 에티엔 카베의 『Voyage en Icarie(이카리아로의 여행)』등 수많은 저서들이 당시의 상황과 체제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여러 사상들 간 충돌이 일어나는 가운데, 혁명을 모의하는 비밀 단체들은 투쟁을 준비하고 있었고, 급진 성형의 반대파들은 기독교 사회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등 신생 세력들로 분파됐다. 모험가였던 루이-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지금이야말로 수정주의자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하기에 적기라 느끼고 1844년 『De l'extinction du paupérisme(빈곤의 종식에 관해)』를 출간했다.

“오라, 노동자들이여. 우리는 당신들을 두 팔 벌려 환영한다. 우리에게 새로운 열기를 가져다주오. 세계가, 인생이, 과학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미슐레는 프랑스 민족을 이야기할 때 서민, 농부, 노동자를 우선적으로 지칭하기는 했지만 계급투쟁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부자도 프로젝트나 기업 운영을 통해 얼마든지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존재로 보았다. 계급투쟁은 기본적으로, 대부분 ‘허약’하고 별다른 생산 활동을 하지 않으며 시민의 의무보다 개인의 안녕과 권리를 우선시하는 부르주아 계급과, 무지하고 때로는 상스럽지만 인생을 아는 ‘평민’을 대립시킨다. “인생을 안다”는 표현을 쓴 이유는 “인생은 고통받기, 일하기, 가난하게 생활하기라는 대가를 치러야만 비로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을 아는 이들의 ‘직관’은 언제나 옳고, ‘무익한’ 지식에 의해 약화되거나 길을 잃지 않는다. 따라서 “교양 있는 사람이라면 과거, 도덕, 진심, 명예가 이끄는 대로 주저 없이 따라야” 한다. 조지 오웰이 주장한 ‘보편적 품위(Common decency)’의 최초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 민족의 이미지는 한마디로 ‘단순함’으로 이상화돼, 순수한 아이의 상태에 가깝고, 지성인들이 잊어버린 진정한 가치들을 존중하며, 조국에 대한 애국심에서 비롯되는 생기와 활력으로 가득 차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미슐레가 그린 프랑스 민족은 조국인 프랑스의 역사와 긴밀하게 연결된 존재로서 그 역사의 후계자이자 계승자이며, 자신이 세계인이라는 환상을 품고 있다. 조국에는 큰 애착을 갖지 않고 특히 좀 더 부유하거나 권력을 가진 경우에는 다른 나라로의 이주까지 꿈꾸는 엘리트 계층과는 확연하게 구분된다. 

그러나 이는 민족적 애국심과는 다르다. 프랑스 민족은 조국인 프랑스의 대표자인 동시에 수호자다. 프랑스는 “끈끈한 유대감으로 뭉친 국가 이상의 국가”이며,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바로 “혁명에 잠재된 열기”이기 때문이다. 단순하고 말이 없는 프랑스 민족은, 프랑스가 “자국의 이익과 운명을 인류의 그것과 혼동하는” 유일하고도 독특한 국가임을 인정한다. 그리고 “국가 전체를 평등의 성전으로” 만들었다. 빈곤층은 성전을 만드는 임무를 부여받은 자들로서, 이를 위해 최근에도 투쟁했고 앞으로도 투쟁을 계속할 것이다. 따라서 이는 국가주의가 아닌 메시아 신앙의 일종이며, “진정한 프랑스는 혁명의 프랑스”이고, 가장 못 가진 자들이야말로 그 필요성을 가장 잘 이해하는 자들이다. “당신은 1789년 혁명의 후예다.”(2)

물론, 프랑스 민족과 국가적 상징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논리적 근거도 없고 불확실한 부분들도 많다. 직감이 언제나 옳고, 자발적으로 정의로운 길을 선택하며, 본질적으로 유해한 지식은 차단하고, “교양 있는 계층이 오늘날 사고의 쇄신을 위해 찾는 생명의 샘”과 같은 프랑스 민족의 이미지는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종교적이다. 

그러나 이처럼 비논리적이고 위험하기까지 한 신화 속에는 모든 감정을 적극적인 것으로 변모시키는 놀라운 힘이 숨어 있다. 미슐레는 자신이 묘사한 프랑스 민족의 이미지가 어디까지나 이상향임을 알고 있었다. “미슐레가 만들어낸 이상적인 모습의 프랑스 민족은 실제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주변을 살펴보면, 프랑스 민족의 특정 계층 혹은 일부는 변질됐다.” 그러나 이는 중요하지 않다. 강렬하고도 서정적인 프랑스 민족의 이상화된 이미지는 혁명에 대한 열망과 “야만인(거친 혁명가)”에 대한 추앙으로 발전해, 훗날 프랑스 민족의 정체성이 됐기 때문이다.

1848년에 일어난 혁명은 루이 필립을 왕위에서 끌어내렸고, 이후 프랑스에는 (길지는 못했지만) 제2공화국이 수립됐다.  
 

 

글‧에블린 피에예 Evelyne Pieiller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번역·김소연 dec2323@gmail.com
번역위원.

 

(1) Jules Michelet, 『Le Peuple(민족)』, Paul Viallaneix의 추천사 및 주해, Flammarion, coll. «GF», Paris, 1992. 별도의 언급이 없는 경우 본문의 모든 인용문은 이 책에서 발췌된 것임.
(2) Jules Michelet, 『La Bible de l’humanité』, Complexe, ruxelles, 1999. 미슐레는 혁명의 열렬한 지지자로서 후세대를 위해 다수의 저서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