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연재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가 새로 쓰는 ‘비판경제 교과서’ (4) - 부의 분배, 희망과 난관

『비판경제 교과서』연재순서 (1) 경제학은 과학인가? (2) 생산 증대, 무조건 더 많이! (3) 노사관계(다리와 버팀목의 관계) (4) 부의 분배 희망과 난관 (5) 고용, 어떠한 대가를 치러야 하나? (6) 시장을 따를 것인가 명증된 법칙을 세울 것인가? (7) 세계화 국민 간의 경쟁 (8) 화폐, 금전과 현찰의 불가사의 (9) 부채 협박 (10) 금융 지속 가능하지 않은 약속

2019-03-29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카를로스 곤 르노닛산그룹 회장은 2015년 한 해 동안 1,650만 유로(한화로 212억 원)에 달하는 보수를 받았는데, 최저임금으로 환산하면 무려 1,000년 치 연봉에 해당한다. 최저임금을 받는 임금노동자가 십자군 원정 이전인 기원후 1,000년부터 일을 시작해야만 벌어들일 수 있는 액수다. 주류 경제 논리에 따르면 불평등은 창의력을 자극하고, 생산성을 증가시키며, 발전을 촉진하는 역할을 한다. 일부 마음씨 좋은 부자들은 자선활동으로 서민들의 마음을 사려고 시도하기도 한다. 그런 나눔의 미덕에 회의적인 사람들은 국가가 나서서 세금을 통해 부를 재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또 다른 선택지도 있다. 가령 아직 그 효과를 제대로 측정해보지 못한 사회분담금을 예로 들 수 있다. 

 

1. 편견: “빈곤은 골칫거리다”

국제기구 정책, 대다수 서구정당의 정치구호, 수도 없이 쏟아지는 연구물과 보고서, 분석자료의 쟁점사안을 보고 있노라면 ‘빈곤퇴치’의 필요성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이처럼 명백한 공감대에도 불구하고, 빈곤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문제로 남아있다. 선진국만 하더라도 지난 20년간 빈곤율이 전체 인구의 약 15%를 꾸준히 맴돌고 있는 현실이다. 이런 모순적인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지난 20년간 답보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빈곤문제를 이해하려면 먼저 1980년대 초에 각국 정부가 도입한 빈곤퇴치 정책을 살펴봐야 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복지국가의 틀을 다졌던 서구의 여러 정부는 밀턴 프리드먼의 경제 이론에서 영감을 받아 기존의 복지제도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 시기까지만 해도 사회정책은 사회보장제도와 공공서비스 등의 제도적 장치를 기반으로, 평등의 실현을 공공연하게 주창했다. 당시의 사회정책은 그밖에도 모든 국민이 균등한 ‘사회적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경제영역에 직접 관여했으며, 노동시장을 규제함으로써 빈곤의 원인을 제거하는 데 특히 큰 노력을 기울였다. 요컨대, 그 당시 빈곤의 감소는 곧 불평등의 감소를 의미했다.

프리드먼의 등장으로, 기존 복지제도의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복지국가는 거대한 관료주의적 기계에 지나지 않으며, 성취에의 의지를 꺾고 경제의 역동성을 저해한다는 생각이 팽배해졌다. 그 결과, 국가는 경제에 개입해서는 안 되며, 그 역할은 원활한 경제활동과 자유로운 기업경영이 이뤄질 환경을 조성하는 데 그쳐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그리하여 사회보장제도나 공공서비스 대신 ‘빈곤층’에 국한해 최소한의 수당만을 허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일정한 소득수준을 밑도는 계층에는 정부가 (프리드먼이 주장한 ‘음의 소득세’에 해당하는) 보조금을 지급하도록 했다. 이처럼 가난한 사람들이 최저소득을 보장받는 마당에, “무엇 때문에 전국민에게 적용되는 사회보장제도를 계속 유지해야 하는가”라는, 회의적 시각이 제기됐다. 신자유주의적 관점에서 최저소득제도에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이점이 있다. 우선 이 제도는 불평등을 해소하지 못한다. 또한,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여주기까지 한다.

 

“나는 결코  도움을 받지 않을 것이다.”

프리드먼이 주장한 제도가 전격적으로 도입된 적은 없으나, 이는 지난 수십 년에 걸쳐 유럽이 구축한 사회정책 기조에 많은 영감을 줬다. 일례로, 공공지출을 축소하고 사회적 권리를 제한해 극빈층에게 최소한의 보장만을 제공하는 사회정책을 들 수 있다.

이런 정책의 효과는 오늘날 익히 잘 알려져 있다. 부의 규모는 많이 증가했지만, 부의 분배는 악화 일로를 걷고 있다(도표 참조). 오늘날 빈곤율 감소의 추구는 과거 불평등을 근절하고자 했던 열정을 대신하고 있다. 과연 표어만 달리했을 뿐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불평등에서 홀로 떨어져 나온 ‘빈곤’이라는 개념은, 이제 더는 불평등한 부의 분배에 따른 결과로 여겨지지 않는다. 오늘날 빈곤은 개인차원에서 감수해야 하는 문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동시에 사회수당 수혜자들이 ‘성공’을 이루려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곤 한다. 프랑스 경제장관 시절의 에마뉘엘 마크롱은 “제가 실업자라면 결코 타인의 도움에 기대를 걸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소신을 밝힌 바 있다(BFM 텔레비전 2015년 2월 8일 자 방송). 오늘날의 빈곤대책은 경제와 사회정책의 주변부에서 이뤄질 뿐, 경제·사회 정책을 문제 삼지도, 정책방향을 좌우하지도 못한다. 정치적 상상의 핵심부에 자리잡은 신자유주의의 이념은, 부의 재분배 없이도 빈곤을 해소할 수 있다는 환상을 부채질했다. 또한, 어떤 이들이 감수해야 하는 가난의 주된 요인은 다른 이들이 독점하고 있는 부에 있음을 망각하게끔 했다.

 

2. 공정성, 가짜 평등

2014년 새로 선출된 유럽집행위원회 지도부는 ‘고용’과 ‘성장’, ‘민주적 혁신’ 그리고 ‘공정성’을 우선과제로 내걸었다. 그중 프랑스 공화국의 건국이념인 ‘평등’의 대체어인 ‘공정성’이라는 단어는 선거구호나 사회적 약자 우대정책 등, 분야를 불문하고 폭넓게 쓰인다. 그러나 공정성이 내포한 진짜 의미는 무엇일까?
1789년 발표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은 모든 개인이 균등한 권리와 의무를 지는 평등의 개념을 담고 있다. 일반적으로 정치 분야에서의 평등의 개념은 이견의 여지가 거의 없다시피 하다. 반면, 사회 분야에서의 평등은 그 해석에 있어 다양한 의견이 여전히 분분하다. 헌법으로 보장된 ‘공화국’ 정신에 입각한 평등은 형식적일 뿐 아니라 기만적이기도 하다. 사회 안에서 모든 이들이 동등한 지위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일부 사람들은 『정의론(A Theory of Justice)』의 저자인 미국 철학자 존 롤스의 주장대로 평등을 가로막는 장애요인을 고려하는 방법을 통해 산술적 평등주의를 지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기회의 평등’을 이뤄나가는 과정이 평등을 쟁취하는 투쟁의 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집단과 집단 사이의 차이와 특수성을 고려해, 격차를 상쇄할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실업상태의 커플보다 더 많은 수입을 받는 간부직위의 커플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혹자는 전자에 한해서만 가족수당을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엄격히 공정성의 원칙에 따라 접근한다면, 사회적 고립과 차별을 방지하고, 취약계층을 보조하는 우대정책은 ‘역차별적’인 성격을 띤다. 정치적 중립, 특정 그랑제콜 출신 인원 할당제, 다양성 헌장의 도입, 다양한 소수자를 등장시키는 대중매체도 마찬가지다. 만인에게 일관되게 적용되는 규칙을 깨려는 이유는 가장 취약한 사회계층을 보호하기 위함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이처럼 대상에 따라 기준을 달리 적용할 것을 강권하는 공정성의 역설이 과연 진정한 평등을 보장할 수 있을까?
공정성이라는 개념을 선택함으로써 우리는 산술적 평등을 포기하고 도덕 철학적 가르침을 따르게 된다. 프랑스 철학자 앙드레 라랑드는 철학사전을 통해 공정성이란 개념을 ‘특정사안을 판단하는 데 작용하는 정의와 불의에 관한 확고하고 즉각적인 통찰’이라고 정의했다. 다시 말해 공정성이란 원칙을 능가하는 통찰과 판단에 근거한다는 의미다.

그렇지만 특정한 차이점에 더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근거는 무엇이란 말인가? 공정성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역차별’과 교만의 발로인 동정심의 경계는 과연 어느 지점일지에 관해서도 의문을 가질 법하다. 왜냐하면, 자격 여부를 결정하고 불의의 피해자를 정하는 주체는 다름 아닌 정부 당국과 정책 결정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합리적 선택이란 없다. 매 선택을 결정하는 합리적 사리 판단도 감정의 지배를 받기 마련이다.

 

내가 받지 못하는 수당을 옹호할 수 있을까?

결국, 대중적인 호소를 얻지 못하는 한, 특정 집단은 잘 조직화한 여론의 그늘에 가려 역차별을 받는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런 이유로 고결한 명분인 정의를 추구한다는 핑계로 일부 시민들은 역차별을 반대하는 조직을 구성할 수도 있다. 어떤 이들은 격차를 해소하는 ‘보정 효과’의 당위성에 관해 의문을 제기하게 될 것이다. 흔히 공정성은 사회에 유익하다고 여겨지지만, 격차를 해소해야 하는 근거에 대해서는 적잖이도 이견이 새어 나온다. 앞서 언급한 간부직 커플의 경우, 자신들이 가족수당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더라도 과연 해당 제도를 유지하는 데 찬성할 수 있을까? 사회구성원 간의 소득과 부의 격차를 줄이려면, 수당을 적용하기보다는 누진세를 실질적으로 도입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다시 말하면, 산술적이고 절대적인 평등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평등, 변화나 순응의 결과일까?

영미권에서 공정성에 관한 논의는, 흔히 국가를 공동체로 간주하며 특정한 권리를 남용하는 열등한 시민집단에 관한 주제로 흐르곤 한다. 게다가 사회적 불평등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만연하다. 관건은 체제의 변화가 아니라, 겉으로 드러난 역기능과 뿌리 깊은 불의를 해소함으로써 보다 인간적인 세상을 구현하려는 희망이다. 평등이란 본래 만인이 차별 없이 동등한 권리를 누리도록 하는 특징이 있기에, 모든 사람이 평등의 조건을 효과적으로 구현해내는 세상을 지향한다. 그렇기에 차이의 존중이 아닌 권리의 평등을 추구할 때에야 비로소 모든 시민이 완전무결하게 평등한 정치·사회제도를 구현할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3. 미국 내 빈부격차의 주범은 부유층

세계 최대 강대국인 미국은 영토의 면적과 사회적 불평등의 수준에서도 세계 선두를 달린다. 빈곤은 뉴욕보다 미시시피주에 더 만연해 있고, 생계로 곤란을 겪는 비율은, 백인들보다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더 높다. 동시에 최상위 부유층의 소득은 1980년 이래 급속하게 증가했다. 현재 소득 상위 1%는 미국 국민소득의 25%를 차지한다. 이는 복지국가가 출현하기 전인 1920년대와 같은 수준에 해당한다.

 

4. 조세의 역사

로널드 레이건 미국 전 보수파 대통령은 “납세자란, 공무원 시험을 보지 않고도 연방 정부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입니다”라고 발언했다. 레이건 전 대통령이 무심코 던진 이 말은 수 세기를 이어져 온 세금 불신 풍조에 점 하나를 더 찍은 것에 불과하다.

제2천년기에 접어들던 11세기의 조세제도는 오늘날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당시 봉건사회의 세금은 토지의 사용에 대한 지대에 한정됐다. 토지 사용자가 영주에게 납부하는 지대는 무산계층이 유산계층에 복속되는 관계를 잘 나타낸다. 카페왕조 시대에는 영지 신민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했고, 전쟁과 같은 유사상황이 발생하면 추가 세금을 거둬 자금을 조달했다.

프랑스의 군주들은 삼부회(군주의 권한으로 3대 신분인 귀족, 가톨릭 고위 성직자, 평민의 대표자를 소집해 열리는 신분제 의회)의 제재를 벗어나 (현물보다는) 현금 형태의 세금을 징수하는 데 골몰했다. 때에 따라 삼부회는 군주의 요구를 거부하기도 했는데, 백년 전쟁이 한창이던 1356년에 런던에 인질로 사로잡힌 왕 장 2세의 몸값 요구를 삼부회가 거부한 경우를 일례로 들 수 있다.

이에, 군주들은 유사시로 한정했던 특수세를 항구적으로 징수할 방안을 궁리했다. 1439년에 샤를 7세는 신민들이 종군의무를 대신해 연 1회 종군의무 면제세를 납부하도록 했다. 그렇게 하여 거둬들인 세금은 전투에 전문화된 친위대를 유지하는 데 쓰였다. 1614년 이후 프랑스 대혁명이 무르익던 1788년까지 삼부회는 단 한 번도 소집되지 않았다. 이후 프랑스가 절대 군주제로 변모하면서 세금부담은 날로 증가해, 세금징수에 반발한 납세자들은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다시 강력한 진압을 불러왔다. 이처럼 불공정하고 터무니없이 높은 세금에는 설상가상 세리들의 이중수탈이 더해져 세금에 짓눌린 평민들의 분노는 커져만 갔다.

그리하여 1789년 채택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은, 국민의 조세 부담능력에 따라 공평하게 조세부담이 이뤄져야 한다는 (프랑스 공화국의 평등 원칙의 내용에도 적용된) 조세평등주의 원칙과, 조세는 투표를 통해 국민의 대표 동의를 얻어 결정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약탈의 야욕

하지만 19세기 내내 답보상태에 빠졌던 조세제도는 민주적 발전을 저해했고, 세금은 불평등 구조를 심화하는 강력한 기제로 작용했다. 그 결과, 세금논쟁이 빠르게 퍼져 치열한 찬반공방이 벌어졌다. 좌파 진영에서는 세금에 대한 불신이 필연적 결과라고 봤다. 무정부주의자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은 “일률 과세를 적용하는 국가는 갱단의 두목이나 다를 바 없다. 국가야말로 중재재판소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라고 직언하기도 했다.

우파 진영에서는 자유주의 담론이 주류를 이뤄, 프레데릭 바스티아의 경우 국가의 약탈 의지가 “보조금, 누진세, 무상교육, 노동권, 재정지원의 형태로 무한히 증식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1914년에 채택된 누진소득세는 소득수준에 비례해 세율을 적용함으로써 민주적 조세제도의 새로운 대안으로 떠올랐다. 누진소득세는 의회의 회계연도 예산안에 대한 합의 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실질적인 불평등 감소와 소득재분배 효과를 불러온다. 그러나 조세에 대한 불신은 해소되지 않는다. 한편에서는 세제개혁 요구가 빗발치고 다른 한편에서는 불평등이 여전히 뿌리 깊이 박혀있어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게 한다. 그 와중에 조세수입의 감소로 이어지는 탈세, 늘어가는 감세 특혜, 사회보장제도의 혜택이 미치지 못하는 사각지대 등의 이슈는 조세에 대한 불신을 가중한다. 이런 문제는 개개인의 세금에 관한 인식에 악영향을 미치며, 숙의 민주주의적 기반을 흔든다. 루스벨트 정부(1933~1945) 시절 재무장관을 지낸 헨리 모겐소의, “세금이란 문명화된 사회를 얻기 위해 치르는 비용”이라는 말을 되뇌게 하는 대목이다.

 

5. 사회정의와 세금과의 상관관계

“예전에는 더 좋았었다”라는 말은 미래를 염려하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보수적 사고방식의 전형에 해당한다. 각종 사안에 걸친 회고적 시선은 과거에 대한 향수를 자극한다. 특히 지난 수십 년 동안 가장 부유한 납세자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던 조세정책도 이에 해당한다.

사회정의와 세금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20세기 초, 대부분 선진국에서의 조세정의란 소득이 높을수록 더 많은 세금을 부담하는 누진세의 형태를 띠었다. 그 목적으로 프랑스에서는 1901년에 누진상속세를 도입했고, 1914년에는 소득세를 도입했다. 그러나 탈세에 대한 세무당국의 안일한 대처가 너무나도 만연한 나머지, 최상위 부유층은 탈세를 세금의 반대급부로 여겼고, 조세정의의 실현은 묘연했다. 그런 배경에서 1920년 6월 25일에는, 다소 놀랍기도 하지만 ‘국민연합(Bloc national)’을 구성한 다수 우익세력의 주도로 55만 프랑 이상의 소득에 일괄 50%의 세금을 부과하는 법을 도입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비로소 누진소득세를 실질적으로 도입할 수 있었다. 우익 정치인들이 돌연 이 같은 결정을 내린 데는 몇 가지 사연이 얽혀 있었다.

우선, 제1차 세계대전을 치르느라 바닥난 공공재정을 복원하는 것이 무엇보다 급선무였다. 더불어, 프랑스의 부르주아지는 러시아에서 성공을 거둔 혁명의 기운이 행여 프랑스로까지 확산하지는 않을까 몹시 우려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시에는 55만 프랑 이상의 소득수준을 충족하는 세대 수가 고작 몇백에 불과했다. 다른 한편, 우파와 극우세력은 세제개편에 반대하는 활동가들과 연합해 1920년대 말부터 ‘납세자 보호’라는 명목으로 불만을 표시했지만 별다른 소득을 얻지는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자 정부의 세금 수요는 늘어났고, 그에 따라 부유층에 부과하는 세금도 함께 늘어났다. 이후 경제는 꾸준한 성장세를 이어갔으며 과세에 대한 여론의 동요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1949~1972년 기간 동안 소득수준별로 0%~60% 세율을 적용한 8단계 과세표준을 적용했다. 누진 소득세는 긍정적 결과를 가져왔고 조세제도의 소득재분배 효과도 비교적 높게 나타났다. 예외적인 인상률까지 모두 고려했을 때, ‘영광의 30년’부터 1970년대 말에 이르는 기간에 한계세율이 70%에 육박하는 최상위 소득 가구 수는 약 20만에 달했다.

그렇지만 누진세 개념에 이의를 제기한 사례는 드물었다. 당시 누진세는 논쟁거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세금 폭등이 적잖게 발생하곤 했다. 대표적으로 피에르 푸자드는 1950년대에 ‘조세탄압’을 비난하며 물리적인 방법을 동원해 소상인 과세에 맞섰다. 이런 반대운동은 대부분 중산층에 국한해 일어났고, 정부의 강압적인 관리체계가 반발의 주된 원인이었다. 이들에게 있어 부유층에 부과된 세율은 관심 밖의 일이었다.  

 

잇따른 선거 승리에 도취한 부유층

좌파 정부의 집권 직후인 1982년 12월 29일에는 최고한계세율을 초고소득층의 경우 소득의 65%까지 높이는 법률이 채택됐다. 그러나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와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집권으로 승리감에 흠뻑 도취한 부유층은, 그동안 국민적 화합의 결실인 소득을 더는 나누려 하지 않았다. 1990년대에는 일반사회보장부담금(Contribution sociale généralisée·GS)과 같이 누진세가 적용되지 않는 비례세의 비중이 늘어났다. 최고한계세율이 1990년에는 56.8%였으나 1998년에는 54%, 2009년에 이르러서는 40%로 감소했다. 과거와 비교하면 최고 부유층이 부담하는 세금은 대폭 줄었음에도, ‘몰수세’라는 멸칭으로 누진세를 별칭하는 경우가 빈번해졌다. 지금까지도 명맥을 유지하는 누진세의 기본 방침에 오명을 씌우려는 의도인 셈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프랑수아 올랑드는 2012년에 100만 유로를 초과하는 임금에 대해 75%의 세금을 부과하는 계획을 밝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공약을 급히 번복하면서 최상위 과세표준구간의 과세율 상한선을 45%까지로 대폭 인하한 바 있다. 그런데도 고소득자의 능력을 착취하는 세금정책이라는 거센 비난을 피해갈 수 없었다. 그러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부유층에 부과된 세금이 소폭이나마 늘기는 했지만, 여전히 과거의 초고소득 세율을 훨씬 밑도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6. 감세, 탈세, 그리고 조세 천국

프랑스 조세 당국이 발표하는 명목세율과 납세자들이 실제로 부담하는 실효세율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런 차이는 합법적 또는 비합법적 방법으로 가정과 기업이 세금을 피해갈 방법이 존재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배경을 이해하려면 최근 늘어만 가는 조세감면 혜택의 내용부터 살펴봐야 한다.
미국의 경제학자 아서 래퍼는 “지나친 세금은 세금을 죽인다”라고 말했다. 세금 납부를 꺼리는 분위기가 만연했던 1980년대에 조세 당국은 아서 래퍼의 말마따나 대기업과 부자들의 세금을 감면해주는 장치를 지속해서 늘려갔다. 프랑스에서는 조세감면 혜택 적용 건수가 1981년 320건에서 2012년 449건으로 증가했고, 그 규모는 연간 약 830억 유로에 달했다. 원칙적으로 법인세율은 기업이 벌어들인 수익의 33%를 적용하지만, 영세기업의 경우는 수익의 39%, 직원을 5,000명 이상 고용한 기업은 25%, CAC40에 상장된 기업은 8%를 세금으로 납부하고 있다. 기업 규모에 따른 세율 차이는 주로 대기업에 적용되는 세액공제 혜택(예: 연구·개발 비용 공제)에서 발생한다. 부유층 가정 역시 조세감면 혜택을 누리는데, 일부 경우는 전문 세무 상담을 통해 소득세를 전혀 납부하지 않는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기도 한다.

2008년에 (2013년 세금 사기 혐의로 기소된 제롬 카위자크 전 예산처 장관을 성원으로 하는) 프랑스 의회 위원회는 각종 조세감면 혜택의 전체 규모가 약 수천억 유로에 달하며, 감세가 고용과 성장으로 이어지지 않고 국가 부채만 늘린다고 평가하면서 해당 제도의 폐지를 촉구했다. 합법적 조세감면 장치는 조세회피처를 통한 손쉬운 조세회피 방법을 포함한다.

1980년대를 시작으로 1990년대에 특히 전자금융거래가 활성화되고 조세 전문 변호사와 같은 전문가가 급증하면서, 부유한 납세자가 조세회피처로 빠져나가는 길이 활짝 열렸다. 탈세 추정치에는 이론의 여지가 있으나, 1982년에 조세회피처에 은닉한 자산을 약 800억 프랑으로 추정한다. 반면, 오늘날에는 그 액수가 약 800억 유로로 늘어나 30년 만에 6배 이상으로 규모가 늘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

 

1조 유로, EU 내 조세회피 규모

앞서 언급한 두 가지 현상이 결부돼 조세회피 가능성이 크게 높아졌다. 조세회피는 합법적인 틀 안에서 세금을 줄이는 조세 최적화와 불법에 해당하는 탈세로 구분할 수 있다. 2013년 5월 유럽의회가 발표한 보고서에 의하면, 유럽연합 내에서 세금 회피로 발생한 세수 손실액은 총 1조 유로에 달했다.

 

“근절을 약속합니다.”

국가의 과세권을 지속적으로 침탈해오는 조세회피에 대해 정부당국은 어떤 방식으로 대응했을까? 겉으로는 단호한 조치가 취해지는 듯했다. 2009년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조세회피처와 비밀은행을 모두 근절하겠다”라고 거침없이 선언했다. 그러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조세회피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횡행하고 있다. 경제학자 가브리엘 주크먼은 신고되지 않은 개인 비밀계좌로 빠져나간 돈의 규모가 전 세계 GDP의 6%에 해당하는 4조7천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탈세에 관한 발표 내용은 나날이 더 강경한 태도를 보이지만, 공공당국의 조치는 여전히 소극적이다. 

대표적인 예로 2008년 세계 2위의 금융그룹인 HSBC은행에 비밀계좌를 개설한 탈세자 명단 유출사건을 들 수 있다. 2005년과 2006년 사이에 거의 2천억 유로에 달하는 자금이 해외로 빠져나간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프랑스의 에리크 뵈르트 예산처 장관은 정규 부서를 신설하고 역외탈세 혐의가 포착된 4,700명으로부터 세금을 징수하자는 제안을 했다. 당국은 2009년 4월 20일부터 12월 31일까지 사례별로 과세 대상을 분류하고, 비밀계좌를 신고하지 않을 경우 가산세와 추징금을 부과하는 방법으로 12억 유로의 세금과 과징금을 거둬들일 수 있었다. 2013년 6월에는 행정공문에 근거해 자진신고를 유도하는 시정 절차를 제도화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2014년에는 자발적 세무신고를 통해 소득세 2억 2,200만 건, 등기료 4억6,100만 건, 부유세 8억2,700만 건이 접수됐다. 하지만 부유층 납세자에 대한 형사기소 사례는 극히 드물다. 이런 상황은 국가의 통치권이 탈루 세액의 일부를 수습하는 선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회의에 빠지게끔 한다.

이제 더는 조세회피를 목적으로 케이맨 제도를 찾을 필요가 없다. <포브스>가 발표한 순위를 살펴보면, 이제 ‘최고’의 조세회피처는 미국의 델라웨어주다. 이 작은 지역에만 미국 500대 그룹사의 2/3가 사서함을 보유하고 있다. 델라웨어주에는 거주민의 수(95만 명)보다 기업의 수(120만 개 처)가 더 많을 정도다. 이곳에서 기업들은 규제를 피하면서 파나마보다 더 높은 익명성을 보장받을 수 있다.

런던 금융계 종사자 대다수는 2016년 6월 국민투표에서 ‘유럽연합 잔류’에 표를 던졌다. 하지만 투표결과, 유럽연합 탈퇴 표가 우세해 브렉시트(Brexit: 영국의 EU 탈퇴)가 결정됐고, ‘세계 금융중심지’로서의 런던의 위상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가 예상되면서 유럽 제일의 금융경제 모델인 런던 금융계가 위협을 받게 된 것이다. 그동안 런던은 전 세계 다국적 기업들이 유럽 시장에 접근하는 통로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영국 연합왕국의 해외 영토, 즉 과거의 영국 식민지로 구성된 역외 조세회피처 조직망의 핵심으로 자리매김해왔다.

 

7. 국가를 위한 자선활동

서구에서는 지난 30여 년 동안 조세와 지출을 줄이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각종 방안을 도입해왔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오늘날 정부들은 자원봉사단체나 자선단체에 사회복지사업을 위탁함으로써 재정부담을 더는 한편, 민간단체의 자선활동과 후원을 적극적으로 독려하는 추세다. 이 노력을 다시 풀이하면, 조세정책 실패로 생겨난 예산공백을 온정의 손길로라도 막아보려는 심산인 것이다. 

자선사업의 개념은 19세기 말에 미국에서 처음 생겨났다. 1892년에 4천 명 수준이었던 미국의 백만장자 수는 1916년에 들어 무려 4만 명에 달할 만큼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였다. 재력가들은 대중에 자신들의 관대함을 알림과 동시에 자신이 축적한 부를 정당화하고자 대의명분을 앞세운 투자를 감행했고, 그 결과 수많은 도서관과 병원, 대학이 설립됐다. 당시에는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민간자본을 활용한다는 것은 좀처럼 흔치 않은 일이었다. 경제학자이자 작가였던 폴 라파르그는 1887년, “막대한 부당이익을 챙겨서 최소한으로 되돌려주는 행위가 바로 자선활동이다”라고 꼬집어 지적한 바 있다.

기업 자본가들은 예술과 보건, 과학 분야에는 더없이 관대하고 이타적이지만 공장 안에서는 인색하기 그지없고 폭압적이었기에, 이들의 자선활동을 지켜보는 노동자들의 시선은 의심으로 가득했다. 대표적인 예로, 1890년대 초에는 펜실베이니아주의 수많은 철강 공장이 강압적인 방식으로 운영되자 공장 노동자들은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의 후원으로 설립된 건물 출입을 거부했으며, 카네기가 도서관 건립 후원을 자청했던 해당 주의 46개 도시 중 20개 도시는 이내 그의 제의를 거절하기도 했다.

 

교회의 번영을 위해

오늘날 그 어떤 자치정부가 억만장자의 기부를 거절할 엄두를 낼 수 있을까? 파리시는 2014년에 프랑스 최고 재벌 베르나르 아르노 소유의 럭셔리 그룹 LVMH(루이뷔통 모에 헤네시·Louis Vuitton Moët Hennessy)가 전액 출자해 설립한 현대미술박물관을 유치하는 과정에서 기업을 특별예우한 바 있다. 디트로이트시의 경우는 더욱더 말할 나위가 없다. 디로이트시는 2013년 파산 선언 이후, 포드 재단과 크레스지 재단, 나이트 재단으로부터 일정 금액의 후원을 받아 공무원 연금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처럼 겉으로나마 ‘관대한’ 기업후원은 공공부문 긴축재정을 펼치는 대다수 서구권 국가들에 없어선 안 될 유용한 재원이다. 그러나 언론매체의 주목을 받아 부각된 재벌과 기업의 후원 활동은 기실 전체 자선활동을 놓고 봤을 때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정부 당국이 세수의 감소를 무릅쓰고 세금 공제 혜택을 부여해가며 장려하는 ‘대중의 후원’도 간과할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한다.

프랑스의 여러 가정이 비영리 단체에 기부하는 연간 총액은 40억 유로가 넘는다. 이는 프랑스 국내총생산(GDP)의 0.2%를 차지하는 액수다. 그러나 프랑스의 기부 규모는 캐나다(60억 유로, GDP의 0.5%)와 영국(110억 유로, GDP의 0.7%), 그리고 특히 미국에 비하면 낮은 수준이다. 미국의 경우 2013년을 기준으로 10가구 중 9가구 이상이 기부했으며, 전체 액수는 GDP의 1.4%에 해당하는 2,410억 달러(1,750억 유로)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된다. 기부금의 상당 부분은 교회로 전달됐다.

 

미 정부는 비영리 단체의 1위 고객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와는 달리 비영리 자선단체와 지역사회단체는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로만 결성되지는 않았다. 사회복지사업에 직접 관여하지 않으면서 비용은 최소화하고자 하는 정부전략의 결과이기도 하다. 국가기관에 속하지 않는 비영리 부문(이른바 제3부문)의 경우 임금노동자의 법적 지위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게다가, 불안정 계약이나 시간근무제 형태로 고용된 사례가 시장부문의 두 배에 달한다. 이에 해당하는 많은 단체는 무급으로 일하는 수백만의 자원봉사자에 의존하며 근근이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를테면, 빈곤구제 활동은 엠마우스나 사랑의 식당(Restos du Cœur)과 같은 대형조직, 혹은 지역을 기반하는 소규모 단체를 중심으로 상당 부분 비영리와 무상봉사를 통해 이뤄진다. 미국 정부는 사회복지 분야에서 활동을 펼치는 백만여 비영리 단체에 사업을 위탁하는 최대 고객임과 동시에 보조금을 지원하는 최대의 후원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캘리포니아 우드사이드 마을의 사례에서 보듯, 지역연대와 사회활동은 역효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1998~2003년 부촌에 해당하는 우드사이드의 유일한 초등학교는 부모, 주민, 졸업생들로부터 1천만 달러의 기부금을 받았다. 학교는 기부금을 활용해 500명의 학생이 음악과 미술, 그리고 컴퓨터를 배울 수 있도록 수업을 제공했다. 하지만 이 마을에서 15km 떨어진 곳에 있는 또 다른 마을 라벤스우드 내의 여러 초등학교에는 아무도 기부금을 제공하지 않았다. 가계소득이 우드사이드의 1/4에 지나지 않는 이 마을 주민들은 아이들에게 바이올린 수업을 제공할 여력이 없다. 정부가 세금공제 혜택을 제공하며 독려하는 기부금제도가 불평등을 초래한 셈이다.

 

8. 사회분담금 - 열망하라, 꿈과 희망을

상상 속의 이상향은 열망만큼 큰 절망으로 돌아온다. 이상향의 실현은 다른 세상에서나 가능하다는 사실을 새삼 자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르나르 프리오는 사회를 완전히 바꾸거나 대체할 막강한 도구가 이미 우리의 손에 쥐어져 있다고 말한다. 19세기와 20세기에 걸친 사회투쟁의 결실로서,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기는 하지만, 사람들의 열망을 자극하지는 않는, 그 도구는 이름하여 사회분담금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속된 노동운동에 힘입어 생겨난 사회분담금의 기본원칙은 기업 활동으로 창출된 부의 일부를 모아 퇴직연금, 사회보장, 실업보험 등의 자금을 조달하는 상호부조에 있다. 구체적으로는 전체 임금의 40%를 모아서 ‘사회보장’, ‘퇴직금’ 등의 금고에 불입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해서 모이는 돈의 규모는 상당하다. 프랑스의 경우 2014년을 기준으로 4,760억 유로(기업 분담금 공제 기금에 불입하는 일반사회분담금을 포함함)로 국내총생산의 22%를 웃돌며, 국가예산을 훨씬 넘어서는 액수다.
사회분담금은 시장 내에서 자본으로 축적되거나 이윤을 발생시키지 않는다. 사회분담금은 간병인 임금, 퇴직연금, 또는 복지혜택으로 쓰인다. 세금과 달리 국가나 정부 부처가 아닌 별도의 기금관리공단에서 운용한다. 1960년대에 정부 당국이 노사동등주의원칙을 적용하기 이전의 사회보장기구는 노조 대표 3/4과 고용주 대표 1/4이 대표단을 구성했다. 노동자는 국가나 시장과 무관하게 스스로 생산한 부의 일부를 직접 관리하곤 했다.

 

노동 시장의 철폐, 임금과 고용의 연결고리 끊기
여러 유럽 국가(독일, 오스트리아, 벨기에, 프랑스,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등)가 이미 복지제도에 이와 같은 내용을 반영하고 있다. 이렇게 얻어낸 결실을 바탕으로 논리를 발전시키고, 그 경계를 확장하다 보면 마침내 흥미로운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사회학자 베르나르 프리오는 설명했다. “이미 존재하는 사회분담금의 기본 바탕 위에 고용주가 지급하는 임금을 분담금으로 대체함으로써 임금 전체를 사회화하는 방안을 그려볼 수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직원에게 임금을 지불하는 고용주는 더는 필요치 않다. 고용주를 대신하는 기업의 관리부는 분담금을 납입하고, 직원을 채용하지만 임금을 지급하지는 않는다.” 
임금명목으로 마련된 기금에 분담금을 납입하고, 기업 대신 해당 기금에서 직원들 앞으로 직접 급여를 지급하기 때문이다. 임금과 고용의 고리를 끊으면 노동시장은 철폐될 것이다. 임금노동자가 임금의 반대급부의 상품으로 고용주에게 노동력을 팔지 않는다면, 노동자를 고용주에게 귀속시키는 지배 관계도 사라진다. 이상향일 뿐이라고 생각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현재 프랑스에서는 약 1,400만 명에 달하는 연금수령자들이 퇴직 후 이와 같은 체계 안에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사회화된 임금

분담금을 통해 투자 역시 사회화할 수 있다. 오늘날의 시장체계에서는 소유자와 경영자만이 기업이 창출한 이익의 사용처(배당, 투자)를 결정한다. 그러나 특정한 목적을 띠는 분담금을 조성하면 보상금이나 금융소득 없이도 미래의 계획을 재정적으로 지원을 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조직원 공동의 결정을 따를 수 있다. 기금은 선출된 직원이 관리하며, 부족함 없이 운용될 것이다. 아울러 직원들은 기업의 생산량, 생산 방식, 그리고 어떤 조건에서 기업이 운영돼야 하는지에 관한 주요 경제적 결정권을 가질 것이다.
오늘날 세금으로 운영되는 주택, 에너지, 통신 및 금융과 같은 각종 공공서비스에도 똑같이 사회분담금 운영 방식을 적용할 수 있다. 베르나르 프리오는 다음과 같이 설명을 갈무리했다. “새로 창출된 부를 모두 사회화된 임금인 분담금에 할당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내포한다. 궁극적으로, 가치를 정의하고 생산하며, 그 가치를 어떻게 어디에 적용할지를 결정하는 권한이 임금노동자에게, 즉 주권을 가진 국민에게 돌아옴을 뜻하기 때문이다.”   

 

글·<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편집부

번역‧이푸로라 poorora@daum.net
번역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