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의 오해
재구성돼야 할 주체사상

[Corée 특집] 세습, 다르게 대면하기

2010-11-05     방인혁/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교수

1994년 7월 김일성 주석 급서 이후 대량의 아사자와 탈북자가 속출한 1997년 2월 황장엽의 망명은 북한 체제 붕괴가 임박했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고, 철학자로서 황장엽의 이력은 그의 망명을 ‘주체사상의 망명’ 등으로 인식하게 했다. 3대 권력승계가 공식화되고 당 창건 65주년 기념식으로 요란했던 지난 10월 10일 그의 돌연한 죽음은 북한의 현재와 장래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주체사상의 대부’가 망명했음에도 북한 체제는 붕괴하지 않았고 주체사상도 여전히 건재해, 그 중요한 한 부분인 혁명적 수령론과 후계자론에 근거해 3대 권력승계라는 전대미문의 일까지 발생했다. 예상과 다른 이런 사태 전개는 주체사상의 이론적 체계화 과정에서 황장엽의 역할, 주체사상과 망명 이후 황장엽이 제시한 ‘인간중심철학’의 차이점, 나아가서는 주체사상과 인간중심철학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요구한다.

황장엽은 제한적 역할에 그쳐

망명 이전부터 한국에서는 주체사상의 이론적 체계화 과정에서 황장엽이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했다. 북한의 국가 형성 직후 이른바 ‘새로운 민족 간부’ 양성책의 일환으로 모스크바대학 철학부에서 유학했고, 김일성종합대 총장과 당의 사상 담당 비서로 일한 경력 등을 고려하면 이런 평가가 근거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망명 이후 황장엽이 발간한 자서전이나 철학 연구서들을 보면 이런 평가와 전적으로 배치되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의 몇 가지 사실은 주체사상 형성에서 그의 역할에 대한 기존 평가에 상당한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첫째, 주체사상의 이론적 체계화 과정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시기인 1966~67년 황장엽은 ‘독자적인 과도기론’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을 제기함으로써 당시 당 조직지도부장 김영주와 중앙당학교 교장 양형섭에게 반당 수정주의 이론가로 비판받았다.(1) 이 시기 북한 내부의 논쟁은 1967년 5월 25일 김일성 명의의 논문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과도기와 프롤레타리아 독재 문제에 대하여’로 종결된다. 김일성의 이 논문은 황장엽의 입장을 전면 비판한 것으로, 현재도 북한에서 ‘5·25 교시’로 불리면서 주체사상의 사상이론적 독창성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경위는 분명하지 않지만, 황장엽은 1968년 김일성의 신임을 회복하고 1970년 10월 20일 김일성과 독대해 주체사상 연구에 전념할 것을 승낙받았다고 한다.(2) 황장엽은 수정주의로 비판받은 이 시기에 마르크스주의의 계급주의적 관점과 결별했다고 주장한다.(3) 이를 통해 주체사상의 초기 형성 과정에는 양형섭·김영주 등 황장엽과 대립되는 견해들이 정통으로 인정됐음을 알 수 있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비판

둘째, 1974년 2월 당 정치국 정치위원에 선임된 김정일은 1974년 4월 2일 당 선전일꾼들과의 담화 ‘주체철학의 리해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에서 ‘한 사회과학자’가 주체사상의 마르크스-레닌주의로부터의 계승성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즉, 사람 중심의 주체사상을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무관한 인간철학으로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정일의 이런 비판은 12년이 지난 뒤에도 되풀이됐다. 1986년 6월 27일자 담화 ‘주체사상은 인류의 진보적 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사상이다’에서 김정일은 주체사상의 계승성을 부정하는 일꾼들이 주체사상을 민족 자주성을 강조하는 사상인 것처럼 오해하고 있다고 비판했고, 같은 해 7월 15일 담화 ‘주체사상 교양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에서도 주체사상을 유물변증법의 일반 원리와 무관한 것으로 오해하는 견해를 질타했다. 주체사상의 계승성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계급적 입장과 혁명적 원칙을 견지하는 것이라면, 이런 비판들은 마르크스주의의 계급주의적 관점과 결별했다는 황장엽에 대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중심철학이 빠진 함정

셋째, 황장엽 망명 직전인 1996년 7월 26일 김정일이 당 이론지 <근로자>에 기고한 ‘주체철학은 독창적인 혁명철학이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김정일은 “일부 사회과학자들이 혁명 실천의 요구로부터 철학적 문제를 탐구하지 않고 대외 선전의 특성에 맞게 한다는 구실로 주체철학을 선행철학의 틀에 맞춰 해석하거나 선전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1974년과 1986년 담화들에서와 달리 주체사상의 독창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 시기 인간중심론을 해외에 선전하기 위해 일본의 좌익 지식인이나 중국 공산당원들과 긴밀히 접촉했다는 황장엽 자신의 술회(4)와 당시 당 국제 담당 비서로 주체사상의 국제적 선전을 주도한 점에서 김정일의 비판 대상이 황장엽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미 1984년부터 황장엽은 북한도 중국식 개혁·개방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느꼈으며, 중국이 제2의 혁명을 하고 있고 덩샤오핑이 위대한 공적을 쌓았다고 주장했다.(5) 주체사상의 독창성에 대한 이 시기 김정일의 강조는 북한의 위기 극복의 해법을 둘러싸고 황장엽의 견해를 전면적으로 비판하기 위한 의도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북한에서 유수한 철학자이자 학계와 당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던 황장엽은 자신의 회고대로 주체사상의 철학적 원리 연구를 주도한 것은 사실일지라도, 사상과 이론 및 방법의 전일적 체계라고 주장하는 현재의 주체사상의 이론적 체계화 과정에서는 배제됐을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다음의 사실로도 추정할 수 있다. 황장엽은 입버릇처럼 자신이 김일성의 이론 서기로 7년을 복무하며 김일성 명의의 중요한 논문과 담화들을 기초했다고 했다. 또한 망명 이후 한국에서 최초로 출간한 자서전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에서는 사회주의 진영의 붕괴에 대한 북한의 정책적 대응으로 평가되는 김정일의 1991년 5월 5일 담화 ‘인민대중 중심의 우리식 사회주의는 필승불패이다’와 1992년 1월 3일 담화 ‘사회주의 건설의 력사적 경험과 우리 당의 총로선’도 자신이 작성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황장엽은 생전에 현재 북한에서 주체사상의 이론적 체계화에 대단히 중요한 문건들로 평가되는 앞의 1974년과 1986년 김정일 담화들에서는 침묵했다.

전체주의·국가주의 위험성

황장엽은 주체사상의 철학적 원리 연구나 북한의 대내외 정책과 관련한 이론적 작업들은 어느 정도 담당했지만,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계승성과 독창성이라는 주체사상 이론 체계의 핵심적 부분의 작성에서는 배제되고 지속적으로 비판받았음을 알 수 있다.

주체사상의 이론적 체계화 과정에서 황장엽의 이런 제한적 역할은 북한의 주체사상과 망명 이후 황장엽이 주장한 인간중심철학의 관계를 해명하는 열쇠가 된다. 주체사상과 인간중심철학은 마르크스주의를 물질 중심의 세계관으로 해석하면서 사회역사 발전의 요구에 맞게 철학의 근본 문제를 물질과 의식의 관계가 아닌, 가장 발전된 물질인 사람이 세계에서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의 문제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에서는 공통적이다. 그러나 주체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선행 노동계급의 철학으로 보고 계급성과 혁명적 원리를 인정하면서, 물질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원인을 혁명운동의 발전이나 인간의 과학적 지식 수준이 낮은 점에서 찾는다. 이에 반해 황장엽은 마르크스주의가 실천의 적용에서 변증법 원리를 왜곡시킴으로써 계급투쟁과 혁명론에 잘못 적용했다고 주장한다.(6) 마르크스주의 전반을 비판하는 황장엽은 결국 포이어바흐로의 회귀를 주장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종교를 인간의 본성에 맞게 개조하려고 한 포이어바흐의 기도를 비웃었지만 그것은 탁견”(7)이라고 주장하면서 이후 사랑과 동지애 등을 인간중심철학의 중요한 범주로 도입했다.

주체사상과 인간중심철학이 공유하는 철학의 근본 문제에 대한 재검토가 진행된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반에는 사회주의 진영 안팎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생산력주의적이고 경제결정론적인 관점과 심지어 국가주의적 편향을 비판한 시기였다. 당시 사회주의 진영을 지배한 정통 마르크스주의는 스탈린 이후 경직된 소비에트 마르크스-레닌주의였다는 점에서 1960년대 후반기 동독의 실천 논쟁, 일본의 주체성 논쟁 및 프랑스의 알튀세르 이론 득세 등은 그에 대한 비판의 일환이었다. 황장엽의 마르크스주의 인식과 마찬가지로 주체사상도 마르크스의 사상 혹은 160여 년간 다양하게 대립된 마르크스주의 전통 전부를 물질 중심적 세계관으로 규정한 것은 오류다. 주체사상이 독창성과 계승성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당시 정통으로 인정되던 소련의 마르크스-레닌주의였지 마르크스 사상이나 마르크스주의 전체에 대한 그것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 내부에서 길 찾기

사르트르는 “마르크스주의를 넘어선다는 주장은 최악의 경우 마르크스주의 이전으로 복귀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고, 반면 최선의 경우에도 이미 자신이 넘어섰다고 주장하는 바로 그 철학에 이미 포함된 사상을 재발견하는 것일 뿐”(8)이라고 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마르크스주의 전체로 오해한 주체사상이 최선의 함정에 빠진 것이라면 포이어바흐로 돌아간 황장엽의 인간중심철학은 최악의 함정인 셈이다.

인간을 탈역사화된 민족에 귀속시키면서 계급이해가 아닌 사회공동의 이해를 주장하는 황장엽의 인간중심철학에는 전체주의와 국가주의의 위험이 내재한다. 뉴라이트 등 한국 사회의 보수세력 가운데 황장엽의 인간중심철학에서 자신의 사상적 정당성을 발견하려는 시도(9)가 나타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주체사상 연구의 현재적 의의는 경제결정론으로 매도되는 마르크스주의의 진면목을 발견하기 위해서다. 경직된 교조적 소비에트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마르크스주의 내부에서 극복하려는 시도 속에 주체사상의 문제제기는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사르트르의 경구처럼 주체사상이 새롭게 밝혔다는 많은 문제들이 이미 마르크스의 사상 속에 존재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마르크스와 작별하고 포이어바흐로 회귀한 황장엽의 인간중심철학은 탈역사화된 사회와 민족 개념으로 인해 전체주의와 국가주의의 검은 그림자를 떨치기 힘들 것으로 판단된다.

글•방인혁
사회과학 출판을 하다 2008년 뒤늦게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마르크스주의 역사, 주체사상 및 서구중심주의 비판 등을 연구한다.

<각주>
(1) 황장엽,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pp.146~149, 한울, 1999. 황장엽, <개인의 생명보다 귀중한 민족의 생명>, 시대정신, pp.138~139, 1999.
(2) 황장엽, <개인의 생명보다 귀중한 민족의 생명>, 시대정신, p.162, 1999.
(3) 같은 책, p.139.
(4) 황장엽, 위의 책 <나는 역사의 …>, pp.224~237.
(5) 같은 책, pp.218~219.
(6) 황장엽, <세계관: 맑스주의와 인간중심철학Ⅲ>, 시대정신, pp.39~40, 2001.
(7) <황장엽 비밀파일>, <월간 조선> 1997년 4월호 별책부록.
(8) Sartre, J. P./Barnes Huzel E.(trans.), 1968, Search for A Method(N. Y.: Vintage Books), 7.
(9) 전향한 주사파 김영환은 2006년 11월 28일 CBS <공지영의 특별한 인터뷰>에서 황장엽을 ‘20세기 최고 사상가’라고 주장했고, 국정원 산하 통일정책연구소는 황장엽과의 공동연구 결과물로 <주체사상과 인간중심철학>을 간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