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의 역설, 그리고 독창성

2019-03-29     장미셸 프로동 l 파리정치대학 교수

한국전쟁 이후 한국은 미국 군정과 독재정권을 거쳤지만, 한국 영화는 할리우드의 공식을 벗어나 끊임없이 문화적 영향을 발휘해왔다. 반면 한국의 여성 감독들의 활약은 상대적으로 미약한 실정이다. 이는 마치,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반영하는 듯하다.
 

한국 영화의 탄생은 일제강점기(1910~1945)를 기점으로 한다. 탄생과 동시에 숙명적으로 일제침략에 대한 저항과 투쟁의 역사를 써 내려갔던 한국 영화는 사회주의 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싹을 틔웠다. 한국 영화의 시금석이라 평가되는 작품은 나운규의 1926년 작품 <아리랑>이다. 해당 영상은 소실돼 오늘날 더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제곡으로 쓰여 널리 불리게 된 동명의 전통민요 <아리랑>은 오늘날 한민족을 대표하는 노래로 자리 잡았다. 

이후 한반도 분단을 초래한 한국전쟁(1950~1953)을 거치며 한국 영화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를 갖추기에 이른다. 한편, 북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 권력자들의 세대를 거듭한 영화에 대한 식지 않는 애정 덕에 영화 제작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고, 사회주의 리얼리즘 측면에서 흥미로운 요소가 간혹 눈에 띄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 영화와는 대조적으로, 제7의 예술이라 불리는 영화의 발전에 북한 영화가 기여한 흔적은 찾아보기가 힘든 것이 현실이다.

한국 영화는 역설이 빚어낸 놀라운 결실이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은 미 군정기를 거치며 경제적으로는 빠른 발전을 이뤘으나, 정치적으로는 반대 세력을 철저히 검열하고 침묵시키는 데 주력했다. 격화된 냉전 체제로 미 군정의 서슬이 푸르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는 서슴없이 보호주의를 표방했다. 가장 직접적인 예로 관련 법률에 따라 1967년부터 시행하고 있는 스크린쿼터제를 들 수 있다. 이후 상당 기간 외화 대 한국 영화의 극장상영일수를 2:1의 비율로 제한하는 교호상영제(1974~1996)를 실시하기도 했다. 한국은 스크린쿼터제를 무기로 할리우드 영화의 영향에 상대적으로 덜 노출됐던 국가들도 굴복했던 미국의 문화 패권주의에 제동을 걸 수 있었다. 미국 정부와 영화계는 할리우드 영화의 진격에 한국 영화가 속수무책일 것이리라 속단했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흘러, 그 판단은 치명적인 실수였음이 밝혀지게 됐다.

195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한국 영화의 제작 편수는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였다. 그리고 스크린쿼터제가 도입되자, 한국의 여러 영화 제작·배급사는 국내 영화 의무상영 비율을 억지로 맞추기에 급급했고, 흥행의 보증수표였던 해외영화 수입에 더 많은 공을 들였다. 궁여지책으로 공장에서 찍어내듯 제작된 각종 장르(통속극, 수사물, 모험 사극, 전쟁물 등)의 이른바 ‘쿼터 채우기 졸속 영화(quota quickies)’를 마구잡이로 양산해냈다.(1) 당시의 한국 영화산업은 정부의 이념적 통제 대상이었을 뿐 아니라, 영화 제작 자금을 지원하는 지역 폭력집단과도 유착돼 있었다.

그러나 영화를 기계로 찍어내다시피 하던 당시의 척박한 여건 속에서도, 한국 영화 1세대 거장들은 작품성이 돋보이는 영화를 탄생시켰다. <지옥화>(1958),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등의 작품으로 대표되는 신상옥 감독도 그중 한 명이다. 한때 그는 북한에 공식 영화사를 설립해 김일성 체제하에서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훗날 그는 미국에 가까스로 망명해 자신이 납북됐다고 주장했지만, 납치인지 자발적 월북이었는지의 사실은 여전히 미궁으로 남아있다. 그야말로 영화 같은 삶이었다.
또 한 명의 거장은 김기영 감독이다. 초현실주의 사조를 이끈 그의 작품은 주로 사회 풍자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묘한 에로티시즘을 풍기는데, 하나같이 사뭇 기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1960년 작품 <하녀>를 탄생시킨 김기영 감독은 스페인의 영화감독 루이스 부뉴엘에 곧잘 비견된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감독으로 꼽히는 임권택 감독을 빼놓을 수 없다. 데뷔 이래 총 104편의 영화를 만들어낸 임권택 감독은 과거에 ‘쿼터 채우기용’으로 졸속 제작된 자신의 초기작 70여 편을 모두 ‘가짜 영화’로 치부한다. 사실 이런 자가비판은 과장된 측면이 없지 않다. 몇몇 초기작은 졸속 가짜 영화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물론 그 영화들을 <짝코>(1980), <만다라>(1981), <길소뜸>(1985), <씨받이>(1986), <아제 아제 바라아제>(1989), <개벽>(1991)과 같이 단연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에 견주기는 어려울 것이다.

 

특히 <서편제>(1993)는 임권택 감독이 서구권에 실력을 알리는 계기가 됐고, <춘향뎐>(2000)과 <취화선>(2001)은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했다. 임권택 감독의 작품세계는 놀랍도록 풍부하며, 사실상 한국이라는 나라의 정치, 문화, 종교, 역사의 거의 모든 측면을 영화 속에 담아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독재정권의 민주화 탄압은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절정에 달했다.(2) 사회참여의 신념을 가진 이들은 탄압에 대한 반동으로 영화라는 장르를 빌어 저항 의식을 은유로 표현해냈고,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는 민주화운동가들 사이에서 비밀리에 유통됐다. 유럽과 아시아에서 일어난 ‘실험적 조류(Nouvelle vague)’의 영향을 받아 이들은 표현 양식을 심화함으로써 한국 영화에 새로운 특징을 가미했다. 이 영화들은 대부분 익명이나 단체의 필명으로 제작됐다. 이들 중 일부는 <서울예수>(1986)를 만든 장선우 감독, <칠수와 만수>(1988)를 만든 박광수 감독과 같이 훗날 영화계에 데뷔해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도 했다. 

장선우 감독의 경우, <꽃잎>(1996), <나쁜 영화>(1998), <거짓말>(1999)을 통해 사회적 금기를 조롱했고, 당돌하고 전위적인 시도를 거듭함으로써 정치 세태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나쁜 영화>를 촬영하는 과정에서 청소년들의 비행을 보다 적나라하게 담기 위해 장선우 감독은 아이들에게 소형 카메라를 맡겨 직접 촬영하게 하기도 했다. 박광수 감독은 <그들도 우리처럼>(1990), <그 섬에 가고 싶다>(1993), <이재수의 난>(1999)을 통해 한국의 현실과 체제에 대한 비판을 가함으로써 저항 영화의 오랜 계보를 이었다. 반면, 경제 발전과 현대화로 점철된 이 시기의 한국 경제는 ‘재벌’이라 명명되는 삼성이나 대우 등의 거대자본에 잠식돼 있었다. 영화산업 역시 그 영향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1987년, 민주화 물결이 영화에 미친 영향

1987년 이후, 한국 영화는 한국 사회의 민주화에 힘입어 새로운 도약의 시기를 맞이한다. 한국의 민주화 물결은 그로부터 10년 후, 김대중 대통령이 대선에서 승리를 거둬 최초의 여야정권 교체를 이루는 바탕이 되기도 했다. 영화인, 문화계 인사를 비롯한 기업가와 정치인들은 정치경제의 중심지인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항구도시 부산에 모여 한국 영화의 미래를 논의했고, 이는 1996년에 부산국제영화제가 탄생하는 계기가 된다. 이후 부산국제영화제는 빠르게 성장해 후발주자인 상하이국제영화제뿐 아니라 더 오랜 역사를 가진 홍콩, 도쿄 국제영화제를 능가함으로써 아시아 최고의 영화제로 발돋움했다. 1999년, 김대중 정부는 ‘프랑스 국립영화센터(Centre national du cinéma français)’와 유사한 성격의 영화 전담기관, ‘한국 영화진흥위원회’를 설립했다. 영화진흥위원회는 영화관련 교육, 영상문화 진흥, 창작역량 강화를 위한 각종 활동을 지원하며 한국 영화 발전을 도모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렇게 해서 도입된 한국의 새로운 영화 지원체계는 한국 영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1995년과 2012년 사이 한국 영화계는 독창성을 추구하는 영화뿐 아니라 공포영화와 판타지 영화를 중심으로 하는 장르 영화가 붐을 이뤘다. 이 시기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한반도 분단의 아픔을 표현해낸 전쟁영화의 흥행을 꼽을 수 있다.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2004), 강우석 감독의 <실미도>(2003),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2000), 박광현 감독의 <웰컴 투 동막골>(2005)이 바로 그 예다.
한국 영화의 발전은 K팝을 중심으로 한 한국의 문화상품이 아태지역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높은 인기를 누리는 현상과 맥락을 같이 한다. 한편, 2006년 한국은 미국의 통상압력 강화로 스크린쿼터제에 따른 한국 영화 의무상영일수를 기존의 146일에서 현행 73일로 축소했다. 하지만 한국 영화는 그동안 쌓아온 내공과 다양성을 토대로 동요 없이 지속적인 발전을 모색함과 동시에 창의성을 꾸준히 발휘해냈다. 

아울러, 농식품업과 유통업을 주축으로 하는 롯데그룹과 식품, 정보통신 기업 등을 소유한 CJ그룹 같은 재벌기업들이 영화 유통시장에 뛰어들어 ‘복합상영관’ 보급에 앞장섰으며, 그 결과 한국 극장산업은 안정성을 확보했다. 한국 영화의 중심 도시로 자리매김한 부산은 영화학교와 촬영 스튜디오 등의 시설을 두루 갖추고 부산국제영화제 전용 극장과 건물을 확보했다. 그밖에도 대학가에서는 영화기법 연구가 발전을 거듭했고, 다수의 영화 전문 잡지가 새로 출간됐으며, 다양한 영화 축제가 성황을 이뤘다.

 

한국의 ‘예술영화’를 대표하는 5인

예술적 측면에서, 이 시기를 대표하는 한국의 영화감독으로 다음의 5인을 꼽을 수 있다. 먼저, <복수는 나의 것>(2002)부터 <올드보이>(2003), <아가씨>(2016)에 이르는 박찬욱 감독의 작품은 ‘바로크(Baroque)’적으로 과장된 스타일과 만화에서 영감을 받은 잔혹한 폭력 묘사가 두드러진다. 본래 소설가로 등단해 활동했고 한때 문화부 장관을 지내기도 한 이창동 감독의 작품은 완곡하고 정적이며, 과거 독재정권에 반대했던 감독의 젊은 시절 기억을 반영하고 있다. 특히 <초록물고기>(1997), <박하사탕>(2000), 그리고 <버닝>(2018)으로 이어지는 작품 속에서 이런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봉준호 감독은 완벽한 완성도를 추구하는 감독이다. 그의 대표작에 해당하는 <마더>(2009)는 극적인 요소에 스릴러가 더해져 전율과 충격을 선사한다. 최근에는 <설국열차>(2013)와 <옥자>(2017)를 선보이며 국제무대에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 작품 활동을 사실상 중단한 상태인 김기덕 감독의 여러 작품은 다수의 한국 영화감독들이 공유하는 경향의 한쪽 극단에 자리한다. <수취인불명>(2001), <해안선>(2002),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빈집>(2004), <피에타>(2012)와 같은 작품을 통해 김기덕 감독은 언어적, 물리적 폭력과 세대 간, 남녀 간, 계층 간의 부조리한 힘의 논리를 그려냈다. 그는 관객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폭력과 가학으로 뒤엉킨, 욕망에서 비롯된 잔혹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의 영화는 개인이 겪는 갈등과 사회적 정치적 충돌이 본질에서는 국가의 분단과 독재 정권이 가져온 결과임을 관객들에게 상기시킨다.

홍상수 감독은 김기덕 감독과는 전혀 다른 영화적 색채를 지녔다. 그는 현대 한국 영화에서 가장 많은 작품을 찍은 감독이자, 가장 주목할 만한 감독이다. 1996년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부터 그의 영화에는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그의 영화에서는 연신 가벼운 대화가 오가며, 술자리 장면이 빠지지 않는다. 그리고 남녀 간 유혹과 배신, 재회가 이어지는 과정에서 해학과 절망, 그리고 은밀한 속삭임이 터져 나온다. 자전적 이야기를 담아 영화를 만들어내는 홍상수 감독은 24편의 장편영화를 통해 자신만의 서사적 특징을 구축한 작가주의 감독으로 자리하고 있다. 프랑스에는 2018년 한 해 동안 그의 영화 세 편, <밤의 해변에서 혼자>, <클레어의 카메라>, <풀잎들>이 연달아 개봉했다.

과거 군사독재 체제를 이끈 박정희의 딸 박근혜의 대선 승리로 2013년 강성 보수정권이 들어서면서 한국 영화계는 상당한 진통을 겪었다. 영화진흥위원회의 역할이 축소됐고, 영화 축제는 하나둘 자취를 감췄다.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 정부의 무반응을 고발한 다큐멘터리 <다이빙벨> 상영을 계기로 부산국제영화제에 대한 전방위적인 외압이 시작됐다. 세월호 참사는 여객선 세월호가 침몰하면서 대부분이 고등학생인 승객 300명의 목숨을 그대로 앗아간 대형 사건이다. 전 세계 영화인들의 지지가 이어지는 가운데 한국 영화계는 확고한 뜻을 고수했고, 2017년 박 대통령 탄핵(이후 구속)이 결정될 때까지 정부를 규탄하는 시위를 계속했다. 오늘날 부산국제영화제는 칸, 베를린, 베니스, 토론토와 함께 5대 국제영화제로 꼽힌다.

보편화된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세계에서 가장 ‘긴밀히 연결된 사회’인 한국은 극장 매출에서도 꾸준히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2017년 기준, 한국의 극장 매출액은 14억 6천만 달러(12억 8천만 유로)에 달했고, 자국 영화의 매출액 점유율은 50%에 달했는데, 이 수치를 통해 한국 영화의 확고한 위상과 특수성을 읽을 수 있다. 한국 영화계의 ‘문화적 특수성’은 프랑스 영화계가 흔히 주장하는 ‘영화산업 보호’라는 대의보다는, 자국 영화산업 진흥에 보다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한국 영화는 동아시아 영화 시장을 선도하고 있으며, (자국 교민들에 의해 주로 소비되는 인도와 중국의 영화를 제외했을 때) 그 어느 아시아 영화보다도 세계에 널리 보급돼 수많은 현지 관객층에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

2016년에는 연상호 감독의 좀비 영화 <부산행>이 한국과 해외에서 모두 보기 드문 대성공을 거두는 기염을 올렸다. 한국 극장가에서는 프랜차이즈 영화(시리즈 영화)가 강세를 보였다. 장편 판타지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신과 함께> 1, 2편이 각각 2017년과 2018년에 개봉돼 두 편 모두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한 바 있다.  
 

 

글·장미셸 프로동 Jean-Michel Frodon
영화 평론가 겸 영화사학자, 파리정치대학(Sciences Po Paris) 부교수,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 펠로우교수
최근 출간작으로는 『파리의 영화(Cinémas de Paris)』(공동저자: 디나 이오르다노바, CNRS출판사, 파리, 2017년)가 있다.

번역·이푸로라 poorora@daum.net
번역위원

 

(1) 1920년대 영국에 스크린쿼터 법안이 도입되면서 스크린쿼터용으로 제작된 졸속영화를 일컫는 용어
(2) 1980년 5월에 광주의 대학생과 시민들이 군사독재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광주는 당시 독재정권 비판에 앞장섰던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이기도 했다. 당시 정부는 계엄군을 투입해 무자비한 진압을 가했고,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