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 영화 <내가 사는 세상> - 예술노동자에게 ‘빵과 장미’를

2019-03-29     서성희(영화평론가)

예술도 노동이다! 청년 예술인에게 ‘빵’을

<내가 사는 세상>은 청년세대의 빈곤 중에서도 특히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예술노동자들의 현실에 관한 영화다. DJ를 꿈꾸는 민규는 낮에는 퀵서비스 배달원으로 일하고, 밤에는 친한 형의 클럽에서 공연한다. 낮이든 밤이든 노동계약서 한 장을 쓰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월급이 덜 들어온 게 분명한데도 기껏 사장을 찾아간 자리에서 “덜 들어온 것 같습니다”라고 조심스럽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의 일상이다. 

연인인 시은 역시 미술학원 입시반 강사로 일하면서 과중한 업무와 부당한 임금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다. <소공녀>(2017), <이월>(2017) 등 생활고에 시달리는 청년의 초상을 주요하게 다루는 한국 독립영화 중에서 <내가 사는 세상>은 ‘빵’과 동시에 ‘장미’를 말하는 새로운 주제의 한국 노동영화를 예고한다. 

<내가 사는 세상>에서 예술을 노동행위로 인정하고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예술계 종사자인 민규와 시은의 삶은 늘 고달프고 꿈은 잠식당한다. 사람들은 정당한 대가를 지급해 주지 않으면서 그들에게 열정을 요구한다. ‘열정페이’는 노동자가 고용주에게 정당한 임금을 받지 않고 자신의 열정만 소비하는 형태를 말한다. 고용주가 노동자에게 “네가 좋아하는 일을 시켜주는 것이니 무보수”라는 태도를 취하며 노동력을 착취하는 행위가 가장 오래 남아있던 분야는 예술계일 것이다. 예술을 생업으로 선택한 사람은 ‘돈과 무관하게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오래된 프레임 때문이다.  

이 프레임이 한국사회에 문제로 떠오른 건 2015년이 돼서다. 당시 한국패션디자이너연합 회장 이상봉 디자이너가 운영하는 디자인실에서 야근수당을 포함해 견습은 10만 원, 인턴은 30만 원, 정직원은 110만 원의 급여를 준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은 대국민 사과를 했고, 신조어 ‘열정페이’를 알리는 계기가 됐다. 오랜 세월 청년의 열정을 착취해온 주체는 악덕 기업주지만, 이는 예술을 노동으로 인식하지 않는 한국사회의 오래된 인식의 프레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권리를 당당하게 말하는 사회

민규는 함께 아르바이트하는 동료에게 급여가 모두 들어오지 않았다는 말을 듣지만 “에이, 설마”라고 생각한다. 바쁘다는 이유로 명확하게 계산해보지 않았고 “바쁜데 알아서 챙겨주셨겠지”라며, 괜한 사람 의심하는 듯, 죄스러운 마음까지 가지고 얼버무린다. 현재를 살아가는 평범한 청년들의 현실은 그다지 명확하지 못하다. 민규는 노동계약서도 쓰지 않은 채 일을 하다 보니 자신의 돈이 어떻게 지급되는지, 4대보험은 제대로 나가고 있는지도 잘 모른다. 흑백으로 표현한 영화와 메시지가 잘 맞아떨어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동료의 채근으로 꼼꼼하게 따져본 후에야 민규는 급여에서 7만 원이 덜 들어온 것을 확인하게 된다. 이 사실을 시은에게 말하자 시은은 당장 가서 돈을 받으라고 얘기한다.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살지 말라”는 것이다. 민규는 거리에서 무료상담을 해주는 노무사에게 상담을 받고 나서야 고용주에게 보험금 영수증과 노동계약서를 써달라고 요구한다. 고용주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퀵 아르바이트들의 돈을 부당하게 떼먹고 있었고, 노동자인 민규와 동료는 자신이 일한 권리를 당당하게 말하고 해고당한다. 

내친김에 민규는 밤에 일하는 친한 형 가게로 가서 ‘공연계약서’를 써 달라고 한다. 하지만 민규의 바람과는 달리, 친한 형은 계약서를 써주기는커녕 자신의 존재조차 무참히 짓밟아버리고 화를 내고 욕하고 모욕을 준다. <내가 사는 세상>은 가까운 사이일수록 노동계약 조건을 이야기하거나 문서로 만드는 것이 얼마나 더 어려운 일인지 보여준다.

부당한 노동현실은 시은에게도 이어진다. 시은은 시간 외 근무로 입시준비 중인 학생들을 위한 그림을 수시로 요구하는 친한 언니인 학원장에게 추가수당을 요구하지 못한다. 추가수당은 고사하고, 오히려 서울에서 대학을 나온 후배 강사에게 자신의 자리를 빼앗기고 부당한 임금삭감을 당한다. 그럼에도 자신의 권리를 당당하게 말하지 못한다.

 

청년 예술노동자에게 ‘장미’를 

공연계약서를 써달라는 민규의 요구에 형은 불같이 화를 낸다. 시은의 부당한 대우에 항의하는 친한 언니도 불같이 화를 낸다. 왜일까? 감정은 변덕스럽고 무질서한 한 개인의 에너지로 생각하기 쉽지만 시대를 지배하는 정서적 문법에 영향을 받는다. 친한 형과 친한 언니의 ‘화’라는 감정은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다. 감정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감정은 내밀한 영역이면서도 사회의 거시적인 차원과 맞물려 있다. 지금 우리의 마음, 그리고 인간관계를 지배하는 정서는 심리적인 뿌리와 함께 역사적인 맥락이 함께 작용한다. 따라서 사람들의 감정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살펴보면 사회의 실체를 보다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다. 

민규의 친한 형과 시은의 친한 언니처럼 ‘선배’로 불리는 인간적 관계는 일이나 정보를 제공하기도 하지만, 권리를 주장하기는 힘든 환경을 만든다. 이들은 후배를 부당하게 지배하려 하고, 인간적인 모욕감을 쉽게 줄 수 있는 관계를 형성한다. 무심코 반복하는 선후배 사이의 언행이 한국사회를 형성하는 과정의 일부이자, 타인을 무시하고 모욕하는 관행으로 자리 잡아 불합리한 사회를 만든다. 모멸감은 상대방이 나를 대하는 방식이 부당하다고 느끼며 화가 나는 감정이다. 우리는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큰 수치심과 모멸감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강한 모멸감을 느낀 사람은 모멸감을 유발한 사람이나 집단에 대해 분노나 원한 등의 감정을 품게 된다. 이런 모멸감이 흔한 사회일수록 비인간화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우리 사회는 인간관계가 불러오는 모멸감뿐만 아니라 사회구조가 주는 모멸감도 수없이 존재한다. 특정한 기준으로 인간의 귀천을 나누는 의미체계가 모멸감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학력에 의한 위계 의식이다. <내가 사는 세상>에서 시은이 후배에게 ‘지방대’라는 이유로 밀려나는 학력위계도 모멸감을 생성하는 뿌리 깊은 한국사회의 프레임이다. 인간의 격을 위아래로 나누는 서열 관념은 학력 이외에도 여러 가지 기준으로 형성된다. 이런 다양한 사회적 위계는 또다시 다양한 사회적 모멸감을 생산해낸다. 우리 사회가 외형적으로 엄청난 풍요를 이루었음에도, 불행에 대한 감각이 자꾸만 날카로워져 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의 생명보다 중요한 것은 자존감이다. 인간은 모욕으로 자존감과 인격을 훼손당했을 때 회복하려고 몸부림친다. 아니면 삶의 의욕을 잃고 무기력 상태에 빠지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거나 일어났을 때 적절하게 대응하는 사회를 가리켜, 철학자 아비샤이 마갈릿은 ‘품위 있는 사회’라고 말한다. 품위 있는 사회란, 구성원들이 자기가 모욕당했다고 간주할 만한 이유가 있는 조건에 맞서 싸우는 사회, 또는 그럴 만한 이유를 제공하지 않는 사회다.(1)

 

한국 노동영화의 새로운 변화

<내가 사는 세상>은 예술계에 종사하는 청년 노동자들에게 ‘빵’과 함께 ‘장미’를 제공하는 품위 있는 사회가 돼야 한다는 시대감각을 장착한 새로운 노동영화다. 예술계의 노동은 오랫동안 ‘고상한 예술과 천박한 돈’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부당한 줄 알면서도 문제 삼을 방법을 알지 못했다. 정색하고 대결하자니 관계가 끊어지거나 선후배가 얽힌 좁은 예술계에서 다시는 일거리를 얻지 못할 각오를 해야 했다. 아니면 예술노동의 대가를 지급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덮어 씌운, ‘돈을 밝히는 예술가’라는 프레임 속에 갇혀 살아야 했다. 대부분은 그럴 용기가 없거나 그냥 귀찮아서 꾹 참고 넘어갔다. 그러나 덮어두고 넘어갈수록 더 깊이 곪아갔다. 예술노동자는 울분을 참느라 속병이 나고 정신적으로 피폐해졌다. 

이런 악순환을 막기 위해서는 잘못에 대해 단호하게 대응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돼야 한다. 예술노동의 정당한 대가와 예술가의 인권과 정의의 문제, 그것이 보장되기 위해서 사회구성원들의 의식이 향상돼야 하고 그런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변화를 매개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소수의 상시채용과 이직이 일상화된 21세기 신규 노동시장 구조에서 청년 예술가가 노동의 대가를 정당하게 받을 수 있는 제도적 프레임을 만들어내야, <내가 사는 세상>이 예술노동자가 살 만한 세상으로 바뀐다. 
그러기 위해서는 청년 예술가들이 함께 논의하고 함께 연대해서 더 나은 제도를 마련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해야 한다. 역사가 증명하듯 ‘빵과 장미’는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글‧서성희
영화평론가, 대구경북영화영상 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 대표, 대구단편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1) 김찬호, 『모멸감 - 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 문학과 지성사, 2014, 2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