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싱 인 이라크 vs 댄싱 온 청계천

2010-11-05     노순택/사진가

 <장면 1>

탄약을 채운 25kg의 방탄조끼를 입고, 사막전투용 군화를 신은 무장 군인 두 명이 신나게 춤추고 있다. 아이들이 몰려든다. 손뼉을 치며 “미스터! 미스터!”를 외친다. 두 흑인 병사는 아이들의 환호가 흥에 겨운 듯 더 화려한 춤동작을 선물한다. 적어도 그 순간엔, 전쟁은 없다. 여기는 2006년 이라크.

“소대에 흑인이라곤 우리 둘밖에 없었어요. 다시 말해 춤출 줄 아는 사람은 우리뿐이었죠. 결국 우리가 아이들에게 뭔가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쌍둥이 형제인 오코와 아퀘티는 그들의 댄스 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다. 먼 훗날 자녀와 손자손녀에게 보여줄 수 있는 ‘잘나가던 젊은 시절의 증거물’로 간직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동영상은 조회 수 18만9천 회를 넘을 정도로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이 ‘컴뱃 댄싱’엔 악플도 많았다.

“우리가 위선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밤에는 나가서 아이들의 아버지를 쏴 죽이고, 낮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이들 앞에서 춤춘다고 말이죠. 그곳에서 사실상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아요. 그저 주어진 임무를 수행할 따름이죠.” 두 형제는 부정적인 댓글엔 답글을 달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고 싶었을 뿐이다.

형제는 이라크에서 귀국한 뒤 진지하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됐다. ‘주님 안에서’(In Jesus)라고 커다랗게 써 있는 성전 앞에서 점잖게 손을 모으고 사진을 찍었다. 물론 여전히 춤을 춘다. 이라크에서 추었던 춤(Dancing in Iraq)이 주님의 품안에서 추는 춤(Dancing in Jesus)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제 보니 대량살상무기를 제거하겠다고 시작한 그 전쟁도 ‘주님의 이름으로’ 치른 것이 아니던가.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주님의 용도를 변질시켰다.

<장면 2>

빗물이 방울방울 맺힌 100g가량의 하얀 비닐 옷을 입은 비무장 여인들이 춤을 추듯 나비처럼 하늘거린다. 사막전투용 군화는커녕 뾰족 샌들에 플라스틱 분홍 샌들, 운동화가 고작이다. 사람들이 꼬리를 문다. “서두르세요, 어서 건너가세요, 어어 거기 조심하세요!” 이들의 얼굴은 굳어 있다. 한 여인이 뒤를 돌아보더니 무언가에 놀란 듯 더욱 화려한 춤동작으로 나풀거리며 달아난다. 발 아래로 물이 흐른다. 플라스틱 분홍 샌들을 신은 여인은 발을 헛디뎠다가 다시 중심을 잡았다. 아슬아슬하다. 이들이 징검다리를 건너기 무섭게 방패와 몽둥이로 무장한 진압경찰이 밀려든다. 고양이마냥 물 앞에서 망설이던 그들은, “체포해” 소리가 떨어지자 사납게 달려든다. 여기는 2008년 청계천, 달아나는 촛불시위대와 뒤쫓는 진압경찰의 ‘컴뱃 댄싱’이 공연되고 있다.

“앞날이 창창한 이들이란 결국 우리 세대더군요. 다시 말해 광우병의 피해에 가장 많이 노출되는 이들이 우리 세대인 거죠. 결국 우리가 어른들에게 뭔가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조금이라도 의심스럽다면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하잖아요. 우리의 미래가 걸린 건데.”

중고등학생을 비롯해 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의 주장을 아고라에 올렸다. “먼 훗날 자녀와 손자손녀에게 보여줄 수 있는 ‘정의와 상식을 추구하던 젊은 시절의 증거물’로 간직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이 게시물들의 조회수는 물론 18만9천 회를 훨씬 웃돌았다. 하지만 경찰 당국의 항변도 이어졌다.

현장 지휘관은 “우리가 위선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시민에게는 법질서를 강요지만, 실제 시위 진압 과정에서 경찰이 저지르는 불법행위도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도 하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이곳에서 사실상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아요. 그저 주어진 임무를 수행할 따름이죠” 하며 억울해할지 모른다. 당국은 ‘시민에게 몽둥이를 휘두르지 말라’는 요구엔 답글을 달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윗분들을 즐겁게 해주고 싶었을 뿐이다.

촛불시위는 처절하게 진압됐다. 유모차를 몰고 아스팔트에서 촛불댄스를 추던 아기 엄마들도 모두 소환됐다. 태초부터 진지하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장로 대통령님은 서울 봉헌에서 그랬던 것처럼, 대한민국의 은총을 위해 오늘도 간절한 기도를 봉헌한다. ‘청계천 위에서’(on Cheonggyecheon) 못 다한 일이 없듯, ‘주님 안에서’(in Jesus) 못 해낼 일도 없으리라. 이제 청계천 위에서 추었던 춤(Dancing on Cheonggyecheon)이 4대강 위에서 추는 춤(Dancing on 4Rivers)로 바뀌었을 뿐이다. 4대강에는 ‘삽질 댄스’, ‘포클레인 댄스’가 쉴 새 없는 춤사위를 자랑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삽의 용도를 변질시켰다.

<책 1>

책 한 권이 집으로 날아들었다. ‘춤’에 관한 책이다. 발레리나 강수진씨의 발에 견줄 만한 못생기고 시커먼 발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발톱엔 멍이 들었다. 춤 때문이리라. 이 책은 춤에 관한 책이지만, 올가을에만(?) 춤에 관한 책일 뿐, 사실은 세상 온갖 것의 금지에 구애받지 않고 ‘필 받는 주제’에 과감하게 올인해온 ‘계절 잡지’다. 이번 호엔 우리 시대의 춤에 관한 사진과 글을 실었다. ‘춤의 세계’를 다루기보다는 ‘인간 세계의 춤’을 다루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전통적이거나 역사적인 춤보다는 ‘당대의 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로드니 킹 구타 사건과 LA 폭동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행위예술가 닉 케이브의 춤이 등장하는가 하면, “뚱뚱한 사람은 춤을 못춘다는 편견을 버려라”고 외치는 쿠바 무용단 ‘단자 볼루미노사’의 얘기가 흘러나온다. 마이클 잭슨의 <스릴러>에 맞춰 집단적으로 춤추는 필리핀 세부 교도소 수감자들의 엽기발랄한 모습은 이 책보다는 유튜브에서 직접 보는 게 나을 듯싶다. 다만, 흥미 지저분한 뒷이야기와 교도소장 가르시아가 퇴임 후 아끼는 수감자 출신 댄서 12명을 데리고 ‘친선대사들’이라는 팀을 만들어 순회공연을 했다는 소식은 유튜브에 없다.

앞서 소개한 <장면1>의 ‘컴뱃 댄서’를 만나려면 이 책의 30쪽을 펼치면 된다. <장면2>에 등장한 ‘촛불 댄서’와 ‘몽둥이 댄서’, ‘삽질 댄서’ 이야기는 이 책 어느 곳에도 나오지 않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이 세상 어느 구석진 곳에서 벌어지는 또 다른 춤바람’에 관한 꼬리물기식 생각놀이의 하나로 여기면 좋을 것이다. (사실 나는 <장면2>의 사진에 대해 “이 여인들이 지금 무슨 춤을 추고 있는 것이냐”는 질문을 여러 번 받았다. 춤을 특집으로 기획한 이 잡지를 읽으면서, 특히 이 책에 실린 사진들을 보면서 <장면2>의 이미지가 떠오른 건 실로 어색/당연하다.) 추측하건대, 이 잡지의 편집자는 ‘사실은 춤이 아니지만 어찌 보면 마치 춤처럼 보이는’ 그런 잡다한 장면에 지대한 관심을 갖는 열린 뇌 구조의 소유자가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춤과 복장’, ‘춤과 나이’, ‘춤과 집단’, ‘춤과 개인’ 등 ‘춤’ 자체가 아닌 춤의 주변부에 저렇듯 눈길을 보낼 리가 없다. 이 책은 결국 사회를 보여준다.

그동안 발간된 이 잡지의 주제 목차에 그 성깔이 잘 드러나 있다. ‘에이즈’에서 스칸디나비아 반도 옆에 붙은 섬 볼랜드까지, 쇼핑·전쟁·음식·사랑·노예에서 동물·감옥·연속극·장난감·광기까지 가볍고도 무거운 세상사를 동시에 건드려왔다. ‘가벼운 무거움’이라고 해도 좋고, ‘성질 있는 가벼움’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어쨌거나 심히 무거운 책은 아니다. 심지어 표지를 제외하고 잡지 안에 단 한 단어도 없이 이미지로만 책을 채운 적도 있다는데, 아직껏 본 적은 없지만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래서, 이 잡지의 이름이 뭐냐고? <COLORS>(컬러스)다. 알 만한 사람은 알 테고, 모른다고 창피할 것까진 없다. 1991년 창간 이래 77호가 발행될 때까지 영어·이탈리아어·프랑스어·스페인어로만 나왔으니까. 그런데 78호부터는 한국어판이 시작됐다. 옆에 영어를 병기하는 방식으로.

이 잡지는 베네통의 센세이셔널한 광고를 주도했던 사진가 올리비에 토스카니의 손으로 창간됐고, 아트디렉터 티보 칼만의 손을 거치면서 더욱 주목을 받았다. 출발부터 지금까지 베네통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아 발행되고 있다. 베네통 그룹 산하 커뮤니케이션 연구센터인 ‘파프리카’가 기획 편집을 맡고 있다. 그런데, 초국적 의류 생산 자본인 베네통의 지나친 간섭에 시달리지는 않을까? 돈이 곧 칼인 세상이니까. 나도 그게 궁금했는데, <컬러스> 관계자가 “이탈리아에서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것은 이미 오랜 전통이고, 오늘날 <컬러스>에 대한 베네통의 지원은 메디치가보다 낫다”며 “<컬러스>가 아주 자율적으로 기획·제작되고 있다는 데 자부심을 가진다”고 말했다는 기사를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냈다. 물론 진짜인지 가짜인지 인터넷이 알려주지는 않는다.

문화예술을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겠다는 그들의 기특한 댄스가, 문화예술을 지원하지 않되(혹은 좌파 적출식으로 선별 지원하되) 일일이 간섭하겠다는 우리 문화정책 당국의 사특한 댄스와 자꾸 비교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문화예술이 정부의 장단에 ‘춤’이라도 추랴? ‘쉘 위 딴쓰?’ 그래야 만족?

요점을 정리하면 이렇다. 이 잡지의 이름은 <컬러스>고, 첫 한국판은 갖가지 춤을 다루고 있으며, 책을 덮고 난 뒤에 그 밖의 곁가지 춤을 연상할지 말지는 각자의 자유다. 다만, 이제는 우리의 메마른 가슴에도 ‘딴스홀’을 허하자, 끝.

글•노순택
한국전쟁이 남긴 흔적의 작동과 현재성에 주목하고 있다. ‘분단권력’은 남북한에서 작동하는 동시에 오작동하는 현실의 괴물이다. 그 괴물의 틈바구니에서 흘러나오는 가래침과 탁한 피, 광기와 침묵, 수혜와 피해, 폭소와 냉소, 정지와 유동을 이미지와 글로 주워 담았다가 다시금 흘려보내는 일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