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을 향한 유혹, 그 별이 진다
[Horiz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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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의 이미지> 시리즈, 1992-장피에르 쉬드르 |
오늘날 극은 존립 위기에 처해 있다. 물론 실존하지 않는 것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니, 극 자체가 사라진다는 말은 아니다. 극의 중심을 형성하는 설원(雪原)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북극은 큰 난관에 처해 있다. 빙하는 녹고 있고, 이미 몇 해 전부터 (어쩌면 폐결핵에 걸려) 부쩍 야윈 북극곰들은 빙산을 따라 배회하고, 이 영화 저 영화에 떠돌며 출연하거나 사진작가 얀 아르튀스 베르트랑, 니콜라 윌로의 작품에 남아 있다.
실존하진 않지만 엄연한 존재
남극은 항상 몹시 추운데, 통상 20℃ 정도 기온이 더 낮다. 남극은 수면에 떠 있는 빙산이 아니라, 지구 내 담수의 90%를 차지하는 거대한 빙붕으로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북극보다는 지구온난화를 훨씬 잘 견뎌내고 있지만, 베델해나 윌킨스빙붕에서 룩셈부르크 크기의 빙산이 떨어져나가 가늠할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지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한편, 온난화로 군침을 삼키는 나라들이 있다. 극지방과 맞닿은 곳에 위치한 캐나다, 러시아, 미국, 노르웨이, 덴마크이다. 이 나라들은 빙산 붕괴로 가져올 엄청난 광물 및 석유 자원을 챙길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다. 이같은 일을 동화 같은 이야기라 해야 할지, 공포스러운 이야기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인간은 빙산 아래 숨겨진 엄청난 자원의 존재를 이미 오래전부터 알았지만, 도저히 접근이 불가능했다. 빙산 붕괴는 인간에게 숨겨진 금괴의 열쇠를 주는 것이기에 기적과 다름없다. 아니, 불행을 가져오는 기적이다.
비즈니스계와 석유산업계는 지난 400여 년간 탐험가들이 끊임없이 발견하려 애써온 2개 기적의 루트- 이 두 루트는 캐나다를 통한 북서쪽 경로와 시베리아를 통한 북동쪽 경로며, 미 대륙과 유럽을 케세이·캘리컷·지팡구(각각 중국·인도·일본을 이르던 옛 명칭)의 극동 지역과 이어줄 것으로 관측된다- 가 열리는 날 얻을 수 있는 부(富)가 어느 정도일지 궁금해하고 있다.
매년 봄이 오고 눈이 녹으면, 나는 ‘눈’이 어느 정도 멀리까지 가버리는지 궁금했다. 눈은 어디에 은둔할까? 어디에서 피난처를 찾는 것일까? 극지방의 만년설은 극의 빙하가 사라지는 날 어디로 숨을까? 우리는 분명 만년설을 그리워할 것이다. 세계 ‘제로 포인트’의 공백과 부재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극지방은 금이나 안티몬보다 인간과 세상에 더 중요한 가치가 있는 희귀 자원이다. 무구함과 무(無), 적막과 무한함과 미지가 그것이다.
무구함과 무한함, 그 희귀함
대항해 시대 개막 500년이 지난 오늘날 지구에서 아직까지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는 곳은 극지방뿐이다. 예전에 공포와 열광을 자아냈던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미지 세계는 측량·조사되었고, 널리 알려졌다. 국립지리연구소의 최신판 지도는 가히 걸작이라 할 만하다. 한 뼘만 한 땅도 모두 실려 있다. 하지만 최신판 지도에 더는 미지의 땅이 없다는 말과 같기에, 동시에 절망도 안겨준다.
1930년대 시인·비평가인 폴 발레리는 “유한 세계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말했다. 당시는 극지역이 미분류되었고, 그 한계도 알려지지 않았으므로 폴 발레리의 말은 시기상조였다. 문명 세계는 이 무한한 지역을 어떻게 토지대장에 기록해야 할지 몰랐었다. 하지만 오늘날 빙하가 녹으면서 측량가들은 도저히 표현해낼 수 없던 곳에 측량침을 꽂을 수 있게 되었다. 폴 발레리의 말도 최후의 시기를 맞았다. 지리상으로 유한 세계가 도래한 것이다. 비밀은 스러져가고, 구멍난 통에서 물이 빠져나가듯 신비함도 사라진다.
대신 우리는 보물찾기 시대를 맞았다. 지질학자들에게 극지방은 축제장이나 다름없다. 너나 할 것 없이 극지방을 찾은 이들은 설원 밑에 숨겨진 자원 목록을 집계하는 데 여념이 없다. 수십억만 배럴에 달하는 석유, 수십억만㎡의 천연가스, 석탄, 코발트, 안티몬, 다이아몬드, 구리, 니켈, 수산자원, 그리고 오염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온난화에 군침 삼키는 국가와 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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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의 이미지> 시리즈, 1992-장피에르 쉬드르 |
북극은 국제법상 영토 분쟁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다. 북극의 주인은 없고, 모든 인류가 공통으로 소유한 땅이기 때문이다. 실존하는 땅이 아니라 수치로만 존재하는, 지표면과 축이 만나는 점에 지나지 않는 곳을 어떤 나라가 소유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극은 시간에 근접해 있는 개념이다. 모든 경도선과 표준시간선이 교차하는 곳이기에 모든 시간이 함께 공존한다. 지리학적·지질학적으로 분류가 불가능한 사례이다. 이 얼마나 위안이 되지 않는가.
1982년 체결된 유엔해양법협약은 극해역 연안국들이 200해리(360km)의 ‘배타적 경제수역’을 지정해, 역내 해양자원 관리를 규정했다. 광물자원 대부분은 해안지역에 집중됐고, 200해리 내 범위에 있으므로 분쟁의 소지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1992년 협약 조항이 분란의 씨가 되었다. 이 조항은 해안경계선에 맞닿은 대륙붕이 자국 배타적 경제수역인 200해리를 넘어간 것을 증명하는 국가에 한해, 여분의 영해에 대한 주권을 부여한다.
극지역 5개국은 이 조항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이 국가들의 지질학자들이 즉시 여러 차례 대륙붕 발견을 공표했음은 물론이다. 러시아는 로모노소프해령을 앞세워 극해 영유권을 주장했다. 로모노소프해령은 러시아 해안가에서 시작해 극지역을 관통해 운 좋게도 정확히 북극을 통과하는 해저산맥이다. 따라서 러시아는 북극과 그 주변 지역이 러시아 영토라 주장한다. 캐나다 지질학자들은 이에 맞서 로모노소프해령이 캐나다 북단에 위치한 엘즈미어섬의 연장선에 지나지 않는다고 맞섰다. 덴마크 지질학자들은 캐나다의 주장에 코웃음을 치며, 로모노소프해령은 이뉴잇 토착민들이 영토권을 회복할 때까지 덴마크가 관리를 맡고 있는 그린란드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주장했다.
바야흐로 땅 속 보물찾기 시대
북극 지역은 지금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10년, 20년 뒤가 되면 금융권과 산업계에서 북극해를 넘볼 것이다. 그동안 인간사의 호기심 어린 눈에서 벗어나 고요함과 백색의 무구함이 존재하던 곳은 불도저와 굴착기, 정제소, 가스 유출, 대형 선박, 비정부기구와 생태론자, 갖은 기계 소음, 대구 공장, 석유 시추용 플랫폼과 대형 유조선, 원자력 빙하 분쇄기 등으로 가득 찰 것이다. 설경은 자취를 감추고, 사라져가는 빙산 속에서 바다는 진흙탕물이 될 것이다. 안개 속에 불을 밝히는 도시가 들어서고, 평화로운 적막 대신 사이렌과 망치 소리가 메아리칠 것이다. 사물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마지막 보루 중 하나가 종말을 맞을 것이다.
지난 4세기간 이동 거리를 줄이기 위해 빙하와 섬을 통과하려는 수많은 시도가 있었다. 서쪽에서는 캐나다 북서 지역을 통과해 베링해협을 건너 극동 지역 국가를 잇는 통로를 찾으려 했다. 10여 차례에 걸쳐 다양한 팀과 대담한 선장들이 이 눈부신 미로 속에서 길을 잃거나, 고독 속에 목숨을 잃고, 곰의 공격을 받아 사망했다. 이들의 주검은 빙하 속에 갇혀 있다. 러시아는 북동 지역을 통과하되 시베리아 북쪽 연안을 거쳐 베링해를 지나 극동아시아를 잇는 무역로를 찾으려 했다. 북극 빙하의 예정된 종말은 이 두 항로를 열어줄 것이다. 참으로 사치스러운 선물이 아닐 수 없다.
달아오른 영유권 쟁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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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의 이미지> 시리즈, 1992-장피에르 쉬드르 |
무역 선단이 캐나다 섬 사이나 시베리아를 따라 항해하는 날은 세계사에 큰 획을 긋는 날이 될 것이다. 전쟁과 왕위 계승, 기아와 페스트는 국가사를 특징지었다. 그러나 신항로의 출현, 터널과 지협의 관통, 전례 없는 경로 통제권은 새로운 지리학적 분포를 규정하는 동시에, 국가사에 더욱 장기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새로운 지리 체계가 기존 체계를 대체할 때마다 매번 역사는 크게 뒤바뀐다.
극은 사라지고 지구는 뒤바뀐다
1498년 긴급 보고를 받은 베니스 총독은 회의를 소집했다. 보고된 내용 역시 두려움을 자아냈다. 포르투갈의 항해자 바스코 다가마가 아프리카 남부 ‘폭풍의 곶’(희망봉의 옛 이름)을 돌아 항해하는 데 성공했다는 소식이다. 이 소식은 베니스에 청천벽력 같았다. 이전까지 인도와의 교역은 오직 베니스를 지나는 위험하고 긴 육로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베니스의 부와 영광은 이 육로가 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신항로 발견으로 포르투갈뿐 아니라 유럽 전체에 해로를 통해 인도로 가는 길이 열렸고, 베니스는 요충지로서의 중요성을 잃었다.
하나의 지구 전도가 사라지고, 새로운 전도가 탄생한다. 서둘러 최신판 지도집이 제작된다. 북극과 적도는 이리저리 표류하고, 그동안 불변으로 믿어왔던 경계선들이 사라진다. 마치 지각판이 운동하듯, 지중해는 중심이 서쪽으로 옮겨가며 전대미문의 변화를 겪는다. 그리스해와 라틴해가 중심지로서 위용을 회복하기까지는 1868년 수에즈 운하 통과라는 또 다른 지리학적 변화를 기다려야 했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교량으로서 누린 제국의 영화는 붕괴되었다. 베니스의 길고 사치스러운 침체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글•질 라푸즈 Gilles Lapouge
작가. 주요 저서로 <지리학의 모험>(알방미셸·파리·2010) 등이 있다.
번역•김윤형 hibou98@naver.com
파리3대학 통번역대학원 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