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중국의 위구르족 탄압-신장에선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2019-04-30     레미 카스테 l 보르도-몽테뉴대학 중국학과장

재교육수용소를 경험한 위구르인이 몇 명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약 1백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 전례 없는 감시체계는 신장 지구의 무슬림계 위구르족을 몰아세우고 있다. 이들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처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저지를지도 모를 일에 대해 처벌받는다. 시진핑 주석은 이런 억압정책과 중국화 정책을 안보 모델로 추진하고자 한다.

 

중국의 서쪽 끝, 신장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2018년 9월, 국제 인권감시기구(Human Rights Watch)는 터키계 이슬람 민족인 위구르인, 그리고 카자흐스탄인과 우즈베키스탄인 등에 대한 심각한 인권침해를 고발했다.(1) 중국 정부는 이를 부인하며, 위구르족 반대파 혹은 외국세력에 의한 ‘급진주의’나 ‘테러리즘’ 퇴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슬람 국가들의 관점에서 중국 정부는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는 셈이다.

 

‘사회통합’의 이름으로 수감된 1백만 명

확실한 것은, 중국 정부가 1990년대에 파룬궁 종파 추종자들의 ‘재교육’을 위해 도입한 ‘교화’ 조치가, 이제는 이슬람 소수민족을 겨냥해 신장에서도 적용 및 확대된 것이다. 공식자료가 없는 상황에서, 이에 관련된 사람들의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수용소 건설 및 확장을 위한 공공계약 조사를 근거로 한 아드리안 첸츠의 연구에 의하면, 위구르 주민의 10% 이상(약 100만 명)이 수용소를 거쳤거나 현재 수감 중인 것으로 추정된다.(2) 노동개조소(라오가이-실형을 받은 범죄자 중 노동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법적 감독 하에 강제노동을 시키는 곳-역주)에서 일어나는 일과는 반대로, 이곳에서는 용의자들이 법정에 서지 않고도 무기한 감금될 수 있다. 첸츠의 연구와 인권보호 단체들의 보고서는 이런 억압 메커니즘이 공개 재교육 수업뿐만 아니라 엄격한 규율이 적용되는 폐쇄수용소 등 여러 단계를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반체제 사상 치료’와 맥을 함께하는 이 조치들의 목표는, ‘이데올로기적 바이러스를 근절’하는 것이다.

UN 인권고등판무관실(OHCHR)은 공식적으로 접근 권한을 요청했다. 중국 측에서는 이런 장소들을 ‘애국교육’의 장이자, 소수민족들의 ‘사회통합’을 위한 직업훈련소로 소개했다. 실제로, 표준 중국어를 원활하게 구사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언어교육과정에 애국교육, 자기비판 교육, 심문들이 섞여 있다. 그러나 재교육수용소에서 석방된 후 중국에서 도피한 이들이 해외언론에 증언한 내용은, 중국 언론에서 밝힌 것보다 훨씬 참혹하다. 이들은 구금환경에 대해 매우 가혹하고, 강한 압박과 정신적·육체적 고문 행위가 있었다고 묘사했다. 현실정책과 위구르인들과의 결속 사이에서 오랫동안 망설이던 터키 정부는 2월 중순 항의 서명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새로운 탄압의 물결이 정점을 찍었지만, 신장은 지난 역사 속에서 저항과 동시에 억압을 받아왔다. 이는 중국 지도자들이 벗어나지 못하는 악순환이다. 높은 산맥으로 둘러싸인 이 지역은 오랫동안 실크로드의 주요 교차점이었다. 첫 번째 밀레니엄의 전환기에는 한나라, 수나라, 당나라의 지배를 겪었다.(3) 이들 국가는 위구르 족이 실크로드 교역로에서 혜택을 얻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항로개척 이후, 육로는 점진적으로 해로에 밀려 버려졌고, 이는 이들 오아시스 도시들이 오랫동안 쇠퇴기를 겪게 되는 시발점이 됐다. 10~17세기 이슬람으로 전향된 이 지역들이 18세기 중반 청나라(1644~1912년)에 정복당했을 때, 이미 신장 지구의 중심성은 사라졌다. 중국의 폐쇄정책과 신장 지구의 고립, 뒤이은 중국과 소련의 분쟁은 결국 중국으로 하여금 신장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내도록 했다.

 

 

중국 최빈 지역에서 에너지 중심지로

중국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에 속하는 신장지구는 지역적·국제적 위상을 되찾으며 점진적으로 발전을 이뤘다. 1949년 마오쩌둥의 집권 이후, ‘서부 대개발 정책’과 함께 2000년대 전환기에 강화된 공공투자를 통해 신장은 중국 내 다른 지역들에 연결됐다. 이 시기 대규모 이주를 한 한족은 중국의 다수민족이다. 한족은 1950년대부터 북쪽 지역에 여러 신도시를 건설했으며,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오래된 남쪽 오아시스 도시들의 모습을 변화시켰다.

오늘날 신장은 고속도로망 및 고속철과 연결된 철도망을 통해 중국의 다른 지역들과 연결되고 있다. 국영기업들의 견인차 구실과 신장 생산건설 병단(4)이 개발한 생산시설 덕택에, 신장은 광산물 및 농산물(목화, 토마토 등)에 특화된 지역이 됐다. 프랑스의 3배에 달하는 거대한 면적을 지닌 이 지역은 전략적 에너지 중심지다. 이곳에는 중국 전체 석유 매장량의 약 25%와, 석탄 매장량의 약 38%가 존재한다. 중국 정부가 자원의 수입 의존도를 줄이고자 하는 상황에서, 중국 기업들은 이곳에서 국내 석유 생산량의 1/6과 천연가스 생산량의 약 1/4을 채굴한다. 중국의 성장을 만들어낸 이 다량의 석유들을 나르기 위해 199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 중앙지역과 해안지역으로 연결되는 송유관과 가스관도 빠르게 설치됐다. 이제 당국은 액화석탄 인프라 구축과 풍력, 태양열, 수력을 이용한 전기생산에 집중하고 있다. 

소비에트 연합의 분열 이후 그리고 시진핑 주석이 개시한 신 ‘실크로드’ 사업(BRI)과 함께 중앙아시아 지역이 개방되면서 신장은 중국의 아시아 내 영향력 확대 전략의 마스터 카드가 됐다.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구소련연방 국가들과 국경을 맞댄 신장은 철도, 도로, 에너지 운송 축의 요충지를 보유하고 있는데, 중국은 이를 이용해 자국 필수품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고 유럽에까지 경제적인 영향력을 미치려 한다. 중국 정부를 위해서도 신장지역의 안정은 절실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중국이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이 지역에서 이슬람주의가 더 확산하거나 미국의 입김이 너무 강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신장에 대한 주권을 점차 공고히 하고 있지만, 독립 단계로까지 번졌던 폭동의 기억,(5) 소요사태의 재발 그리고 최근에는 테러로 발전된 폭력행위의 확대가 당국의 우려를 사고 있다. 과거에 서양 지리학자들이 ‘동투르키스탄’ 또는 ‘중국령 투르키스탄’이라 불렀고, 터키어권 주민이 지배적인 신장 지구는 강력한 배타주의, 그리고 중국 황제들이 늘 염려했던 불안정성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청나라인들이 이곳을 ‘신장(新疆)’이라는 지명처럼 ‘새로운 국경’으로 만들고자 했을 때, 이미 이곳에서 자신들의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수피교(이슬람교의 신비주의 분파-역주)의 신권정치(통치자가 신 또는 신의 대리자로 간주돼 절대적 권력으로 인민을 지배하는 정치 형태-역주) 지지자들은 이슬람교를 보호했다. 이는 그들이 이슬람교를 비이슬람 중국-만주 권력에 대항하기 위한 결집의 도구로 여겼기 때문이다. 20세기 초에는, 카자흐 유목민과 키르기스 유목민이 우세한 지역이 북부 지방과 파미르 산맥에 생겨났고, 위구르 정착민들이 거주하던 오아시스 도시들이 남부와 동부에 모습을 드러냈다.

1912년 청 제국의 몰락 이후 권력을 이어가던 중국의 군벌(청나라가 멸망한 이후, 군사력을 기반으로 전국 또는 지방의 일부에 웅거하면서 실질적으로 권력을 행사한 중국의 고위군인 및 그들의 병력-역주)은 새로운 자치주의(또는 독립주의) 반대파들의 부상과 맞닥뜨렸다. 반대파는 우측으로 범터키주의 운동, 좌측으로는 1940년대 말까지 소비에트 연합이 지원하고 유지했던 공산주의 무대와 함께하는 새로운 세대의 활동가들이 이끌고 있었다. 하지만 1949년 마오쩌둥과 공산주의자들의 승리, 그리고 이후 문화대혁명(1966~1976년)을 이끌어낸 억압정책들로 인해 이 반대파 조직의 활동은 중단됐다.

 

보수진영의 회귀, 강화된 감시정책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중국공산당(CPC) 개혁파가 집권하면서 중국 정부는 국가기구에 소수민족들을 채용했다. 문화적·종교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가 생겨났고, 위구르 지식인들 사이에 ‘반식민’ 민족주의(6)가 확산됐다. 문화대혁명 시대 이후, 위구르 지식인들 중 일부는 남쪽의 이슬람에 다시 눈을 돌려, 탈립(종교 전공 대학생들) 그룹이 만들어지는 마드라사(‘학교’, 특히 이슬람교 신학교를 가리키는 아랍어-역주) 조직망을 재건했다. 어떤 이들은 사회규범의 이슬람화와 독립적인 이슬람국가 수립을 주장했다. 동투르키스탄 이슬람당 창당 몇 개월 만에 1990년 바렌(Baren)에서 일어난 폭동이 이를 증명한다.(7) 

1985년, 1988년, 1989년 우루무치와 다른 도시에서 발생한 시위들은 중국에 의한 식민지화, 차별, 종족별 불평등 또는 정치적 자율성 부재 등을 규탄했다. 대학생 단체들이 간혹 종교 집단 옆에서 이끌었던 시위들은, 1989년 5월 정부청사에 돌을 던짐으로써 폭력적 양상으로 바뀌었다. 3월에는 티베트가 소요사태에 뒤흔들리고, 6월에는 중국이 천안문 광장사태로 타격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공산당은 신장 지역이 자신들의 손에서 벗어날까 두려워했으며, 또 다른 두려움에도 직면해야 했다. 소비에트 연합의 분열로, 위구르의 사촌격인 터키어권 주민들에게 독립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이 보수진영으로 회귀하면서 자치주의자(혹은 독립주의자) 집단이 가졌던, 신장에서 행해지는 정책에 관해 협상이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를 앗아갔다. 중국공산당, 신장 이슬람 협회(무슬림을 대표하는 중계조직), 지역행정부, 종교조직, 교육기관 등이 점차 보수진영에 넘어갔다. 정부에 순종적이지 않거나 종교색이 강하거나, 자치주의자(혹은 독립주의자)에게 관대한 간부들은 배제되거나 처벌을 받았다.

사상에 대한 감시정책도 점차 강화됐다. 열정적인 민족주의 운동가들은 체포 및 구금을 피하고자 과거 용공주의자였거나 범터키주의자였던 중앙아시아, 터키, 서구의 위구르족 국외동포들과 합류했다. 티베트를 본뜬 인권투쟁을 지역조직 내에서 촉진하기 위해서였다. 이 비폭력 전략은, 민족주의 단체들이 워싱턴에서 ‘세계 위구르 회의’를 설립하며 연합했던 2004년, 민족주의자들 사이에 널리 확산됐다.

하지만 신장에서는 탄압이 확대되고 긴장상황이 고조됐다. 분노한 위구르 군중들은 1995년 호탄이나 1997년 이닝에서 그랬듯이 거리로 나왔다. 남부 마드라사가 해체된 상황에서 일부 이슬람 민족주의자 조직은 중국공산당이 이제 이슬람과 위구르인들의 이슬람 정체성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고 간주했다. 탈립과 몇몇 민족주의 조직은 지하로 들어가 폭력행위와 테러활동을 내세우는 소조직을 결성했다. 중국 측에 의하면 1990~2001년 ‘162명의 사망자를 낸 200건의 테러행위’가 벌어졌다.(8) 그 사이 소규모 조직들은 조금씩 와해됐다.

실제로 1996년 3월부터 중국공산당은 반체제 활동을 발본색원하기 위해, 엄격한 강령을 세웠다.(9) 여러 ‘강력한 공격’ 작전이 이어졌고(1997년, 1999년, 2001년) 이 작전은 애국교육 시간 확대, 반체제적 행위를 규정하는 법조문 남발 그리고 대규모 체포 사태로 이어졌다. 이 문서는 병단 내 한족의 유입을 장려할 필요성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즉 이슬람 사원 건설을 엄격히 제한하고, 한족 출신 책임자들을 예배당이나 종교단체의 지도부에 앉히고, 비허가 종교학교에 다닌 사람들을 감시해 기록하고, 종교가 사회문제 및 정치문제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강력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내용이었다.(10) 국제앰네스티는 1997년 1월부터 1999년 4월까지 총 190건 이상의 사형이 집행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11)

파키스탄 지역과 아프가니스탄 지역 그리고 잘라루딘 하카니(과거 대소련 항쟁의 영웅인 무자헤딘 지도자, 탈레반 조직 ‘하카니 네트워크’의 수장-역주)의 탈레반 네트워크에 합류했던 소수의 이슬람 민족주의 활동가들이 연결된 때가 이 무렵이다. 중국에서 ‘동투르키스탄 이슬람 운동(ETIM)’이라 불리는 이 소조직은 최근 현지에 재편성된 여러 알카에다 조직의 관심을 끄는 데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들의 재원이 한정적이어서, 휴면 조직들이 완전히 분해된 신장에서 투쟁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9·11테러 이후의 상황, 그리고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개입 당시 ETIM 구성원을 체포해 득을 본 중국은 테러세력과 (민족)분리주의 세력, 종교 극단주의 세력을 총칭하는 ‘삼고세력’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그렇게 중국은, 사회·정치 분야에서 이슬람 가치를 증진하려는 민주주의 민족주의자 집단이나 비폭력 자치주의자들, ETIM 성전주의자들, 나아가 모든 반체제 정신 소유자들을 한데 섞어 버렸다.

 

끊이지 않는 테러와 폭력, 그리고 탄압

2010년대, 와지리스탄으로 후퇴한 ETIM의 조직망(또는 잔존세력)은 알카에다 국제 성전주의 조직에 통합된 후 투르키스탄 이슬람당(TIP)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폭력을 부추기는 수단으로 SNS를 활용했다. 중국정부의 인터넷 감시는 대단히 엄격해서, 정부 게시물에 접근하기란 굉장히 어렵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오랜 소강상태 이후 신장 남부와 신장의 수도 우루무치에서 테러행위가 연속적으로 발생했다는 점이다. 테러는 2008년, 올림픽을 앞두고 시작돼 2009년 그 규모가 확대됐다. 2009년에는 우루무치에서 위구르족과 한족이 대립한 과격소요사태로,(12) 공식적으로 197명의 사망자(이 중 한족이 약 3/4)가 발생했다. 이후 침묵이 이 지역을 덮쳐 여러 달 동안 인터넷이 끊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격은 계속됐다.

2011년 카스 테러처럼, 일부 테러행위는 투르키스탄 이슬람당 연계조직들이 계획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경찰이나 시민을 대상으로 한 도검류 공격 등의 테러행위는 사전계획 없이, 단순히 TIP나 성전주의 운동 영상을 접한 청년에 의한 것으로 보였다. 때로는 신장국경 밖에서 발생하는 폭력행위가 중국여론을 충격에 빠뜨리기도 했다. 2013년 10월 천안문 광장 차량돌진 테러(관광객 2명과 테러범 3명, 총 5명 사망), 2014년 3월 쿤밍역 칼부림 테러(사망 31명, 부상 143명) 그리고 2014년 5월 우루무치 시장 테러(사망 43명, 부상 90명 이상) 등을 비롯해 소규모 테러가 잇따랐다. 2014년은 300명 이상의 테러 피해자를 기록하며, 암흑의 해가 돼버렸다.

비슷한 시기, 탈레반이 있는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조직망 구성이 가능했던 시리아에 TIP가 재조직되자 중국인들의 우려는 더욱 깊어졌다. TIP는 시리아 분쟁에 관여하면서 병력과 원조를 확대했다. 현재 하야트 타흐리흐 알샴(알카에다 연계 조직, 알누스라 전선을 포함한 3개 조직이 합쳐져 결성됐다-역주)이 된 알누스라 전선(시리아와 레바논에서 활동하는 알카에다 연계 조직-역주)의 다른 연계조직들과 함께 시리아 북서부 지방에서 전투에 참여하며 그 역량을 입증한 TIP는 중장비를 갖췄으며 전투원 수백 명 동원이 가능한 상태다. TIP는 신장지역 외에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근동 등 몇몇 지역에서 활동하며, 중국의 이익을 위협하는 존재가 됐다. 시진핑 주석이 원했던 ‘지하 강철 만리장성’(13)은 중국 내 위구르족의 행동반경을 여전히 아주 강력하게 제한하고 있다. 그러나 위구르 사회는 TIP의 엄격한 이슬람 해석에는 실상 거의 동조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009년 소요사태에 따른 체포 및 처벌(사형 포함)이 급증하면서, 위구르 주민들은 변화했다. 1980년대에는 분쟁 속에서도 중재자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많은 이들이 그런 좋은 시절은 지났다고 끝났다고 생각한다. 중국 정부에 대한 원망은 한족을 향하게 됐다. 위구르족에게 있어 한족은, 자신들을 복종과 중국화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하위계층으로 간주하는 교만한 식민지 지배자일 뿐이다.

중앙정부가 제안한 ‘공존’은, 인구·문화의 동질화와 한족 간부의 강력한 자치지역 기관 통제에 입각하고 있다. 위구르족 입장에서는 자신들 고유의 언어 대신 중국어를 배워야 하고, 경찰과 행정부의 검문이 끊임없이 강화되는 상황이다. 그런 가운데 계속되는 한족의 이주로, 위구르족들은 중국인들에게 포위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고 있다.(14)

2010년대 초, 한족은 해당 지역 주민 220만 명 중 40%를, 위구르족은 약 45%를 차지했다. 이는 1949년(한족 6%, 위구르족 74%)과 비교했을 때 그 차이가 두드러진다. 이런 행정 및 경제 분야에서의 한족의 우위는 원주민에 대한 불신과 결합해 상당수의 위구르인들이 사회계층의 하위에 머무르도록 만든다. 물론 국가는 지역예산 절반 이상의 지원과 대규모 투자를 통한 두 자릿수 성장을 오랫동안 단언해왔다. 하지만 교육의 기회를 얻지 못했거나, 학위가 있음에도 차별받는 수많은 위구르인들은 이런 성장에서 이익을 얻고자 애를 쓰고 있다. 

중국의 강자로 떠오른 시진핑 주석은 테러 위협을 근절하고 안보 공략을 재정의하겠다고 약속했다. 테러방지 활동기관들은 재정비돼 정부의 보다 엄격한 감독 아래 놓였다. 과거 다양한 행정부 및 일명 ‘대표’ 종교단체들이 책임졌던 소수민족 및 종교문제 관리도 이제 매우 중앙집권적인 중국공산당의 통일전선부 소관으로 넘어갔다.(15)

 

‘수상한 행동’의 다양한 기준, 강요된 침묵

법 체제 역시 개편됐다. 2014년 11월에 이미 신장 자치지구 의회는 1994년의 지역 종교 규제들을 개정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맘 임명, 이미 철저히 감시 중인 이슬람 사원 및 종교교육 기관통제 법규들을 현대화하기 위해 18개 조항을 추가했다.(16) 2017년에도 ‘종교 과격주의의 퇴치’라는 명목으로 일련의 조치들이 새로 제정됐다. 일명 ‘비정상적인’ 수염 금지, 공공장소에서 베일 착용 금지 등 무슬림들 입장에서 그들의 자유를 침해하는 내용이었다.

천취안궈가 티베트 자치 지구에 이어 2016년 신장 지구 공산당의 수장이 된 이후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아드리안 첸츠에 따르면,(17) 안보에 할당된 예산이 급증했다. 특수 경찰과 반소요사태 조처들이 보강됐으며, 2016년 여름부터 2017년 여름까지 경찰채용이 정점을 찍었다. 2009년의 12배에 달하는 9만여 명의 경찰이 채용된 것이다. 마을마다 공안사무소의 지소를 설치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천취안궈는 온화한 이름을 지닌 ‘가족 만들기’라는 프로그램도 강화했는데, 공무원들이 정기적으로 주민들의 집에 때로는 며칠씩 머물며 반체제적 행동을 파악하고, 고발을 부추기며 애국교육을 하는 프로그램이다. 남부 농촌지역에서 100만 명 이상의 공무원이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신장은 첨단기술을 활용한 감시 및 안보 빅 데이터의 대규모 실험의 장이 됐다.(18) 도로에 늘어선 다수의 경찰 검문소에서는 언제든 스마트폰을 검사할 수 있다. 얼굴인식이 가능한 광범위 감시카메라 체계도 개선됐다.(19) 대부분의 위구르인들은 여권을 반납해야 했기 때문에 해외에 나가길 원했던 이들의 희망도 거의 사라졌다. 중국 정부는 이제 사회규범을 위반하는 이들을 처벌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정부 통합공동운영 플랫폼(IJOP)을 통한 데이터 수집은 “평상시와 다른” 행동 연구와 결합해, 개인의 충성도와 안보 위험도를 예측 및 분류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IJOP의 수많은 식별기준에는 26개 ‘위험국가’ 체류 경험도 포함된다.(20) 외국인이나 외국에서 살았던 사람과 대화하는 경우, 금지된 커뮤니케이션 애플리케이션 ‘왓츠앱’을 다운로드 하는 경우, 수염을 기르는 경우, 술을 마시지 않는 경우,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경우, 할랄 음식을 먹는 경우, 라마단 기간 금식하는 경우,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경우, 자녀에게 마호메트의 이름처럼 반체제적이라 판단되는 이슬람 이름을 지어주려는 경우 등 ‘수상한 행동’의 신호는 대단히 많다.

명망 높은 대학교수, 예술가, 운동선수가 갑자기 행방불명됐거나(수감된 것으로 추측) 가택연금을 당했다. 몇 달 전부터는 극도로 무거운 형벌들이 선고됐다. 신장 전 교육사무소장과 전 신장 대학 총장이 ‘분리주의 성향’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것이다. 또한, 위구르 지식인 집단의 마지막 비판적 인물, 일함 토흐티(경제학자이자 작가)는 2014년 체포된 후 무기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중국 측에서는 폭력행위가 대폭 감소했으며, 따라서 이런 조치들이 성공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문화대혁명을 연상시키는, 최첨단 기술에 강력한 제제와 억압을 결합한 안보모델을 자랑한다.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국가와의 충돌을 조정할 수 있었던 공산당 지방 간부, 종교 지도자, 공무원, 지식인들은 이제 침묵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이런 강요된 침묵은 신장의 무슬림들에게 상당한 불만을 야기한다. 따라서 이 전략은 위험하다.  

 

 

글·레미 카스테 Rémi Castets 
파리 정치대학(IEP)박사, 보르도-몽테뉴 대학 중국학과장 

번역‧김자연 jayoni.k@gmail.com
번역위원

 

(1) ‘Eradicating ideological viruses. China’s campaign of repression against Xinjiang’s Muslims‘, Human Rights Watch(국제 인권감시기구), New York, 2018년 9월 9일.

(2) Adrian Zenz, ‘Thoroughly reforming them towards a healthy heart attitude: China’s political re-education campaign in Xinjiang’, Central Asian Survey, Abingdon-on-Thames, 2018년 9월.

(3) 한나라는 기원전 206~220년, 수나라는 581~618년, 당나라는 618~907년 지속됐다. 하지만 이들 국가가 통치기간 내내 신장을 지배한 것은 아니다.

(4) 1954년 신설돼 군 지휘 하에 있는 이들 여단은 개간과 국경 안보 임무를 맡고 있다.

(5) 1864~1877년 야쿱 벡의 카슈가르 왕국, 호탄 왕국, 이어서 1933~1934년 카슈가르에 세워진 동투르키스탄 제1공화국, 1944~1949년 신장 북부 3개 구역에 세워진 동투르키스탄 제2공화국.

(6) Dru Gladney, ‘Internal colonialism and the Uyghur identity: Chinese nationalism and its subaltern subjects’, <동지중해와 터키-이란 세계에 대한 연구보고서(Cemoti; Cahiers d'Études sur la Méditerranée Orientale et le monde Turco-Iranien)>, n° 25, Paris, 1998년 1~6월.

(7) 아프가니스탄을 표본으로 훈련한 성전주의자들은 2일 이상 전투를 벌였다.

(8) ‘East Turkistan forces cannot get away with impunity’, <People’s Daily>, Information Office of State Council, Beijing, 2002년 1월 21일.

(9) ‘China : State control of religion, update number 1', Human Rights Watch, 1998년 3월.

(10) ‘Devastating blows : Religious repression of Uighurs in Xinjiang’, Human Rights Watch, 2005년 4월 11일.

(11) ‘China : Gross violations of human rights in the Xinjiang Uighur autonomous region’, Amnesty International, 1999년 3월 31일.

(12) Martine Bulard, ‘Quand la fièvre montait dans le Far West chinois(위구르 사태, 중국 대륙에 도미노 되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09년 8월호.

(13) Tom Phillips, «China : Xi Jinping wants “Great Wall of Steel” in violence-hit Xinjiang», <The Guardian>, London, 2017.3.11.

(14) Gardner Bovingdon, The Uyghurs in Xinjiang : Strangers in Their Own Land, <Columbia University Press>, New York, 2010.

(15) Jérôme Doyon, ‘Actively guiding religion under Xi Jinping’, <Asia Dialogue>, 2018.6.21, http://theasiadialogue.com

(16) ‘The modern Chinese State and strategies of control over Uyghur Islam’, Central Asian Affairs, vol. 2, n° 3, Washington, DC, 2015.

(17) Adrian Zenz, ‘Thoroughly reforming them towards a healthy heart attitude : China’s political re-education campaign in Xinjiang’, op. cit.

(18) Josh Chin and Clément Bürge, ‘Twelve days in Xinjiang: How China’s surveillance State overwhelms daily life’, <The Wall Street Journal>, New York, 2018.12.19.

(19) René Raphaël, Ling Xi, ‘Bons et mauvais Chinois(착한 중국인, 나쁜 중국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2019년 1월호.

(20) 아프가니스탄, 알제리, 사우디아라비아, 아제르바이잔, 아랍에미리트, 이집트, 인도네시아, 이라크, 이란, 카자스흐탄, 케냐, 키르기즈스탄, 리비아, 말레이시아, 나이지리아, 파키스탄,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소말리아, 남수단, 시리아, 타지키스탄, 태국, 터키, 투르크메니스탄, 예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