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팽한 고요 다시 술렁이는 침묵

[Reportage] 그리스 반정부 시위 2주년

2010-12-03     오렐 & 피에르 돔

2008년 12월 6일, 아테네 엑사치아 지역에서 한 소년이 경관 2명에게 피격당해 숨지자, 흥분한 그리스 젊은이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2년이 지난 지금, 그리스는 금융위기로 국제통화기금(IMF)의 손아귀에 떨어졌지만, 좌파는 정권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투표 기권율이 50%를 웃도는 기록을 세웠다. 정권에 염증을 느낀 수천 명의 군중은 아테네에서 시위와 폭동을 일으켰고, 이런 염증은 여전히 가시지 않고 있다.

우리는 아테네 엑사치아 지역 중심가의 작은 보행자 전용도로가 있는 미소롱지우 거리를 찾았다. 카페와 나무들이 들어서 있고, 군데군데 앉아서 맥주를 홀짝거리는 수십 명의 젊은이가 보였다. 몇몇 젊은이는 맨바닥에 앉아 있었다. 이들은 컵도 없었고, 캔맥주도 마시지 않았다. 인근 식료품 가게에서 50cL짜리 병맥주를 사 마셨다. 그게 더 싸기 때문이다. 벽마다 포스터와 낙서가 난무한 가운데, 사방에 나붙은 천사의 눈빛을 한 소년의 사진이 눈에 띄었다. 주인공은 2008년 12월 6일, 경찰에 피격당한 15살 소년 알렉시스 그리고로풀로스였다.(1)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바로 이곳입니다. 곧 2년이 됩니다”라며 검은 대리석 현판을 가리켰다. 그들은 ‘그날 밤과 그 뒤 폭동으로까지 번진 거리시위에 가담했느냐’는 질문에 일제히 “물론이죠! 그것은 경이적인 순간이었죠! 우리는 알렉시스 때문에 슬펐고, 너무 화가 났죠. 우린 모든 것을 때려부수고 싶었어요!”라고 답했다. 우리의 질문은 적절치 못했다. 모든 사람이 2008년 12월 광란의 날들, 그리고 화염, 부서진 가게, 최루탄이 난무한 밤 시위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엑사치아에 대한 기사가 얼마나 많이 쏟아졌던가! 무정부주의자들의 온상, 마약 중독자 소굴, 훌리건들의 은신처 등…. 우리는 엑사치아가 검은 옷차림의 젊은 마약 중독자들이 우글대는 우범지대라 여겼다. 그런데 이곳 골목길들은 수십 개의 식당과 바, 서점, 작은 공방들이 뒤엉켜 매혹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인근 대학의 많은 학생뿐 아니라 교수, 지식인, 예술가와 좌파 인사, 그리고 발목에서 무릎까지 돌려 감은 각반을 찬 채 헬멧·권총·곤봉으로 무장하고 허리춤에 방독면을 매단 건장한 경찰들이 그곳에 있었다. 사회당의 크리스토스 파푸트시스 시민보호 장관은 “난 엑사치아를 무척 좋아한다. 그런데 경찰들이 없다면 엑사치아 주민들은 봉기해 이 지역의 창문을 부수고, 화염병을 투척할 것”이라고 했다.(2) 그러나 이곳 주민인 페트로스는 그런 주장을 반박했다. “이곳 주민 누구도 가게를 부수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 지역을 에워싼 저 경찰들은 부르주아를 보호하기 위해 ‘훌리건들’을 감시하는 것이다.” 아테네 지리를 상세히 점검할 필요가 있었다. 요컨대 ‘위험한 계층’이 거주하는 엑사치아 한 길 건너엔 아테네 중심가의 최고 갑부 지역인 콜로나키가 있다. 2008년 12월, 시위대는 이 두 지역 사이에 위치한 아스클리피오를 건너 콜로나키 지역의 명품 가게들을 표적으로 삼았다. 그래서 요즘은 이 거리가 경찰들로 북적인다.

2년 전 경찰 피격으로 숨진 소년

12월 폭동 2주년을 맞아, ‘당시 그리스 젊은이들의 엄청난 반정부 에너지가 남긴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에, 무정부주의 단체 중 하나인 AK(Antiexousiastiki Kinisi) 회원 반젤리스는 “남긴 게 거의 없는 동시에 많은 것을 남겼다”고 했다. 이어 그는 무정부단체들이 아테네에서 몇몇 공원과 건물 10개를 점거해 집단 공동체를 이뤄 거주한다고 했다. 반젤리스는 친구들과 함께 엑사치아 지역 테미스토클레우스 거리 66번지에 있는 건물을 관리한다. 그 건물에는 작은 바와 이민자를 위한 언어 교실, 그리고 무정부주의 강의 교실이 있다. 주민들은 그곳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있는 옛 주차장을 점거해 소규모 식물원으로 개조한 뒤, 간이 바를 갖추고 자체 운영하고 있다.

또 다른 변화가 있었다. 주민협회는, 가끔은 무력으로, 무정부주의 단체의 도움을 받아 엑사치아 중앙에 있는 작은 광장에서 몇 년 전부터 노숙하고 있던 마약 중독자들을 추방했다. 이제 이들은 엑사치아에서 300m 떨어진 공과대학 ‘폴리테크네오’와 고고학 박물관 사이 토시트사 거리에서 노숙하고 있다. 광장은 예전처럼 엑사치아의 모임과 밤의 중심지로 재탄생했다. ‘폭동이 남긴 것이 고작 광장을 되찾은 것이냐’고 묻자, 반젤리스는 “유토피아를 실현할 수 있다는 희망을 남겼다”고 서둘러 말했다.

광장에서 몇백m 떨어진 법과대 정문에는 ‘우리 학위의 가치 하락을 막자!’는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각 학생회 조직마다 회원을 모집하고 있었다. 알렉시스 리쿠디스는 극좌파 단체인 대학독립좌파운동연합(EAAK) 소속이다. 그는 2008년 12월, 거리에서 “경찰은 돼지, 살인자!”란 구호를 외쳤고, 점거한 교내에서 기거하며 모든 집회에 가담했다. <르몽드> 그리스 특파원은 그의 초상화를 신문에 실어 “모든 그리스 청년의 시위 행렬과 행진의 표상”으로 삼았다.(3) 이후, 리쿠디스는 어떻게 됐을까?

그는 말했다. “2009년 1월, 국가를 전복하고 싶었지만 실패한 우리는 가벼운 공황장애를 앓았다. 그런데 우리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학생들이 학생회 조직에 가입하며 금세 할 일이 많아졌다. 이웃 집단끼리 싸우기 시작했다. 2008년 12월은 정말로 젊은이들의 정치 교육장이었다.” 그 과정에서 새로 탄생한 ‘시스템 전복을 위한 반자본주의 좌파연합’인 안타르시아(4)가 트로츠키주의자를 비롯한 10개의 소규모 극좌파 단체를 통합했다. 비판적인 도시민에게 정치적 돌파구를 제공하기 위해 창립된 안타르시아는 창립 10개월 뒤 치른 국회의원 선거에서 0.4%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한편, 좀더 오래된 또 다른 극좌파 연합인 ‘시리자’는 득표율이 4.6%로 떨어지면서 의석 하나를 잃었다. 이에 대해 알렉시스는 “갈 길이 멀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우리는 차근차근 발전하고 있다”며 침착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리스의 경제위기가 닥쳤다. 2010년은 샐러리맨들의 파업과 시위로 점철된 한 해였다. 당연히 엑사치아의 모든 젊은이들은 시위에 가담했다. 무직 상태인 26살의 젊은 건축가 크리스티나는 이곳 사람들 모두 그리스 총리 파판드레우와 국제통화기금(IMF), 그리고 유럽연합(EU) 사이에 서명한 ‘양해각서’가 “책임도 없는 서민층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위한 자본주의의 신종 사기였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시위에 가담했다”고 설명했다. 시위 때마다 사람들이 몰린 것은 아니었지만, 5월 5일의 시위는 예외였다. 아테네의 판테온대학 사회심리학 교수 크세니아는 “난 거리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정말 대단했다! 일순, 어떤 그룹이 ‘빌어먹을 의회를 불사르자!’라고 구호를 외치자, 군중 모두 그 구호를 연호했다. 난 구호를 외치는 것이 부끄러웠지만, 따라 외쳤다!”며 흥분했다. 그의 여자친구인 마리아는 “만약 은행 직원 3명이 희생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현재 국회를 점거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시위 화재로 사무실에서 질식사한 세 은행원 때문에 시위대는 치명타를 입었다. 무능한 경찰은 복면을 쓴 3명의 방화 살인범을 찾지 못하는 가운데, 그리스에서 성행하는 국가의 사건조작설이 번지고 있다. 사건 당일 저녁, 스타 정치평론가 야니스 프리텐데리스는 텔레비전 채널 <메가>에 나와 “사람들이 거리에서 ‘의회를 타도하자’고 외친 결과가 바로 이런 것이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남긴 게 거의 없고, 많은 것을 남겼다

모든 시위에 가담한 엑사치아의 젊은이들이 그리스의 젊은 세대를 대표할 수 있을까? 그건 확실치 않다. 정말 그리스 젊은이들의 정신을 느끼고 싶다면 이 빈민가와 멀리 떨어져야 한다. 위기의 순간에 고도로 정치화된 청년들과 무정부 그룹이 연동해 대단한 힘을 구축할 수 있는 곳이 엑사치아이긴 하지만, 강력한 이미지를 좇는 미디어 권력을 좋아하는 엑사치아가 곧 그리스는 아니기 때문이다.

인근 교외에 거주하는 유행을 좇는 무리들은 밤마다 아크로폴리스에서 북서쪽으로 몇백m 떨어진 프시리와 모나스티라키 혹은 가지 거리에 위치한 바들을 찾고 있다. 우리가 바에서 만난 지오르고스, 하라, 파노스, 엘레나, 에프티니아, 미카리스, 피터, 랄린 등은 모두 ‘2008년 12월 거리’에 있었다. 이들은 탁자에 앉아서 와인에 꿀을 타 데워 마시는 라코멜로를 피처로 시켜놓고 조금씩 따라 마시며 자신의 의견을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파노스는 “우리 학교 학생은 모두 거리에 있었다. 그래서 나도 쫓아나갔다”고 했다. 에프티니아는 대다수의 그녀 친구들처럼 “우리가 여기 있고,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시위대에 이틀만 가담했는데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시급 3.5유로를 받고 웨이터로 일한다는 대학생 파노스는 “여전히 최악이다! 난 내가 직업을 구하지 못할 것임을 안다. 두 가문이 반세기 전부터 그리스의 권력을 쥐고 있다. 그게 다다.(5) 이걸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가?”라고 했다. 그 옆에 있던 친구는 한술 더 떠 “난 저런 인간들한테 투표하는 우리 부모와 조부모가 싫다!”고 했다. 이 젊은이들 모두에게 ‘양해각서’는 “너무나 골치 아픈 것!”이었다. 심지어 이들은 양해각서의 내용을 이해하려고 시도도 해보기 전에, 이 협약이 “그리스 집권 사회당(PASOK)과 제1야당인 신민당(ND)이 다년간에 걸쳐 조직적으로 자행하는 부패 행각에 변화를 전혀 주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다.(6) 2010년에는 이들 중 시위에 가담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랄린은 “거리시위는 너무 위험해졌다. 그리고 난 폭력에 반대한다”고 했다. 그녀의 친구 에프티니아는 “단체들이 사회당에 매수됐다! 이젠 아무도 단체에 소속돼 있지 않다. 우리가 가진 것은 음악과 친구가 전부다!”라고 했다.

여전한 젊은이들의 환멸

엑사치아에서 북쪽으로 몇km 떨어진(7) 키프셀리 지역의 포키오노스 네그리 거리를 장식한 수많은 카페와 대중음식점에는 관광객의 발길이 뚝 끊겼다. 이 지역의 중산층, 하위 공무원, 상인, 그리고 이들의 자녀만 카페와 식당을 찾았다. 엘레나, 디미트리스, 파노스, 니나, 드지나, 엘레니 그리고 이들의 친구들은 맥주를 한 잔씩 마시고 있었다. ‘너무 비싸 딱 한 잔씩 시켜놓고’ 텔레비전에서 키프셀리의 두 명문 구단인 ‘파나티나이코스’와 ‘파니오니오스’가 펼치는 축구 경기를 시청했다. 이들 중 대부분은 2008년 12월 시위 때 가담하지 않았다. 디미트리스는 “알렉시스는 사고로 사망했다. 그런데 왜 내가 시위에 가담해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파노스는 “정당들이 정부를 공격하는 데 알렉시스의 죽음을 이용했다”고 단언했다. 시위에 간 사람은 엘레나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난 딱 하루만 시위하고, 훌리건들의 폭력을 목격한 뒤 시위 현장을 떠났다”고 했다. 2010년, 이들 중 긴축정책 반대시위에 참여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들은 속수무책이었다며 “정부와 유럽연합이 결정한 정책인데, 우리가 무얼 반대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물었다. 몇몇은 “어쨌든 우리 모두는 그 빚에 책임이 있고, 현재 그 빚을 갚아야 한다”고 했다. 드지나는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막 끝난 경기에서 파나티나이코스가 2 대 1로 승리했다), “언론이 정부를 위해 일한다고 확신한다”고 했다. 이들의 대화는 이민자들에 대한 이야기로 끝을 맺었다. “이민자가 너무 많다. 정부는 이들을 추방해야 한다”고 했다.

판테온대학의 사회인류학과 전임강사 라니아 아스트리나키는 “2008년 시위대에 가담한 젊은이들 대부분은 2010년 시위에는 다시 가담하지 않았다. 2008년 이들은 시위에 가담하고, 심지어 폭력시위도 마다하지 않으며 모든 사회계층에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사람들은 진정한 시위 동기가 무엇인지 현재까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고 했다. 장차 젊은이와 샐러리맨이 합세해 함께 시위할 수 있을까? 이론상 그럴 개연성이 많다. 우선 젊은이들 쪽에서 보면, 2008년의 문제가 여전하거나 더 악화됐다. 학위가 가치를 거의 상실해 대학을 졸업한 학위 취득자들이 변변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데다 물가 상승과 항상 위협적인 경찰, 그리고 최근에 592유로로 책정된 최저임금과 부모들이 이런 긴축 조치에 타격을 입어 줄어든 용돈, 요컨대 이들은 지난여름부터 이런 조치들 때문에 심각한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거리 곳곳의 닫힌 상점 진열장이나 건물의 출입문에는 ‘임대’라고 쓰인 노란 딱지가 나붙었다. 공무원들은 한 달 봉급에 상응하는 7월 보너스를 받지 못했다. 주민들은 리터당 1유로 50센트로 오른 휘발유 가격을 비롯한 물가 상승에 술렁이고 있다. 민간 기업들은 문을 닫거나 단체협약의 수정을 검토 중이다. 그리스 민간 부문 노조인 ‘노동자총연맹’(GSEE) 산하기관인 노동연구소의 과학이사이자 경제학 교수인 사바스 로보리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단언컨대, 그리스에 2011년은 끔찍한 해가 될 것이다. 2011년 말에는 2009년 15.5%이던 실질 실업률이 20%로 상승해 실업자 100만 명의 한계가 깨질 것이다. 게다가 아무도 정부가 취한 강제 세금 조정 조치를 신뢰하지 않는다. 집중적인 선제 공세를 통한 정부의 이런 조치들은 자신이 행한 사기, 대중영합주의, 부패, 빚 등에 대해 우리 모두를 죄인으로 취급하는 셈이다.” 작가 타키스 테오도라풀로스(8)는 “단지 세금 징수 시스템만 부패한 것이 아니라, 위정자들과 무기 및 정보통신, 해운, 에너지 분야에서 국가와 함께 일하며 부를 축적한 소수 가문들 간에 최고 수준의 공모가 이뤄지고 있다. 이 가문들은 절대 통제를 받지 않지만, 반대로 의사에게 어쩔 수 없이 3천 유로의 뇌물을 건넨 파케라키(9) 같은 소시민은 기소됐다”고 규탄했다.

시위를 가로막는 몇 가지 장애물이 있다. 우선, 아직은 많은 그리스인들이 주택이나 임대아파트 혹은 작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어 경제위기를 잠시나마 완화할 수 있는 여력이 있다. 정치적 측면에서 보면, 급진좌파의 극단적인 분열이 대중의 시위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사회당 좌파 연합에만 60여 개 정치단체가 있다. 폴리테크네오의 옛 건축학과 학생이자 그리스의 국제공산주의 기구(OKDE-Spartakos)의 일원인 마노스 스쿠포글루는 “사회적 불만은 커질 텐데, 이런 불만을 정치적 항의 시위로 바꿀 수 있는 어떤 구조도 존재하지 않는다”며 안타까워했다. 극장에서 무정부주의를 고무하는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는 마리나는 “2009년 난 좌파 연합인 시리자를 찍었는데, 실망하고 말았다. 저들은 허구한 날 언쟁만 벌여 지겨웠다”고 했다. 노조 입장에서 보면, 이런 상황은 노동자들을 보수화한다. 그리스의 노조 활동은 ‘민간 부문 노조’(GSEE)와 ‘공공노조연맹’(ADEDY), 두 조합이 주도하고 있다. 사회당이 이끄는 두 조합은 시위와 총파업을 벌이며, 정부와 IMF에 긴축정책의 엄정한 기준을 완화해줄 것을 촉구한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저들 간에 맺은 양해각서를 파기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폭력’을 둘러싼 뚜렷한 시각차

그리스의 특이 사항은 또 있다. 좌파의 힘과 연대한 모든 단체(10)에 근본적으로 반감을 드러내는 그리스 공산당(KKE)의 존재다. 이들은 지난 국회의원 선거에서 7.5%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KKE의 사무총장 알레카 파파리가(11)는 “우리가 GSEE와 ADEDY와 연대한다면 그것은 노조운동을 배신하는 범죄행위다. 특히 이들은 지금 정부의 야만적인 조치들이 부당하긴 하지만 필요한 조치라며, 노동자들이 이를 수용하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했다. 시위 때면 이 단체들은 서로 섞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만약 GSEE와 ADEDY가 오모니아 광장에서 집회를 열면, KKE는 신타그마 광장에서 집회를 열고, 극좌파 단체들은 파티시온 대로에서, 그리고 그 옆에서는 무정부주의자들이 집회를 벌인다.

유럽에서 스페인 다음으로 큰 무정부주의 단체는 그리스의 퍼즐게임을 푸는 중요한 요소다. 무정부주의 노조 ‘로시’(ROSSI)의 일원인 야니스 안드로울리다키스는 “2008년 폭동 때, 무정부주의자들이 폭력을 주도하며 시위 붐을 일으켜 전국적으로 5천∼1만 명이 시위대에 가담했다”고 털어놨다.

무정부주의자들은 “국가의 폭력에 폭력으로 맞설 것”을 요구하며 사회 전반에서 예외적인 호의를 누렸다.(12) 하지만 그들의 시위 참여는 양날의 칼이었다. 무정부주의자 중 일부는 국민의 봉기를 폭동으로 몰고 갔고, 또 일부는 극한의 폭력, 살인 행각을 자행하며 시위대를 와해했기 때문이다. 랄린과 프시리의 친구들, 그리고 많은 젊은이들이 “진열장을 부수고 화염병을 던지는 쿠쿠로포리(Koukoulofori·복면을 한 자들)와 그에 맞서 최루탄을 쏘는 경찰이 두려워 더 이상 시위에 가담하지 않는다”고 했다.

걸림돌 많지만 분노는 다시 비등

2008년 12월의 폭동이 있은 지 2년이 지난 지금, 사람들은 거리시위의 미래에 대해 대조적인 예측을 내놓고 있다. 경제학자 코스타스 베르고풀로스는 “사회 상황이 폭발 직전이다. 예기치 않은 사건이 터지면 그리스 전체가 불바다가 될 것이다!”라고 예고했다. 이어 그는 IMF의 계획은 “악순환의 고리다. 국민소득이 축소되면 소비가 추락할 테고, 소비가 추락하면 기업들이 문을 닫아 실업자가 양산되고, 소득 감소가 더 두드러질 것”이라고 규탄했다. 작가 타키스 테오도라풀로스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통제할 수 없는 형태의 폭력, 모두가 모두에게 자행하는 폭력”을 우려했다. 피아니스트 마리나도 “난 파시즘의 기승이 정말 겁난다. 밤마다 극우단체들은 엑사치아 근처 아지오스 판델레모나 지역 거리에서 이민자들을 공격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아테네 거리에는 분노한 샐러리맨들이 거의 매일 저녁 몰려들고 있지만, 아직 수많은 요구를 쏟아내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트럭 운송업자, 과일과 채소 생산업자, 월급을 못 받고 있는 젊은 의사, 체육부 직원, 문 닫은 출판사 직원 등이다. 정부는 국회와 아테네 중심가 주변의 폴리스라인을 확장해 철벽 요새로 둔갑시켰다. 엑사치아의 여학생 소피아는 “사람들이 긴축정책을 싫어한다는 것을 아는 파판드레우 총리가 사람들에게 겁을 줘, 저들의 시위 의지를 꺾으려는 심산”이라고 했다.

글•오렐 돔 Aurel Daum 일러스트레이터
피에르 돔 Pierre Daum  저널리스트, 아테네

번역•조은섭 chosub@ilemonde.com
파리7대학 불문학 박사. 주요 역서로 <착각>(2004) 등이 있다.

<각주>
(1) 발리아 카마키, ‘이들은 은행에 돈을 주고, 젊은이들에겐 총알을 제공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9년 1월호.
(2) ‘디아스’라는 경찰 폭동진압 소대들이 창설됐다. 소대당 20여 명으로 구성된 소대원들은 2인1조로 오토바이(한 명은 운전하고, 다른 한 명은 시위대를 타격한다)를 타고 시내 중심가를 24시간 순찰한다.
(3) 엘리즈 뱅상, ‘또 다른 알렉시스’, <르몽드>, 2008년 12월 18일자 참조.
(4) 안타르시아는 ‘폭동, 반란, 봉기’를 의미한다.
(5) 우파 쪽에서는 전 그리스 총리 카라만리스 지지 세력이 제1야당인 신민당(ND)을 1955년부터 지배하고 있고, 좌파 쪽에서는 파판드레우의 3세대가 70년 동안 정권을 쥐고 있다.
(6) PASOK는 전 그리스 사회주의 운동을 일컫고, ND는 신민주주의를 일컫는다.
(7) 아테네는 파리의 4배에 해당하는 거대 도시로, 그리스 인구 1100만 명 중 거의 절반인 500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8) 사빈 웨스피서, <밀로의 비너스의 발견>, 파리, 2008.
(9) 그리스의 톱니바퀴 보건 시스템. 환자들은 정상적인 치료를 받기 위해 일반 의사나 외과 의사들에게 돈봉투를 준다.
(10) 좌파의 상대적인 성공은 나치에 저항한 화려한 전력 때문이다. 이들은 과거 민란 때(1946~49) 수천 명이 희생되면서 군사독재에 맞선 영웅이 됐다. 이들은 국회의원이 부패했다는 견해를 고수하며, 유럽연합과 유로존 탈퇴를 내세워 젊은이들을 선동하고 있다
(11) 기자들과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는 파파리가는 예외적으로 우리의 몇몇 질문에 서면으로 답해왔다.(12) 앞에서 거론한 것처럼, 무정부주의 단체를 지지하는 시위 중 5천 명이 가담한 지난 9월 26일의 아테네 시위는 경찰버스에 화염병을 투척하며 실패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