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리, 섭정 속으로

2019-04-30     아크람 벨카이드, 라흐다르 벤시바 l 기자

알제리에서 지난 2월 22일부터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이는 알제리에서 역사적인 일이다.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이후, 남부 도시들을 포함해 알제리 전역에서 이렇게 평화적인 성격의 반대시위가 일어났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주말의 시작인 금요일(이슬람권에서는 주말이 금요일과 토요일이다-역주)마다, 정치에 무관심했던 청년들을 비롯해 남녀노소 수십만 명이 거리에 모였다. 다른 날에도 연좌농성과 직종별(변호사, 연구원, 언론인, 퇴직공무원 등) 가두행진이 있었다. 이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시위대는 한목소리로 4월 28일 네 번째 임기가 끝나는 압델라지즈 부테플리카 대통령의 정권 유지를 반대했다. ‘평화 시위’를 외치는 시위대는 부테플리카 대통령의 형제인 사이드 부테플리카와 나세르 부테플리카를 비롯한 그 측근들도 비난했다. 시위대는 현 정권의 종식과 ‘새로운 공화국’을 요구했으며, 일부는 제헌의회를 주장했다. 경찰은 시위가 시작된 이후 몇 주간 시위대에 협조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일부 경찰관과 헌병은 시위대와 연대하기도 했다. 

 

‘결정권자’는 대체 누구인가?

부테플리카 대통령은 침묵했다. 의료시설이 갖춰진 제랄다궁에 기거 중인 부테플리카 대통령은 거동이 불편하다. 그는 말을 하지 못하는 상태로 2013년부터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으며, 여러 고위 관리들의 이야기도 부테플리카 대통령이 대통령직을 수행하기 어렵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1) 그는 2월 초 ‘정기 건강검진’차 스위스에 머물렀다가 귀국한 후에도 여전히 서한으로 소통하고 있다. 부테플리카 대통령은 서한으로 알제리 국민들에게 4월 18일로 예정됐던 대선을 취소함과 동시에, 다섯 번째 대선 도전을 포기하겠다고 밝혔다. 선거를 취소함으로써 사실상 ‘포괄적 국민회의’가 구성되기까지 그의 네 번째 임기가 무기한 연장된 셈이다. ‘포괄적 국민회의’의 성격도 모호해 회의가 구성되더라도 앞으로 정권의 입맛에 맞는 의제만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2) 알제리인들은 부테플리카 대통령의 건강 상태가 위중하다는 것을 알고 궁금해했다. 권력의 무대 뒤에서 부테플리카 대통령을 대신해 결정을 내리고 행동하는 인물은 누구인가? 누가 대통령 대신 결정하고 행동하는가? 알제리 국민들에게 전하는 서한들을 작성한 인물은 누구인가? 누가 여러 명의 총리를 임명하고 해임했을까? 이 ‘포괄적 국민회의’라는 것을 실제로 생각해낸 인물은 누구일까? 

이는 우리가 ‘결정권자’라고 부르는 이들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결정권자’라는 용어는 1992년 1월 16일, 모하메드 부디아프가 망명생활을 끝내고 귀국하면서 처음으로 사용했다. 당시 알제리는 군부개입으로 벤제디드 샤들리 대통령이 축출됐고, 1차 선거에서 이슬람구국전선(FIS)이 승리하자 최고안전회의(HCS)가 의회 결선투표를 취소한 이후로 극심한 정치적 위기를 겪고 있었다.(3) 민족해방전선(FLN)의 역사적인 인물인 부디아프는 ‘결정권자’라는 단어를 쓰며 이렇게 말했다. “결정권자들과 이야기를 했고, 알제리의 부름에 응답하기 위해서 이를 받아들였다.”

부디아프는 이 발언을 통해, 샤들리 대통령의 축출에 따른 헌법적 공백 사태를 메우기 위한 임시 결정기관 국가최고위원회(HCE)의 의장을 맡은 것을 합리화했다. 과거 정치를 그만두기 전, 오랫동안 정권을 비난해왔던 부디아프는 자신을 설득시킨 이 ‘결정권자’들의 정체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그로부터 6개월 후, 부디아프는 근접경호를 맡고 있던 장교의 손에 피살됐다.(4) 

국가최고위원회의 의장의 역할이 방패막이에 불과하다고 믿었던 대다수의 알제리인들은 부디아프의 소심한 태도에 대해 놀라지 않았다. 부디아프는 피살되기 두 달 전인 1992년 4월, 몇몇 기자들에게 “나는 모든 결정권자를 알고 있지 않다”라고 털어놓았다. 그 후 군 출신의 라르비 벨헤이르, 할레드 네자르, 모하메드 메디엔(일명 ‘투픽’)과 모하메드 라마리의 이름이 자주 거론됐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알 수 없는 일이 있다. 어떻게, 어떤 내부거래를 통해 ‘1월주의자(janviériste: 1992년 1월 16일로 예정돼있던 의회 결선투표에서 이슬람구국전선의 압승이 예상되자, 1월 11일 선거를 중단하기로 결정한 알제리군 장성들을 지칭한다. 이들을 ‘결정권자들’로 지칭하기도 한다-역주)’들이 1988년 10월의 유혈봉기 이후 일어난 민주화운동, 즉 ‘알제리의 봄’을 평화롭게 마무리 짓기로 했는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 당시 알제리 당국은 반정부 항쟁을 하던 청년 수백 명을 향해 발포했으나(사망자 수는 비공식 발표에 의하면 600명으로 추산), 그 이후 복수정당제와 신문·언론의 자유화 등 여러 개혁을 실행했던 것이다.(5)

두 사건의 성격은 다르지만, 현 상황과 그 당시 상황의 공통점이 있다. 불투명성이 그것이다. 지난 3월 15일 금요일에 시위대가 든 플래카드에는 “마리오네트 인형줄로 미라 부테플리카를 조정하는 이들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적혀 있었다. “결정권자들은 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가?”라고 적힌 플래카드도 있었다. 이 질문들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몇 해 전에 나온 질문인 것이다.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부테플리카가 어떤 방식으로 정권 내에서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했는지 살펴봐야 한다.  

1965년부터 1978년까지 집권했던 우아리 부메디엔은 1965년 6월에 아흐메드 벤 벨라를 축출시켰던 혁명위원회 내의 동료들과 함께 주요권력을 독점했다. 의사결정구조는 샤들리 벤제디드 체제(1979~1992)에서 진화해, 크게 알제리인민해방군(ANP)의 참모부와 보안대(SM) 등의 안보기관 및 경제·안보 자문을 거느린 대통령직이라는 3개의 축을 중심으로 연결됐다. 이 3개 주체들은 민감한 사안에 대해 서로 경쟁관계에 있으면서도 항상 정권의 안정성 유지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벤제디드는 최종결정을 내릴 때 합의를 우선시했다. 위 3개 주체 중 2개 주체가 어떤 안을 추천하면, 정부는 그 안을 선택하고 실행했다. 

그 당시 ‘안보기관’과 알제리인민해방군의 참모부는 대통령이 원한 소극적인 정치개혁에 반대했고, 민족해방전선이 유일 정당으로서의 지위를 잃는 것을 원치 않았다. 흔히들 민족해방전선이 1962년부터 알제리를 이끌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민족해방전선은 프랑스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알제리전쟁을 치른 후, 군부와 함께 역사적 정당성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사결정 과정에서 네 번째 축이 됐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국(Political bureau)을 통제할 수 있었지만, 민족해방전선의 유력인사들은 안보기관이나 알제리인민해방군의 참모부에 전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반쪽짜리 대통령이 되지 않을 것”

1999년 부테플리카가 최초로 당선되기 전까지, 군부와 안보기관은 오랫동안 대통령직보다 우월한 지위를 점해왔다. 이들은 1992년에 벤제디드 대통령을 축출했을 뿐만 아니라 1997년에 안보기관과 이슬람구국군(AIS, 이슬람구국전선의 군사조직) 간에 체결된 합의를 수용하지 않은 리아민 제루알 대통령(1995~1999)을 사임하게 만들기도 했다.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에 수도 알제의 고지대에 있는 엘 무라디아 궁전으로 들어간 부테플리카는 의사결정주체의 세 번째 축인 대통령직의 영향력을 신속하게 회복했으며, 때때로 “나는 반쪽짜리 대통령이 되지 않겠다”는 말을 강조했다.

부테플리카의 선언에는 다음 두 가지 의미가 내포돼 있다. 첫째, 부테플리카는 대통령으로서 새로운 ‘알제리의 봄’에 찬성할 생각이 없었다. 부테플리카의 목표는 군부와 안보기관 및 정부의 인사들을 쥐고 흔들었던 절대 집권자 부메디엔 대통령(1978년 사망) 체제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외무부 장관을 역임(1963~1979)했던 부테플리카는, 장애물 없이 권력이 행사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세대에 속했다.  

두 번째로 부테플리카는 군부에 순종적이지 않았다. 그는 군부를 포함해 고위급 책임자들에 대해서도 임명, 해임 및 퇴직을 명할 수 있는 대통령의 권한을 지난 20년간 이용했다.  

부테플리카는 첫 번째 임기부터 세 번째 임기까지(1999~2014) 군부와 안보기관보다 대통령의 의사결정권을 더욱 강화했다. 외교적 수완을 강점으로 부테플리카는 군부와 안보기관에 알제리의 국제적 이미지를 정상화할 것은 물론, ‘암흑의 10년(1991~2000)’ 동안 그들이 자행한 행위들(강제 실종, 군부의 민간인 학살 개입 등)에 관련해서 기소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부테플리카는 스스로를 내외부적으로 ‘평화를 되찾아온 사람’이라고 칭했으나, 사실 그 평화에 대한 사안은 그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전에 이미 잘 협상됐던 것이었다. 

그는 군부가 자신에게 빚을 졌으며, 자신이 대통령직을 떠날 경우 군부가 잃게 될 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군부에 상기시켰다. 부테플리카가 특정 장군들을 퇴직시키거나 ‘1월주의자’ 중 한 명으로 참모장이자 무장단체와의 투쟁을 담당했던 라마리 장군을 2004년에 사임시켰을 때도 다른 ‘결정권자들’은 이에 반대하거나, 정부 고위직에 특정인을 임명하도록 강요할 수 없었다. 노련한 부테플리카는 ‘제복차림의 군인’인 참모부와 ‘사복차림의 군인’, 안보기관 간의 경쟁심을 열심히 이용했다. 1990년대의 위기를 통해 정치적 영역에서 알제리정보안전부(DRS, 보안대가 그 전신이다)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했고, 2002년에는 아흐메드 가이드 살라흐 장군(현재 79세. 2004년부터 참모부 수장을 맡고 있으며 2013년부터 국방차관을 맡고 있음)과 장기협력을 맺었다.

여론으로부터 ‘세계 최고령의 현역 군인’이라는 조롱 섞인 별명을 얻은 부테플리카는, 대통령 단독으로 군대 내 상위 계급자를 여러 명 파면시켜 자신의 위치를 강화했고, 스스로를 부테플리카식 시스템의 중심에 올려놓았다. 현역 상급 장교 한 명은 다음과 같이 털어놓았다. 

“아흐메드 가이드 살라흐 장군은 압델라지즈 부테플리카에게 빚이 많다. 살라흐 장군은 원래 군 지도부 쇄신의 일환으로 2000년대 초에 퇴직했어야 할 인물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부테플리카는 살라흐 장군에게 지휘권을 주고 계속 활동할 수 있게 했다. 참모장이 부테플리카 대통령의 5선 계획을 지지하는 이유는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안보기관들은 대통령에게 무작정 보조를 맞추지는 않았다. 알제리정보안전부는 2010년부터 대통령 측근이 개입된 여러 부패사건을 이용해 영향력을 되찾았다. 알제리정보안전부가 부테플리카의 후계자로 추정되는 에너지·광산부의 카키크 켈릴 장관을 문제 삼으며, 알제리석유가스공사인 소나트락의 경영진을 대거 해임했던 경우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2013년 1월에 ‘피의 서약(Signatories for Blood)’이라는 이슬람 무장세력이 인아메나스 가스생산시설을 습격한 사건은 부테플리카와 군부에게 알제리정보안전부의 기세를 저지할 기회를 제공했다. 정보안전부는 이 인질극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안보기관들의 재정비가 이루어졌으며 2015년 9월에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해 왔던 메디엔 장군이 해임되기까지 했다. 정보안전부는 감시안보부로 개편됐고, 변화의 표시로 대통령 직속 기구로 편입됐다. 군부는 예전 정보안전부의 특권 가운데 일부를 되찾았다. 2013년 봄, 부테플리카는 네 가지 재료를 동일한 양으로 섞어 ‘파운드케이크’를 만들 듯 모든 의사결정의 핵심주체들을 아우르는 판, 대통령직이 걸린 도박판을 주무르고 있었다. 

하지만 부테플리카는 건강악화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해 4월 27일 뇌졸중으로 쓰러진 부테플리카는 4선 캠페인을 이끌 수 없었다. 이후 알제리 내 권력의 현실은 더욱 불투명해졌다. 하지만 대통령직이라는 축에서 몇 가지 변화가 감지됐다. 부테플리카는 첫 번째 임기가 시작되자마자 군부의 영향력을 축소하고, 자신의 사람들(알제리 서부지역 출신이 다수)을 헌법위원회와 회계감사원 등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그는 걸프 군주국에서나 어울릴 법한 독단적 권력에 대해 대의단체(의회와 노사단체 등)들의 비난을 받았으나, 이 단체들이 자신에게 헌신적인 태도를 취하도록 조종했다. 이로 인해 부테플리카는 독립한 알제리의 역사상 유례없는 인물로 숭배됐고 곳곳에 걸려 있는 그의 초상화를 보면 ‘각하’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다. 

부테플리카는 대학교수인 동생, 사이드 부테플리카(61세)를 비롯한 형제들과 측근들과 함께 권력을 다졌다. 이들은 공식적인 권한 없이도 국가원수의 완벽한 신뢰를 받는 ‘부테플리카의 사람들’이다. 이들은 부테플리카의 이름으로 장관들 및 도지사, 알제 주재 서구권 대사들에게도 직접 간섭했다. 사이드 부테플리카 덕택에 장관직이나 총리직에 오른 이들은, 그에게 맞서는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 총리가 되면 대통령 파벌의 명령을 실행하거나, 아흐메드 우야히아 총리처럼 권력의 세 축을 연결하는 역할을 맡았다. 부테플리카의 시대에는 그 어떤 총리도, 대통령에 대해(2013년부터는 그의 파벌에 대해서도) 맞서는 행동을 할 수 없었다.

 

폭력배도 막을 수 없는 알제리 국민들

그러나 그 가운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대통령 파벌 내에서 새로운 축, ‘사이드 부테플리카의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 사업가인 그들은 국가 인프라시설 계약 덕분에 갑자기 큰 부를 축적했다. 탄화수소로 벌어들인 돈(알제리는 2000~2015년 1조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음)으로 정실자본주의(공무원이나 기업대표의 가족, 지인에게 일자리나 대출 등에서 불공정한 혜택을 주는 경제체제-역주)를 지탱하기 위해 그 수익을 재분배했다. 경제인포럼(FCE)의 대표를 맡고 있는 알리 하다드는 과두정치, 즉 정치적으로 영향력 있는 소수 지배자들의 출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일례로, 2017년 여름 동안 이들은 민간 수입업자들에게 할당된 외화예산을 축소하려 했다는 이유로 갓 임명된 테분 총리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들은 에너지 분야 등이 포함된 민영화 계획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테플리카의 5선 도전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시작된 지난 2월 22일 이후, 부테플리카를 대리한 섭정이 있었다는 증거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부테플리카는 병환으로 자리를 지킬 수 없지만, 그의 서명은 여전히 필요했다. 대통령의 최측근 2명과 파벌, 참모장은 병환중인 그의 업무수행을 도와 부테플리카 체제가 여전히 유효함을 보여주려 했다. 사이드 부테플리카는 60여 년 전 벌어진 독립전쟁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혁명적 정당성’이 없다. 그런 만큼, 그는 국민들의 분노를 이용하지 않으면, 형의 뒤를 이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아흐메드 가이드 살라흐는 나이와 현역 군인이라는 점이 걸릴 것이다. 결국 부테플리카 시스템은 공감대를 형성할 대안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난관에 부딪힌 것이다. 

2월 22일의 대규모 시위는 대통령 파벌 문제에서 출발했지만, 이제 이를 넘어서서 정권 교체에 대한 문제를 강력하게 제기하고 있다. “그들은 정말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라는 슬로건이 계속 등장했다. 이 시위는 알제리민족해방전선, 과두정치 및 정권에 종속된 ‘대중조직’ 등 대통령과 연합한 자들이 폭력배를 동원해도, 거리행진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줬다(폭력배 동원은 2011년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입증된 방법이다).

다시 말해, 해결책은 시위자를 향해 무기를 사용하도록 언제든지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군부와 안보기관의 손에 달려있다. 살라흐 장군은 이번 시위를 두고 “알제리를 고통의 시간으로 몰아가려는 특정주체들이 있다”고 평가(3월 6일)했지만, 이후 말을 바꿨다. 그는 3월 10일에 “알제리는 알제리 국민이 있기에 운이 좋고, 군부도 알제리 국민이 있기에 운이 좋다”라고 말했다. 제복차림의 군부든, 사복차림의 안보기관이든 이들은 권력을 끌어들이는 것을 포기하고, 근본적인 정치적 변화를 받아들일 것인가? 

앞서 언급한 상급 장교는 “군부는 자신들이 받고 있는 재정적인 혜택이 시민들에게 넘어갈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체념을 말해왔던 알제리 국민들은, 이제 (민주주의의 주역으로서)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알제리 군부에는 정치적 영역을 벗어나, 자신들의 내부 혁명을 이룰 일이 아직 남아있다.

 

 

 

글·아크람 벨카이드 Akram Belkaïd, 라흐다르 벤시바 Lakhdar Benchiba
기자

번역·이연주
번역위원

 

(1) Akram Belkaïd, ‘늙고 병든 마그레브의 취약한 권력자들(Les gérontocrates et le dilettant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8년 12월호.

(2) 누르딘 베두이 총리의 기자회견, 알제, 2019년 3월 14일.

(3) Abed Charef, 『대격변의 알제리(Algérie. Le grand dérapage)』, L’Aube, La Tour-d’Aigues, 1994.

(4) Mohamed Boudiaf, 『알제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의 혁명(Où va l’Algérie? Notre révolution)』, Éditions Librairie de l’Étoile, Paris, 1964.

(5) Ignacio Ramonet, ‘충격에 빠진 알제리(L’Algérie sous le choc)’,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1988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