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고받는 강대국, 승자는 투기자본

[Dossier] 화폐전쟁

2010-12-03     로랑 자크

지난 11월 21일 아일랜드는 유럽연합과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다음날 곧바로 포르투갈과 스페인으로 위기가 확산될 것이라는 불안감이 증폭되면서 투기 세력이 들썩였다. 열흘 전 서울회의에서 주요 20개국(G20) 정상들은 “강력하고, 지속 가능하며, 균형 잡힌 성장”의 초석을 다짐하며 투기를 단속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회의 이후 정상들의 연이은 상호 비방은 오히려 국제통화 시스템의 약화만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달러나 중국의 위안화에 대한 헤알화의 가치가 상승할 것을 우려한 브라질의 귀도 만테가 재무장관이 지난 9월 ‘화폐전쟁’에 대해 언급하며 최초로 경종을 울렸다. 다음에는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국제통화기금(IMF) 총재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그는 “설령 잠재적일지라도 화폐전쟁의 위험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1)

이 ‘충격적인’ 발언은 1930년대 대공황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위기를 부채질한 것은 주요 경제대국 간의 경쟁적인, 다시 말해 참담한 환율 평가절하였다. 이후 국제통화 시장의 지형도는 크게 바뀌었다. 국제통화 시장의 주역이 늘어났고, 게임 룰도 달라졌다. 하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경제성장과 고용창출은 화폐가치 절하를 통한 중상주의 정책에 의해 좌우된다.(2) 과거의 법칙은 여전히 유효하다. 화폐가치가 낮은 국가는 상품 수출이 용이하다. 상품 가격이 그만큼 저렴하기 때문이다.

모두 평가절하에 목매다

국제통화 무대가 한층 더 뜨겁게 달궈졌다. 지난 9월 엔화 절하를 위해 일본 중앙은행이 일시적으로 대대적인 환율 개입을 단행했다. 브라질과 타이는 자본유입을 억제했다. 9월 말 미 하원은 의도적으로 환율을 조작하는 국가(중국을 직접 겨냥하고 있다)에 보복관세를 부과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또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미국 경제에 대규모 유동성을 투입하며 달러 가치를 인하하는 데 앞장섰다. 여기저기서 경고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환율전쟁의 주역들은 자국의 경기부양을 위해 은밀히 화폐가치를 절하하려고 든다. 하지만 이런 게임은 제로섬 성격에 가깝다. 한 참가자의 평가절하는 다른 참가자의 평가절상을 가져온다. 그렇다면 ‘화폐전쟁’이 발발한 것일까?

1944∼71년 브레턴우즈협정은 전후 세계에 불어닥친 위기를 예방할 수 있는 ‘새로운 화폐 질서’의 초석을 다졌다. (중앙은행들과의 협력 아래) 국제통화 시스템을 관장하기 위해 IMF가 창설됐다. 각 화폐의 환율은 금 1온스당 35달러의 가치로 달러화에 고정됐다. 달러나 금 대비 통화가치가 1% 이상 변동할 때 곧바로 해당국의 중앙은행이 개입했다. 물론 이런 체제는 몇 가지 문제점을 드러냈다. 국제수지의 균형을 실현하며 브레턴우즈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각 화폐의 상대 가치를 조정하는 것, 다시 말해 평가절하가 주요한 문제였다.

1958년부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국은 자본이동 통제는 유지하면서도, 무역(재화와 용역의 수출입)에 대한 환율 통제는 해체해나갔다. 지속적인 경제성장으로 세계경제 지형이 변화하면서 전후 환율체제가 더 이상 시대의 요구에 부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71년 미국은 돌연 일방적으로 온스당 35달러 하던 달러의 금태환을 포기하고, 자국 화폐의 평가절하를 공식화한다.(3) 다른 주요 선진국 역시 수요와 공급에 따른 ‘변동’환율제를 택한다. 이제는 환율시장이 중앙은행을 대신해 환율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각국의 중앙은행이 환율의 방향을 조정하기 위해 대규모 개입을 단행하면서, 여전히 의도적인 ‘환율 조작’(Dirty Floating) 문제가 상존했다. 그럼에도 환율 통제가 점차 완화됨에 따라 중앙은행의 절대적인 환율통제권은 축소된다.

중앙은행, 외환시장 앞의 초라함

어쨌든 중앙은행은 더 이상 선택권이 없다. 오늘날 중앙은행이 애용하는 무기(외환보유고)는 거대한 외환시장 앞에서는 새 발의 피일 뿐이다. 한 예로 외환시장의 하루 거래량은 4조 달러를 넘는다. 이는 유로존 국가의 중앙은행이 보유한 외환액을 전부 합친 것보다 5배나 높은 수치다. 그런데 일일 거래의 단 5%만이 무역거래에 속하고, 전체 외환거래의 95%는 투기자본의 이동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앙은행이 나서서 환율의 향방(환율의 절하나 절상)을 거스르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기껏해야 대거 달러를 매입함으로써 자국 화폐의 가치 변동을 늦추는 일이 고작일 것이다. 이는 오래전부터 아시아에서 관측되는 현상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일본(1조 달러 이상 외환 보유)이라는 대국이, 그리고 오늘날에는 일본의 권좌를 넘겨받은 중국(한국·대만·홍콩·싱가포르·말레이시아 등에 바짝 쫓기는 중국의 외환 보유액은 2조5천억 달러 이상이다)이 그러하다. 물론 신흥국 브릭스(BRICs·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 그리고 멕시코, 타이, 인도네시아,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자본이동을 통제하며 최소한의 환율 통제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시장 자유화로 환율 통제의 입지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중국 고정환율, 환율전쟁의 시발

환율전쟁(만일 환율전쟁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의 시발점은 1990년대 달러화에 자국의 화폐가치를 고정한 중국의 결정에서 비롯됐다. 이 조치는 위안화 절상을 억제하는 데 기여하며 중화제국의 무역 흑자 감소를 막아줬다.(4) 당시 중국은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중국의 기록적인 연간 성장률(10~12%)은 수출 증가의 힘이 컸다. 수출은 미국·일본·유럽 등지의 다국적기업의 하청과 해외 이전으로 가속화됐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의 무역 적자가 가중됨에 따라 중국의 무역 흑자는 눈덩이처럼 늘어났다. 그런데 미국의 무역 적자는 중국이 미국 국채를 대거 매입하며 중국 내 보유 달러가 늘어났기 때문이기도 했다.

중국은 인위적인 환율 조작으로 수출에 드는 비용과 수출로 거둬들이는 수익 사이의 불균형을 조장했다. 수입상품에는 높은 관세를 매기면서 자국의 수출에는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관행에 불만을 품은 미국이나 유럽은 이미 30~40%의 위안화 절상을 요구한 바 있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위안화 절상은 자국 기업을 도산으로 내몰고, 그로 인해 실업과 사회문제가 발생할 것이라며 반발했다. 중국에는 무역 상대국의 불만보다 이런 문제가 더 큰 골칫거리인 셈이다. 최근에는 오히려 중국이 미국의 방만한 재정 및 화폐 정책을 비난하며, 미국을 세계경제를 위협하는 불균형의 원흉으로 지목했다.

중국의 무역 상대국은 중국에 관세 보복 조치에 나설 수도 있다. 그러면 화폐전쟁은 무역전쟁으로 확전될 것이다. 전통적인 경기부양책(긴축재정을 동반한 기준금리 인하책)에도 경기가 살아나지 않는 지금의 상황을 감안하면, 이런 시나리오가 꼭 실현되지 말라는 법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어쨌든 중국이 조금씩 화폐정책에 변화를 도모하는 것도 사실이다. 해외에서 위안화 표시 국채 발행을 허가함으로써 위안화의 국제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이것은 미국이 그토록 바라는 환율 통제의 점진적 붕괴의 서막이자 신호탄이다. 앞으로 위안화 가치는 더욱 자유롭게 변동되고, 달러 대비 가치도 점차 상승할 것이다.

이것은 중국 대 세계가 대립하는 전통적인 형태의 환율전쟁 1차전에 불과하다. 여기에 좀더 포착하기 힘든 투자가 집단의 등장을 축으로 제2의 환율전쟁(식별은 힘들지만 더욱 우려스러운)이 가세하고 있다. 이른바 ‘캐리 트레이더’(Carry Trader·저금리 국가에서 돈을 빌려 상대적으로 금리가 높은 나라의 주식이나 채권 등에 투자하는 투자가)가 그것이다.

중국 대 세계의 1차전, 그리고…

OECD 국가의 중앙은행 총재는 연기금이나 머천트뱅크, 투자기금의 경영자들로 이루어진 이 일단의 통제 불가능한 군단에 환율통제권을 내주고 있다. 물론 전설의 ‘와타나베 부인’(가계 저축을 책임지는 일본의 가정주부를 의미)도 무시할 수 없다. 환율시장으로 우르르 몰려드는 캐리 트레이더들은 중앙은행이 쌓아올린 인위적인 환율 방어벽을 무너뜨리고 있다. 이들은 ‘저금리 통화’(Funding Currency·이른바 자금통화)를 대출해 ‘고금리 통화’(Carry Currency·캐리통화)에 투자함으로써, 각종 자산의 수익 차로 짭짤한 이문을 올리고 있다. 2000년 초 일본 금리가 제로에 가까웠을 때 ‘와타나베 부인’을 비롯한 개인 투자가들은 당시 5~8%의 수익률을 보장하는 영국이나 오스트레일리아 국채에 종잣돈을 투자했다. 이런 차익거래(Arbitrage)는 환율이 안정세를 보이는 투자 기간에 수익을 보장한다. 그런데 원통화와 목표통화의 환율 차이로 국채 수익률이 배가되면서 이런 종류의 거래는 더욱 높은 수익원이 되고 있다.

캐리 트레이드의 무차별 공습

현재 캐리 트레이드의 거점은 미국·영국·유로존을 비롯해 단기금리가 거의 제로에 가까운 국가들이다. 이들이 타깃으로 삼은 국가는 브라질·터키·남아공 등 금리가 높은 신흥국이다. 투자의 법칙에 힘입어 이런 현상은 자가증식 양태를 보인다. 캐리 트레이드가 원통화의 가치절하를 조장하며 목표통화의 가치 상승을 부추기는 것이다. 환율시장에 드리워진 캐리 트레이드의 높은 파고 앞에 중앙은행은 속수무책이다. 가장 최근의 환율전은 일찌감치 패배로 끝났다. 지난 9월 일본의 중앙은행은 며칠 만에 240억 달러 규모의 대대적인 환시장 개입을 단행하며 엔화 절하를 시도했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캐리 트레이더의 타깃이 된 신흥국은 자국 화폐가치의 과도한 상승에 놀라며, 환율로 인한 자국 산업의 경쟁력 약화를 막기 위해 환율을 통제하고 있다. 미국과 영국은 예산 적자와 무역 적자를 축소하기 위해 마구잡이로 화폐를 찍어내고 있다. 예컨대 ‘양적 완화’(Quantitative Easing)라는 바로크적인 이름으로 불리며 최근 성행 중인 고릿적 방식의 화폐정책이 그것이다. 한편 유로존 국가는 그저 사태를 관망 중이다. 유럽은 독일이라는 견인차에 얹혀 탄 채,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 위협에 사로잡힐수록 더욱 절상되는 유로화에 자국 경제를 내맡기고 있다. 물론 유럽 주변국(포르투갈·아일랜드·이탈리아·그리스·스페인)은 경쟁력 회복을 위해 유로화 절하를 희망하고 있다.(5) 어쨌든 세계 각 나라는 화폐전쟁의 망령이 물러가기를 기다리는 동안 다른 나라는 안중에도 없이 아직 남아 있는 무기를 속속 사용하느라 여념이 없다.

글•로랑 자크 Laurent L. Jacque
매사추세츠주 메드포시 소재 터프스대학 플레처스쿨과 프랑스 HEC 경영대 교수. 주요 저서로 <글로벌 파생상품의 위기: 이론에서 위법행위까지>(월드 사이언티픽 출판사·싱가포르·2010)가 있다.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각주>
(1) <르몽드> 인터뷰 기사, 2010년 1월 7일.
(2) 중상주의적 정책은 수출 활성화를 위해 사용된다. 틸 판 트레크, ‘유럽 경제의 독버섯, 독일의 무차별 신중상주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0년 9월호.
(3) 오늘날 금 가치는 온스당 150달러에 육박한다.
(4) 이브라힘 와르드, ‘중국에서 결정되는 미국 달러의 운명’,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9년 3월호.
(5) 로랑 자크, ‘한계에 부딪힌 유로화 우울한 10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9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