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퓰리즘은 위험하다?

2019-04-30     세르주 알리미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발행인

19세기 말, 미국에서 월가의 권력에 대항하고자 포퓰리스트당(인민당)이 창설됐다. 대부분 중하층 출신이었던 포퓰리스트당 지지자들은 자본주의 자체보다는 그 과잉 양상을 비판했다. 뉴딜 정책이 시행되면서, 포퓰리스트당은 좌파 및 지식인층과도 손을 잡았다. 그러나 이런 동맹관계는 반세기 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포퓰리스트’라는 치욕스러운 형용사만이 살아남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1백여 년 전, 농민 중심의 농촌 민주주의를 복원하려는 움직임에서 태동한 포퓰리즘 운동은 비교적 ‘진보적’인 성향을 보였으며, 구체적인 대규모 경제 개혁 방안을 내놓으면서 조직화됐다. 하지만 미국의 반흑인단체 KKK단이나 억만장자 로스 페로가 ‘포퓰리즘’이라는 용어를 인용하면서, 또한 아를레티, 브루스 스프링스틴, 군부 세력인 후안 페론과 조르주 불랑제, 레온 톨스토이, 프란츠 파농, 고전 사학자 쥘 미슐레, 장 마리 르펜 등 다양한 분야의 다양한 인물들이 ‘포퓰리즘’을 인용하는 바람에, 이 용어는 여러 이념이 혼재된 가운데 각자가 그 이데올로기적 함의를 파악해야 하는 수식어로 전락해버렸다. 사람들의 시선을 돌릴 만한 것이 필요할 때 내세우는 이념적 도구로 치부돼버린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 무지로 포퓰리즘에 대한 개념적 오해가 일반화된 가운데, 사회분석 평론이나 언론매체에서 ‘포퓰리스트’란 형용사가 무분별하게 사용되고 있다.

물론 포퓰리즘의 개념에 관한 적절한 비유적 설명이 없는 것은 아니다. 1890년 미 포퓰리스트당인 피플스 파티(People's Party: 인민당) 전당대회에서 캔자스 주 소속의 메리 엘리자베스 리스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월가는 현재 온 나라를 손에 쥐고 있다. 우리에겐 더 이상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월가의, 월가에 의한, 월가를 위한 정부만이 있을 뿐이다. 오늘날의 법은 사기 치는 법관들에게는 번듯한 옷을 입혀놓고, 성실한 국민들에게는 누더기를 던져주는 제도적 산물이 되고 말았다. 따라서 오늘날의 국민들은 궁지에 몰려 있다. 금고를 지키는 졸개들이 우리를 괴롭히며 경계를 늦추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포퓰리스트당이 출범할 당시, 그 지지 기반은 소규모 농가들이었다. 재계와 업계는 경제부흥기의 기업친화적인 정책을 통해 급성장했으나, 농민들의 삶은 내전으로 피폐해졌기 때문이다. 소외계층의 손을 잡아준 포퓰리스트들은 도시인과 지식인 등 소위 ‘진보’의 주축이 된 인물들을 경계했다. 자신들이 이들 때문에 직접적인 피해를 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에 1892년 포퓰리스트당의 기본강령 서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언급된다. “선거는 물론 입법기관과 의회에 부패가 만연하고, 법관들의 옷에도 부패의 흔적이 있다. 언론은 권력의 시녀가 돼 보조금을 받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 권력의 탄압을 받고 있다. 노동은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대지는 자본가들이 점령하고 있다. 노동자들은 조합을 결성할 수 없고, 해외에서 유입된 노동력으로 인해 불안감에 시달린다. 수백만의 피땀이 어린 노역의 결실을 가로챈 사람들은 이를 바탕으로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다.”(1)

급진적인 성향을 보였던 포퓰리즘 운동은 인종 간 경계를 허물기도 했는데, 인종차별이 극심하기로 유명한 남부에서도 인종 구분 없이 단합된 양상을 보였다. 아칸소 주 포퓰리스트당원들은 인종분리법이 철폐되기 60여 년 전부터 이미 ‘인종과 관계없이 억압받는 사람들’의 문제를 공론화했다. 

 

시대에 역행하는 파시즘

19세기 말 미국 ‘악덕 자본가’들의 포퓰리즘 비판이 이어졌다. 사실 이는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프랑스든 미국이든 포퓰리즘을 처단한다는 명목하에, 좌파와 포퓰리즘을 은근히 결부시키면서 좌파의 바람직한 측면까지 없애려던 시도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언론매체에서 포퓰리즘은 “자유로운 개인주의와 진보주의를 거부하며 시대에 역행하는 파시즘”(2)이라는 식으로 정의될 때가 많은데, 이는 포퓰리즘의 정치적 영향력을 축소하려는 악의적인 설명에 불과하다. 외국인 혐오주의나 인종차별주의 등을 앞세우는 극우파를 잘 관찰해보면, 그들은 자신들의 기준에서 ‘이성의 범주’를 넘어서는 모든 이들을 겨냥한다. 그들은 소외계층일수록 포퓰리즘에 쉽게 포획되고 포퓰리즘은 이를 근간으로 발전한다고 주장한다. 

정치학자 피에르 비른바움의 설명에 의하면 이런 신화적 분석에서는 “민중과 우중”(3)이 대비된다. 다양한 사회적 현실을 반영하려는 비른바움의 ‘가상한’ 노력에도 지나친 단순화 논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대형은행들의 국경초월주의에 반대하는 일부 ‘포퓰리스트’들은 국수주의 성향의 반(反)유대주의자라는 식이다. 즉, ‘금융권의 비대한 성장과 세계화에 대한 비판은 수상한 행위’라는 식의 논리가 돼버린다. 

미국의 역사학자 마이클 카진의 경우, 보다 덜 악의적으로 미국 포퓰리즘의 역사를 상세히 기술했다.(4) 카진은 포퓰리즘의 본질이 흐려지는 것에 분개했지만, 결국 그가 취한 노선 역시 앤드루 잭슨 대통령이나 미국노동총동맹(AFL), 보호무역주의연맹, 잭 런던, 매카시즘(50년대 미국의 반공주의), 60년대 신좌파,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빌 클린턴 대통령 등의 노선과 별 다를 바 없었다. 잘 관찰해보면, 이들에게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우선 겉으로는 서민층과 중산층을 위하는 듯한 말로 그럴싸하게 치장하며, 소위 ‘기득권층’이라 불리는 이들에 대해 대놓고 반대한다. 그리고 이들은 새로운 매체를 활용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특히 일부 학자들은 이 마지막 특징만 가지고도 ‘포퓰리즘’이라는 딱지를 붙이기에 충분하다고 보고 있다. 가령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와 패트릭 뷰캐넌, 장 마리 르펜 같은 경우는 텔레비전을 다루는 능력이 뛰어났다. 그리고 카글린 신부(라디오 연설로 미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보수파 신부), 루스벨트 대통령, 우파의 토크쇼 황제 러시 람보 등은 독보적인 라디오 매체 활용력을 보여줬다. 그리고 조지 윌리스, (할리우드 출신의) 로널드 레이건 등은 촌철살인의 언변을 구사했다. 다수의 국민에게 호소한다는 이유만으로 ‘포퓰리즘’이라는 오해를 사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민중’과 ‘기득권층’의 범주 또한 포퓰리즘에서는 정의하기 나름이다. 민중이란 무엇이고, 기득권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문제 제기는 오랫동안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파는 오직 ‘포퓰리즘’만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다. ‘포퓰리즘(Populisme)’에서 말하는 ‘민중(People)’이란 일단 ‘좌파’에 해당하는 반면, 재벌가나 금융권, 철도기업, ‘월스트리트 저널’ 등은 모두 우파의 친구들이기 때문이다.

 

“반역의 20년 정권”

사회주의와 포퓰리즘은 공통분모가 많았지만, (미국 포퓰리스트당과 비슷한 담론을 펼치며 비슷한 지지 기반을 갖고 있던) 제3공화국 산하 프랑스의 급진파와 미국 포퓰리스트들은 자본주의에 대한 문제 제기는커녕 자본주의의 논리를 비롯한 자본주의의 그 모든 것에 대해 문제 삼지 않았다. 이들이 우선적으로 비판했던 것은 정치적 특혜나 담합구조, 독점, 은행 등 기존 체제에서 사회적 신분 상승에 장애가 된 요소들이었다. 

미국의 뉴딜 정책과 1930년대 프랑스의 좌파연합 인민전선은 진보주의 정당과 노동자, 농민, 지식인, 그리고 정부 권력이 한데 뭉친 대표적 사례다. 1981년이 돼서야 비로소 좌파가 집권한 프랑스에서는, 민중 중심의 권력을 수립하기에 충분한 시간을 가지지 못했다.(5) 반면 미국에서는 민주당과 노조 지도부, 학자 및 전문 고위관료 중심의 비공식 연립 내각이 결성돼, 약 20년 동안(1932~1952) 정권을 획득했다. 그리고 이들은 이미 시들해져 가고 있던 ‘포퓰리즘’ 담론을 서서히 공화당 측에 넘겨줬다. 

하지만 극심한 반공주의와 더불어 그에 따른 사상적 순정주의 및 마녀사냥이 나타나면서 좌파 지식인층은 우파가 자신들을 공격하기 위해 일부 국민들을 선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위스콘신 주의 공화당 상원 의원 조셉 매카시가 “반역의 20년 정권”이라는 구호를 내세우면서 모두들 공산주의와 퇴폐주의, 그리고 ‘반미주의’에 물들어있다며 정부와 학계, 영화계, 주요 언론들을 싸잡아 비판했기 때문이다. 내부 사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진보진영과 학계가 주도하는 미국에 반대하며 무작정 들고 일어났다. 그리고 이에 대해, 좌파는 무시로 일관했다.

1945년부터는 민주당이 반공 열풍에 빌미를 제공함에 따라 뉴딜 정책 기간, 공산주의와 손을 잡은 이들에 대한 의심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진보지식인층은 그런 민주당의 책임자들을 문책하지 않고, 이 문제를 문화적 또는 감정적 차원의 문제로 치부해버리고 만다. 이에 미국의 주요 사학자 중 하나인 리처드 호프스태터도 그 당시 미국의 이런 매카시즘이 “포퓰리즘의 전통과 진보주의의 전통이 반(反)자유주의적이고 과격한 사상으로 변질”된 결과라고 분석한다. 

그러나 포퓰리즘과 매카시즘을 동일시하는 것에는 논란의 소지가 있다. 포퓰리즘은 남부 지역에서, 그리고 매카시즘은 미드웨스트 지역에서 특히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포퓰리스트들은 경제개혁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제안해왔음에도, 조셉 매카시는 유독 이들의 ‘사회전복적인 측면’만을 물고 늘어지며 독설을 퍼부었다. 게다가 그의 지지자들 또한 일찍이 포퓰리즘과 진보주의 후보를 반대했기 때문에 뉴딜 정책에 반대하던 유권자층과도 정확하게 겹쳤다. 그리고 이렇듯 모호해진 ‘포퓰리즘’의 개념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포퓰리즘’으로 자리 잡았다(프랑스에서도 특히 푸자드주의와 이어 국민전선에 대한 연구 분석을 중심으로 비슷한 식의 접근 양상이 나타난다). 

‘포퓰리즘’ 현상은 사회분석을 제대로 거치지 못한 채 극단주의가 한데 모인 집합체로 정의됐다. 즉, 포퓰리즘은 ‘과격한 감정’을 드러내면서 인종차별주의와 민족주의에 민감한 사상 정도로 인식됐다. 좌파가 승리를 거두는 데 큰 역할을 한 백인 노동자층은 돌연 그 사상적 배경을 의심을 받게 됐다. 그리고 이제는 ‘포퓰리즘 성향을 보이는 사람’은 ‘재교육을 통해 교정을 받아야 하는 인물’, ‘문화적 뒤처짐에 따른 권위적 인물’ 취급을 받는다.

포퓰리즘은 사상적인 면에서 권위주의, 반유대주의, 보수주의 등 다양한 이념적 관심을 받았다. 가령 공격성과 냉소성, 그리고 엄격한 도덕성을 주장하며 양면성을 수용하지 않는 미성숙한 태도는 파시즘과 결부됐다는 것이다. 

특권층의 총애를 바탕으로 권력을 장악한 고위 자유주의 지식인층은 모든 사회적 문제에서 민중을 우매하며 비합리적이고 고지식한, 한마디로 ‘포퓰리즘적인’ 존재로 인식했다. ‘이데올로기의 종언’(6)에 관한 담론을 구축해내고 전문가들로부터 정당성까지 부여받은, 고위 인텔리겐차들은 결국 민중을 교정이 필요한 존재라고 치부해버렸다.

블랙팬더당의 슬로건을 본떠 “민중에게 권력을”이라고 부르짖던 1960년대 신진 좌파는 뉴딜 세대의 자식들로서, 여당인 민주당이 배제했던 집단, 즉 흑인이나 히스패닉 계 농민 노동자들, (당시 소외돼있던) 애팔래치아 소수민족들을 정치적으로 동원하려 했다. 하지만 제도권에 대한 반발이 확산되길 바랐던 급진파 학생들은 본의 아니게 서민층 백인들을 우파 쪽으로 기울게 했다. 정부로부터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소수 유색인종 집단의 탈선을 두려워하던 서민층 백인들이 의지할 곳은 우파뿐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공화당이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공화당은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부자들과 손을 잡는 한편, 좌파에게 무시당한 서민층 백인들을 향해서도 애착을 표현한다. 

 

가식의 기술

1992년 클린턴 대통령이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선거가 3파전이었던 점도 작용했지만, 그의 경제 분석이 유권자의 마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주요 평론가들의 분석에 의하면 클린턴은 엉성한, 나아가 ‘포퓰리즘적인’ 경제 분석을 내놓았다. “먼저 국민들을 생각해야 한다. 지난 십 년간 부자들은 더욱 잘살게 된 반면, 힘들게 일하면서 열심히 법을 준수한 사람들은 더욱 살기 힘들어졌다”고 한 것이다.(7) 하지만 그의 당선 이후 빈부격차는 더 심해졌고, 금융권의 규제도 이뤄지지 않았다. 게다가 공화당과 타협해 자유무역협정을 비준시키는 바람에, 노동자층의 불안감은 더욱 배가됐다. 1992년 대선과 1996년 대선에서 클린턴의 상대 후보로 출마한 로스 페로는 이렇게 말했다. “정치인들이란 다들 우리(자신을 포함한 기업 대표들)를 공격하며 포퓰리즘 공작을 벌인다. 하지만, 일단 당선된 후에는 우리 편이 돼준다.”

로스 페로의 이 말은, 참으로 정확하다.  

 

 

글․세르주 알리미 Serge Halimi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발행인. 미국 버클리대 정치학 박사 출신으로 파리 8대학 정치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1992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합류한 뒤 2008년 이그나시오 라모네의 뒤를 이어 발행인 겸 편집인 자리에 올랐다. 신자유주의 문제, 특히 경제와 사회, 언론 등 다양한 분야에 신자유주의가 미치는 영향과 그 폐해를 집중 조명해 왔다.

번역·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번역위원

 

(1) Howard Zinn, 『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Harper&Row, New York, 1980.

(2) Alain-Gérard Slama, 『민주주의 탄압 La Régression démocratique』, Fayard, Paris, 1995. 

(3) Pierre Birnbaum, 『민중과 우중: 어느 한 신화의 역사 Le Peuple et les Gros. Histoire d'un mythe』, Grasset, Paris, 1979. 

(4) Michael Kazin, 『The Populist Persuasion. An American History』, Basic Books, New York, 1995.

(5) Serge Halimi, 『좌파가 권력으로부터 배운 것 Quand la gauche essayait. Les leçons du pouvoir: 1924, 1936, 1944, 1981』, Agone, Marseille, 2018. 

(6) 『The End of Ideology 이데올로기의 종언』(Free Press, New York, 1962)의 저자 다니엘 벨(Daniel Bell)은, 경제적 번영에 따른 ‘새로운 사회적 불안’ 때문에 극우파가 등장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7) Bill Clinton & Al Gore, 『Putting People First: How We Can All Change America』, Times Books, New York, 1992.

 

* 이 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자매 격월간지 <마니에르 드 부아> 4~5월호(N 164)에 게재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