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퓰리즘 문학 vs. 프롤레타리아 문학

2019-04-30     에블린 피에예 l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오늘날 프랑스 논평가들은 ‘포퓰리즘’이라는 표현에 상징적인 매질을 가하고 있지만, 그보다 훨씬 전인 1930년대에는 여러 문학가들이 모여 ‘포퓰리즘 문학상’을 제정하기도 했었다. 여기서의 포퓰리즘은 정치와 무관하게 스스로를 낮추는 하나의 문학운동으로, 포퓰리즘 문학가들은 자신의 모습이기도 한 ‘서민들’의 모습을 그리고자 했다.

 

1930년의 프랑스 문학계는 초현실주의가 지배적이었다. 앙드레 지드는 인기 작가의 반열에 올랐고, 폴 발레리는 문단의 권위자가 됐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세상을 떠난 지 8년밖에 되지 않았을 때였고, 장 콕토와 장 지로두 역시 점차 인기를 얻고 있었다. 1914년부터 4년간 이어진 전쟁의 참극으로 생겨난 절망과 분노는, 점차 새로운 격분을 일으키는 연료로 변해갔으며, 1917년 러시아 혁명을 통한 대변혁은 모든 이들의 동조(同調)를 끊임없이 촉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파리 앙리 4세 고등학교와 소르본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친 바 있는 소설가 레옹 르모니에(1890~1953)가 『포퓰리즘 소설 선언』을 발표했다.(1) 이를 살펴보면 르모니에가 선언을 통해 민중을 그려내는 방식과 그 목적을 정의하고자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2) 그러나 당대의 여러 선언문들이 주로 논쟁적 특징을 지녔던 것처럼, 르모니에 역시 포퓰리즘 문학의 목적보다는 포퓰리즘에 반하는 반대 사조를 규정짓는 데 주력했다.
“낭만주의와 초현실주의는 무정부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반사회적이다. 또한 낭만주의와 초현실주의는 귀족적이다. 본질적 차원에서도 그렇지만, 결과적 차원에서는 분명히 그렇다. 낭만주의와 초현실주의는 예술가 자신에게 사회와 사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만드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현실주의와 포퓰리즘은 대중적이다.”

초현실주의에 대해서는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고, 낭만주의 역시도 다소 뒤처진 흐름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르모니에의 선언은 -비난의 대상이 된 초현실주의 역시 그러했듯- 당대의 미학적 사조를 격렬하게 비난하며 자신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 선언에서 더 주목할 만한 것은, 포퓰리즘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펼쳐 보였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다지 명확하지는 않다. “포퓰리즘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이유는, 우리가 극도로 혐오하는 스노비즘에 맞설 가장 강력한 반대 명제가 될 수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민중들이 그러하듯 우리 역시도 모든 형태의 겉치레를 경멸한다.” 그러므로 “사교계 인물들을 내세우는 것”을 멈추고 “소시민들, 평범한 사람들, 삶 그 자체가 희곡이 되는 이 사회의 대중들을 그려내는 것”이 중요하다. 즉 “현실에 대한 면밀한 연구를 촉구하고 있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다큐멘터리적 접근

광범위하고 막연하며 모호한 설명이다. 르모니에의 말을 계속 빌리자면, 포퓰리즘 작가들은 작품에서 “‘훌륭한’ 저속함과 ‘꾸밈없는’ 냉소의 표현을 포기하지 않길 바랐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 이 지점에, 스스럼없는 저속함과 냉소를 보여줄 특정한 ‘민중’이 존재한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 포퓰리즘 작가들이 이야기하는 ‘서민-민중’은 부르주아적 윤리나 언어와 거리가 멀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주장은 아니다. 이런 주장이 담긴 작품으로, 하인들의 삶을 다룬 몰리에르의 희곡들이나 외젠 쉬의 『파리의 신비』, 에밀 졸라의 『루공 마카르 총서』 등 여러 자연주의 문학들을 떠올려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연주의가 아닌 또 하나의 문학사조를 만들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루공 마카르 총서』 속의 묘사들은 졸라가 비판해온 이상주의적 시각을 거부하고 있으며 대중적인 서사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는 가공적이며 과장과 대조로 가득한 시선, 지극히 양식화돼 있으며 나름대로 낭만적이기도 한 시선으로 사회 전반을 다루고 있다. 기 드 모파상이 『피에르와 장』의 서문을 통해 강조했던 내용을 살펴본다면 졸라의 태도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주의 예술가들은 삶의 모습을 담은 평범한 이미지를 보여주기보다는, 현실 그 자체보다 더욱 완전하고 강렬하며 결정적인 이미지를 선사하고자 할 것이다. 현실의 모든 사실들을 이야기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일 최소 한 권 분량의 새 책을 찍어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덧붙여 모파상은 “재능 있는 사실주의자는 오히려 환상주의자라고 불러야 할 것”이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반면, 포퓰리즘 작가들은 환상주의를 거부하는 경향을 보인다. 다큐멘터리에 가까울 정도의 ‘사실성’을 추구하기 위해서다. 르모니에와 앙드레 테리브가 1931년 제정한 ‘포퓰리즘 문학상’의 첫 번째 수상작 역시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제1회 포퓰리즘 문학상은 파리 생마르탱 운하에 위치한 작은 호텔의 일상을 그린 외젠 다비의 『북호텔』로 돌아갔다. 특정한 주인공 없이 간결한 어조로 쓰인 이 소설 곳곳에서는 실제로 당대의 서민층이 사용하던 언어들을 찾아볼 수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은 다른 사람의 이름을 은어로 부르는가 하면, 매춘을 이야기하고, “코가 비뚤어지게” 취하기도 하며, 아침마다 “망할 놈의 일!”이라고 외치곤 한다. 직공들은 불완전한 문장과 속된 단어들을 뱉어내며, 호텔의 하녀는 연인에게 이용당하고 버림받아 ‘쉬운 여자’로 전락해버렸고, 노인들은 외로움에 떨며, 노동자들은 연민보다 와인을 원한다. 소설 전반의 어조 역시 발랄함과는 거리가 멀다. 이처럼 소설 『북호텔』은 1938년 마르셀 카르네 감독이 영화화한 동명의 작품과는 전혀 다르다. 오히려 영화 『북호텔』은 환상적이고 몽상적인 ‘시적 현실주의’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포퓰리즘 소설들에선 ‘민중’이 평범하고 단조롭게 그려진다. 또한 포퓰리즘 문학의 전개에 있어 “정치적 요소는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민중이라는 개념 그 자체도 정치와는 무관하다”는 것 역시 명확히 할 필요가 있었다. 이 문제에 있어 르모니에는 지극히 분명한 태도를 보여준다.

“포퓰리즘이라는 용어가 이미 중앙유럽 내 정치권에서 특정한 의미로 쓰이게 된 상황에서, 굳이 그 단어를 사용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그 특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되물으면, 누구도 명확한 답을 들려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 ‘포퓰리즘’이라는 프랑스어 단어는 우리가 부여하려는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하는 바다. 한편 포퓰리즘이 어떤 방식으로든 결국 정치적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며, 우리 중에도 최소한 볼셰비즘적인 분위기를 띨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는 그저 순전한 문학가일 뿐이며, 우리의 활동 범위도 예술적 분야를 벗어나 본 적이 결코 없다.”

르모니에는 오히려 포퓰리즘 문학가들은 “민중들에게 읽히기를 바라지 않는다”면서, 그러려면 “그들을 다시 교육하고, 예술에 해롭기에 우리가 전염병처럼 경계해온 정치·사회적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포퓰리즘 문학이란 무엇인가? ‘겸허한 사람들’(포퓰리즘 문학 운동은 ‘겸허주의’라고 불릴 뻔했었다) 안에서 주제를 찾아내 ‘서민적’인 단어들로 꾸미는 것일까? 요새에 숨어 겸허하지 않은 자들의 교만을 찾는 것일까? 결국 포퓰리즘 문학은 본질적인 모호함 때문에 힘을 잃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1932년 시작된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맞붙게 됐다. 프롤레타리아 문학은 포퓰리즘 문학이 “민중이 되려고 하지 않고 민중을 다루려고만 한다”며 비판했고, 프롤레타리아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글을 쓰는 이가 그 계급에 속해 있을 때만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3)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이끌었던 이들로는 앙리 풀라이유와 함께 외젠 다비, 트리스탕 레미, 에두아르 페송 등을 들 수 있는데, 이처럼 포퓰리즘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들이 대표적 프롤레타리아 작가로 거론된다는 점에서도 당시 적지 않은 혼란이 일어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포퓰리즘 운동에 부합하면서도 이상하게 이렇다 할 인정을 받지 못한 작가들이 있다. 특히 루이-페르디낭 셀린과 조르주 심농을 들 수 있는데, 이들 역시도 각각 나름대로 ‘포퓰리즘 문학가’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장 폴 사르트르(『벽』)부터 자크 시라크의 측근인 드니 틸낙에 이르기까지, 또한 물루 페라웅부터 르네 랑보빌, 장 페르니오, 베르나르 클라벨에 이르기까지, 좌파든 우파든 유명하든 그렇지 않든 다양한 작가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포퓰리즘 문학가로 손꼽혀 왔다. 장-피에르 샤브롤이나 베르나르 클라벨 등은 대중으로부터 많은 인기를 누리기도 했지만, 영화감독으로 더 유명한 사무엘 벤처트리트처럼 문학 이외의 분야에서 유명세를 얻은 이들도 있었다. 『라루스 문학대사전』(1986)이 왜 포퓰리즘에 대해 “머잖아 아무것이든 지칭할 수 있는 말이 될 것”이라는 설명을 붙였는지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의미론적 조작에 선을 긋다

사실 수상작이 없는 해도 여러 차례 있었지만, 어쨌든 포퓰리즘 문학상이 지금까지 지속되지 않았더라면 ‘포퓰리즘 문학’이라는 말조차도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나마 이 문학상 자체도 1992년, “‘포퓰리즘’이라는 단어의 해석을 왜곡해, 정적(政敵)들이 민중의 어리석음을 가정하고 이를 이용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데에 선을 긋기” 위해 그 명칭을 ‘포퓰리즘 문학 외젠 다비 상’으로 변경하기도 했다. 
심지어 최근 수상작 겉표지에는 포퓰리즘이라는 표현이 아예 빠진 ‘외젠 다비 상 수상작’이라는 표기만 적혀 있을 정도다. 그러나 빅토르 위고와 『레미제라블』, 막심 고리키(특히 희곡), 찰스 디킨스, 윌리엄 포크너 등 과거의 여러 작가들이 그 어떤 문학사조조차 내세우지 않은 채 각각의 문체와 시각을 통해 빈민층의 고충과 그들의 힘을 전설적인 작품들로 구현해냈다는 사실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글·에블린 피에예 Evelyne Pieiller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번역·김보희 sltkimbh@gmail.com
번역위원

 

(1) Léon Lemonnier, 『Manifeste du roman populiste et autres textes(포퓰리스트 소설 선언 외)』, La Thébaïde, Le Raincy, 2017년. 본문 중 별도의 표기가 없는 인용문은 모두 해당 서적에서 인용한 것임.

(2) Marie-Anne Paveau, 『Le “roman populiste”: enjeux d'une étiquette littéraire(‘포퓰리스트 소설’: 문학사조의 명칭 문제)』, Gabriel Périès & Pierre-André Taguieff(eds.), “Discours populistes”, Mots, no.55, 리옹, 1998년 6월.

(3) Marie-Anna Paveau의 위의 저서.

* 이 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자매 격월간지 <마니에르 드 부아> 4~5월호(N 164)에 게재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