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크 폴로, 프롤레타리아가 재해석한 귀족 스포츠

2019-04-30     다니엘 파리-클라벨 l 언론인

지금은 누구나 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 일반 대중들은 단체 활동이나 학교수업을 통해 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 이런 스포츠의 대중화는 실상 계급투쟁의 결실이다. 20세기 초 1일 노동시간은 12~16시간이었고 휴일은 일주일에 1일이 고작이었으며, 급여도 형편없었다. 게다가, 노동자들이 운동을 즐기는 것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에 1890년 창설된 프랑스운동협회연합(USFSA, 프랑스 연맹의 전신)의 정관에서도 “회원은 그 어떤 노동자 직무도 수행해선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경기장에 노동자들의 자리는 없었다. 

한편 공립학교에서는 1882년부터 남학생에게 체육과 교련 과목을 가르쳤는데, ‘학군단’이란 이름으로 소년들을 교육해 양손에 총을 들고 조국을 지키도록 한 것이다. 이후 1903년에는 한 성직자가 프랑스체육운동후원연맹(FGSPF)을 창설했고, 연맹의 역할은 심신이 단련된 노동자 청소년을 육성해, 건장한 남성들과 용맹한 군인들로 다음 세대를 채우는 일이었다. 다만, 같은 해 창설된 투르 드 프랑스의 경우에는 노동자 계층과 선을 그으려는 의지가 두드러졌다. 

노동자 선수층을 육성하려는 노력은 사회주의 운동 진영에서도 나타났다. 1890년대 문화를 노동자 해방의 수단으로 삼기 위해 교양대학 설립에 매진하던 사회주의 운동가들은 노동자들의 스포츠 육성을 위해 힘쓰며 교회와 군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 했다. 1907년 11월에는 사회당 스포츠 연합(USPS)의 주도하에 ‘노동자 스포츠’가 탄생하고, 프랑스 북부와 파리 지역에서는 다수의 노동자 스포츠 동호회가 봇물 터지듯 생겨났다. 노동자들은 길가나 공터에서 축구나 육상, 또는 이제 막 미국에서 들어온 농구 등의 스포츠를 즐겼다.

그러나 사람들의 관심은 차츰 테니스나 펜싱, 폴로 등 전통적인 ‘귀족 스포츠’로 옮겨갔다. 이로써 부자들의 고유영역으로 들어가 지배계층의 전유물을 공유하겠다는 노동자들의 발상에서 계급혁명의 기운이 물씬 풍겼다. 1869년에는 인도에서 돌아온 영국인들이 본국에 ‘폴로’라는 경기를 유행시켰는데, 말을 타고 하는 이 경기는 이미 긴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기원전 수천 년 전부터 스키타이족과 페르시아인이 즐긴 폴로는 특권 계층과 기마대, 귀족들 등 상류층의 스포츠로 발전했다. 폴로를 ‘귀족 스포츠’라 일컫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영국 상류층을 사로잡은 폴로의 인기는 빠르게 전 계층으로 확산됐지만, 가난한 ‘프롤레타리아’에게는 말이 없었다. 그러나 이는 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이들에게는 말 대신 자전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1891년 10월, 아일랜드의 사이클 선수 겸 기자인 리처드 J. 메크레디는 더블린 근처에서 최초의 바이크 폴로 경기를 주최했다. 10월 31일, 자전거 전문지 <사이클링>에서는 몇 가지 초기 규칙을 공시했다. 잔디밭에서 4~5명의 선수들로 이뤄진 두 팀이 자전거에 올라 채를 들고 가죽공을 치면서 상대편 골대 안에 골을 넣으면 득점하는 것이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 규칙도 조금씩 달라졌지만, 바퀴와 채만으로 공을 굴릴 수 있다는 기본 규칙은 변하지 않았다. 19세기 말 더블린에는 여성 바이크 폴로팀도 있었지만, 여성팀의 경기가 지속됐다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프랑스에서는 1898년 물랭 루즈에서 시범경기가 열렸으나, ‘프랑스 바이크 폴로 클럽’과 ‘파리 바이크 폴로 클럽’이 창설된 것은 1925년의 일이었다. 다만 스위스인 헨리 뒤리그가 결성한 이 구단 소속 선수들이 (주로 파리 지역을 중심으로) 벌인 경기들은 결코 시범경기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1927년 여름, 이브리-쉬르-센 지역에서 에드몽 프랑스와 그의 동료에 의해 바이크 폴로가 신속하게 확산되기 시작했다. 기계공학도이자 사이클 선수로 당시 24세였던 에드몽 프랑스는 동료 뤼시앵 그를랭제와 함께 폐쇄된 주차장에서 바이크 폴로를 즐겼는데, 이들은 크로켓 라켓과 테니스공으로 바이크 폴로를 즐기며 곡예를 선보였다. 얼마 후 이들의 친구들이 합세하면서 작은 팀이 구성됐고, 이 지역 노동자구단에서는 바이크 폴로를 정식종목으로 채택했다.

 

주차장에서 탄생한 하드코트 바이크 폴로

1919년 사회당 스포츠 연합(USPS)이 스포츠 노동연맹(FST)으로 대체됐고, 이와 함께 이브리 지역에서는 사회주의 소년단 출신의 남녀 20명이 ‘이브리 스포츠 노동연합(USTI)’을 결성했다. 초창기 이브리 스포츠 노동연합 소속의 선수들은 비어있는 공장 창고나 카페 뒤 작은 홀에서 경기를 했고, 도심 거리에 스타팅 블록까지 파가면서 하기도 했다. 1925년 지방선거에서 공산당 후보 조르주 마란이 당선된 뒤 이듬해 이브리 지역 노동자 선수들이 경기장에서 정식 바이크 폴로 경기를 할 수 있게 됐다. 

이후 1927년 가을에는 구단 내에 바이크 폴로팀이 출범하기에 이르렀다. 이브리 팀은 파리 바이크 폴로 구단을 대파하고 국내 굴지의 바이크 폴로팀으로 등극했다. 이브리 스포츠 노동연합(USTI)의 우수한 성과 덕분에 성장을 거듭한 바이크 폴로는 스포츠 노동연맹(FST)에서도 널리 장려하고 나섰다. 이에 1928년에는 스포츠 노동연맹(FST)에서 제1회 파리 챔피언십을 개최함으로써, 이브리를 포함한 인근 교외 지역은 물론 파리 5구와 13구 지역 노동자 선수들까지 총동원됐다.

전쟁 중 영국에서 완전히 맥이 끊겼다가 1929년에 부활한 바이크 폴로 붐은 영국 식민지 지역에서도 꽤 인기가 있었고, 1930년대 프랑스에서는 그야말로 황금기를 누렸다. 하지만 프랑스 자전거 경주 연맹(FFC 1940년 말 창단)의 전신, 부르주아 연맹 프랑스 자전거 연합(UVF, 1881년 창설)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경기를 즐기는 모습을 그냥 두고만 볼 수 없었다. 부르주아들은 에드몽 프랑스를 불러들여 1930년 창설된 바이크 폴로 위원회의 기술 고문직에 앉히고, 1932년 독자적인 경기 룰을 발표한다. 다양한 종목을 아우르던 노동자 구단들과 달리, 부르주아 구단들은 ‘1종목 1연맹’의 원칙을 준수함에 따라 바이크 폴로에 특화된 구단들이 생겨났다.(1) 이런 유형의 구단들은 다른 지역으로도 확산됐는데, 세벤의 알레스 바이크 폴로 구단이나 보르도의 레 알 스포츠 구단, 툴루즈의 폴로 바이크 구단, 일드프랑스의 아를 독립 페달 구단 등이 이에 속한다. 

하지만 바이크 폴로가 선풍적인 인기를 얻은 데는, 스포츠 노동연맹(FST)의 활약이 컸다. 센 강 컵, 스파르타쿠스 컵, 노동자 농민 컵, (1933년 나치에게 잡혀가 1944년 부헨발트에서 처형된 독일 공산주의자 에른스트 탈만을 기리는) 탈만 컵, (유명한 아나키스트 도형수를 기리던) 폴-루상크 컵 등 다양한 경기들이 스포츠 노동연맹 산하에서 조직됐기 때문이다. 특히 폴-루상크 컵과 관련해서는 1933년 12월 28일 자 <르 트라바이외르>(Le Travailleur, 이브리, 슈아지, 비트리, 티에스 지역의 공산주의 주간지)에도 그 기록이 남아있다. 

“이브리 스포츠 노동연합(USTI)에서는 내일 처음으로 파리 지역 최고의 팀들이 경합을 벌인다. 부르주아 장교들의 희생양이 된 폴 루상크를 기리는 이 대회는, 낡은 프랑스 공화국의 탈선자들 밑에서 신음하는 우리 노동자 동지들을 살리고자 하는 우리의 반군국주의에 힘입어,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1934년 12월, (극우 리그가 조직한 1934년 2월 6일의 격렬한 반 의회 시위 이후) 공산당과 사회당 노선의 선수들은 파시즘의 위협에 맞서 각급 단위를 통합하기로 결정하고,(2) ‘체육 스포츠 노동연맹(FSGT)’을 발족했다. 체육 스포츠 노동연맹(FSGT)은 인민 전선(좌파 연합, 1936~1938) 시기 정부의 스포츠 부서(레오 라그랑주)와 체육 부서(피에르 드자르노)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고,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여세를 몰아 이브리 바이크 폴로 국립 훈련 센터도 건립됐다.  

1935년 ‘이브리 스포츠 노동성’이 됐다가 1949년부터는 ‘이브리 스포츠 연맹’으로 거듭난 이브리 스포츠 노동연합(USTI)은 1934~1936년 프랑스 파리 최고의 챔피언이었다. 당시 노동자 선수단은 공식연맹에 가입한 선수단 못지않게 많았는데, 1939년 체육 스포츠 노동연맹(FSGT)에서 집계한 구단의 수는 1,769개였고, 선수들의 수도 10만 3,420명에 달했다. 프랑스 자전거 연합(UVF)과 체육 스포츠 노동연맹(FSGT) 사이에 벌어진 1934년 8월 26일 아르퀘유 경기는 두 단체 사이의 차이점을 극명히 보여주는 상징적인 자리였다. 사실 노동자 선수들의 시합은 대부분 우호적인 친선경기였고, 프랑스자전거연합의 경기는 경쟁의 성격이 강했다. 그에 따라 프랑스자전거연합의 룰에서는 영국의 폴로나 바이크 폴로처럼 상대선수에 대한 공격이 허용됐다. 노동자들이 중시하는 ‘동지애’의 가치가 경쟁중심의 경기원칙과 충돌한 순간이었다. 

독일 점령기에는 수많은 노동자 선수들이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전락했고, 이에 따라 이들이 소속된 구단과 연맹도 1939년부터 와해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체육 스포츠 노동연맹(FSGT)과 프랑스 자전거 경주 연맹(FFC) 등을 중심으로 다시금 바이크 폴로가 성행했지만, 1950년대 말에는 실제 경기를 하는 선수들의 수가 현저히 줄었다. 사실 그사이 스포츠 단체 종목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가령 11인제 핸드볼과 그 뒤를 이은 7인제 핸드볼 게임이 독일 치하의 프랑스에서 크게 인기를 끈 것이다. 1970년대에는 체육 스포츠 노동연맹(FSGT)에서 바이크 폴로를 제외시켰지만, 르아브르에서처럼 프랑스 자전거 경주 연맹(FFC) 산하의 일부 구단에서는 간신히 그 명맥이 유지되고 있었다. 그로부터 10여 년 후, 바이크 폴로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1984년 일 드 프랑스 챔피언십이 재개되고 1996년에는 국제 바이크 폴로 챔피언십이 창설된 것이다. 2001년에 창단한 프랑스 바이크 폴로팀은 2005년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현재에도 바이크 폴로를 하는 사람들은 영국의 구 식민지 지역, 그리고 아르헨티나와 독일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귀족 스포츠 폴로에 맞불을 놓으며 자리 잡은 바이크 폴로의 서민적인 뿌리는 사라진 지 오래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다시금 ‘하드코트 바이크 폴로’라는 새로운 형태의 경기가 등장했다. 아직 일부만 즐기고 있지만 신속하게 전 세계로 확산 중인 하드코트 바이크 폴로의 기원은 다름 아닌, 자전거 택배기사들이다. 3명이 한 팀을 이뤄 쉬는 동안 주차장에서 경기를 하던 관행이 1998년부터 스포츠 형태로 자리 잡은 것이다. 말 위에 올라 폴로를 즐기던 부르주아들이 노동자들로부터 결코 빼앗을 수 없었던, 노동자들만의 스포츠 전통이 이 하드코트 바이크 폴로를 통해 부활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글·다니엘 파리-클라벨 Daniel Paris-Clavel
대중문화지 <ChériBibi>(www.cheribibi.net)를 창간했으며, 저서로 『이브리 스포츠 연합 100년사 1919-2019: 모두를 위한 스포츠의 역사』(US Ivry, 2018) 등이 있다.

번역·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번역위원

 

(1) 1921년 프랑스운동협회연합(USFSA)은 다수의 단일 스포츠 연맹으로 분리돼 ‘1종목 1연맹’의 원칙을 따르게 된다. 이로 인해 프랑스 스포츠계는 현재까지도 부문별로 분열돼 통합되지 못하고 있다. 사회 내에서 스포츠가 차지하는 입지에 대한 시각도 제각각 달라져 각자 다른 정치적 시각을 드러낸다.

(2) 공산당은 스포츠 노동연맹(FST), 사회당은 스포츠 체육회 노동연합(USSGT, 1924년 스포츠 노동연맹(FST)에서 분리된 조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