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연재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가 새로 쓰는 ‘비판경제 교과서’ (5)-고용, 어떠한 대가를 치러야 하나?

『비판경제 교과서』연재순서 (1) 경제학은 과학인가? (2) 생산 증대, 무조건 더 많이! (3) 노사관계(다리와 버팀목의 관계) (4) 부의 분배 희망과 난관 (5) 고용, 어떠한 대가를 치러야 하나? (6) 장을 따를 것인가 명증된 법칙을 세울 것인가? (7) 세계화 국민 간의 경쟁 (8) 화폐, 금전과 현찰의 불가사의 (9) 부채 협박 (10) 금융 지속 가능하지 않은 약속

2019-04-30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실업자들이 좀처럼 줄지 않는다. 계속 줄어만 가는 일자리는 이제 ‘창조자’로 성장할 잠재력을 갖춘 사람들에게만 돌아가는 일종의 혜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리하여 실업은 ‘다모클레스의 검’처럼 임금노동자들의 절박함을 부채질하며 날로 가중되는 고용 불안정을 감내하도록 한다. 하지만 고용이 만사를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다.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프랑스 여성 중 30%는 시간제로 일한다(남성의 경우, 8%). 오늘날만큼 생산 효율이 높았던 때도 없었지만, “모든 사람에게 일이 돌아가도록 적게 일하라”는 주장은 어떤 이들에게는 결코 통하지 않을 말이다. 다른 한편에서 어떤 이들은 소득 보장제 도입을 주장하며 임금사회를 뛰어넘기를 희망한다.

 

 

1. 편견: “기업이 고용을 창출한다.”

‘고용주’라는 단어는 1980년대 초를 기점으로 쓰임새가 줄어 오늘날에는 ‘부를 창조하는’ 기업가라는 단어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현대의 영웅으로 부상한 오늘날 이들의 위상을 생각하면 기업가가 더 걸맞은 단어처럼 보인다. ‘기업이 일자리를 창출한다’라는 말에는 기업이 다수의 안녕과 행복을 좌우한다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이 믿음이 과연 얼마나 근거 있는 것인지는 따져봐야 한다. 

‘기업이 일자리를 창출한다’라는 전제는 언론의 경제 보도와 정치 담화를 통해 수없이 반복되면서 상식으로 통용되고 있다. 추가적인 고용을 결정하는 이는 바로 고용주이니 당연한 노릇이지 않겠는가? 여기서 가장 잘못된 부분은 이 전제를 옹호하는 주요 이해당사자들은 이미 진실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이 차마 부끄러워 고백하지 못하는 진실은 바로 그 전제가 잘못됐다는 사실이다. 가끔 그들 중 어수룩한 이들은 무심코 비밀을 누설하는 실수를 범하기도 한다! 2014년 1월에 정부의 책임협약 도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프랑스 중소기업자연맹(CGPME)의 장프랑수아 루보 회장이 행한 발언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협약 내용에 따라 기업에 500억 유로의 세제 환급 혜택을 제공하는 반대급부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기업은 고용 창출에 적극 힘쓸 것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됐다. 이에 루보 회장은 일차적으로는 관련 가능성을 일축했고,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였다. “관건은 기업이 생산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느냐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고용은….”

벌거벗은 임금님이 따로 없다. 고용을 창출한다던 임금님은 사실 그동안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않았다. 기업은 지금 당장 혹은 미래의 주문량이 보장될 때만 새로운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다고 자신을 스스로 정당화한다. 가까운 미래에 관한 충분한 정보를 확보하지 못한 기업은 자체적으로 판매량을 예측할 수조차 없다. 물론 판매량을 예측할 수 있다면 기업가 노릇처럼 쉬운 일이 없을 것이다.

우선, 기업이 외부 요인에 따라 수동적으로 주문량을 결정하고 내부 요인인 생산성의 추이에 따라 고용을 결정한다고 미뤄 생각해볼 수 있다. 기업은 혁신 추구와 비용 절감으로 최상의 상품을 보다 낮은 가격에 판매할 수 있다. 이 사실에 근거해 기업이 더 많은 고객을 유치하는 재량을 갖췄다고 반론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미시경제적인 틀 안에서 봤을 때 이 주장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은 결국 ‘제로섬’으로 귀결된다. 낮은 가격을 제시한 기업의 고객 수가 늘어나면 그만큼 경쟁 기업의 고객 수는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 결과, 고객 수를 늘린 기업은 고용을 늘리지만, 고객을 잃은 기업은 고용을 줄인다. 경제 내의 가처분 소득 총량이 정해져 있는 상황에서 기업이 하는 일은 경쟁 논리에 따라 일자리를 분배하는 것이다.

 

기업에 제공하는 부담금과 세제 감면 혜택은 실업률만 높일 뿐이다

시장 전체뿐 아니라 분야와 경쟁사별로 세분화해 살펴봤을 때, 모든 경우를 막론하고 기업은 전반적 경기(景氣)의 흐름에 따라 결정된 경제 활동의 총량을 고용으로 치환하는 지엽적인 기능을 수행할 뿐이다. 기업가에게 부여된 영웅적인 창조가 이미지와는 달리, 실질적인 고용을 창출해내는 것은 특정 주체가 아닌 전반적 경제의 활동, 즉 경기다. 이 같은 (이념적 이해관계를 반영하고 있는) 오해의 결과로, 지난 30년에 걸쳐 줄곧 경제정책의 초점은 경기 그 자체가 아닌 불량한 ‘창조의 대리인’인 기업에 혜택을 베푸는 데 잘못 맞춰져 있었다. 거시경제정책이 유럽연합의 규제라는 굴레에 묶여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와중에 기업들은 부담금과 세금 감면이라는 횡재를 누리기도 했다. 실업자가 계속 늘어만 가는 현실이 놀랍지 않은 이유다. 

하지만 ‘기업이 일자리를 창출한다’라는 전제를 뒷받침할 방법이 정말 없는 것일까? 개별적인 기업이 아닌 총체적인 ‘기업’의 움직임으로 생각한다면, 그 전제를 인정할 수도 있다. 기업들이 집합적으로 투자를 결정한다고 가정한다면, 투자의 총량으로 봤을 때 기업들은 거시경제적 차원에서 미래에 대한 내기를 하는 셈이다. 지극히 자기실현적인 방법으로 판돈이 굴러가는 내기와 같다. 왜냐하면 기업들은 집합적 투자 결정을 통해 전반적인 경기의 흐름을 형성하는 지출을 결정할 수 있고, 내기에 판돈을 걸기 전에 미리 수요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개별 기업은 미래를 예측해 투자를 시도하지만, 기업들이 집합적으로 협력해 경기의 흐름을 조정할 가능성은 불행히도 매우 희박하다. 왜냐하면 모든 기업은, 개별경제 주체가 다른 경제 주체와 조정을 거치지 않고 독립적인 의사결정을 내림으로써 경기의 흐름을 형성하는 특정한 체계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이 체계를 우리는 시장이라고 부른다!

 

2. 노동은 권리인가 의무인가?

가난한 노동자의 삶보다는 그래도 실업자로 사는 것이 낫지 않은가? 페스트와 콜레라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을 의미하는 프랑스식 속담에 정치적 딜레마를 대입한 이 의문은 자칫 이치에도 맞지 않는 터무니없는 말로 들릴 수 있다. 그런데 실업자에게 돌아가는 혜택을 축소해야 한다는 여러 정치적 주장의 이면에는 이런 인식이 짙게 깔려 있다. 그렇다면 이들의 주장이 의도하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

이런 주장의 바탕에는 자발적인 실업이 상당수 존재한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사회부조라는 제도는 실업자가 지원금의 혜택만 누리고 일은 하지 않도록 유도함으로써 기회주의적 선택을 종용하는 부정적인 장치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시각은 과거 ‘좋은 빈민’과 ‘나쁜 빈민’을 구분짓던 낡아빠진 논리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 19세기에 영국에서는 구빈 보조금을 받는 부랑자들을 ‘워크하우스(구빈원)’에 수용하도록 권장했다. 이들은 지금으로 치면 ‘공동 작업’에 해당하는 노동에 배치됐다. 예나 지금이나 빈곤을 대하는 논리는 그대로다. 1834년 영국의 왕립위원회는 “빈민들은 가장 취약한 소상공인 계층에 비해 열악한 여건을 감수해야 한다”라고 못 박은 바 있다. 그뿐만 아니라 최소사회수당의 상한선을 최저임금의 75%로 제한함으로써 일을 하는 사람과 수급자 사이에는 어떤 경우라도 실질적인 격차가 존재하도록 해야 한다고 단언한 이도 있다. 그는 다름 아닌 프랑스 유럽부 장관(2011)을 역임한 정치인 로랑 보키에다.

이들의 구실을 뒷받침하는 경제적 접근법에 의하면 노동이 가진 미덕은 단 하나로 요약된다. 바로 노동의 대가로 받는 돈이다. 즉 이들이 보기에 노력, 투자, 저당 혹은 저축과 무관하게 획득한 돈은 폐단만 있고 유익함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활동의 ‘의욕을 꺾어놓는’ 각종 제도는 시급히 폐지돼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오늘날 사회적 정체성의 바탕을 이루는 노동

잠시 도덕적 규범과 그에 따른 온정적 의무감을 내려놓고 생각해보면, 빈곤퇴치 문제와 빈곤층의 노동은 서로 별개의 사안임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거꾸로, 부를 창출해내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간다는 것만으로도 빈곤에서 벗어나는 일종의 권리가 될 수는 없을지 생각해보자. 이렇게 접근할 경우, 서두에서 제기된 의문은 그 의미를 완전히 상실하고 만다. 노동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애초부터 문제는 빈곤 그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발상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기본 소득제도’를 마음속으로 그려 보게끔 한다. 그러나 노동이 그저 돈을 벌기 위해 억지로 참고 견뎌야 하는 고통인 것만은 아니다. 노동은 개개인이 능력을 발휘하고, 관계를 형성하고, 역량을 키워나갈 수 있게 하며, 사회적 정체성의 근간이 되기도 한다. 

 

공동책임

따라서 소득 분배는 빈곤과 고립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의 한 구성 요소일 뿐이다. 소득과 비교하면 더 포괄적인 개념인 ‘노동에 대한 권리’는 실업자가 합법적으로 노동의 기회 제공을 요구할 권리가 있음을 의미한다. 모두가 쉽게 상상하는 바람직한 ‘일자리’란 함께 해서 즐거운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양질의 일터다. 이 같은 전제 조건은 일자리뿐 아니라 교육과정에도 적용 가능하다.

그러므로 직업을 가진다는 것은 (일부 사람들이 과다한 사회부조로 인해 감소한다고 말하는) 개인 의지에 국한한 문제가 아닌, 공동의 책임에 관한 문제로 이해해야 한다. 그 예로 1848년 2월 혁명 이후 파리의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 설립된 ‘국립작업장(Ateliers nationaux)’이나 최근에 도입된 ‘청년고용계약(Contrat emploi-jeune)’, ‘실업자 없는 나라(Territoires zéro chômeur)’를 들 수 있다. 이처럼 모든 사람이 유익하고 보람된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공동체의 의무다. 반면 이런 가능성을 개인으로부터 박탈하는 것은 헌법으로 보장된 노동권을 침해하는 것과 같다. 서두에 언급한 전제가 성립할 수 없는 이유다. 보조금을 수급하는 실업자는 이익을 좇는 사람이 아닌, 집단 생산 활동에 참여하는 마땅한 권리가 박탈됐기 때문에 보상을 받는 사람일 뿐이다.

 

광기의 경제

고전 경제학계는 효용성의 극대화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데, 마치 철칙처럼 여기는 효용성에 관한 이들의 신념은 과연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을까? 과학 논문 두 편의 사례를 통해 속사정을 한 번 들여다보자. 우선 첫 번째 사례는 2008년 경제학자 미셸 위송이 발표한 경제 금융화와 실업률의 관계에 관한 논문이다. 경제 금융화와 실업률 간 양의 상관관계는 너무도 완벽해서, 마치 씨줄과 날줄처럼 정교히 얽힌 원인과 결과를 보는 것 같을 만큼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미셸 위송이 제시한 도표는 분명 지난 4반세기에 걸친 거시경제의 정곡을 명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또 다른 하나는 ‘변기 좌석은 올려야 할까 내려야 할까? 남성 경제학자의 화장실 예절에 관한 선언문(Up or down? A male economist’s manifesto on the toilet seat etiquette)’이라는 다소 엉뚱한 제목을 단 최재필 교수의 논문이다. 최재필 교수는 수학 공식을 사용해 흔히 남성들이 좌변기 사용 후 덮개를 원위치로 내려놓아야 한다고 알려진 화장실 사용 예절이 때로는 비효율적일 수 있음을 분석했다. 결과적으로, 미셸 위송의 논문은 과학 학술지의 장벽을 통과하지 못했다. 해당 논문에 대한 연구평가청의 평가 점수는 0점이다. 반면 최재필 교수의 논문은 2011년에 권위 있는 학술지인 <이코노믹 인콰이어리(Economic Inquiry)>에 게재됐고, 심사위원들은 해당 논문에 A등급을 부여했다. “아 참, 그러니까 ‘효용성’을 중시한다고 했던가요?”

 

3. 실업 퇴치, 낡은 정책과 잠재적 위험

국가는 어떻게 실업자가 일자리를 찾도록 도울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은 크게 세 가지 부류로 나뉘는데, 각각 실업 문제에 대한 서로 다른 분석을 제시하고 있다. 실업의 원인을 과연 개인 차원에서 찾아야 할까? 아니면,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하는 경제나 부조리한 사회가 유발하는 문제로 이해해야 할까?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은 노동을 서로 동등한 위치의 고용주와 피고용자 사이에서 자유롭게 교환되는 상품으로 간주하며, 고용주와 피고용자 모두 ‘노동 시장’ 안에서 동등한 위치를 점하는 개별 주체로 본다. 이 분석의 틀 안에서 실업은 노동보다 불로소득(배우자 소득, 재산, 사회부조 등)을 선호하는 개인의 선택에 따른 결과다. 케인스학파는 임금의 삭감이 아닌 고용의 확대가 생산 확대로 이어지고 기업의 활로를 열어 주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본다. 그 밖의 비주류 경제학자들은 노동이란 한 사회에 속한 개인의 위치(소득, 사회적 권리, 사회적 인정 등)를 정의하는 사회관계의 초석이라고 생각한다. 이 세 가지 서로 다른 시각 중 어느 편을 취하느냐에 따라 공공정책의 방향이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첫 번째 접근법의 경우, 고용정책은 가격(즉, 임금)에 의해 좌우된다. 시장의 자율적 기능을 최대한 보장해 ‘적정한 수준의 임금’이 결정돼야 한다고 보는 견해로, 시장이 균형을 찾아 고용에 대한 수요와 공급이 서로 일치할 때 비로소 실업이 해소된다고 주장한다. 임금이나 고용 방식(노동 시간, 직무 편성 등)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부의 개입(최소임금, 노동자 보호법 등)을 통해 규제돼서는 안 된다고 보는 입장이기도 하다. 아울러, 모든 고용 조건은 개별 협상으로 조정돼야 한다고 본다. 

 

기업 세계를 문명으로 이끄는 노동법

앞에서 설명한 첫 번째 접근법(신고전주의 경제학자)의 경우, 일반적으로 실업 문제 해결에 있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대처법을 따른다. 

1. ‘노동 비용’을 삭감한다. 실업률의 원인은 높은 임금에 있다. 임금이 높으면 일자리 공급이 수요에 비해 줄어들기 때문이다. 직접적인 방법으로 임금을 삭감할 수 없는 경우(예를 들어, 최저한계선으로 간주하는 생활 수준과 비교해 임금이 이미 너무 낮은 상태), 사회분담금과 같은 ‘간접 임금’을 낮추는 방법을 취한다. 

2. 실업자가 불리한 고용 조건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유인책을 도입한다(다양한 방법의 관리·감독, 특정 제안 수용을 전제로 한 복지 혜택 등). 

3. 고용자와 구직자 간의 관계를 조율하는 수단으로 직업 훈련, 업무시간(일요일 근무 등)의 유연화, 계약형태(계약직, 임시직 등)를 활용한다. 

이런 고용 방식은 영미권에서 가장 먼저 도입됐고, 독일에서는 2000년대 초에 하르츠(Hartz) 법안의 시행과 함께 적용됐으며, 이후 대다수의 유럽국가로 확대됐다. 이 같은 추세는 프랑스 고용주들이 ‘노동법 단순화’를 요구하는 촉매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실업을 다루는 두 번째 접근(케인스주의) 방식에 의하면, 실업 문제는 고임금이 아닌 고용의 공급 부족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 일자리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고용문제를 논의하는 자체가 어불성설임을 밝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부는 성장을 촉진하는 정책을 펼침으로써 일자리 창출에 역할을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해법을 적용할 수 있을까? 첫째로, 가계 소비나 공공 및 민간투자의 활성화를 바탕으로 경제 활동을 촉진함으로써 기업의 활로를 확대하는 방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두 번째로는, 첫 번째 방식에 노동 시간 단축을 결부하는 방법도 적용 가능하다. 끝으로 특정 산업 분야(가령, 에너지 전환 관련 산업)에 대한 지원을 통해서도 해법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 접근방식(비주류 경제학자)은 고용 문제를 다룸에 있어 단순한 수요와 공급에 관한 논의를 훌쩍 넘어선다. 이 접근 방식은 보다 종합적인 임금 관계를 다루며, 노동자와 고용주가 서로 대등한 위치에 있다는 전제를 거부한다. 반면 종속관계에 놓인 임금노동자의 입장을 고려해 중재 역할을 하는 정부의 정책적 개입이 필요하다고 본다. 콜레주 드 프랑스 알랭 쉬피오 교수의 표현과 같이, 노동법이 강화돼야만 우리는 비로소 기업의 세계를 ‘문명’으로 이끌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노동이 단순한 소득을 넘어 시민 개개인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하는 요인으로 기능하게 될 것이다.

 

4. 도표: 곡선에 나타난 행복

신고전주의 경제가 신성하게 여기는 상징이 있다. 반원, 교차선, 그리고 곡선이다. 이 토템신앙은 ‘자유경제국’이라고 불리는 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한다. 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보편적 행복이라는 목표에 근접해 있다. 그중에서 현재 일자리를 찾고 있는 맥스의 생활을 함께 살펴보자.

 

 

시공을 넘나드는 경제

5. 프랑스 혁명 전야의 고용제도

프랑스 혁명은 길드의 그늘에서 무산계급을 해방시킴으로써, 자유노동 시장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그러나 새로 불어온 변화는 노동조합 활동을 금지하고 독립심을 고취하도록 요구하는 양날의 검이었다. 그로부터 한 세기 후, 임금노동자들은 강력한 조합을 조직하기에 이른다. 그동안 노동자들의 지위는 노동에 대한 종속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해냈다! 채용 면접 끝에 공정상사의 인사 팀장은 크리스틴을 상품 매니저로 채용하기로 했다. 고용계약서는 앞으로 크리스틴이 받게 될 급여의 액수와 지점장의 지휘명령에 따라 수행하게 될 직무의 내용이 명시돼 있다.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노동시장은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 시기에는 직업을 가지려면 오랜 수련 과정을 거쳐야 했고, 그 과정은 경제적인 성격보다는 사회적 성격이 더 강했다. 직업을 가지고 일을 하려면 누구든 길드라는 관문을 넘어야만 했다. 길드란 수공업자나 전문 상인들이 모여 각종 규약을 설정하고, 공동의 이익을 도모하며, 도시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동직자 간의 경쟁을 방지하기 위해 조직된 조합을 말한다.  

당시 군주가 내리는 ‘특허장(혹은 장인 증표)’을 얻은 길드는 품질 보장, 질서 유지, 그리고 도제 교육을 책임지는 대가로 영내의 독점적 지위를 누리기도 했다. 1785년 당시 120여 개의 길드가 존재했고 성인 남성의 2/3에 해당하는 인구가 길드에 소속돼 있었다. 당시에는 여섯 가지 산업 분야, 모직물상, 식료품상, 잡화상, 모피상, 양품상, 귀금속상 길드가 가장 높은 권위를 가졌다. 그 밖에 시계상, 와인상, 코르셋 상인, 마구 상인도 길드를 구성했다. 

역사학자 데이비드 개리오크는 밧줄 제작자 에티엔 비네가 거친 과정을 예로 들어 설명하며 “당시 장인이 된다는 것은 직업 그 이상을 의미했습니다. 정체성 그 자체였으니까요”라고 힘주어 말했다. 데이비드 개리오크의 설명에 등장하는 에티엔 비네는 첫 4년간은 장인 밑에서 견습공으로 도제 생활을 하며 일을 배운다. 그 후, 비네는 직인(journeyman)이 돼 다른 지방에 내려가 경험을 쌓는다. 매년 한 번 있는 장인 선발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그는 정교하고 장식적인 자신의 특기를 십분 발휘해 작품 완성도를 높인다. 만약 이 시험에 통과한다면, 비네는 124파운드라는 엄청난 액수의 가입금을 지급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 관문을 넘어야만 비로소 자신의 가게를 열 수 있고, 결코 다른 밧줄 장인들보다 낮은 가격으로 거래하지 않겠다는 선서를 하게 되며, 밧줄 길드의 수호성인인 성 바오로의 축일 행사와 기일 미사에 참여하는 자격을 획득하게 된다.

 

노동자에게 ‘용역 제공자’라는 지위를 부여한 19세기의 고용 계약

장인은 서로 동등한 위치에 있었지만, 길드의 위계질서 속에서 견습공은 장인에게 복종해야 했다. 예컨대, 장인은 견습공이 작품의 수준을 무한히 향상하도록 감독했고, 아주 높은 가입금과 길드 간부들에게 제공하는 사치스러운 만찬 비용을 부담하도록 강요하기도 했다. 그 결과, 건축공들은 1791년 6월에 <국민의 친구(L’Ami du peuple)> 신문을 통해 다음과 같은 글을 발표했다. “탐욕스러운 억압자들은 가난한 수공업자들을 희생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들끼리 담합해 우리에 관한 악랄한 비방을 유포하고 있다.” 

프랑스 혁명의 결과로 1791년 ‘르 샤플리에 법(la loi Le Chapelier)’이 도입됐다. 이 법은 노동자들의 해방을 가져왔다고 평가되기에는 양면적인 성격을 보인다. 이 법은 길드 제도의 폐지를 명분으로 노동조합 결성을 금지했다. 이에 관해 프랑스 사회주의자 장 조레스는 르 샤플리에 법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고용주와 공장 노동자들이 서로 대등한 지위를 누리는 법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노동자에게만 불리한 조건을 담은 가혹하기 짝이 없는 법이다.” 

반면, 역사학자 알랭 코테로는 해당 법에 관해 “길드 제도의 폐지는 실질적 노동자 해방과도 같은 중대한 변화였다”라고 에둘러 표현했다. 이후 한 세기에 가까운 세월 동안 프랑스 노동계에는 저항의 바람이 일었다. 당시 영국의 노동자들은 정해진 시간에 작업장을 벗어나면 감옥살이를 면할 길이 없었지만, 프랑스에서는 숙련공 대부분을 ‘노동 임대업자’로 간주했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더 독립적인 방식으로 노동에 임할 수 있었다. 숙련공 대부분을 ‘노동 임대업자’로 간주했다. 말하자면 고용주가 지급하는 임금은 노동의 결과물에 한정됐으며, 일을 수행하는 방식은 논외로 했다. 노동자가 고용주의 작업장에서 일한다고 해서 종속적인 지위에 놓이는 것은 아니었다. ‘고용 계약’이라는 개념은 19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프랑스 법 원칙(법적 선언 원리)에 등장한다. ‘고용 계약’이라는 이 새로운 개념은 ‘용역 제공자(하인)’라는 법령에 따라 상당히 오랜 기간 임금노동자와 종속관계를 한 쌍으로 결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공정상사에 새로 채용된 크리스틴도 머지않아 이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 견습과정

북한에서 벗어나 한국으로 넘어가는 과정은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는 여행이 결코 아니다. 주된 위험은 일신을 보존하는 문제에서 시작된다. 경비대의 감시나 인신매매를 노리는 브로커 망을 피해 한국으로 넘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난관을 넘어 한국에 도착하면 우선 한국 정보기관이 이들의 이력을 검사한다. 이들 중에 혹시라도 간첩이 있지는 않을지를 확인하는 절차다. 그리고 나면 최후의 난관을 남겨두게 된다. 바로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이다.

총 12주 동안, 탈북자(북한 이탈 주민, 새터민으로 칭하기도 한다)들은 흡사 재교육 수용시설 같은 하나원의 숙소에서 함께 생활하며 시장경제의 장점을 배운다. 하나원의 책임자는 더 없이 침착한 말투로 “우리는 자본주의를 가르칩니다”라고 말했다. 하나원의 ‘학생들’은 소그룹으로 나뉘어 엄격한 통제하에서 지역 시장을 방문하고, 그곳에서 제일 먼저 돈으로 물건을 사는 법을 배운다. 북한 체제에는 존재하지 않을 소비야말로 자본주의 사회로 가는 첫걸음이라고 보는 것이다.

북한에서 성공한 엔지니어, 컴퓨터 전문가, 숙련노동자, 평범한 농민으로 살았던 이들이 하나원에서는 하나같이 현대사회(즉 자본주의 사회)의 문맹이 된다. 은행 계좌 개설하기(여기까지는 일사천리다), 직불 카드로 결제하기(평이하다), 직장에서 잘 처신하는 법(상당히 다르다), 직장 문화에 적응하기(올 것이 왔군), 마지막으로 민간 기업이 수행하는 역할의 중요성을 배운다. 통용되는 공식에 의하면 “국가는 만능”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국가의 역할이 한정적이라고 보기도 한다. 재교육을 모두 이수하고, 정신을 잘 단련한 새터민의 75%는 앞서 북한에서 받은 교육, 학력과는 무관하게 가장 열악한 일자리로 내몰린다. 이를 가리켜 대부분 ‘지상으로의 귀환’이라고 말한다.

 

6. 임금노동의 한계를 넘어서는 소득보장제도

신자유주의 경제모델은 오직 두 가지 선택지만을 제시한다. 첫째는 살기 위해 삶을 희생하는 임금노동자가 되는 것이고, 둘째는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은 실업자가 되는 것이다. 오늘날의 사회 조직 방식에 대한 불만족은 더 나은 사회를 추구하는 과정으로 이어졌고, 급기야 다음과 같은 대안을 탄생시켰다. 그것인즉, 임금노동과는 무관하게 모두에게 돌아가는 보편적 기본소득이다. 만일 기본소득이 실현된다면 개인에게 있어 임금노동은 하나의 선택이 된다.

“내 인생의 목적은 무엇일까?” 또는 “즐거움을 얻으면서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활동은 무엇일까?”와 같은 의문은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품을 수 있는 특권이다. 설령 개인의 희망이 생계를 결정짓는 요인 중 하나라고 해도 천 가지 다른 결정 요인에 비하면 아주 미미한 비중만을 차지할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원하는 교육을 받을 수 없어서, 부유한 사람들은 가족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실업에 빠지지 않을 분야를 선택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희망을 따질 겨를이 없다. 인간이란 본래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가정은 희망을 쉽사리 포기하는 선택지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듯하다. 하지만 소비자의 환심을 사서 돈을 버는 임금노동자조차 그 일이 지역사회에 이바지한다고 자신을 스스로 설득한다. 비록 실재가 없는 시뮬라크르(simulacre)를 열심히 양산해내고 있는 경영진이지만 그들의 목적이 비단 이익 추구에만 그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위안 삼는 것이다. 

이 같은 실존적 고민에 당위성을 부여함으로써 문명적 도약을 실현하는 것이 바로 진보주의자들이 꿈꾸는 기본소득의 이상향이다. 누구에게나 충분한 생활비가 매달 지급될 뿐 아니라, 원한다면 보수를 받으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 혹은 더 많은 수입을 보장하는 일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모두에게 돌아가는 빈곤 없는 사회의 혜택

그 결과, 개인과 집단 차원에서는 보람 있고, 필요한 일이라고 여겨지지만 노동 시장은 결코 두둔하지 않는 일들도 선택지가 될 수 있다. 지식 함양, 자녀 양육, 아픈 친지나 친구 돌보기, 아무것도 하지 않기 등…. 아마 가장 빈번한 경우로, 이 모든 선택지를 넘나드는 일도 가능해진다. 일부는 필요에 따라 간헐적으로, 또 다른 이들은 영구적으로 노동 시장에 머무를 것이다. 노동 시장에서 벗어나더라도 지속해서 사회생활을 영위할 것이고 오히려 더 활발히 사회에 참여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사회 참여가 최소한으로 축소되는 경우에도, 기본소득으로 생계가 보장되기 때문에 누구나 빈곤 없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된다.

기본소득의 도입에 있어 가장 큰 장벽은 심리적 저항이다. 경제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기본소득은 전적으로 실현할 수 있다. 이 제도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조세제도와 사회보장제도에 관한 면밀한 검토가 전제돼야 한다. 그렇더라도, 사회보장제도 중 기본소득과 성격이 중복되는 일부 수당만 폐지될 뿐 나머지는 현상을 유지할 것이다. 예를 들어, 학생 장학금은 기본소득으로 대체되지만, 장애가 있는 성인 앞으로 지급되는 수당은 기본소득과는 다른 기능을 가지기에 그대로 유지된다. 끝으로, 아무리 기다려도 찾아오지 않을 현대판 고도(Godot)나 다름없는 정부의 ‘완전 고용’이라는 목표를 포기한다면 막대한 비용을 절감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수아 올랑드 전 대통령이 2014년 책임협약(pacte de responsabilité)을 도입해 기업에 세제 혜택을 제공함으로써 아무런 소득도 없이 300억 유로를 낭비한 사례만 살펴봐도 잘 알 수 있다.

 

핀란드, 나미비아, 스위스

국가 차원(핀란드, 나미비아, 스위스)뿐 아니라, 도시(네덜란드의 30여 개 지방정부), 지역(프랑스의 아키텐 지방) 차원에서, 실험적인 프로젝트들이 이어지고 있다. 

양면성의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과도한 기본소득은 임금노동의 의미를 평가절하할 것이다. 반대로 너무 낮은 기본소득은 생계유지를 위해 무슨 일이든 감내해야 하는 상황으로 사람들을 내몰 수도 있다. 기본소득제도가 일종의 ‘기업보조금’으로 전락해 직원들에게 임금을 지급하는 기업의 부담만 덜어주게 될 위험도 상존한다. 

기본소득의 본질과 취지를 왜곡하지 않을 만큼 이념적, 정치적 토양이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섣불리 계획을 실행에 옮겼을 때 생기는 파괴적인 결과를 보다 심사숙고해야 하는 이유다. 

 

 

글·<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편집부

번역‧이푸로라 poorora@daum.net
번역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