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모든 권력은 금융에서 나온다

[Dossier] 화폐전쟁

2010-12-03     베르나르 카상

유럽금융안정기금에 ‘지원’ 요청을 하라는 회원국들 성화에 아일랜드 정부는 11월 21일 결국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이제 유럽집행위원회, 유럽중앙은행, 국제통화기금은 금융권은 살리고 비용은 아일랜드에 전가하는 구제안을 진두지휘하게 된다. 독일은 리스본 조약을 개정해 좀더 엄격한 버전으로 이 제도를 항구화하려고 한다.

유럽연합의 의사결정 중심지는 집행위원회·이사회·의회·사법재판소가 소재한 브뤼셀, 스트라스부르, 룩셈부르크만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독일의 세 도시도 추가된다. 유럽중앙은행(ECB)이 자리한 프랑크푸르트,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의견을 내놓는 베를린, 연방헌법재판소가 소재한 카를스루에(바덴뷔르템베르크주)가 바로 그곳이다.

독일 헌재, EU 조약의 승인권자?

카를스루에 연방헌법재판소는 유럽 조약 제정에 번번이 초를 쳐왔다. 예를 들어 마스트리흐트 조약이 1993년 11월에야 비로소 발효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카를스루에 탓이다. 1992년 대부분의 나라가 조약을 비준했지만, 독일의 연방헌법재판소에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이 접수되면서 1993년 10월 12일 기각 판결이 날 때까지 유독 독일만 비준을 보류했다. 좀더 최근의 일은 2009년 6월 30일에 있었다. 이번에는 카를스루에의 재판관들이 리스본 조약을 흠잡았다. 리스본 조약이 독일의 기본법(독일 헌법)에 위배되지 않기 위해서는 분데스타그(연방의회)나 분데스트라트(상원)에 보충 법안을 상정해야 한다는 판결이었다. 헌법재판소는 당시 판결문을 통해 “유럽연합은 민주주의에 구조적으로 결함이 있다”고 꼬집었고, “유럽의회가 각 의원들이 대표자로 있는 유럽 민족을 대표할 수 있는 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마땅히 개별 국가의 국회가 우선시돼야 한다”는 점을 재차 확인했다.

독일 정치 지도자들에게 카를스루에의 판결은 헌법 질서를 위반해서는 안 된다는 엄중한 경고나 다름없었다. 메르켈 총리가 최대한 용의주도하게 행동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유럽금융안정기금(EFSF) 같은 민감한 사안을 두고 헌법재판소의 재판관들에게 물을 먹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난 5월 그리스 국채 디폴트 위기가 불거지면서 긴급하게 조성된 유럽금융안정기금의 시한은 3년, 그러니까 2012년 말께로 예정되어 있다.

4400억 유로의 자금력(여기에 국제통화기금(IMF)이 지원하기로 약조한 3100억 유로가 추가된다)을 겸비한 이 기금은 지난 5월 국가 간 지원 형태, 다시 말해 유럽연합 조약과는 별도로, 유로존 국가의 지급보증을 통해 조성됐다. 이때부터 그리스에 이어 많은 유로존 국가들이 각 정부나 금융시장에 의해 자동적으로 긴급 ‘구제’ 제도의 잠재적 ‘수혜자’로 대기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처음에는 아일랜드와 포르투갈이, 곧바로 스페인과 이탈리아가 뒤를 이었다.

지난 10월 28일 유럽 이사회에서 메르켈 총리는 예방 원칙을 명분으로, 회원국에 리스본 조약을 개정할 것을 요구했다. 대다수 회원에게는 어이없는 요구였다. 장장 7년이라는 기나긴 산고 끝에 발효(2009년 12월 1일)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조약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메르켈 총리가 개정을 요구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유럽안정기금을 유럽 조약에 포함해 이 임시 제도를 항구화하는 법적 ‘무장’을 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카를스루에가 베를린을 돕기 위해 달려간 것은 게르만-독일의 아주 시의적절한 파트너십의 일환이었다. 사실상 이 ‘베를린 컨센서스’는 여러 나라, 그중에서도 특히 남미와 아프리카에 뼈를 깎는 고통을 안겨다준 ‘워싱턴 컨센서스’(미국식 시장경제 체제의 대외 확산 전략을 뜻하는 말)에 견줘 조금도 손색없다. 그런 의미에서 IMF가 이 작업에 긴밀히 관여하는 것도 그저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메르켈, 느닷없는 조약 개정 요구

반드시 2013년 전에 리스본 조약을 개정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각국 정부는 최대한 신속하게 계획안을 마련하기로 합의했다. 조금만 꾸물대도 금융딜러의 태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각국에 자신의 조건을 강요하려 들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공식적으로 2년 뒤에나 효력이 발생하는 규정을 미리 따져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10월 28일에 열린 유럽 이사회가 차후 심의할 두 가지 사안에 대해 오는 12월 10일까지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못박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하나는 조약 개정 내용에 관한 것으로 유럽집행위에 의뢰됐고, 다른 하나는 개정 방식에 관한 것으로 헤르만 반롬푀이 유럽 이사회 상임의장에게 맡겨졌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다루려는 것이 바로 조약 개정 방식에 관한 문제다.

어쩌면 각국 정부는 리스본 조약을 정식으로 개정하자는 독일의 요구를 받아들일지 모른다. 반대로 몰타나 라트비아 규모의 소국이 내부의 필요에 의해 유럽 제도에 이의를 제기한다면 대국들이 나서 이 국가들을 인도하려 들 것이다. 아일랜드의 예는 조약 수정을 반대하는 이들에게 국민투표 부결(2001년 니스 조약이나 2008년 리스본 조약에 대한 국민투표 부결처럼)은 결코 옳은 길이 될 수 없다는 점을 환기해준다. 프랑스나 벨기에 같은 나라에서는 의회가 국민을 대체할 것이다. 하지만 독일은 연방헌법재판소나 독일 경제 모델이라는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가 버티고 있다.

사르코지 “국민투표 비켜갈 묘책을”

그러므로 조약 개정이 유로화를 위협하는 금융위기로 이어지지 않고 순탄하게 진행되기를 바란다면 이번에는 결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반롬푀이 상임의장이 풀어야 할 난제 중의 난제다. 첫 번째 행동 수칙을 제시한 것은 유럽 공무원들의 ‘법적인 창의성’을 내세운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었다.(1) 사르코지의 말은 곧, 단 한 국가도 국민투표를 동반하는 비준의 형식을 취하지 말자는 의미로 풀이된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국민이나 의회를 배제하고 정부끼리 개정을 진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범위가 유럽연합기능조약(TFEU)과 함께 리스본 조약을 형성하는 유럽연합조약(TEU) 제48조에 명시된 개정 절차에 관한 규정에 한정된다는 사실이다. 이 조항에 따르면, 조약 개정에는 ‘일반절차’(Ordinary Procedure)와 ‘단순절차’(Simplified Proce-dure)가 존재한다.

대대적인 개정이나 유럽연합 내 권한 분배에 관한 개정에 사용되는 일반절차는 유럽헌법조약(ECT) 제정 때도 이미 적용된 적이 있다. 당시 ECT는 완전히 사장됐고, 2007년 12월 리스본 조약으로 그대로 재활용됐다. 일반절차는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우선, 각 국가가 의회를 소집하고 심의를 진행한다. 각국 의회가 내린 심의 결과를 기준으로 ‘정부 간 회의’(IGC)를 실시한다. 마지막으로 개정된 조약을 조인하고 비준(의회 비준이나 국민투표를 통해)한다. 하지만 복잡하기 그지없는데다 시간도 오래 걸리고 리스크마저 따르는 이 절차를 반롬푀이 의장이 선택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단순절차다. 단순절차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둘 다 공통점은 TEU는 손댈 수 없고, TFEU만 부분 혹은 완전 개정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중 하나인 이른바 ‘가교조항’(Passerelle Clause or Overcrossing Clause·유럽 이사회의 만장일치가 아닌 가중다수결에 의한 표결을 명시한 조항)은 두말할 것 없이 배제될 것이다. 2009년 6월 30일 독일 연방헌법재판소의 판결에서 호되게 비판을 받은 조항이기 때문이다. 반면 나머지 단순절차는 의도한 목적에 아주 적합해 보인다. 이 절차는 유럽연합의 정책과 내부 활동에 관한 위 조약 제3장과 연관된다.

TEU 제48-6조에 따르면 제3장의 규정은 유럽 이사회의 만장일치만 있으면 각국의 의회나 정부 간 회의를 소집하지 않고도 직접 개정이 가능하다. 그렇다. 제대로 읽은 것이 분명하다. 비준 절차가 없는 개정이 맞다. 유럽 제도 문제에 관해 권위적인 연구를 수행한 외교관 에티엔 드 퐁생은 “이 절차에 따른 조약 개정을 위해서는 회원국 전원이 자국의 헌법 규정에 따라 ‘승인’(그러니까 ‘비준’은 아니다)만 하면 된다. 현실상으로는 ‘승인’과 ‘비준’의 차이가 모호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수정 조약에 대한 각국 의회의 투표가 아닌, 정부에 대한 의회의 승인만 내포하는 말이 될 수도 있다”(2)고 설명했다. 그러니까 반롬푀이 의장은 굳이 막대한 비용을 들여 브뤼셀의 법학전문가들을 불러모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저 리스본 조약을 읽는 것만으로도(아니면 4.9유로를 주고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를 구입해 읽는 것만으로) 원하던 답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아직 기뻐하기에는 이르다.

‘민주주의의 적법성’이라는 문제는 법적 논쟁과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2005년 유럽헌법조약에 대대적으로 반대표를 던진 프랑스 국민에게는 더욱 그럴 것이다. 2008년 2월 프랑스 의회는 사르코지 대통령의 주도 아래 리스본 조약을 비준하기 위해 국민의 결정을 무시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이처럼 대중의 주권을 짓밟고 채택된 조약은 더욱 국민을 우롱할 여지가 있는 조항을 남발할 위험이 크다. 사실상 유럽금융안정기금이 단순 개정 절차의 대상, 그러니까 유로존의 일개 관리 조치에 불과하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없다.

우리 눈앞에 이미 생생한 증거가 있다. 지난 11월 파산 처지에 몰린 와중에도 아일랜드와 포르투갈 정부는 지난 5월에 설립된 이 구제제도를 어떻게든 피해보려고 처절하게 투쟁을 벌였다. 미래에 탄생할 새로운 구제금융제도보다 훨씬 강압성이 적은 제도인데도 말이다. 이 국가들은 금융 구제를 자국의 주권 침해로 판단했다. 구제금융을 받는 순간 국가의 주권은 유럽집행위원회나 유럽중앙은행, IMF의 휘하로 넘어갈 터이기 때문이다. 배트 오키프 아일랜드 기업상업혁신부 장관은 “아일랜드는 주권을 어렵게 쟁취했다. 그러므로 주권을 아무에게나 넘겨주지는 않을 것”(3)이라고 말했다. 그는 유럽연합 내의 권력이 국민 앞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정부에서 ‘아무나’(앞서 언급된 3인방)에게로 넘어가고 있음을 제대로 간파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금융시장 외에는 그 무엇에도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3인방 중 하나인 IMF는 심지어 유럽 기관조차 아니다.

국민 책임 안 지는 세력에게 주권을?

이를 감안할 때 문제는 단순절차가 아니다. 리스본 조약을 개정하는 것은 TEU에 명시된 유럽 내 권한 배분에 관한 문제를 제기한다. 따라서 일반절차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이런 상황에서 메르켈 총리가 요구한 조약 개정을 둘러싼 앞으로의 전쟁은 다분히 정치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각국 정부는 조약 개정 논란을 최대한 무마하거나, 조약 개정이 거의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유럽연합 주변국을 ‘지원’하기 위한 금융 분야의 기술적 문제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하려 들 것이다. 더구나 이 정부들이 자국은 유럽금융안정기금이라는 혹독한 광야를 경험할 일은 결코 없으리라 장담할 때 이 경향이 더욱 강할 것이다. 독일 총리의 조약 개정 요구에 강력한 지지를 보낸 사르코지 대통령도 물론 같은 생각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언젠가 프랑스가 ‘구제’ 국가 목록에 오르지 말라는 법이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글•베르나르 카상 Bernard Cassen
파리8대학 명예교수, 세계사회포럼 초대 의장. 주요 저서로는 루이 베베르와 공동 저술한 <유럽의회 선거, 사용법>(르크로캉 메무아르 데 뤼트 출판사·벨콩브 엉 보주·2009) 등이 있다.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각주>
(1) <뤼마니테>, 파리, 2010년 10월 30일.
(2) 에티엔 드 퐁생, <리스본 조약 키워드 27>, Lignes de repères 출판사, 파리, 2008.
(3) <파이낸셜타임스> 인용, 2010년 11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