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연재] 대중서사와 로맨스(6)- 센 여자와 예쁜 남자의 로맨스

2019-04-30     문선영 l 문화평론가

TV 로맨스, 신데렐라 스토리 깨기

재벌 가문의 승계를 이어갈 남자는 일도 잘하고 잘생겼다. 완벽해 보이는 그에게 단 하나 결점이 있다면, 차갑고 까칠한 성격. 하지만 그는 사실 알고 보면 따뜻하고 다정한 남자다. 숨겨진 그의 매력을 발견하는 것은, 가난하지만 밝고 예쁜 여자다. 그녀는 결국 까칠한 사장님 또는 본부장님의 결점을 보완해주며, 신데렐라의 구두 신기에 성공한다. 너무도 흔한 이 뻔한 스토리는 오랫동안 한국 로맨스 드라마의 전형으로 여겨졌다. 2001년 주간지 상하이 TV에서 소개한 ‘한국 드라마의 4대 킬링 법칙’ 중 한 가지는 재벌남과 신데렐라 캐릭터다.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까지 유명해진 한국 TV로맨스의 법칙들이 2000년 초반까지 이어졌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현재는 어떤가. 오래된 전형들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하며 TV로맨스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주목받지 못했던 여성이, 까칠해 보였지만 실은 다정한 재벌남, 즉 완벽한 남성에 의해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존재로 재탄생하는 스토리. 더 이상 대중은 이런 스토리에 별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TV로맨스 드라마에서 신데렐라 스토리의 균열은 남녀관계 설정의 변화로부터 발견된다.

 

더 이상 악녀는 없다. 나쁜 여자, 예쁜 남자

“내가 왜 좋아요?” “너무 예뻐서, 예쁜 사람이 내 말을 잘 들어줘서, 끼니도 잘 챙겨주고, 가끔 단 것도 주고….” 

<뷰티인사이드>(2018, jtbc)에서 은호(안재현)의 물음에 사라(이다희)의 대답은 “너무 예뻐서 좋다”는 것이다. 사라와 은호 커플은 서브플롯이지만 중심플롯 이상으로 매력적이어서 종영 이후 끊임없이 회자됐다. <뷰티인사이드>의 사라는 재벌회장의 손녀로 외모, 경제력, 경영능력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다. 세련되고 아름다운 외모와 회사를 물려받을 충분한 자질까지 갖추고 있다. 그러나 사라는 차갑고 까칠하다. 어디서 많이 본 캐릭터 아닌가. 그렇다. 사라는 우리가 잘 알고 있던 TV로맨스물의 전형적인 ‘남성 캐릭터’다. 전형적인 로맨스에서 재벌가의 여성은 가난한 여주인공과 재벌남의 사랑을 방해하기 위해 온갖 술수를 쓰는 악녀로 등장했다. 사라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 다른 사람을 돌아보지 않는 ‘나쁜 여자’지만, 무능력하거나 술수만 부리며 남을 괴롭히는 악녀는 아니다. 

 

그녀의 로맨스 대상 은호는 아이돌급 외모로 수많은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는 꽃미남이다. 은호는 여자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청소나 음식을 수준급으로 하는 다정한 남성이다. 은호의 부모님께 찾아가 ‘아들을 신부로 맞이하겠다고’ 하며 기꺼이 ‘신랑은 자기가 하겠다’는 사라의 당당함. 전형적 로맨스 드라마에서의 관계 역전은 대중들의 욕망을 반영한다.  

재력을 갖춘 사라가 잘생기고 어린 은호를 당당하게 리드하는 이야기는 대중문화의 변화로부터 짐작할 수 있다. 아이돌 스타 만들기(대표적으로 <프로듀서 101>)에 활발히 기여하는 30대 이상 직장여성들은 선택과 투자를 통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확인하는 데 적극적이다. 이제 여성들은 더 이상 누군가를 지원하거나 보조하는 역할에 만족하지 않는다. 남자로 인한 구원을 기다리거나, 집안만 믿고 설치는 캐릭터도 더 이상 설득력을 얻기 힘들다. 이는 <파리의 연인>의 ‘애기야 가자’는 재벌남이 가고, 말 잘 듣는(?) 귀엽고 예쁜 ‘멍뭉이’들이 텔레비전을 장악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초능력을 무기로! 지키는 여자, 보호 받는 남자

자신보다 덩치가 큰 남성들을 내팽개치고, 던지기까지 하는 괴력을 지닌 여자, <힘쎈여자 도봉순>(2017, jtbc)의 도봉순(박보영)은 기존의 TV로맨스의 청순가련형과는 거리가 멀다. 청순한 여주인공들이 여린 이미지로 남성들의 보호본능을 불러일으켰다면, 도봉순은 대대로 물려받은 엄청난 괴력으로 자신과 주변 인물들을 보호한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오지랖 넓은 그녀는 손가락 하나로 약한 자를 괴롭히는 남자들을 하늘 위로 통쾌하게 날려 보낸다. 작고 귀여운 외모에 숨겨진 놀라운 힘, <힘쎈여자 도봉순>의 여주인공은 센 언니/누나다. 

 도봉순은 남성의 보호가 필요 없을뿐더러, 오히려 남자를 지키는 역할도 거뜬히 해낸다. <힘쎈여자 도봉순>에서 안민혁(박형식)은 게임회사의 젊은 사장이다. 그는 감각적이고 패셔너블한 스타일의 남자다. 하얀 얼굴에 가늘고 긴 선을 지닌 민혁은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약한 이미지의 남성이다. 자신의 분야에 대해서는 거침이 없지만, 늘 알 수 없는 존재에게 위협받고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리는 민혁은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한 사람이다. 도봉순은 민혁의 경호원으로 그를 지키고, 민혁은 도봉순의 보호를 받으며 안정을 찾는다.

터프하고 멋진 남성의 보호를 받으며, 연약함을 여성성의 특장처럼 발휘했던 TV로맨스물의 수많은 여주인공들과 비교해봤을 때, 괴력을 지닌 도봉순의 캐릭터는 특별하다. 물론 이 드라마에서도 약한 자(특히 여성)를 지키는 데 거침없는 야생마 같은 남자, 국두(지수)도 등장한다. 하지만 결국 여성혐오자이며, 자신보다 약한 여자를 학교폭력의 희생자로 삼았던 연쇄살인범을 잡는 것은 강력반 형사 국두가 아니라 힘센 여자 도봉순이다. 

초능력을 지닌 도봉순 캐릭터의 탄생은 현재 우리 사회의 여성들의 불안감에서 표출된 판타지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다. 2016년 5월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묻지마식 살인사건, 데이트 폭력 등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는 끊임없이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공권력으로부터도 철저히 보호받을 수 없다는 의심들은 불안과 공포를 증폭시켰다. 이런 여성들의 불안과 공포가 <힘쎈여자 도봉순>과 같은 로맨스를 상상케 했다.   


  
TV로맨스 드라마의 변화, 여전히 남은 문제들

 예전에 센 여자 하면, ‘억센, 드센’이라는 단어가 앞에 붙으며 다소 부정적인 이미지로 통용됐다. 이제 센 여자는 ‘걸크러쉬’와 결합해 닮고 싶은 여성, 동경의 대상으로 전환됐다. 이는 여리고 약한 남자에 대한 편견의 변화와도 그 흐름을 같이 한다. 힘이든 재력이든 뭐든 강하면 남성적 매력으로 보았던 과거에서 이제 여리고 예쁜, 다정하고 귀여운 남성에 대한 호감이 상승하는 시대다. 이런 변화는 TV로맨스 드라마에서 기존 관습들을 깨고 다양한 남녀 캐릭터를 탄생시키며, 새로운 관계들을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변주되며 도전장을 내미는 로맨스물 중에서 과연 얼마나 성공적인 전환을 이룰 수 있을지, 대중의 욕망을 얼마나 반영할 수 있을지, 그리고 그들과 즐겁게 소통할 수 있을지는 더 고민해봐야 할 문제다. 이는 방영 초 새로운 접근으로 주목받았지만, 기존의 로맨스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한 몇몇 드라마(<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남자친구>)들이 남긴 아쉬움으로부터 비롯된다. 아쉬움들은 애정으로부터 발생되는 것이리라. 앞으로 다채로운 TV로맨스 드라마들이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글·문선영
한국산업기술대학교 지식융합학부 조교수. 한국 방송극의 장르 문화와 형성에 관심을 기울이며 연구 중이다. 현재 대중서사학회 로맨스연구팀에서 장르로서의 로맨스를 탐구하고 있다. 공저서로『대중서사장르의 모든 것 4 코미디』, 『대중서사장르의 모든 것 5 환상물』, 저서로『한국의 공포드라마』 논문으로 <TV드라마의 과학적 상상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