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 <하트 스톤>의 매혹, 메시지의 정치성에서 카메라의 정치성으로

2019-04-30     남유랑(영화평론가)

흔한 실수 한 가지를 언급하면서, 논의의 첫 획을 그어보려 한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지향하는 소위 ‘정의로운’ 영화들이 의외로 자주 범하는 어떤 실수에 관해 술회해보겠다는 뜻이다. 이 실수란 한 마디로, 다수의 영화 텍스트들이 명사(메시지) 자체에만 과도히 함몰돼버림으로써, 자칫하면 동사(그 전달)의 중요성을 망실해버리기 쉽다는 것이다. 참으로 간단한 내용이다.

축약되고 단순화된 명제의 단출함이 곧장 야기될 법한 문제 상황의 거든함마저 보장해주진 않는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테지만 말이다. 오래되다 못해 빛이 바래고 케케묵은 명제를 끌어오는 일을 혹 용납한다면, 꼭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게 하나 있다. 적어도 예술적 표현에 있어서만큼은, 내용과 형식이 서로 평행선을 그려선 안 된다는 사실이다. 좀 더 세련된 표현방법도 있을 테다. ‘무엇’은 ‘어떻게’의 세례를 경유하지 않고서는 자기존재를 증명해낼 수 없노라고 말이다. 적절한 기표의 몸을 빌려 현신치 않으면, 기의는 기의다울 수 없단 뜻이다.

대개 정체성 정치원리를 제 근원으로 삼는 예술작품들이 겨냥하는 궁극의 목적은 ‘기억’이다. 자세히 풀어 써보면, 관객들이 현재성과 현장성을 머금은 예민한 쟁점들을 기억하고 또 간직한 채로 살아가도록 돕는 일 정도로 번역해보는 게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 작업을 위해서 낱낱의 예술작품들은 먼저 장르언어의 섬세한 운용능력을 갖춰야만 한다. 전혀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누군가와의 만남을 연상해보라. 그이에게서 들려오는 목소리의 음색과 악센트가 선명할 때, 그리고 특별할 때, 대화 내용을 붙들어 오래도록 맘에 새길 수 있다. 반면 그 음성이 그저 무미건조한 기계음에 불과하다면, 아무래도 시간의 시험을 견뎌내기 어려울 것이다. 

 

이 영화가 단순한 퀴어물이 아닌 이유

 따라서 효과적인 호소를 위해 카메라의 원활한 움직임과 테크닉의 압축적 활용에 대한 이해가 요청된다는 진단은 무척이나 자연스럽다. 영화의 경우에 국한시킨다면 말이다. 그것이야말로 영화가 관객에게 ‘말을 걸어오는’ 방식이니 말이다. 어쨌든 영화 매체의 본령은 ‘피사체를 찍는 데’에 있으니까. 그리고 그런 점에서 <하트 스톤>(4월 25일 국내개봉)은 충분히 주목해볼만한 영화라고 할 수가 있다. 성급하게 열을 올리기보단, 조곤조곤한 디테일들의 발화로 가득 채워진 쇼트들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존재감을 충실하게 증명해내고 있는 까닭이다.

사실 이 영화를 그저 퀴어물로‘만’ 규정해버리고 마는 것은(베니스영화제에서 퀴어사자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이 공정한 판단을 저해하겠지만) 불합리하다. 외려 텍스트 면면에 함께 덧칠된 여러 빛깔의 미시적 음성들이 아울러 공명하면서 영화의 살결을 입체적으로 만든다. 이런 입체성은 무엇이든 단숨에 움켜 파악해버리려는 이해본능을 능가하는 대상에게서 더욱 매력을 느끼는 인간의 정서구조와 욕망시스템을 강렬히 자극한다. 더 깊이 빠져들어 매혹되도록 말이다. 

‘미성년’ 특유의 불안정한(unstable-indefinite) 성격은 다양성을 실어 나르는 충실한 통로가 된다. 이로써 젠더라는 경계선을 허물고 정체성 일반의 고민으로까지 확장된 문제의식은 존재론적 보편성을 넉넉히 포용해 들임으로써 폭넓은 관객들을 사로잡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특수성이 사장돼버린다는 건 아니다. 외려 배경요소에 의해 전경이 한층 도드라지는 효과를 낳는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의 삶과 고민이 외딴 공간에서 살아가는 이질적인 외계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 분명 우리의 살갗에 와 닿는 일상세계의 실제 현실이라는 점을 긍정하도록 만드는 것이야말로, 동류의 영화들이 가닿기를 꾀하는 종착점 아니겠는가?

이 즈음 고백 겸 변명, 내지는 자기변호에 해당하는 말을 읊조리지 않을 수 없다. 디테일의 중요성을 강변하면서도 계속해서 사변적인 말들을 꾸역꾸역 늘어놓을 수밖에 없는 이유 말이다. 그건 대체 어디서부터 논의의 출발을 기해야 하고 또 어디에서 맺어야 할지 도통 종잡을 수 없는 까닭이다. 확실히 텍스트는 말해야만 할, 말해져야만 할 것들로 충만하다. 개중 어느 국면, 특정 쇼트 하나에만 착목하려니 양심이 부대끼어 괴롭다. 

그러나 부족한 능력을 어떻게든 동원해 텍스트의 골자들을 놓치지 않고 대강 갈무리하는 데 방점을 찍는다 해도 족히 100매는 필요할 테니, 절대적인 지면의 한계 앞에서 그만 침묵하게 된다. 무엇을 먼저 말하고, 무엇을 뒤로 미뤄야 할지 좀체 가늠할 수 없는 혼돈과 짙은 불안 가운데, 맑았던 정신이 하얗게 질린 백지로 갈음돼버린 꼴이다. 하지만 필자의 등줄기를 서늘히 적시는 식은땀의 농도가 독자들이 품은 기대감의 밀도로 능히 승화될 수 있음을 믿기에, 맘 한 칸의 위로와 더불어 어렵사리 졸고를 이어갈 동력을 얻는다.

이에 삭혀지지 않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몇몇 지점들을 추려 간단히 언급해보고자 한다. 거듭 반복하지만 본고에서 지목한 부분들이란 영화의 구성적 아름다움에 비춰본다면 극히 일부분에 해당하는 것들일 따름이다. 남은 국면들은 오롯이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도록 하겠다. 적어도 잔뜩 부풀어 오른 가슴에서 금세 김이 빠져나가 버리는 일만은 없을 것이라 확신한다.

 

상상력을 촉발하는 시각적 은유

먼저 거론하고자 하는 지점은 오브제의 섬세한 활용이다. 대개 영화 속에서 각양 오브제들은 미장센의 한 요소로서 쇼트의 전반적 분위기를 구성하는 한 축의 기능을 담당한다. 더 나아간다 해도 시간여행을 위한 장치나 사건 전개를 위한 열쇠고리 등 기술-서사적 필요에 부응하는 수준에서 동원되는 게 일반적이다. 즉, 오브제는 이야기 진행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그러니 가외의 목적에 기대지 않는다면 구태여 사물이 카메라의 시선을 독점하는 일 따윈 불필요하다. 허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이를테면 오브제를 의도적으로 클로즈업해 시각적 은유를 덧입힘으로써 텍스트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들의 질감/양감 및 호소력을 한 차원 끌어올리는 것 역시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정확히 <하트 스톤>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상자에 갇힌 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나브로 썩어가는 생선들, 깨진 스테인드글라스 조각들로 두서없이 얼기설기 엮인 모빌, 화려하게 과장된 색감의, 허나 한편으로는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가면 등속의 오브제들은 분명 작중인물의 내면상황을 환기하는 이미지들이다. 물론 다른 갈래의 오브제들도 있다. 다리가 묶인 채 결국 죽어버린 바닷새, 비난받는 못생긴 물고기, 또 결함을 갖게 됐단 이유로 사살되고 끝내 화마에 죽어간 양 등의 이미지들은, 좀처럼 차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계의 고착성과 폭력성을 암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상술한 모든 종류의 오브제들은 분명 이야기의 흐름과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다. 대신 켜켜이 쌓인 텍스트의 의미 지층 속으로 스며들어 낱낱의 부분들이 가진 색감을 보다 풍부하게 만들어준다고 할 수 있다.

상상력을 촉발하는 시각적 은유의 기술은 카메라의 효과적인 움직임 그 자체를 통해서도 두드러지게 현상된다. 가령 베티에게 선물을 주는 단짝 토르를 바라보는 장면에서 크리스티안의 손은 의도적으로 강조된다. 말의 갈기를 꾹 움킨 손이 저도 모르게 베티에게 질투심을 느끼는 크리스티안의 심리를 암시해준다. 네 소년소녀가 함께 떠난 야영지에선 제각각 파트너들과 - 베티와 토르 그리고 한나와 크리스티안 - 끈적이는 시간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서야 잠을 청하는 토르와 크리스티안을 비추는 모습이 특징적으로 부각된다. 마주 잡은 소년들의 손깍지를 한참이나 붙들어내는 카메라의 눈은 충만한 침묵의 수다를 이끌어내는 데 복무한다. 무언가 우정 이상의 기류가 슬근히 오가고 있음을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헤아릴 수 있도록 말이다. 

이튿날 이른 아침 강물에 몸을 담그는 크리스티안의 모습은 시선의 변증법에 의해 신비화된다. 강가로 걸어와 몸을 담그는 그를 올려다보거나,, 안면근육의 꿈틀거림을 파악하기 충분할 만치 바짝 들러붙기도 하며, 마침내 수면을 박차고 일어서는 소년을 멀찍이 관찰자적 시선으로 내려다보기까지 한다. 초점과 거리의 밀도 있는 조절을 통해 그의 세신은 세례(침례)라는 제의의 모양새로 성공리에 탈바꿈한다. 세례가 존재에서 또 다른 존재로의 옮아감(re-birth)을 의미할진대, 물속에서의 절규는 드디어 소년이 자신의 내밀한 욕망을 간파하고 온전히 대면하게 됐음을 감지하게 한다. 격한 존재이행의 순간인 셈이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끝내 자살을 결심한 크리스티안의 서글픈 눈길이 마지막으로 가닿는 자리에 무엇이 놓여있을지 예상해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외화면으로 연장된 슬픈 안광은 아마도 그 시각 베티와의 성관계 후 주체할 수 없는 흥분과 희열에 사로잡힌 토르의 그림자 속으로 스리슬쩍 스며들 것이다. 그 탓인지 수풀에 발랑 드러누운 토르에게 비친 하늘빛은 역설적이게도 물을 잔뜩 머금은 솜뭉치만큼이나 무겁고 탁하다. 바람에 제 몸을 가누지 못하는 갈대의 방황은 어둠의 정서를 한층 배가시킨다. 별안간 총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린 토르의 시선이 어디를 향했을지 떠올려보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은 (분명 짐작했겠지만) 아니다.

영화의 면면을 통해 도드라지는 기법상의 한 특징은 거의 모든 국면에서 두 소년의 움직임을 핸드헬드 효과를 가미한 트래블링쇼트와 패닝을 통해 그려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울렁거림은 불안감을 잔뜩 머금은 가운데 불안정한 삶의 무대 속에 내던져져 있음을 의식적으로 표내는 장치라 본다면 옳을 테다. 허나 일매지게 고정되지 않았단 건 무엇이든 표현할 수 있다는 가변적 잠재성을 지시하기도 한다. 영화의 진자운동은 끝없는 변주를 경유해 녹록지 않은 의미덩이들을 토해낸다. 그에 몸을 적시고 감응하며, 달리 살아내는 건 우리에게 남은 몫이다.  

 

 

글‧남유랑
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 당선, 또 같은 해 제37회 영평상(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에서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비평가로서의 이력을 시작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일반대학원 비교문학협동과정에 재학 중이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총무간사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