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신문은 왜 사진까지 조작했나?

2010-12-03     소피 포미에

이집트의 11·28 총선은 예상한 대로 여당의 승리로 끝났다. 늘 그래왔듯이 투표율은 저조했고, 대대적인 부정행위를 통해 호스니 무바라크 현 대통령의 국민민주당(NDP)이 무난히 승리했다. 무바라크가 의회 장악의 기세를 몰아 6선을 내다보거나 차남에게 대권을 승계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성급한 관측마저 나오고 있다.

이집트 샴엘셰이크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두 번째 정상회담이 열린 다음날인 지난 9월 14일, 친정부 성향의 이집트 일간지 <알아람>에 사진 한 장이 실렸다. 이집트 대통령 호스니 무바라크가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고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뒤를 따르는 모습이다. 그다음으로는 팔레스타인 지도자 마무드 아바스와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 요르단 국왕 압둘라의 모습이 보인다. 그로부터 몇 시간 뒤 이 사진이 조작된 것을 발견한 네티즌들이 원래 사진을 웹사이트에 올렸다. 원래 사진에는 미국의 ‘큰형’이 앞장서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이 뒤를 따라가고 있다. 이집트 대통령과 요르단 국왕의 자리는 맨 뒤 가장자리다.

약해지는 존재감, 초조함의 무리수

이 사건은 단순하게 웃어넘길 에피소드가 아니다. 정권의 정통성 강화를 위해 중동 지역에서 중요한 세력으로 부상하려는 이집트 정부의 고민이 반영된 것으로 봐야 한다.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1952~70)의 ‘유산’이 여러 관점에서 비판받고 있지만- 특히 그의 경제정책이 비판받았다. 1970년대부터 아랍 사회주의는 경제 자유화에 길을 내주게 된다- 외교를 정치 핵심으로 삼는 전통은 여전히 계승되고 있다.

이집트는 매우 적극적이고 전문적인 외교 역량을 자랑한다. 국제 무대에서 이름을 널리 알린 사람도 많다. 가령, 부트로스 부트로스갈리는 유엔 사무총장(1992~96)과 국제프랑스어사용국기구 사무총장(1997~2002)을 역임했다. 암르 무사는 2002년부터 아랍연맹 종신 사무총장을 지내고 있다. 또한 현 투자부 장관 마무드 모히딘은 최근 세계은행의 고위직에 임명됐다. 그러나 이집트는 최근 몇 년간 중동 지역과 세계 무대에서 그만큼의 지위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이집트가 이스라엘과 아랍 세계의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아랍 국가 중에 가장 먼저 이스라엘과 평화협정(1979)을 맺었다. 또 하나는 아랍 민족주의의 선구자로서 팔레스타인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준다. 이미 오슬로 합의를 위한 일부 회담이 여러 차례 이집트에서 개최됐다. 그러나 평화회담이 난항을 겪고 정세가 변화하면서 이집트의 역할이 축소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이 예전보다 진정된 모습을 보이고, 이스라엘에 대한 테러도 급감하자 미국과 동맹국들은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다. 이들은 동쪽의 이라크, 이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문제만으로 이미 벅찬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이집트의 영향력이나 개입 능력은 더욱 축소될 수밖에 없다.

여기저기 눈치 보는 처지

팔레스타인의 내부 분열 역시 하마스에 대항해 파타 지도부를 지지하는 이집트 정부의 중재 능력을 약화시킨다. 하마스는 무바라크 정권에 반대하는 무슬림형제단에서 갈라져 나온 조직이다.(1) 가자지구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집트로서는 여기저기 눈치를 봐야 할 처지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연대 입장을 내세우면서 한편으로는 자국의 안보를 위해 이스라엘의 요구를 들어줘야 한다. 그러나 이집트의 국민 여론은 ‘정부 태도가 가자지구 봉쇄를 돕고 있다’고 비난한다.

이집트 정부가 자신의 위상을 증명하기 위해 설득해야 하는 대상은 미국만이 아니다. 자국 국민 역시 설득할 필요가 있다. 선거만으로는 여론의 심중을 알 도리가 없다. 국민은 부정으로 얼룩진 선거 따위에는 관심 없다. 선거는 단지 고위층 인사들의 세력 관계만 반영할 뿐이다. 그러나 인구 8천만 명을 거느린 나라를 최소한의 국민적 지지 없이 통치하는 건 불가능하다. 표현의 자유와 정치적 참여 공간이 부재한 상태에서 이집트 정부는 민족적 자부심을 통해 민심을 규합하려고 한다. 그러나 민족적 자부심만으로는 엘리트와 민중 사이의 균열을 봉합할 수 없다.

이집트 정부를 이끌던 군인들의 자리를 이제 사업가들이 물려받았다. 이들은 정계에서 은퇴해 다시금 돈벌이에 나서기도 한다. 이들은 이스라엘 정부에 적대감을 가지고 있지 않을뿐더러 이스라엘을 현대화 모델로 간주한다. 그들이 보기에 2006년 여름 레바논 분쟁 때만 해도 헤즈볼라를 아랍 세계의 수호자로 간주하던 여론(2)은 이제 아이로니컬하게도 비아랍 출신의 두 인물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그 주인공은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총리다. 이들이 팔레스타인의 해방과 이스라엘을 비호하는 서구 세계에 대한 반대에 앞장서고 있다.

한때 이집트가 앞장서서 내세우던 통일된 아랍이라는 신화는 산산조각 났다. 이집트는 30년이 넘도록 이란과 굳건한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시리아에 냉담하다.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도 더 나을 게 없다. 이집트는 또한 요르단의 압둘라 국왕이 팔레스타인 문제의 해결사로 나서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압둘라 국왕은 2002년 3월 베이루트에서 포괄적 평화안을 제시한 바 있다. 5년 뒤에는 하마스와 파타 사이의 분쟁에 중재자로 나서기도 했다(메카 합의). 소국 카타르도 이집트의 신경을 거스르는 국가 중 하나다. 1996년 카타르에서 창립된 이후 나날이 영향력이 커지는 <알자지라> 방송 때문이다. <알자지라>는 현재 예멘, 수단, 리비아 등 여러 곳에서 매개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나세르 정권 때 <아랍의 목소리>(Sawt Al-Arab) 방송으로 아랍 세계의 목소리를 대변하던 이집트에는 이제 범아랍권 방송사가 없다. 아랍 지역에서 중심 세력으로 떠오르고 싶어하는 이집트의 의지가 오히려 외국에서 자국 방송의 인기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자랑스럽던 국립대도 내리막길

오랜 세월 지성과 종교의 중심지던 알아자르대학도 총장 이맘(지도자)의 권력유착으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대통령이 직접 임명한 셰이크 모하메드 탄타위 이맘(지난 3월 10일 사망)은 여러 차례에 걸쳐 정권의 대변자 노릇을 자청했다. 선거 때는 투표를 독려하는가 하면, 가자지구와 접한 국경 밑의 땅굴에 철조망 설치하는 걸 지지하기도 했다. 대학총장이라는 지엽적 지위에 구속된 이맘은 정신적 지도자로서의 옛 권위를 잃었다. 또한 새로운 정보기술(IT)을 활용해 설교를 전파하는 경쟁자들에게 추월당했다. 이런 새로운 경향에 적응하고 살라피스트 극단주의자들을 견제하기 위해 알아자르대학은 2009년 자체 텔레비전 채널을 개설했다. <아자리> TV는 중동과 아시아 각국의 언어- 아랍어·우르두어·파슈토어 등- 뿐만 아니라 영어와 프랑스어 방송을 내보내고 있다. <아자리> TV는 이슬람의 관대하고 개방적인 이미지를 전파하려고 노력한다. 명망 높은 신학자인 새로운 이맘 아메드 알타예브는 소르본 유학파로 프랑스어를 구사한다. 항상 종교 간 대화를 강조하는 그는 이집트를 온건 이슬람의 본거지로 만들려는 전략에 꼭 들어맞는 인물이다. 대외 영향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논리는 외국 출신 이맘을 양성하려는 노력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알아자르대학 혹은 80개국에서 방송 중인 <아자리> TV의 설교를 통해 교육받는다. 프랑스처럼 이슬람 인구 비중이 높은 나라들도 극단적 이슬람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 알아자르대학과 교류를 요청하거나 후원한다. 그러나 알아자르대학은 자신의 위신을 높이기 위해 이집트 중심주의적 입장에서 벗어나고 교직원의 역량- 특히 외국어 능력- 을 강화하고, 아직도 미진한 미디어의 현대화를 진행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세계화 시대 적응 안간힘

세계화 시대를 맞아 이집트는 자신의 위치를 재정립하고 있다. 이집트는 외교 원칙에 의해서든 국제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고 싶어서든 다양한 국제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의 제안으로 2007년 출범한 지중해연합에 무바라크 대통령이 초반부터 열성적으로 참여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지중해연합은 아직 가시적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건설과 통신 분야 말고는 이렇다 할 해외 진출 기업이 없는 이집트는 최근 몇 년간 상당히 큰 규모의 해외 자본을 끌어들였다(2008년 기준 주식 시가로 599억 달러). 그중에서도 특히 걸프만 국가들의 투자가 두드러졌다. 현재의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그 성과는 꽤 고무적이다. 교역 상대국을 다원화하려는 이집트의 전략은 중동 지역에서 입지를 강화하려는 중국·인도·러시아의 전략과 맞아떨어진다. 이집트는 그동안 등한시해온 동유럽·아시아·중남미 국가와도 접촉을 확대해나가고 있다.

반면, 아프리카에서 이집트의 영향력은 쇠퇴하고 있다. 남(南)수단의 독립 여부를 결정하게 될 국민투표가 2011년 1월로 예정된 가운데, 지금까지 단일국가로서 수단을 지지해온 이집트는 남수단이라는 새로운 국가의 부상을 대비해야 하는 처지다. 나일강의 수자원을 둘러싼 분쟁 또한 나일강 유역 국가와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있다. 지난 5월 에티오피아, 르완다, 탄자니아, 우간다는 1959년 이집트와 수단이 체결한 ‘나일 수자원 협약’과 별도로 수자원 재분배를 내용으로 하는 협약을 체결했다.

무바라크, 아들 세습 성공할까

중동 지역에서 미국의 중요한 동맹국인 이집트는 연간 13억 달러의 군사원조와 2억5천만 달러의 민간원조를 받는다. 이스라엘 다음으로 많은 액수다. 이집트 정보부 국장 오마르 술래이만은 팔레스타인이나 이라크 관련 중요 사안을 미국과 긴밀히 협력한다. 한때 부시 행정부의 대중동 강경정책과 이집트에 대한 민주화 압박으로 조성된 긴장관계가 현재는 다소 완화된 상태다. 오바마 대통령은 2009년 6월 4일 카이로 연설에서 이슬람 국가에 대한 화해의 제스처를 보였다. 미국의 태도는 올바른 통치나 민주화를 구실로 이집트의 입지를 약화시킬 의사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2005년 이집트 총선에서 무슬림형제단이 선전하고 팔레스타인에서는 2006년 1월 하마스가 선거에서 승리하자 미국은 고민에 빠졌다. 무바라크 이후의 정세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미국은 가말 무바라크(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아들)를 성급하게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는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지난 9월 초 워싱턴에서 열린 평화회담에 사절단의 일원으로 아버지와 함께 참석한 가말 무바라크는 자신의 국제적 역량을 과시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 그의 잦은 해외 방문은 권력세습에 반대하는 여론으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다.

여전히 외교적 활동은 이집트의 체제 정통성 유지를 위해 중요하다. 무바라크 대통령이 여든이 넘은 몸을 이끌고 잦은 해외 방문을 계속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의 후계자는 이런 외교적 노력을 계승하고 중동 지역에서 이집트의 위상을 높일 수 있을까? 이 질문은 현재 이집트에서 진행 중인 변화가 성공으로 귀결될지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가 될 것이다.

글•소피 포미에 Sophie Pommier
정치평론가. <이집트의 이면>(La Découverte·파리·2008)의 저자.

번역•정기헌 guyheony@gmail.com

<각주>
(1) Husam Tammam, ‘이집트 무슬림형제단의 고통스러운 반성’,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5년 9월호.
(2) Bernard Rougier, ‘수니파 이슬람주의와 헤즈볼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7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