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화의 씨앗 평화의 열쇠, 아프간-파키스탄 경계선

2010-12-03     조르주 르푀브르

아프가니스탄은 지난해 대선에 이어 지난 9월 총선에서도 저조한 투표율과 온갖 선거 부정으로 홍역을 치렀다. 나토가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사이에 끼어 있는 파슈툰족의 중요성을 간과한 채 전략을 구사함으로써 두 나라 접경 지역의 테러 위험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작년 한 해 동안 아프가니스탄인이 2412명 피살됐다.(1) 그러나 아프가니스탄과 접경 지역인 파키스탄 북서부의 파슈툰족 거주 지역에서는 그 수가 시민, 군인, 반군 세력을 통틀어 1만2천여 명에 달한다.(2) 총 2억 명이 사는 두 나라가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벗어나 피로 물든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에는 런던 국제회의(지난 1월 28일)와 카불 국제회의(지난 7월 20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탈레반에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것 말고 다른 해법은 없는 것일까? 이 민감한 지역에 대한 (특히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간에 청산되지 않은 식민지 역사의 산물과 관련해) 대안을 찾고 있지만 상황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현 상황을 2001년부터 아프가니스탄에서 전개해온 전략적 실패의 결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하지만 현재 비극은 초기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새로운 시각이 등장했다.

파슈툰 지역 한 해 1만여 명 피살

1986년 오사마 빈 라덴은 파키스탄의 와지리스탄에서 몇km 떨어진 아프가니스탄 동부의 코스트를 근거지로 삼았다. 같은 시기, 코스트 출신의 파슈툰인이자 HIK(헤즈비이슬라미 케일즈)의 지도자인 잘랄루딘 하카니는 와지리스탄 북부의 미란샤에서 군대를 조직해 소련군을 격파했다. 현재 ‘듀란드 선’(1893년 영국 외무장관 모티머 듀란드가 불안정한 아프가니스탄과 영국령 인도제국을 분리하기 위해 지정함)으로 분할된 코스트와 미란샤는 와하브파 테러리즘의 온상지가 되었다. 모든 일이 우연히 일어난 것은 아니다. ‘움마’(이슬람 공동체)를 단일국가로 간주하는 급진적인 와하브파는 민족국가들을 붕괴시키고 이슬람 국가인 ‘칼리프연합국’을 건설하겠다는 신성한 명분을 앞세워 전쟁을 일으켰다. 세계적인 지하드(성전)는 지역민족주의를 활용해 국경을 허물고 정부의 중앙권력을 약화시키는 전략을 펼쳤다.

듀란드 선은 1980년대부터 빈 라덴에게 행운의 선이 되었다. 아프가니스탄은 인정하지 않고 파키스탄은 손대지 못하는 이 경계선에 의해 파슈툰족은 분할됐지만, 소련의 침공에 함께 저항하며 민족의 정체성을 키워나갔다. 이 정체성은 어원적 오해와 인구통계적 모순에서 비롯된 오래 묵은 불만과 역사를 함께한다. 페르시아어권 사람들에게 ‘아프가니스탄인’이란 파슈툰인을 의미해왔고, 파키스탄의 파슈툰인들도 자신을 아프가니스탄인 또는 파슈툰인이라고 구별 없이 부른다. 또한 아프가니스탄에 거주하는 파슈툰인은 모두 1200만~1500만 명으로 아프가니스탄 총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반면, 파키스탄 내 파슈툰인은 그 수가 두 배에 달하면서도 총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5%에 그친다.

듀란드 선, 빈 라덴엔 꽃놀이패

이런 모든 요인을 발판 삼아 마침내 빈 라덴은 두 나라에 걸쳐 있는 불안정한 이 지역을 자신의 기지(카에다)로 삼았다. 지하드는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넉넉한 경제적 지원을 받았고, 그의 후원자인 하카니는 핵심 수혜자였다. 빈 라덴은 알카에다의 기지가 진출할 마땅한 요충지를 발견하지 못하다가 1996년 8월, “두 성지(메카와 메디나)를 점령한 미국인에 전쟁을 선언”하며 세계적인 지하드를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그런 와중에, 1994년 탈레반이 등장했다. 탈레반이 알카에다의 분파 조직은 아니지만 탈레반의 최고 지도자 물라 무하마드 오마르가 예전 사령관 하카니와 관련되어 있었다. 알카에다에 새로운 행운의 길이 열린 것이다. 알카에다의 역할은 탈레반을 쫓아다니며 엄격한 이슬람 원리주의를 강요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탈레반은 1992년 친소 정권이 붕괴된 이후, 아프가니스탄을 피로 물들인 내전에 종지부를 찍었다. 민족과 상관없이 샤리아(이슬람 율법)의 깃발을 앞세워 아프가니스탄의 파슈툰족 거주지부터 아무다리야강까지 재탈환했다. 그 결과는 미국뿐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와 파키스탄에까지 이득을 줬다. 현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인 하미드 카르자이가 탈레반의 상대 대표단으로 있던 미국 캘리포니아의 석유화학 기업 유노칼(Unocal)은, 아프가니스탄을 통과하는 가스 수송관 건설사업을 위해 아프가니스탄의 정권 안정이 필요했다. 사우디아라비아도 자국민의 20%를 차지하는 시아파에 대한 이란(시아파)의 영향력을 우려해, 수니파를 중심으로 한 금욕적인 수장국의 출현을 지지했다. 이것은 미국뿐 아니라 파키스탄에도 만족스러운 이란 격리 전략이었다. 마지막은 모든 파키스탄인과 당시 총리 베라지르 부토까지 강박적으로 집착하던 ‘전략적 방어 중심’의 문제였다.

두 나라에 걸친 하나의 민족

파키스탄인이 ‘전략적 방어 중심’에 집착하는 이유는 인도가 파키스탄을 침공할 경우 자국 군대가 아프가니스탄으로 후퇴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지역의 지형을 파악한다면 이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단번에 알 수 있다. 실제로는 지정학적 질서에 대한 우려 때문이며, 아프가니스탄이 공식적으로 듀란드 선을 국경선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과 관련 있다.

세속적인 파슈툰 민족주의는 1950~ 70년대에 소련의 지원을 받으며 반정부화됐다. 반면 아프가니스탄 대통령 모하메드 마우드(1973~78)는 파키스탄 내 파슈툰 거주 지역을 아프가니스탄의 영토라고 주장했다. 이미 동부 지역에서 카슈미르 분쟁(3)으로 끊임없이 위협받던 파키스탄으로서는 서부에 또 다른 위험이 도사리는 상황이 불안했다. 이에 따라 파키스탄은 카불에 파슈툰에 의한 이슬람 정권이 수립되는 것을 지지함으로써 영속성을 지키고 ‘대파슈투니스탄’(4)으로 확장하려는 민족주의 세력을 꺾으려 했다. 1994년 파키스탄은 탈레반에 대한 통제권을 갖는다는 조건 아래 탈레반(무슬림, 파슈툰인, 경우에 따라서는 민족주의자)을 인정했다.

이같은 다수의 공동 이익이 기폭제가 되면서 탈레반에 막강한 힘을 실어주었다. 2001년 9월 암살당한 아마드 샤 마수드가 이끌던 북부동맹이 계속 저항의 중심 역할을 담당했더라면 타지크족, 하자라족, 우즈베크족이 연합한 북부동맹이 2001년 9·11 테러 이후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믿는 건 아주 순진한 생각이다. 마수드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어도 그 혼자 국가를 지탱하는 주축이 될 수는 없다. 즉, 가족 구성원 절반을 쫓아낸 뒤 다시 화목한 가족을 이루기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탈레반의 반계몽주의에 경악한 ‘국제사회’는 부분과 전체를 혼돈한 나머지 일부를 소외시켰다. 2001년 12월 독일 본에서 체결된 조약에 의해 출범한 새로운 아프가니스탄 정부 관료 23명은 북부동맹 출신이었고, 파슈툰인 출신은 7명뿐이었다. 물론 대통령 카르자이가 파슈툰족이었지만 그는 미국 정부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파슈툰인들의 소외감과 그로 인한 불만은 커져갔다. 8년 동안 민족주의적이지 않지만 강한 정체성으로 뭉친 ‘파슈투니즘’과 내부적으로 무장한 ‘탈레바니즘’, 마지막으로 병약한 몸에 침투한 바이러스처럼 외부에서 흘러들어온 임시부대 알카에다가 겹겹이 쌓여 하나로 얽혔다.

주변국, 이해 따라 온갖 꼼수

2001년 10월과 11월 미국의 공습 이후 파슈툰족이 발언권을 얻었더라면, 탈레반 세력은 봄날 눈 녹듯 해체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아프가니스탄을 ‘파슈툰족 국가’라고 인정하고 안 하고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파슈툰족은 역사와 인구비율 면에서 자신들이 아프가니스탄의 주인이라고 믿는다. 항변의 여지는 없지만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인 정치인류학적 사실은 이전에 고려돼야 했고, 앞으로도 고려돼야 할 문제다. 파슈툰족이 스스로를 더 이상 역사적 아프가니스탄인의 동포만이 아닌 동등한 애국자로 여기게 될 때 아프가니스탄에서 완전한 민족 간 화해가 이뤄질 것이다. 이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아프가니스탄의 타지크족이 두샨베(타지키스탄의 수도)로, 우즈베크족은 타슈켄트(우즈베키스탄)로, 시아파인 하자라족은 테헤란(이란)으로 각각 편입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아프가니스탄인은 지난 두 세기 동안 함께 지켜온 공동의 영토에 대해 성스러움에 가까울 정도로 예민해져 있다. 이들에게 민족 분할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

쇠락하던 빈 라덴, 미국 덕에 우뚝

계속적인 판단 오류로 이득을 얻는 쪽은 알카에다였다. 땅에 발붙이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알카에다는 자신들이 뿌리박고 있는 탈레반의 민족통일운동을 계속 발전시켜야 했다. 국내 지하드가 유지되지 못하면 국제 지하드도 영향받을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5) 오사마 빈 라덴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1996년부터 시작된 물라 오마르 탈레반 정권과 미국 유노칼사의 협상에 불안해하던 오사마 빈 라덴의 걱정을 말끔히 해결해준 사건이 발생했다. 탄자니아와 케냐 주재 미국대사관 폭파의 배후로 미국이 알카에다를 지목하며, 1998년 8월 아프가니스탄에 최초의 보복 폭격을 가한 것이다.

다시 한번 호기를 잡은 빈 라덴은 물라 오마르의 분노를 이용할 줄 알았다. 1998년 8월 칸다하르에서 오마르와 빈 라덴의 쌍두통치가 확정되고 9·11 테러 이후에도 이 동맹은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알카에다는 하카니의 주도 아래 국제 지하드와 국내 지하드가 합류하는 장소인 코스트-미란샤 지역으로 후퇴하고, 발루치스탄 북부 주민의 85%를 차지하는 길자이족 출신의 탈레반은 손쉽게 칸다하르-퀘타 지역을 장악했다. 아프가니스탄에 전략 지대를 확보하려던 파키스탄의 의도가 오히려 전도된 것일까? 파키스탄의 전략가들에 따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을 재탈환할 기회를 엿보면서 국내에서는 극도로 몸을 사리는 대신, 자신들의 국제 테러망을 와해시키려는 세력을 축출하는 데 힘써왔다.

알카에다가 재기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사령관인 데이비드 바노 중장이 2004년 제안한 ‘진퇴양난’ 작전 덕분이었다. 이 작전은 파키스탄 군대가 우즈베키스탄 이슬람 반군들을 와지리스탄 남부에서 몰아내면 국경선에서 이들을 소탕한다는 계획으로, 최초로 군대가 전면 투입됐다. 하지만 한 달 만에 파키스탄 병사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고, 결국 마을의 젊은 반군인 넥 모하메드와 교섭해야 했다. 두 달 뒤, 넥 모하메드는 미군 무인정찰기의 공격으로 사망했다. 8만 군인에게 대항한 ‘자랑스러운 아들’ 넥은 영웅담 속 주인공이 되어 그를 추앙하는 모든 젊은이들이 복수의 칼을 갈았다. 그의 막강한 후계자 바이툴라 메수드는 알카에다와 연계해 파키스탄의 군부대와 수송차량, 총사령부를 공격했다. 페르베즈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은 세 번의 암살 기도를 모면했고, 베나지르 부토는 2007년 12월 암살당했다. 그 뒤 메수드는 20여 개 조직을 통합해 파키스탄 탈레반 운동(TTP)을 조직해 파키스탄의 북서부 지역에서 활동하며 새로운 종교적 정화전쟁을 일으켰다. 그 결과, 2008년 10월 10일 오라크자이에서 한 번의 작전으로 시아파 주민 162명이 목숨을 잃었다.

 파키스탄의 탈레반 공격, 그러나…

공포는 절정에 달했다. 알카에다의 공격으로 황폐화된 지역은 어린 조직원들이 관리했다. 스파이 활동을 했다고 간주되는 300명 이상의 부족장들이 참수당했다. 메수드는 파키스탄 중북부 펀자브의 테러단체들의 지원을 받으며 이들과 관계를 조직해갔다. 와하브파의 라시카레타이바뿐 아니라, 라시카레장비나 자이시모하메드 등 와하브파는 아니지만 반시아파인 단체들도 포함되었다. 심지어 물라 오마르까지 사태를 우려하게 됐다. 오마르는 파키스탄의 정국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오직 자신의 저항세력을 키우는 데만 신경을 썼다. 덕분에 파키스탄은 2009년 여름까지 유일한 위협 대상인 TTP를 소탕하기 위해 믿을 만한 탈레반에 의지했다. 확실한 성과는 얻지 못했지만 결국 메수드는 8월에 암살당했다. 그의 사촌인 하키물라 메수드가 그의 뒤를 이어 TTP의 최고지도자로 선출되고, 물라 오마르는 하카니 네트워크의 도움을 받아 다시 TTP를 와해시키려고 했다. 그해 10월, 파키스탄 군대는 와지리스탄에 새로 공격을 가했고, TTP도 맹렬하게 반격했다. 지난 10월과 11월 사이에 81번의 자살테러 공격으로 1680명이 사망했다.

런던 회의와 카불 회의는 오래 묵은 방안을 재탕하는 것에 그쳤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이제 교착 상태에 빠져 있고, 반군 활동 지역에서 경제개발도 불가능해 보이며, 정치적 상황도 전혀 낙관적이지 않다.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이른바 ‘굿 거버넌스’에 대한 원조만으로 실타래처럼 뒤엉킨 상황을 풀 수 있을까?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에게 남은 해결책은 탈레반과의 협상이다. 오바마 대통령도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이에 동의했다. 지금보다 최악의 상황은 없었다. TTP는 알카에다, 펀자브 테러단들과 함께 파키스탄 탈레반을 응집시켰다. 전통적인 부족사회의 권력을 찬탈하고, 시민의 삶을 비극으로 몰아갔으며, 끊임없이 테러 행위를 일삼고 있다. 이런 혼돈 속에서 속죄받을 수 있는 탈레반이 있을까? 아무리 뛰어난 국제 전략가들이 협상에 합류할지라도, 탈레반 세력이 자극하는 이 지역의 동족성과 충성심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소용없다.

한 달 새 81번 자살 테러, 1680명 숨져

결론적으로, 탈레반과의 협상은 좋은 전략이 아니다. 좀더 근본적인 문제를 다뤄야 한다. 앞서 보았듯이 알카에다는 땅에 발붙이지 않고 생존할 수 없고, 잠잠해진 파슈툰 사회는 더 이상 탈레반의 무장권력이 필요 없다. 바로 이 민족이 우리가 손을 내밀고 도움을 호소해야 할 대상이다.

부족 체제가 무너지게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침탈당한 권력을 되찾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 전통적인 부족장들이 참수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전통’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봉건제도 아래서 민족의 가치만 강조한 사고방식은 ‘전통’과 ‘세습’을 혼돈했다. 유럽에서 봉건적 권력은 왕의 신성한 권리에 의해 부여된 것으로, 신에 대한 영원한 충성을 강요하고 혈연에 의한 권력세습을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중동 지역의 봉건제도에서는 신에 의해 권력을 부여받지 않는다. 자신의 세속 권력을 증명하고, 그 조건으로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이들에게 관대함을 베푸는 자라면 누구든지 족장이 될 수 있다. 즉 영향력 있는 모든 파슈투인들은 탈레반이든 아니든 혹은 탈레반 지지자이든, 확신을 가지고 있든 기회주의자이든 상관없이 모두 잠재적 협상 대상자가 될 수 있다. 충격적일 수 있겠지만 하카니 또한 탈레반 지도자이자 빈 라덴의 전략적 동지가 되기 이전에는 파슈툰인이었던 만큼 그 대상에 포함될 수 있다. 그는 듀란드 선을 넘나들며 코스트-미란샤의 국경을 가로지르는 자신의 세력 범위에서 부와 권력을 지키고 있다. 하카니에게 알카에다와 TTP는 자신의 이익 수호를 위한 도구 중 하나일 뿐이고, 세계적 지하드는 그의 실질적 관심에서 벗어나 있다.

민족주의냐 지하드냐, 선택 기로

같은 맥락에서 지난 2월 2일 아시파크 파르베즈 카야니 파키스탄 육군참모총장이 하카니에게 교섭을 제안한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는 파키스탄 서부의 접경 지역은 “안정화하기 위한 것뿐이지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고 명시하며 전략적 종심을 공식화했다. 그는 듀란드 선을 거론하며, 아프가니스탄 내 인도의 영향력 증가는 파키스탄에 대한 적대적 포위를 뜻한다고 우려를 표명했다. 그의 판단이 과장된 것일 수 있겠지만 전혀 사실무근은 아니다. 냉전시대 동안 파키스탄은 미국-중국의 외교적 축과 소련-인도 축의 교차점에 놓여 있었다. 그 결과, 세속적인 파슈툰의 민족주의는 소련의 지원뿐 아니라 인도의 지원까지 받았다.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암묵적인 사실이 있다. 1947년 듀란드 선이 규정된 뒤부터 파키스탄은 이 선을 국제법이 보장하는 ‘조약의 유산’이라는 점을 고려해 합법적 국경선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은 듀란드 선이 합법적 기반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법률로 인정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 결국, 듀란드 선은 종양 치료를 위해 인위적으로 투입된 고정 종양이지만, 파슈툰족을 소외시킴으로써 종양이 더욱 부풀어 올랐고, 알카에다라는 바이러스에 의해 아예 곪아버렸다.

파키스탄 페슈와르의 집권당인 아와미민족당(ANP)처럼 예전에는 친소주의였던 세속적 좌파 민족주의 정당들도 현재의 상황이 못마땅하다. 2007년 4월 세간의 주목을 받지 못한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카르자이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이 ANP의 창시자인 ‘바드샤 칸’의 이름을 딴 문화센터 개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잘랄라바드를 방문한 것이다. 압둘 가파르 칸이 본명인 바드샤 칸은 1948년 파키스탄을 떠나 아프가니스탄으로 망명한 뒤 1988년에 사망한 인물이다. 뒤를 이어 ANP의 당수가 된 그의 손자 아스판디아르 왈리 칸이 대신 초대받아 연설했다. “여기서든 다른 곳에서든 나는 아프가니스탄인이다”라고 외치며 연설을 마치자 카르자이가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이곳 외에 페슈와르에도 바드샨 칸 센터가 세워졌다.

이처럼 민감하면서도 모순적인 문제들을 야기한 듀란드 선이 앞으로 진정한 지위를 부여받기 어려운 만큼 이 지역의 평화에 대해서도 확언하기 힘들다. ‘선’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휴전, 즉 종결되지 않은 분쟁 상태를 암시한다. 카슈미르를 두 지역으로 가르는 선을 ‘통제선’이라고 부르는 이유와 동일하다.

불행의 시초, 듀란드 선 어찌할까

아프가니스탄이 오랫동안 듀란드 선의 존재를 부정해온 만큼 카르자이 대통령은 비난을 받거나 암살당할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서는 이 상황을 뒤집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이 이 경계선을 인정했더라면 ‘전략적 방어 중심’에 대한 파키스탄의 계획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반테러 동맹은 당연히 효력이 있었을 것이며, 인도의 포위에 대한 우려도 사라졌을 것이다. 결국, 2009년 8월 격분한 파키스탄은 울타리를 치고 듀란드 선을 폭파하겠다고 위협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지역 내 저항세력을 부추기고 알카에다가 개입하는 결과만 초래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지역의 대혼란을 피하기 위해서는 이 ‘파괴의 선’을 ‘평화의 선’으로 탈바꿈시켜야 한다. 두 나라 간의 정체성과 경계선에 대한 오래 묵은 긴장 때문에 서로에게 다가가기가 어렵다면 이제는 ‘국제사회’가 나서서 도와줘야 한다. 이것이 8년 동안 이 지역에 개입해온 국제사회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안이다. 하지만 공동의 경계선이 인정되기 위해서는 일단 두 국가의 영토 안에 분포해 있는 부족장들과의 협상이 전제돼야 한다. 협상은 국민이 더 이상 분단으로 고통받지 않고 주권에 대한 분쟁 없이 공동의 공간을 되찾기 위한 운영방식을 논의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일종의 유럽연합의 작은 ‘셴겐’(Schengen·1985년 룩셈부르크의 이 도시에서 프랑스, 독일, 베네룩스 간에 국경 규제를 철폐하는 조약이 체결됐다)이라고 볼 수 있을까? 누군가는 이 지역이 암거래의 중심지가 될 것이라고 반박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곳이 암거래의 중심지로 자리잡은 지 이미 오래됐고, 아프가니스탄의 개발에 적절한 환경을 조성해 안정을 되찾고 나면 상황은 급속도로 개선될 것이다. 국경선의 ‘운영 방식’에 대해 협상하는 것도 원칙적으로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듀란드 선은 이미 네 번의 조약(1893년, 1905년, 1919년, 1921년) 대상에 포함된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무의미한 반복으로 인해 불신이 깊어지고, 의심의 그림자가 현실까지 덮쳤다.

소외된 파슈툰족에 직접 다가가야

결국 파슈툰인은 자신이 더 이상 필요 없다고 느낄 때 테러단에 등을 돌릴 것이라는 것을 수많은 정황을 통해 추측할 수 있다. 탈레반과 미래가 불투명한 평화를 협상하는 것보다는 두 국가가 과거의 감정과 상관없이 부족장들과 함께 파슈툰족의 문제를 재검토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탈레반과의 협상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지 못했다고 다시 알카에다와 협상할 수 없지 않은가? 파키스탄 북서부 국경지방의 국무장관인 할레드 아지즈는 <더 뉴스>에서 “아프가니스탄과 듀란드 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미국과 파키스탄의 국가적 이익은 결코 일치할 수 없다”(6)고 분석했다.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문제, 그리고 아시파크 파르베즈 카야니 파키스탄 육군참모총장의 공개 제안은 모두 앞에서 언급했다. 국경선이라는 불길을 잡는 것이 아프가니스탄의 민족 화합을 위한 첫째 조건이다. 알카에다가 갖고 있는 기회주의적인 무기와는 차원이 다른 파슈툰족의 정체성은 탈레반에 적대적인 세속 정당들의 마음속에 뿌리내리고 있다. 서로 다른 목표를 추구하는 좌파 민족주의자, 탈레반, 알카에다는 같은 시험관 속에서 통제 불가능한 화학반응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서구적 외교술을 복잡한 분쟁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통상적인 관행을 뛰어넘어야 한다. 배척당한 민족이 다시 발언권을 얻게 되면 허울뿐인 승리가 아니라 진정한 명예를 얻었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또한 세계 최강의 군대들도 처절한 패배감을 맛보지 않고 승리 없는 후퇴라는 모욕감을 느낄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글•조르주 르푀브르 Georges Lefeuvre
인류학자이자 외교관으로 유럽연합위원회의 전직 파키스탄 전문 정치고문을 지냈다.

번역•배영미 youngmib@gmail.com

<각주>
(1) UNAMA 연차보고서, 2010년 1월.
(2) 남아시아 테러리즘 포털 사이트, www.satp.org.
(3) 인도와 파키스탄은 1947년부터 두 지역으로 분할된 카슈미르의 통치권을 둘러싸고 충돌해왔다.
(4) 아프가니스탄의 동의어인 만큼 혼란스러운 용어다. 1948년 자헤르 샤 아프가니스탄 국왕의 지지를 받던 독립국 ‘파슈투니스탄’의 깃발이 와지리스탄 북부와 티라 계곡에서 휘날렸다. 이 반정부 국가는 약 스무 달 동안 지속되었다.
(5) 2010년 1월 29일, 상원 외무위원회에서 장피에르 필리외의 인터뷰. www.senat.fr. 장피에르 필리외, <알카에다의 아홉 가지 인생>(파야르·파리·2009) 참조.
(6) Aligning regional security policies, <더 뉴스>, 이슬라마바드, 2008년 11월 25일.


[박스기사] 아프가니스탄의 역사

1893년
 11월 12일 아프가니스탄과 인도제국(현 파키스탄 포함)을 분할하는 듀란드 선에 대한 조약이 체결됨. 아프가니스탄은 이 ‘경계선’을 인정하지 않고 있음.
1919년  3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영국으로부터 독립함(1919년 8월 8일 라왈핀디 조약).
1933년  자히르 샤 왕이 즉위함. 
1973년  모하메드 다우드가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을 폐지하고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을 선포함.
1978년  공산주의 정당인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이 쿠데타를 일으킴.
1979년  미국 정부가 반공주의적 게릴라를 비밀리에 지원함.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뒤 바브라크 카르말의 친소 정부를 수립함.
1988년 4월 14일 소련군 철수에 대해 아프가니스탄·소련·미국·파키스탄 간 제네바 협정이 체결돼, 1989년 2월 15일 소련군이 철수함.
1992년 4월 16일 친소 정권이 붕괴함. 승리를 거둔 무자헤딘이 계속되는 내란 속에서 분열됨.
1996년 9월 27일 탈레반이 카불을 점령하고 아프가니스탄의 3분의 2를 장악함. 샤리아의 엄격한 적용을 기반으로 한 이슬람 정권이 수립됨.
1997년 5월 26일 파키스탄이 공식적으로 탈레반 정권을 인정함.
2001년 9월 마수드가 암살됨. 빈 라덴이 지하드를 선포함. 
              10월 7일 미국이 연합군과 함께 아프가니스탄에 군사적 개입을 실행함.
           12월 5일 유엔이 주최한 독일 본에서의 정파회의를 통해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이 이끄는 과도정부 창설에 대한 조약이 체결됨.
2004년 1월 26일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으로 공표됨.
              10월 9일 카르자이 대통령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함.
2005년 9월 18일 첫 총선이 실시됐지만 50%에 육박한 기권율을 기록함.
2009년 8월 20일 대선과 지방선거를 실시함. 카르자이 대통령과 격전을 펼친 유력한 경쟁자 압둘라 압둘라 후보가 자진 사퇴함. 
              11월 3일 카르자이 대통령의 화해 제안을 탈레반이 거절함.
           12월 1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아프가니스탄에 3만여 명의 병력을 추가 파병하기로 발표함.
2010년 1월 28일 런던 국제회의에서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전략 변화’의 촉구와 투항한 탈레반의 사회복귀 지원 등을 제안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