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완다-부룬디, 닮아가는 이웃사촌

2010-12-03     콜레트 브랙크만

르완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유엔인권위원회 고등판무관은 지난 10월 1일 르완다가 콩고민주공화국에서 1993년부터 2003년까지 자행한 끔찍한 범죄에 관한 보고서를 발간했다. 폴 카가메의 안보정책이 이웃 나라 부룬디에 영감을 준 것처럼 보인다.

지난 8월 26일 부룬디 수도 부줌부라에서 열린 피에르 은쿠룬지자 대통령의 두 번째(임기 5년) 취임식에는 국가원수로는 유일하게 르완다공화국 대통령 폴 카가메가 참석했다. 과거 벨기에의 식민지로, 종종 ‘이란성 쌍둥이’로 불리는 이 두 국가는 투치족(르완다 국민의 대다수)과 후투족(부룬디 국민의 대다수) 간에 긴장과 유혈사태로 점철된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국경 양쪽에서 불거지는 문제와 이에 대한 대응책은 서로 달랐다.

1994년의 투치족 대학살 사태 1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르완다애국전선(RPF)이 르완다를 통치하고 있다. 국가 정체성 확립에 고심하던 RPF는 즉각 국가의 모든 공식 문서에서 ‘민족’을 언급한 부분을 삭제했고, 어떤 경우에도 사용할 수 없도록 했다. 2003년 공포된 새로운 헌법과 대학살 예방법에는 이런 조항이 명시됐다. 하지만 르완다 정부를 자문한 국제사면위원회는 이 조항이 너무 막연하고 광범위해서 주로 잠재적 반체제 인사들을 격리하는 데 쓰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1) 그래서 지난 8월 대선 후보 2명이 ‘민족말살 이데올로기법’ 위반으로 기소돼 심문을 받았고, 한 신문사 편집장이 체포됐다.

부룬디는 2002년 평화와 화해를 위한 탄자니아 ‘아루샤 협정’ 이후, 근본적으로 르완다와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전 남아공 대통령 넬슨 만델라의 장고의 노력 끝에 체결된 이 협정은, 1993년 투치족 무장세력의 난동으로 후투족 출신 대통령 멜콰이어 은다다예가 암살되며 촉발된 10년간의 내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협정서에는 두 민족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뿐 아니라, 두 민족 간의 할당제 정책까지 암묵적으로 담겼다. 이를테면 국회는 후투족 60%와 투치족 40%로, 상원은 각 부족 동수로 구성됐으며, 행정부는 부족과 정당이 서로 다른 2명의 부통령이 보좌하는 대통령이 이끌고 있다. 예전에 ‘투치족 일색’이던 군은 현재 후투족과 투치족이 반반씩 구성됐으며, 반군 출신들도 사병으로 합류시켰다고 명시돼 있다.

식민지·대학살 경험 빼닮아

이제 정권 다툼은 현 대통령이 당수로 있는 후투족 정당 민주방위국민평의회(CNDD-FDD)와 전 대통령 은다다예가 속한 부룬디민주전선(FRODEBU), 마지막으로 무장해제를 단행한 부룬디해방전선(FNL-Palipehutu)의 삼파전이다. 후투족 정당 중 가장 오래된 FNL은 대학살을 자행한 르완다 체제와 밀접한 대칭관계에 있다. 1972년 투치족이 부룬디에서 자행한 대학살 이후, FNL은 탄자니아로 피란 온 후투족을 난민수용소에서 단원으로 모집했다. 이어 콩고민주공화국 남(南)키부의 숲에서 르완다의 후투족이 주도하는 ‘르완다 해방을 위한 민주주의 군대’(FDLR)와 연대해 작전을 폈다.(2)

르완다의 후투족과 콩고 군인들이 짜고 2004년 8월 부룬디 서쪽 가툼바 난민 학살 사건을 저질렀다고 주장해온 FNL이 정당을 창설하기 위해 실제로 무장해제를 단행한 시기는 2008년 이후다. FNL의 전사들이 본국으로 귀환한 것은 1년도 채 안 된다. 남키부와 부룬디의 수도 부줌부라 인근 농촌 지역에 군 기지와 많은 추종자를 둔 FNL은 자신들을 부패한 CNDD-FDD의 대안이라고 소개한다. 한편 초기에 자신들을 후투족 정당이라고 소개했던 CNDD-FDD는 역설적이게도, 르완다 집권세력인 투치족의 RPF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사실 르완다는 FRODEBU를 증오하고, ‘민족 말살’ 이데올로기를 펼치는 FNL은 더욱 증오한다. 최근 몇 년 사이 이 두 정권은 군경 간에 밀접한 보안 협정을 맺었다. 심지어 부룬디는 별 가책 없이 르완다 반체제 인사 데오 무샤이디를 르완다로 추방했다. 투치족 대학살 때 살아남아 벨기에로 정치 망명을 갔다 귀국한 기자 출신의 데오 무샤이디가 카가메 대통령에 대항하는 무장단체 창설을 꾀했기 때문이다.

내부 장악 위해 손 내민 두 정권

독재에도 불구하고 이 두 정권은 외국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래서 국제사회는 두 국가가 지난 5월 국제인권감시단체인 휴먼라이트워치(HRW) 소속 여성 대표를 추방했을 때와, 부룬디가 유엔에서 파견한 특별대표를 추방했을 때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이런 관대함은 두 정권의 ‘성공 스토리’에 먹칠을 하지 않겠다는 국제사회의 의지로 풀이된다. 특히 최전방에서 ‘테러와의 전쟁’에 최선을 다하는 이 정권들을 격려하겠다는 의지가 깔려 있다. 부룬디는 유엔의 아프리카 군사작전(Afrisom)에 할당된 수천 명의 군인을 소말리아에 파견했다. 이런 노력 때문에 부룬디는 우간다와 마찬가지로 알카에다와 연계된 소말리아 이슬람 반군 ‘셰밥’(Shebab)의 위협을 받고 있다. 한편, 르완다는 수단 다르푸르에 평화유지군 3300명을 파견했다.

폴 카가메는 지난 8월 르완다 대선에서 93%의 득표율로 승리했다. 유럽연합은 이미 선거 결과가 결정났다고 보고 투표감시단조차 파견하지 않았다. 미국만 아프리카 담당 차관보 조니 카슨을 통해 야당과 표현의 자유가 사라질 것을 우려하는 견해를 밝혔다. 한편, 은쿠룬지자가 91%의 득표율로 승리한 지난 6월 부룬디 대선은 야당을 변방으로 몰아내는 대관식 과정에 불과했다. 하지만 국제선거감시단은 다소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면서도 투표 방식을 지지하고 승리자를 축하했다.

두 권력자, 서로에게 정치적 멘토

뛰어난 운동 능력과 독실한 신앙심으로 유명한 체육교사 출신의 은쿠룬지자 대통령은 자신의 스타일대로, 그리고 르완다 정부의 조언에 따라 정책을 폈다. 그는 몇 달 전부터, 아니 몇 해 전부터 국민의 80% 이상이 거주하는 농촌에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는 전략을 폈다. 수도 부줌부라에서는 언론과 단체, 지식인들이 정부의 공금 횡령(대통령 전용기의 미심쩍은 매매를 포함한)과 정부 부처를 독차지한 여당을 용기 있게 규탄했다. 이에 FRODEBU를 비롯한 CNDD의 분리파인 FNL과 전직 언론인 아렉시스 신두히제가 창설한 민주주의사회운동(MSD)을 포함한 12개 야당은 평판이 좋지 않은 정권을 이길 호기를 잡았다고 확신하고 ‘변화를 위한 민주동맹’(ADC-Kinigi)이라는 기치 아래 공동전선을 형성했다.

부줌부라 사람들은 외교 만찬을 기피하고 금요일 오후마다 시골 마을을 방문하는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조롱했다. 대통령은 마을을 순시하는 자리에서 “일하고 기도하라!”는 슬로건을 외치며 농민들에게 아보카도와 과일나무의 묘목을 분배했다. 또 자신이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할렐루야’ 축구팀 소속의 젊은이들과 축구 경기를 했다. 그는 마을회관에서 묵으며, 집권당 당원들인 시장과 시 고위 공무원들에게 벽돌을 찍고 학교와 보건센터를 짓도록 독려했다. 약 1500개 신설 학교들이 농촌 지역에 세워졌다.

종종 정당들의 민족차별 정책에 실망하고, 중앙정권에서 멀리 떨어져 무장단체나 군에 고통받아온 농민들은 국가원수의 이런 단순한 포퓰리즘에 현혹됐다. 게다가 포퓰리즘은 초등학교 무상 교육, 5살 미만 어린이와 임산부에 대한 의료비 면제 등 호평받을 만한 조치를 동반했다. 예전에는 병원비를 내지 못한 산모들은 가족이 돈을 마련해 올 때까지 인질로 잡혀 있어야 했다.

대통령의 이런 편가르기식 농촌 지역 공략은 성과를 거뒀다. 반면, FNL이나 이전에 투치족을 대변하던 유일 정당인 ‘국가의 진보를 위한 연합’(Uprona) 등은 수도 부줌부라 지역에서 표를 획득했다. 농촌 지역은 항상 ‘소비에트 연방’ 스코어인 90%가 넘는 몰표를 CNDD에 주고 있다. 나머지는 정당의 영향력과 사회 통제 능력에 좌우된다. 은쿠룬지자는 취임식 연설 때 “나의 승리가 모든 이의 승리”라고 호언했다. 하지만 공포와 억압이 갈수록 확산되고 있다. 기자 장클로드 카붐바구를 비롯한 240명의 반체제 인사들이 체포됐다. 그래서 여러 ADC의 지도자(네오나르 은양고마, 아렉시스 신두히제,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FNL의 지도자 아가톤 르와사 등)들은 검거를 피해 자취를 감췄거나 고국을 떠나고 싶어한다. 고문의 시대가 회귀한 것이다.

옛 반군들 불만 고조, 재무장 가능성

한편, 전쟁에 사용됐던 무기들이 아직 산속에 은닉돼 있고, 대통령이 이끄는 절대 여당에 맞서 각종 선거를 보이콧하던 야당이 적대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또한 무장해제를 단행했던 전 반군들이 현실에 실망해 르완다와 남키부 인근 키비라 숲으로 집결하고 있는데다, 군에서 탈영하는 병사도 잇따르고 있다. 다만, 전쟁이 재발하더라도 이들의 목표가 CNDD 정권 타도이기에 민족 학살로 곧장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부룬디는 종종 르완다의 성공 사례들을 인용하고 있다. 이를테면 경제성장률이 7%에 달하는데다, 정부 예산의 5분의 1을 보건비로 쓰고 있고, 모든 공무원과 많은 민간 부문 종사자들이 상호공제조합에 가입돼 있으며, 90%의 어린이가 초등교육을 받고 있고, 교육받는 학생들이 대부분 여자아이고, 국회 의석을 여성이 남성보다 더 많이 차지하고 있다고 말한다. 르완다는 부룬디나 콩고민주공화국과 정반대로 ‘부패와의 전쟁’을 효과적으로 펼치고 있다. 또 싱가포르에서 영감을 얻어 수도 키갈리를 서비스와 교역의 허브로 만들기 위한 마스터플랜을 수립했다. 카가메 대통령은 동남부아프리카공동시장(COMESA) 같은 국제 무대 진입과 2009년 말에 프랑스와의 외교관계 복원 및 콩고민주공화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통해 자신의 입지를 공공히 했다.(3) 한편 르완다군이 콩고민주공화국의 일부 영토를 4년 동안(1998~2002) 점령한 적이 있지만, 카가메 대통령은 콩고민주공화국 독립 50주년 행사에 참석해 박수까지 받았다.(4)

등돌리고 망명가는 옛 동지들

카가메의 이런 흠잡을 데 없는 업적은 그가 르완다 대선에서 성공을 거두는 데 한몫했다. 후투족도 나라를 안정시킨 그에게 고마워한다. 카가메도 부룬디 대통령처럼 대선 직전 시골 지역을 순방하며 행정 관료들과 자주 만나고, 일정 기한 안에 발전 목표를 달성하겠다며 시장들과 ‘지역 관할권에 대한 협약’을 체결했다. 이런 발로 뛰는 정치가 성과를 거두었지만, 야당 와해 공작과 전반적인 공포 분위기가 투표에 영향을 끼치는 것도 사실이다.

부룬디에서는 언론의 자유가 과도기를 맞고 있다. 활발한 활동을 펼치던 단체들도 야당의 궐석 때문에 최전방에서 정권과 대적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요컨대 이들은 부패 사정기관 중 하나인 올루콤(Olucome)의 부위원장 어니스트 마니굼와의 암살에 충격을 받았다. 한편, 르완다에서 한때 추방됐던 비정부기구(NGO)들이 오래전에 이미 활동을 재개했다. 대중은 언론이 심한 통제를 받고 있지만 상황이 호전돼, 자신들이 치밀하면서도 효과적인 경찰 시스템 속에 살고 있다고 느낀다.

국내외에서 실질적인 성공을 거둔 카가메 대통령은 두 번째 임기를 의욕적으로 시작했어야 하지만, 그가 콩고민주공화국의 동부 지역에서 저지른 폭정에 대한 유엔 보고서가 지난 10월 1일 발간되면서 심각한 악재를 만났다. 유엔은 이 보고서에서 르완다군을 맹렬히 비난했다.(5) 하지만 르완다도 부룬디와 마찬가지로, 주요 위험은 후투족과 투치족 간의 분열이나 국제적인 압력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출신 배경을 지닌 야당 인사들 간의 제휴에서 발생하고 있다. 현재 일부 FDLR 출신 후투족 그룹과 카가메 정권에 반대하는 특권층 출신의 투치족 반체제 인사들이 북(北)키부 숲에서 동맹을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FDLR는 르완다와 오랫동안 동맹관계를 유지했던 로랑 은쿤다 장군 추종자들이다. 투치족으로서 프랑스어권 콩고인인 은쿤다는 르완다 수도 키갈리에 가택연금을 당한 상태다.

남아공으로 망명을 떠난 카윰바 은얌와사 전 참모총장과 파트릭 카레게야 장군의 변절은 여당 RPF 수뇌부에 타격을 줬다. 예컨대 두 사람은 우간다 군대에서 고급장교로 복무한 뒤, 1980년대 말 RPF를 창설한 극히 폐쇄적인 ‘클럽’인 전 우간다 투치족 망명조직 회원이었다. 영어권 엘리트 회원으로서 초기 르완다 정부의 최고 지위를 누린 두 친구는 카가메의 독재정치를 비난했다. 하지만 대통령은 자신을 포함한 특권층의 부패를 뿌리 뽑기 위해, 옛 전우들의 반감을 감수하면서까지 오래전 자신의 군복을 ‘좋은 거번넌스’(Bonne Gouvernance)의 양복과 물물교환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특권층을 가차 없이 숙청하지 않으면 부패가 나라를 망칠 것”이라고 장담한다. 지난 2월의 키갈리 수류탄 공격 배후로 지목되는 전 주인도 대사 카윰바는 어쩔 수 없이 남아공으로 피신했지만, 그곳에서도 암살을 당할 뻔했다.

‘선거 열풍’, 종족 간 충돌 비화 우려

비록 이 지역의 3국이 안보협력을 강화할지라도- 르완다군은 2009년 콩고군 지원을 위해 후투족 반군 소탕에 가담하고, 지난 9월에는 르완다의 국방장관 카바베레 장군이 콩고민주공화국 수도 킨샤사를 방문했다- 르완다와 부룬디에서 이는 ‘선거 열풍’은 후투족과 투치족 간의 반목과 충돌로 이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다.

글•콜레트 브랙크만 Colette Braeckman 
일간 <르수아르> 기자, 벨기에 브뤼셀 

번역•조은섭 chosub@ilemonde.com

<각주>
(1) 국제사면위원회 보고서 ‘인종학살과 분리주의의 이데올로기에 관한 르완다 법의 위험성’ 참조, 2010년 8월 31일.
(2) 은와예일라 트시옘베, ‘킨샤사를 위협하는 키부의 화약고’,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8년 12월호.
(3) 브누아 프란시스, ‘프랑스-르완다, 대학살 덮고 미래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0년 9월호.
(4) 대학살 2년 뒤인 1996년, 르완다군은 콩고민주공화국 영토에서 후투족 난민의 강제귀국 작전을 펼쳤고, 도망자들을 추적해 학살했다.
(5) 르완다군은 과거 정부군에 편입돼 있던 후투족 난민뿐 아니라, 후투족 출신 콩고인과 난민을 도운 혐의가 있는 민간인들조차 몰살했다.


[박스 기사] 유럽연합의 말뿐인 선거 감시

부룬디에 파견된 ‘유럽연합의 선거감시단’(MOE EU)의 보좌관 톰마소 카프리오글리오는 지난 4월 말, 부룬디 수도 부줌부라에서 “우리 역할은 순전히 기술적이어서, 어떤 경우에도 정치적일 수 없다. 국제기준에 따라 선거의 원활한 진행을 관찰하는 것이 임무다”라며 5월 지방선거, 6월 대선, 7월 국회의원 선거 그리고 9월 야당 지도자 선거 등에서 모든 정치적 간섭을 배제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MOE EU는 5월 28일, 첫 선거가 끝나자마자 부룬디 당국에 감사장을 수여하며 정치적 게임을 시작했다. 한편, 야당은 전반적인 위법행위를 규탄하며 선거 결과에 반발했다. MOE EU는 부룬디 지도자들과 결연을 맺은 셈이다. 만약 MOE EU가 선거의 법적 유효성을 인정한다면, 잘못된 이 게임에서 패배한 자들의 실망은 어디로 향할까? 권력층 지도자들의 레임덕은 1993년부터 2005까지 피비린내 나는 전쟁으로 상처를 입은 국가엔 걱정거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올해 초반부터 민족문제에 관한 토론은 사라지고 정부 비판과 무능한 경제정책, 특히 눈에 띄는 경찰의 일탈 등에 관한 토론이 집중적으로 열리고 있다. 올봄 부룬디 전국이 경쟁적으로 민주화 바람에 휩싸이며, 대규모 시민집회와 민주화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이런 시대 변화에 따라, 심지어 ‘후투족 파워’(1)가 주도하는 부룬디해방전선(FNL-Palipehutu)이 무장투쟁을 포기하고 선거에 참여했다. 부줌부라 시민들은 열광적인 분위기 속에서 선거 캠페인이 충돌 없이 진행되는 것을 지켜봤고, 지난 5월 24일에는 사흘 연기됐던 지방단체장 선거가 치러졌다.(2)

하지만 선거 열풍은 정치적 이유로 삽시간에 막다른 골목으로 치달았다. 예컨대 선거 부정이 만연했다. 야당은 등록된 유권자 수보다 투표자 수가 많다고 주장했다. 올해 초 망명객 83명과 함께 부줌부라에 들어온 MOE EU는 2인1조의 감시팀 15개를 구성해 6900개 투표소를 감시했다. 하지만 유럽연합 회원국이 급조한 선거감시원들이 부룬디의 상황을 알 턱이 없었고, 선거감시 활동은 애초부터 제한적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지방단체장 선거 진행이 실질적인 선거 혼란과 심각한 법률 위반 없이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웠다”는 신속한 조사 결과를 내놨다.

정부·여당(3)인 민주방위국민평의회(CNDD-FDD)가 70%를 득표하면서 세력이 약화된 야당들은 투표소가 폐쇄되자마자, ‘변화를 위한 민주동맹’(ADC)을 결성했다. 이들이 세운 목표는 ‘선거관리위원회의 해체’과 ‘새로운 선거 개최’였다. 하지만 자금 여력이 없는 동맹은 단독으로 선거 부정을 증명하는 데 한계를 느끼고 있다. 한편, 정부는 국제 사무국의 정치성 발언과 MOE EU의 선거 결과 승인 메시지만 국민에게 전달하고 있다. ADC는 지방단체장 선거 이후 선거들을 보이콧하기로 결정했다.

이로 인해 부룬디의 선거의 해는 불명예로 얼룩지게 됐다. 지난 6월 피에르 은쿠룬지자는 대선에 단독 출마해 재선됐고, 그의 당은 만장일치로 그의 당선을 비준했다.

국제 언론의 무관심을 틈타 부룬디 정부는 8월부터 가택수색과 체포를 남발하고 있다. 주요 표적이 된 인사들은 해외로 떠나고, FNL의 책임자 아가톤 르와사는 무장투쟁이 재개될 수 있다는 여운을 남긴 채 다시 지하로 숨어들었다. 실제로 지난 9월 국경선 부근에서 콩고민주공화국과 소규모 교전이 있었다. 이후 부룬디 정부는 군 강화를 구실로 매주 살인·공격·약탈을 자행하고 있고, 주민들은 이들의 보복을 두려워하고 있다. 부룬디의 불안정이 열약한 하위 행정구역에 예측불허의 결과를 미칠 수도 있지만, MOE EU는 무사태평처럼 보인다.

MOE EU는 투표소를 엄격하게 감시하는 대신 정치적 분위기를 칭찬했고, 지난 5월 28일까지만 해도 부룬디의 정치적 분위기가 ‘좋다’는 주관적인 평가를 내렸다. 그리고 이들은 정부·여당에 맞선 후보들이 줄사퇴를 하는데도 단일 후보가 출마한 선거의 감시 업무를 계속했다. 야당이 없는 국회의원 선거까지 말이다! 선거 때마다, 유럽의회 의원이자 투표감시단 책임자인 르나트 웨버는 엄숙한 기자회견을 통해 선거 주역들의 ‘훌륭한 작업 수행’을 칭찬했다. MOE EU가 10월 12일 브뤼셀에 제출한 최종 보고서는 초현실주의적 색채로 가득하다. 보고서는 “당이 하나로 기울고 다원주의가 후퇴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하면서도,(4) 정부·여당에 대한 조사 결과에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민주화에 앞장서야 할 유럽연합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역설적으로 선거 강령을 어겼지만, 부룬디 쪽에서 보면 이번 선거는 가까스로 평화를 가져온 합의를 깨지 않기 위해 정치인의 다년 임기를 보장한 무결점의 선거였을 뿐이다. 안타깝게도, 최근에 재개되는 폭동들은 유럽연합의 태도가 얼마나 무의미하고 근시안적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글•뱅상 뮈니에 Vincent Munié

번역•조은섭 chosub@ilemonde.com

<각주>
(1) ‘후투족 파워’는 1990년 르완다에서 출범한 인종 극우주의를 기치로 하는 단체다.
(2) 특정 당의 투표용지가 투표소에 제시간에 당도하지 않아 마지막 순간에 투표가 연기됐다.
(3) 2005년, 전 반군 지도자 피에르 은쿠룬지자가 대선에서 대승을 거뒀다.
(4) MOE EU의 부룬디 선거 최종 보고서, 웹사이트 www.eueom.eu 참조, pp.15~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