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길 포기 못해 하루씩 쌓은 기륭 1895일
[Corée 특집] 불안정 노동의 시대
병상에 누워 기륭전자 비정규직 투쟁 관련 글을 쓰는 오늘도 아침 7시께 문자 하나가 들어왔다.
‘[긴급] 오전 6시 GM대우 비정규직 해고자 2명 부평공장 정문 아치 위 무기한 고공농성 돌입! 대우차 정문으로 모이는 중. 연대 요망.’
아, 기어코 또 올라갔구나. 가난한 우린 언제쯤이나 굶거나, 어딘가에 매달리거나, 오르거나, 뛰어내리거나, 끌려가거나,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가슴이 서늘했다. 내 자신이 지난 10월 15일 기륭전자 비정규직 농성장을 지키다 기습적으로 밀고 들어온 용역과 경찰과 회사 쪽의 3자 연대에 맞서 침탈용 포클레인 붐대 위에 올라보기도 했기에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조금은 안다. 십수일째 고공농성을 하다 한순간 실수로 추락해 뼈를 다치고 병원에 누워 있는 신세다 보니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조금은 안다.
승리… 병상서 듣는 또 다른 싸움들
지난 11월 1일. 장장 1895일 만에 마침내 교섭되기 전까지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그렇게 싸워왔다. 본인들 표현대로 죽는 일 빼놓고는 다해야 했다. 병상에서라도 뭐라도 도와야겠기에 문자로 보내준 내용과 사진을 다시 알려줄 사람들에게 한참을 보내고 있었다. 다치거나 끌려가서 내려오지 말고 이번엔 부디 기륭 비정규직 동지들처럼 이겨서 내려올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해본다. 신경림 시인의 시 구절 중 ‘못난 놈들은 얼굴만 봐도 즐겁다’고 그간 기륭과 처지가 비슷한 GM대우 비정규직, 재능교육 비정규직, 얼마 전에 간신히 해결된 동희오토 비정규직 등 1천 일 이상 투쟁해온 동지들과는 한 식구들처럼 지내왔기에 더 가슴이 아프다. 따뜻한 봄이라도 오면 올라가지 이 추운 겨울에 어쩌자고 또 고공농성인지. GM대우 비정규직 동지들은 2006년 겨울에도 부평역 앞 30m 높이의 폐쇄회로텔레비전(CCTV) 카메라 탑에 올라 무려 100여 일을 버텼다. 당시 아무런 성과 없이 내려와서는 신경과 치료를 받고, 지금까지 무릎 관절 통증을 호소하기에 더 마음이 아프다. 그 외로운 망루를 다시 몇 년이 지난 지금 다시 올라야 하는 동지들의 아픔이 무얼까. 그것은 이 모진 세상에 대한 절망이자 분노일 것이다. 오르고 싶어서 오른 게 아니라 이 무정하고 고요한 세상이 다시 그들의 등을 떠밀었을 것이다.
또 얼마 전엔 울산 현대자동차 생산라인을 점거하고 대법원 판결에 따라 ‘직접고용 정규직화’에 나서라고 싸우는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투쟁 현장에서 한 동지가 분신을 결행했다는 뼈아픈 소식이 들려왔다. 다시 1천 일이 넘은 재능교육 비정규직 동지들이 서울시청 앞 본사와 전국의 재능교육 지부들을 돌며 집중 투쟁을 하니 ‘제발’ 연대를 부탁한다는 호소의 문자가 오기도 했다. 이렇게 1895일, 햇수로는 6년을 끌어온 기륭전자 비정규직 투쟁은 해결됐지만 890만 비정규 노예노동 현장에서는 제2, 제3, 제4의 기륭 동지들이 오늘도 싸우고 있고, 내일도 싸워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6년여의 싸움을 승리로 이끌어낸 기륭전자 비정규직에 대한 찬사와 박수를 넘어 오늘 다시 ‘제2의 기륭’이 되어 싸우는 이들에 대한 연대여야 할 것이다. 모든 이웃을 대신해 신자유주의 현대판 노예제도인 비정규직 철폐를 위해 싸우는 그들을 기억하고, 함께하는 일일 것이다.
죽는 일 빼곤 다 해본 사람들
그러려면 우린 기륭전자 비정규직 투쟁의 비참과 절망, 그러나 끝까지 ‘희망’이라는 실낱을 놓을 수 없었던 이들의 6년 세월을 기억해봐야 한다.
합의되고 나자 함께 싸움을 했던 우리도 놀랐다. 2008년 범사회적 전선을 형성하고 싸우던 때도 우리의 요구안은 ‘기륭전자가 50% 이상의 지분을 투자한 자회사로의 복직’안이었다. 그조차 무리한 안이라고 우리 운동 진영 내에서도 반대와 우려가 심했다. 그런데 모든 비정규직 투쟁의 목표인 ‘직접고용 정규직화’를 10여 년 비정규 투쟁 이래 처음으로 기륭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관철해낸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참 모진 세상이다. 사용자에게 직접 고용돼 일하는 형태는 십수년 전만 해도 일상적인 고용조건이었다. 이때는 임금이나 근로조건 등이 문제됐을 뿐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땅 890만 비정규직 노동자는 실제 일하는 현장의 원소유자에게 직접 고용돼 노예처럼 일하는 것, 그 자체가 절체절명의 생존권 요구가 돼버렸다. 합법화된 비정규직 확산법과 다름없는 ‘비정규직 보호법’에 따라 2년 이내에 언제든, 꼭 잘려야 하는 미래가 없는 ‘파리 목숨’이 되었다. 안정적으로 노동하고, 착취당할 권리(?)만이라도 가질 수 있다면 행복하겠다는 꿈이 과연 정상적인가. 전태일 열사 사후 40년이 지났건만 이 땅의 890만에 이르는 새로운 전태일들은 근로기준법 적용조차 받을 수 없는 처참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
이런 험악한 사회 속에서 기륭전자 비정규직 문제가 원칙적으로 해결됐다는 소식은 많은 이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전해줬다. 그간 비정규 체제가 들어서면서 수많은 ‘기륭’이 투쟁해왔지만, ‘직접고용 정규직화’를 명문화한 곳은 없었다. 이는 그간 싸워온 각 투쟁 주체들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제반 조건의 문제였다. 여느 비정규직이고 ‘죽음을 제외한’, 때론 ‘죽음까지 각오한’ 투쟁을 전개했지만 모두 완강한 자본과 비정규 체제의 벽 앞에서 좌절해야 했다.
안정되게 착취당할 권리조차 없는…
기륭 비정규직 투쟁은 함께하는 사람들에게조차 해결점이 묘연한 ‘안타까운 투쟁’이었다. 투쟁 동력은 그새 소진돼 10여 명뿐이었다. 이인섭 조합원을 빼고는 모두 여성이었고, 그 사이 가정을 꾸려 마지막 남은 8명 중에서 갓난아이를 안고 다녀야 하는 이가 둘이나 되었다. 여느 사업장처럼 기륭 비정규직은 법원으로부터도 철저히 외면당했다. 2005년 처음 노동조합을 설립하고 노동부로부터 회사 쪽의 명백한 불법파견 판정을 받고 기뻐했지만, 행정 당국이 내놓은 처방은 오히려 당시 일을 시키고 있던 파견노동자를 모두 쫓아내고 ‘진성 도급’을 하면 ‘합법’이 된다는 요령이었다. 그 ‘지침’에 따라 기륭 회사 쪽은 그간 노동자들을 데려다 쓰던 인신매매업체, 좋은 말로 하면 파견인력송출업체인 ‘휴먼닷컴’과 계약을 해지하고 6개에 이르는 합법 하청도급업체들을 끌어들이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졸지에 계약 해지, 곧 부당해고를 당한 150여 명의 여성노동자가 일하던 라인에 주저앉아 싸움을 시작한 게 기륭 비정규 투쟁의 시작이었다. 대법원까지 가서도 대한민국 법원은 회사 쪽 손을 들어주었다. 기륭전자 비정규직들은 ‘휴먼닷컴’ 노동자들로 기륭전자와는 무관하다는 판정이었다. 설상가상 그간 6년여 동안 기륭전자는 생산에는 별 관심이 없는 투기 세력들의 인수·합병(M&A) 대상이 되어 사주가 무려 4번이나 바뀌었다. 그때마다 기륭 비정규직은 힘겨운 고용승계 투쟁에 나서야 했다. 생산공장도 중국으로 이전해 복직을 시켜주려도 공장이 없다는 또 하나의 핑곗거리가 보태졌다. 이렇게 2중·3중·4중의 난관 탓에 기륭전자 비정규직 투쟁은 안타깝지만 고용은 고사하고 위로금 얼마라도 받으면 성공한 거라는 뒷얘기가 무성했다.
이런 내외의 난관을 뚫고 6년여 동안 싸워 원칙적인 승리를 일궈낸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시인 오철수는 1000일맞이 투쟁문화제 때 ‘1000일 거인들’이라는 시를 지어줬다. 우리 모두를 대신해 비정규 노동 체제에 균열을 내기 위해 싸우는 이들에게 예를 올리겠다며 시 낭송 전에 큰절을 올릴 때 모두들 코끝이 시큰했다.
물론 한때는 최저임금보다 10원 많은 64만1850원을 받던 ‘천덕꾸러기’ 노동자였다. 정규직이 보너스 700%를 받을 때 0%를 받던 ‘제로’ 노동자였다. 결혼과 출산 등으로 인한 비용 지출을 막기 위해 3개월·6개월짜리 단기 계약으로 일해야 했던 여성 파견노동자였다. ‘내일부터 나오지 마시오. 해고 사유는 잡담’이라는 문자 해고 통지를 받아야 했던 ‘쓰레기’ 노동자였다. 작업 물량이 줄었다고 특근하고 돌아가던 길에 20∼30명이 집단으로 계약 해지를 당하던 ‘일회용품’ 노동자였다. 납품 물량이 늘면 그다음 주에 다시 새로 파견당하는 ‘하루살이’ 노동자였다. 그런 그들이 6년이 지난 지금 우리 모두에게 희망을 전하는 전령으로 새롭게 거듭났다. 그들에게 어찌 고맙다는 말을 건네지 않을 수 있을까.
억울해서 시작… 갈수록 더 억울해져
어쩌다 보니 기륭전자 비정규직 동지들과 6년여 세월을 주변에서 함께 보내게 되었다. 2008년부터는 ‘불법파견 철폐와 기륭전자 비정규직 투쟁 승리를 위한 공동대책위’를 꾸리고 공동집행위원장을 맡았다. 그 과정에 필자는 두 차례나 국회의사당 내 한나라당 원내대표실 점거투쟁에 함께해 끌려나오기도 하고, 마지막 투쟁이던 올해 포클레인 고공농성에 함께하기도 했다. 포클레인 위에서 실족해 다리를 다쳐 지금까지 병원에 누워 있다. 기륭전자 투쟁 관련 재판 두 건이 진행 중이고, 수차례 소환장과 체포영장을 발부받았다.
개인적으로 기륭전자 비정규직 동지들과 함께한 것은 큰 기쁨이자 행운이었다. 늘상 입으로는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면서도 실제 현장에서는 함께하지 못했다는 반성에서 놓여날 수 있는 계기였고, 실제 현장 투쟁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알게 된 소중한 기회였다. 그중 몇 번의 눈물을 기억하는 것으로 이 글을 대신할까 한다.
기륭에서 흘린 다섯 번의 눈물
첫 번째 눈물은 2008년 5월 초순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였다. 그때 우리는 ‘하이 서울 페스티벌’ 폐막제 행사장에 위치한 20m짜리 조명탑을 점거하고 고공농성 중이었다. 우리는 이제 막 불붙은 광우병 촛불 항쟁과 비정규 투쟁의 연결을 희망했다. 또 비정규직 문제의 사회적 확산을 위해 서울시청을 압박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서울시민의 다수인 비정규직 문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축제나 여는 행태를 비판할 필요도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늘 단위사업장 내 해결을 넘어,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사회적 비판 여론 형성과 대응을 위해 힘써왔다. 당시에도 이제 막 시작된 광우병 투쟁이 밥상 위 광우병을 넘어 십수년 전 이미 우리 삶의 생태계에 침투한 ‘일터의 광우병’ 비정규직 문제로 확산되기를 소망했다. 그래서 아침 6시 전격적으로 ‘일터의 광우병, 비정규직 철폐하자’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시청 앞 점거농성에 돌입했다.
경찰과 용역들은 난감해했다. 저녁 7시부터는 수십억 원을 들였다는 폐막식 문화제를 해야 했고, 근처 청계광장에 대규모 촛불시위가 예정돼 있었다. 결국 난감해진 서울시청이 나서서 첫 교섭 약속이 잡혔고, 우린 자진 해산키로 했다. 하지만 거의 마무리될 즈음 무슨 까닭인지 경찰의 과잉 대응이 일어났다. 약속을 깨고 고공농성자들을 연행해 조사해야겠다는 것이었다. 우리도 예상하고 각오를 했던 일이라 어쩌면 당연한 절차였다. 현장에 나와 있던 상급단체 간부들도 그 정도로 타협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이었다. 경찰의 침탈 위협 앞에 불법집회 소지가 있다는 까닭으로 방송차량을 끌고 온 연대 단위 사람들도 마이크 잡기를 꺼렸다. 그때 기륭전자 동지들이 나서서 마이크를 잡았다. 요지는 ‘그럼 다 잡아가라’는 것이었다. 다 잡혀가겠다는 것이었다. 서울시청 담당과장과 급하게 불려나온 기륭전자 회사 쪽이 사인한 성실교섭 협약서를 손에 들고 있었다. 이것이 무엇이라고 여성 노조원들이 목숨 걸고 새벽에 철탑을 올라야 하는 현실이 서럽다고, 차라리 이깟 종이조각 찢어버리고 여기서 끝까지 결사항전하다 죽겠으니 알아서 하라는 최후 발언이었다. 철탑 아래에서 경찰과 몸싸움을 하던 사람들 모두가 그 울먹이는 결의에 숙연해지고, 덩달아 서럽고 감격스럽기도 해서 서로의 눈을 쳐다보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일회용품에서 희망의 전령으로
저물어가는 서울 한복판이었다. 가난한 여성 비정규노동자들이 목숨 걸고 고공농성 중인 조명탑 너머 무대에서는 리허설을 하느라 신나는 랩 음악들이 들려왔고, 조명탑 바로 뒤쪽엔 어린이용 텀블링이 깔려 있어 영문도 모르는 아이들이 하늘로 통통 튀어오르고 있었다. 난 이 기묘한 장면들에 적응되지 않았다. 그런 사회의 부조화가 더 서러워 한사코 눈물이 그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하기야 언제부터인가 ‘실감’이라는 게 사라진 사회 아닌가. 아이스크림을 빨아먹으면서 민간인들이 죽어가는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침공 동영상을 영화 보듯 즐기며 ‘야, 멋지다’ 하는 게 일상이 된 사회 아닌가.
두 번째 눈물은, 서울시청 앞 고공농성과 2차 구로역 광장 CCTV 카메라 탑 고공농성에 이어 10명 남은 조합원들이 집단으로 무기한 단식 농성에 들어간 지 50일째 되던 날이었다. 부슬부슬 늦은 봄비가 내리는 음울한 날이었다. 기륭 조합원들이 50일째 단식농성 중인 동료 조합원들에게 검은 관을 올리는 상징 투쟁을 결행하기로 한 날이었다. 이 전술과 관련해서는 내부에서 이견이 많았다. 지원 주체들 간에 고성이 오가고, 멱살잡이가 일어났다. 관을 올리는 것은 동지들에게 목숨을 걸라는 것인데 목숨을 담보로 투쟁할 수 없다는 이들과, 무엇보다 싸우는 주체들의 판단과 결의를 존중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격하게 대립했다. 자칫 잘못 나섰다가는 파렴치한으로 몰려 정치적 생명이 매장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수많은 지원 주체가 있었지만 누구도 그 투쟁을 책임질 수 없었다. 당일 비를 맞으며 아래에 있던 여성조합원들이 끙끙거리며 검은 관을 들어 올리고, 그 관을 50일째 단식 중인 김소연 분회장과 유흥희 조합원이 바짝 마른 몸으로 끌어 올리는 광경을 우리 모두는 무책임하게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막내 조합원 최은미가 흐느끼며 읽는 ‘관을 올리며’라는 결의문은 왜 그리 비장하던지, 이런 투쟁 주체들 앞에서 나는, 우리는 뜨거운 눈물이 치솟아 앞을 볼 수 없었다.
스스로 자기 관을 나르다
기륭 비정규직 동지들은 무척이나 외로운 투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수도 얼마 되지 않는 중소사업장의 문제이니 상급 단체들에서도 미안하지만 별 관심이 없었다. 대법에서 지고, 공장도 이전했고, 사주도 4번이나 바뀌었는데 무슨 싸움이냐는 내부의 패배감과 고립감에 시달려야 했다. 무슨 일을 해보려 해도 어느새 관료화된 노동조합운동은 절차와 지침을 따르라는 은근한 압력을 가했다. 힘있는 운동권 내 정파 구조에라도 편입돼 있으면 좋으련만 그마저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모든 걸 내부의 결의와 투쟁력으로 돌파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결의문의 내용은 이러했다.
“우리는 오늘 동지들의 목숨을 이 관에 담기 위해 이 관을 올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현대판 노예제도인 비정규직 제도를 이 관에 담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 관에 모든 노동자 민중을 죽이는 신자유주의를 담아 장례 지내고 싶습니다. 우리의 투쟁을 도와주십시오.”
세 번째 눈물은 전교조 서울남부지회 조남규 선생의 고백을 들으면서였다. 그도 기륭 투쟁과 함께했던 수많은 이들처럼 헌신적이고 열정적이었으면서, 더불어 순박한 사람이었다. 학교 출근 전에 농성장에 들렀다가, 점심때면 다시 농성장에 들러 컵라면으로 점심을 때우며 현장에 연대하던 이였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서 두 통의 부음 전화를 받게 되었다. 한 통은 기륭분회 조합원으로 함께 싸우다 초기에 암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이던 권명희 조합원이 운명했다는 전화였다. 또 한 통은 담임을 맡고 있던 반 학생 어머니가 운명하셨다는 전갈이었다. 평소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아이들로부터도 왕따를 당해서 두어 달 학교를 쉬게 한 기석이의 어머니였다. 공교롭게도 두 분의 빈소가 부천 순천향병원으로 같았다. 참 희한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근무가 끝난 뒤 빈소를 찾았는데, 이럴 수가 기륭분회 권명희 조합원의 아들이 자신이 담임을 맡고 있는 기석이었던 것이다.
평소 참교육을 얘기하며 최선을 다해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경우를 당하고 나니 뭐라 말할 수 없는 슬픔과 아픔이 몰려왔다며, 그가 발언하다 말을 잇지 못하고 하늘을 쳐다볼 때 나도 몰르게 뭉클함에 죄지은 이처럼 눈물이 치솟았다. 우리에겐 얼마나 더 많은 반성과 돌이킴이 필요한가, 라는 아픔이 몰려왔다. 가난한 집안의 여성으로 태어나 중졸 학력으로 평생을 노동자로 일하다 마침내 도달한 게 최저임금보다 10원 많은 64만원짜리 파견직 비정규 노동자였던 권명희 조합원. 그 아들로 태어나 어머니가 암 투병 중이라는 말도 꺼내지 못하고 늘 그늘진 모습으로 왕따를 당해야 했던 그 아들 기석이. 그리고 고아원에서 자란 자신을 남편으로 받아준 권명희 조합원을 잃고 나니 이제 누구에게 기대야 하는지 다시 외로워졌다며 순박하게 울먹이던 그 남편. 남편되는 분은 지금도 야간에 택시기사 일을 하며 새벽에 꼭 기륭 농성장 앞 커피자판기에 들러 커피 한잔을 뽑아먹으며 우리를 격려하고 가곤 한다. 그렇게 만난 우리는 이제 매년 꼭 한 번씩 마석 모란공원엘 함께 간다. 권명희 조합원 기일이다. 비정규직 문제의 참혹함은 사실 멀리에 있지 않다. 누구나 숨죽이며 살아서 그렇지, 우리 주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우리는 그 신음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네 번째 눈물은 그 지랄맞은 놈 때문이다. 김천석이라고 구로공단 운동과 기륭 공대위를 함께한 후배 놈이다. 2008년 시민사회, 종교, 문화예술, 정치권 등 광범위한 곳의 이들이 함께하고도 기륭 투쟁을 마무리짓지 못하고 철탑 망루 투쟁을 끝으로 다시 기륭 투쟁은 일상 투쟁과 소강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 과정에서 성과도 적잖았지만 실의와 좌절감도 많았다.
그 사이 2009년 1월 20일 용산에서 공권력의 무분별한 점거 작전 과정에서 다섯 분에 이르는 철거민 학살이 일어났다. 당시 비정규 운동을 하던 우리에게 용산 학살과 비정규직 일상 학살은 동일한 문제였다. 모두 자본의 초과이윤 확대를 위한 과정에서 일터에서 함부로 쫓겨나거나, 삶터에서 어느 날 갑자기 도려내지는 것이었다. 마침 전국철거민연합은 2008년 기륭 비정규 투쟁의 성과 중 하나이기도 하던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네트워크에 가입한 단체였다. 우리는 생각할 필요도 없이 용산 범국민대책위 구성과 활동에 전면적으로 결합해 들어갔다. 그렇게 용산 학살 현장에서 살던 4월 18일,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마흔까지 싸우다 목숨 끊은 후배
“형, 천석이 형이 죽었대요.”
누구보다 기륭 투쟁에 열심이던 친구였다. 가난한 영상 활동가였지만, 술만 한잔 걸치면 마흔이 넘으면 모두 개량화돼 혁명의 적이 되니 다 죽어야 한다고 독설을 하던 놈이었다. 기륭 투쟁을 넘어 연대 투쟁으로 나가자고 당시 투쟁 중이던 뉴코아·이랜드 현장의 하나였던 시흥 홈에버까지를 묶어 시흥역 앞에서 매주 두 차례씩 비정규0 철폐 거리문화제를 주도해서 열던 놈이다. 상층에서 관료가 다 된 사람들 욕하면 뭐하냐고 지역 현장에서 열심히 하면 됐지 하며 결기가 있던 친구였다. 그런데 그가 학생운동을 마치고 곧바로 와 청춘을 다 바친 구로공단의 철길 옆 담벼락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채 발견됐다. 딱 저가 마흔이 되던 해였다. 얄밉게도 그 흔한 유언장 하나 남기지 않았다. 빈소가 차려진 구로 고대병원에 도착하던 순간부터 마석 모란공원의 차가운 납골당에 그를 두고 올 때까지 시도 때도 없이 수도꼭지처럼 눈물이 흘렀다. 내가, 우리가 그를 죽인 건지도 모른다고. 2008년 그때 만약 기륭 투쟁이 승리했다면 그렇게 천석이가 혼자 죽어가지는 않았을 거라며 모두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기륭 분회원들과 그 연대 단위들이 어떻게 그렇게 똘똘 뭉쳐 한마음으로 전투적으로 싸울 수 있었느냐고? 우리 모두에겐 잊을 수 없는 얼굴들이 있었고, 그들 안타까운 죽음의 한을 풀어주어야 할 공통의 소망이 있었다. 기륭 투쟁을 승리로 이끈 며칠 뒤 기륭 분회원들이 마석 모란공원으로 두 벗을 만나고 왔다 했다. 나는 다시 병상에 누워 눈물이 흘렀다. ‘천석아, 이제 조금은 마음을 풀고, 편안하길.’
마지막 눈물은 2010년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싸우던 얼마 전이었다. 우리는 기륭 비정규직 문제 해결 없는 어떤 부지 개발도 안 된다고 옛 회사터 개발을 막는 강경 입장이었다. 자연스레 다시 마찰이 일상화됐다. 8월 초 첫 번째 공사 강행이 있었을 때 다시 조합원 2명이 경비실 옥상 점거농성에 돌입했다. 두 번째 공사 강행 때는 필자와 4명의 연대 단위가 포클레인 1차 점거농성에 돌입했다.
투쟁 과정에서 교섭 타결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다. 지난 10월 10일께 비공개 실무 교섭에서 거의 타결에 이르렀다. 조인식을 금천구청에서 갖기로 구체적으로 협의도 했다.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마지막 날 회사 쪽에서 일방적으로 결렬 통보와 함께 강경 대응 입장을 전해왔다. 짐작한 바, 이명박 정부에서 내놓은 ‘국가고용전략 2020’이 담은 내용이 구체적으로는 파견업종 확대를 통한 비정규직 확산인데, 파견 비정규 노동 문제의 첫 싸움이자 상징인 기륭에서 ‘직접고용 정규직화’ 합의가 나올 경우 물의가 따른다는 윗선의 판단 아니겠느냐는 것이었다. 들려오는 풍문으로는 투쟁 중인 기륭, 동희오토 비정규직과 구미 KEC 노동자들의 투쟁을 주요 20개국(G20) 서울 정상회의 전에 물리적으로라도 정리시키라는 기조였다고 한다.
이렇게 타협할 순 없다
어쨌든 일방적으로 합의를 깨고 난 이틀 뒤, 그러니까 10월 15일 아침 전격적으로 경찰과 용역, 회사 쪽의 3자 연대에 기반한 공사 강행 및 농성 현장 침탈이 있었다. 그러나 이미 모든 것을 각오한 우리의 기세 역시 작지 않았다. 이미 8월 초 포클레인 점거 건으로 체포영장 발부가 임박한 나와 김소연 분회장은 구속을 결의하고, 2차 포클레인 점거농성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제2의 용산’을 만들어보자는 결의였다. 점거 다음날인 10월 16일엔 소방차와 사다리차, 앰뷸런스 등을 대동하고 강제 진압이 시작됐다. 당시 아래에서는 그러면 안 된다고 오히려 동지들이 울고 불며 죽기를 각오한 나와 김소연 분회장을 만류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우린 고작 스무 명 안팎이었지만 그런 모두의 절규가 경찰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가 보다. 꼭 이렇게 해야 하는지 생각하며 감은 내 두 눈 사이로 뜨거운 회한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나는 경찰들이 물러서기 전까지는 단 한 번도 눈을 뜰 수 없었다.
그런 다음날 어쩔 수 없이 물러났던 경찰의 최후 통첩 시간이 다가왔다. 내용은 ‘직접고용 정규직화’를 포기하고 2008년 교섭안인 ‘자회사로의 복직안’을 받아 교섭에 나서고, 자진해서 농성을 해제하라는 엄포였다. 그날 저녁 두 차례의 조합원 회의가 열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연대 단위들은 모든 중요한 판단은 비정규 주체들의 결정에 따른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무언의 압력조차 없을 수 없었다. 모두가 아쉽더라도 그 정도에서 투쟁을 마무리했으면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조합원들의 결정을 기다리며 모두의 마음이 쓸쓸했다. 이렇게 정리되고 마는가, 누구나 착잡했다.
조합원 회의가 끝나고 마지막일지 모르는 기륭 공대위 회의가 포클레인 위 좁은 텐트 안에서 열렸다. 십수명이 모였지만 비좁다는 사람 하나, 숨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그런데 의외의 결정이 전해졌다. 요지는 모두가 감옥으로 끌려가 6년여에 걸친 기륭 투쟁을 끝내더라도 이렇게 굴욕적으로 투쟁을 마무리할 수는 없다는 조합원들의 굳은 결의였다. 송경동·김소연이 끌려가면 2차, 3차, 4차로 우리가 끝까지 다시 싸울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교섭을 통해 어느 정도 보장받을 수 있는 투쟁 기간의 임금 등도 모두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너무도 의외의 결정이었기에 모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근래 노동운동이나 사회운동 과정에서 이런 ‘사람의 말’을 들어본 적이 있었던가. 눈물겨운 결정을 들어본 적이 있었던가. 그 말을 전하는 김소연 분회장도 울먹이고, 모두의 눈이 붉어지고 가슴이 뭉클해졌다. 눈물조차 함부로 흘릴 수 없었다.
회의는 간단히 끝났다. 더 이상 할 말이 필요 없었다. 그런 투쟁 주체들을 우리가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양심이 남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모든 힘을 집중한다. 결사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질 수 없다. 모두 열심히 하자. 회의 마치자. 그것이 그날 회의의 전부였다.
물론 이외에도 기륭 비정규 투쟁이 공식적으로 우리에게 남겨준 성과와 짚어보아야 할 많은 대목이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2008년 광우병 촛불시민들과 비정규직 투쟁의 연대를 일궈낸 점, 투쟁의 사회화를 위해 기륭 공대위를 확장해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사회운동 네트워크를 만들어내고 강화하기 위해 헌신해온 점, 금속노조 내부 비정규 노동자 주체들의 상호 단결을 위한 ‘금속 비정규 투쟁본부’ 강화에 앞장서온 점, 미술·음악·문학·사진 등 문화운동 및 종교계 등과 비정규 운동의 연대운동 확산에 최선을 다하고 여러 성과를 남긴 점 등 사회연대적 측면이 그 하나일 것이다.
내부적으로는 단위사업장과 투쟁을 넘어 대추리, 이라크 파병,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용산 철거민 학살 등 거의 모든 사회연대 투쟁 현장에 연대해온 기륭 비정규직들의 정신이 기억돼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1895일 특별한 날을 빼고는 회사 정문 앞 출근 투쟁을 지속해온 성실함에도 혀를 내두르게 된다. 저들만의 법을 넘어 우리의 요구를 관철하려면 투쟁하는 수밖에 없다는 값진 교훈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도 비정규직 철폐를 위한 사회연대 투쟁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기륭 비정규 노동자들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어쩌면 이제 다시 새로운 국면으로 출발이라는 점이 기억돼야 한다.
돌아보면 경이와 환희의 시간
내가 흘린 몇 번의 눈물을 고백한 것처럼 그 모든 과정이 너무나도 인간적인 과정이라는 것이 잊혀지지 않았으면 한다. 기륭 농성장은 대추리가 그랬듯, 용산의 참혹한 현장이 그랬듯, 지금 다시 홍익대 앞 두리반과 오늘 다시 재능교육 본사 앞과 인천 부평 GM대우 정문 앞이 그렇듯,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희망과 사회적 연대의 기쁨을 선사해 주던 작은 코뮌이었다. 우리는 기륭 농성장에서 못다 흘린 아픔과 절망의 눈물도 기억해야겠지만, 그곳에서 우리가 만끽했던 생의 경이와 환희 역시 잊지 못할 것이다.
글•송경동
2001년 <내일을 여는 작가>와 <실천문학>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꿀잠>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