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위에 몰린 국제사회의 성난 눈

[Corée]

2010-12-03     홍성수/숙명여대 교수·법학

이명박 대통령 취임 이후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는 한순간도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정권이 출범하기도 전에 대통령직 인수위는 인권위를 대통령 직속기구로 만들려고 했다. 국내외 인권단체와 국제사회의 강력한 항의로 좌절되긴 했지만, 이것은 비극의 서막에 불과했다. 정부는 눈엣가시 같은 인권위 조직을 21%나 강제로 축소하는 조치를 감행했고, 결국 안경환 당시 인권위원장은 “수치스럽기 짝이 없는 일들을 국제사회에서 변론할 자신과 면목이 없다”, “정권은 짧고 인권은 영원하다”는 말을 남기고 인권위를 떠났다.

‘성공 사례’에서 ‘몰락 사례’로

안경환 위원장이 사퇴하자, 청와대는 기다렸다는 듯이 현병철 교수를 새 인권위원장으로 임명한다. 그는 스스로 인권 현장을 잘 모른다고 고백한 인물이었고, 잘못된 인선 결과는 참혹했다. 현병철 위원장은 정권을 불편하게 만드는 일을 만들지 않으려고 인권위를 파행으로 몰고 가, 결국 이에 항의해 문경란·유남영·조국 인권위원이 줄줄이 사퇴했다. 그 여파는 전직 인권위원과 19명의 전직 인권위 직원들의 항의성명, 61명의 인권위 전문·자문·상담위원의 사퇴, 600여 개 시민단체의 사퇴 촉구 성명, 300여 명의 법학자·변호사의 사퇴 촉구 성명으로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정부·여당은 또 한 번 자격이 심히 의심되는 인물들을 인권위 상임위원에 임명·추천해 문제 해결의 의지가 전혀 없음을 만천하에 과시했다.

고도성장에 남다른 재주를 가진 우리나라는 불과 몇 년 만에 인권위를 세계적 수준으로 발전시켜 세계의 부러움을 산 바 있다. 이제 인권위는 또 한 번 국제 인권공동체의 관심을 끌고 있다. 한 번은 놀라운 ‘성공 사례’로, 또 한 번은 무서운 속도로 퇴행한 ‘몰락 사례’로 말이다.

이명박 정부의 인권 콤플렉스?

도무지 이해조차 하기 힘든 정부·여당의 태도에 대해, 대체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이명박 정부가 인권과 인권위에 무지하다는 것이다. 현 정부 출범 이후 ‘인권’이 어느 순간 ‘금칙어’가 되어버렸고, 현병철 위원장을 임명함으로써 떼놓은 당상이던 ‘국가인권기구 국제조정위원회’(ICC)의 3년 임기 의장국 자리를 포기하는 걸 보면, 충분히 설득력 있는 가설이다.

다른 한편, 고도의 정치적 판단에 따른 전략적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 엄연한 국가기구가 ‘딴 목소리’를 내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시대착오적인 고집과, 지지 기반인 보수세력의 입장에 대한 고려가 빚어낸 불가피한 전략적 선택이라는 것이다. 이로 인한 국내외 시민사회의 반발에 모르쇠로 일관하고, 국제사회에서의 이미지 손상은 기꺼이 감수하면서 정면 돌파하는 것이 정치적 이해타산에서 이익이라는 것이다. 최근 청와대와 여당이 임명·추천한 두 상임위원의 면면을 보면 이런 해석에 무게가 실린다.

이명박 정부의 인권에 대한 태도를 보면 인권에 어떤 콤플렉스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든다. 아무런 강제력 없는 연성기구인 인권위를 집요하게 괴롭히는 게 이해가 안 돼서 하는 이야기다. 작금의 사태가 ‘무지’이든 ‘오판’이든, 두 가지 지점이 문제의 진원지로 파악된다. 하나는 국제 행위자로서 인권위의 지위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권 거버넌스에서 인권위의 역할에 대한 것이다.

‘국제 행위자’로서 인권위

인권위는 그 나라의 국가법에 의해 설립되는 국가기구이지만, 다른 한편 ‘준국제기구’의 성격이 있다. 1948년 ‘세계인권선언’ 이후 세계는 인권에 대한 높은 수준의 ‘합의’를 이루는 데 성공했지만, 개별 국가에서 이행 성과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했다. 많은 나라들이 ‘립서비스’로 인권을 말하면서도 정작 자국 내에서는 국가안전 보장, 경제발전, 공공이익, 심지어 정권의 정파적 이해를 위해 인권의 이행을 슬그머니 뒤로 미루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 문제를 타개하기 위한 유엔의 묘안은 바로 각국에 ‘국가인권기구’(National Human Rights Institutions)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유엔은 1990년대 이후 각 나라에 국가인권기구의 설립을 적극 권고했고, 그 결과 지금은 90여 개국에 어떤 형태로든 국가인권기구가 설립돼 있다.

국가인권기구가 국제인권규범을 국내에서 이행하는 기능을 한다는 점에서, 국가인권기구는 ‘인권 분야에서 유엔의 활동을 위한 대리인’ 또는 ‘유엔의 위성’이라고 불린다. 각국의 국가인권기구들은 유엔 인권이사회 회의에서 발언 자격이 있고, ICC, ‘아시아-태평양 국가인권기구포럼’(APF), ‘아시아 시민사회단체 국가인권기구 네트워크’(ANNI) 등 국가인권기구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이것은 국가인권기구가 국가기구인 동시에 국제 인권공동체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국제 행위자’(Global Actor)임을 잘 보여준다.

국제 행위자로서 인권위가 한 나라의 정권에 의해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면 자연스레 세계 인권공동체의 강력한 항의에 직면하게 된다. 이미 인권위는 어떤 개별 국가가 함부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국제적 위상을 지녔기 때문이다. 더욱이 한국의 인권위는 한때 세계적인 부러움을 사던 모범 사례였다. 하루아침에 ‘모범생’에서 ‘문제아’로 전락한 한국의 인권위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졸지에 국제사회의 쏟아지는 비난에 노심초사해야 하는 신세로 전락한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인권 거버넌스’의 핵심인 인권위

행정부·사법부·의회 등 모든 국가기구의 목표는 인권의 보호와 증진이다. 하지만 국가기구는 본성상 잠재적 인권침해자일 수밖에 없다. 어떤 경우에는 의도적으로 인권을 후순위로 미루고, 또 어떤 경우에는 본의 아니게 인권의 중요성을 잠시 망각한다. 그래서 언제나 ‘인권’을 기준으로 사태를 판단하고, 그에 따라 다른 국가기구를 감시·견제하는 독립적 국가기구가 필요한 것이다. 인권위의 역할이 중립적이라기보다는 ‘인권 편향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예컨대 국가보안법, 양심적 병역거부, 공무원·교사의 정치활동, G20 경호특별법, 집회와 시위의 자유 등 주요 인권 관련 쟁점에 대해 국가기구는 아무래도 국가안보나 공공안전 등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인권은 뒷전으로 밀려나기 마련이다. 이때 인권의 중요성을 상기시키고 국가기관에 권고하는 기관이 바로 인권위다. 정부는 정책을 세우고, 인권위는 그 정책이 인권을 침해할 수 있음을 경고하고, 국가기관은 이 경고를 존중해 정책을 다시 수정하고, 인권위가 다시 의견을 내는 등 일련의 과정을 통해 최종적으로 정부 정책이 확정되는 것이다.

인권위의 이런 역할을 사회과학에서는 ‘인권 거버넌스’(Human Rights Governance) 차원에서 이해하기도 한다. 고전적 통치 형태에서는 인권 보호의 책임이 정부나 사법부 등 국가기구에 전가됐지만, 인권 거버넌스에서는 국제기구·국가·사법부·시민사회·인권위가 인권보장을 위해 서로 협력한다. 국가나 사법부는 강제적 집행력을 가졌지만 인권에 충분히 민감하지 못하고, 시민사회는 인권문제에 가장 민감할 수 있지만 정책에 영향력을 미치기에는 비공식적이고 파편적이다. 인권위는 국가기구로서 권위와 조직적 안정성을 지녔으면서도, 한편으론 다른 관료조직에 비해 유연하고 탈권위적인 ‘반관반민’ 기구의 성격이 있다. 이런 다면적 특성 때문에 인권위는 인권 거버넌스가 원활하게 작동하도록 하는 ‘촉진자’ 역할을 맡는다. 국가와 시민사회 사이의 간극이 인권위를 통해 좁혀지고, 이 과정에서 정부와 민간이 협력해 인권을 보장하는 인권 거버넌스가 창출되는 것이다.

혹자의 눈에는 인권 거버넌스가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인권위의 활동이 불필요한 갈등을 조장하는 것처럼 비칠 수도 있다. 정부 입장에서는 야당이나 시민사회를 상대하기도 골치 아픈데, ‘국가기구’인 인권위까지 나서서 정부 정책에 사사건건 시비를 건다는 게 영 못마땅할 것이다. 인사권을 쥔 상황에서 인권위마저 ‘자기 편’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이 드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럼에도 인권위 하나 정도는 독립적 활동을 보장하고, 비판과 감시를 기꺼이 수용하는 지혜가 요구된다. 이렇게 인권옹호 시스템, 인권감시 시스템을 겹겹으로 구축해놓는 우리가 치러야 할 당연한 비용이라고 생각하는 여유가 필요하다. 지혜도 여유도 없다면, 그냥 다른 나라 흉내라도 내면 된다. 인권위의 독립성을 보장하고 국가 거버넌스의 핵심으로 기꺼이 수용하는 것은 이미 세계적 표준이다.

정부의 버티기, 어디까지 갈 것인가?

여하튼 아직까지 정부·여당은 문제의 심각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듯하다. 그것이 무지의 발로이든 전략적 선택의 결과이든,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인권과 인권위가 이런 대접을 받고 있다는 건 분명 비극이다.

다행히 문제의 해법은 비교적 간단하다. 현병철 인권위원장은 모든 문제의 책임을 지고 사퇴하고, 정부·여당은 국가인권위법 제5조에서 규정한 대로 “인권문제에 관하여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있고 인권의 보장과 향상을 위한 업무를 공정하고 독립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고 인정되는 자”를 인권위원에 임명해야 한다. 보수 인사냐 진보 인사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인권위가 국제사회의 일원임을 인식하고, 인권 거버넌스에서 인권위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인정하는 인사라면 보수든 진보든 마다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최근 임명된 상임위원 두 명의 면면을 보면, 정부·여당은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전혀 없는 것 같다. 아무리 너그럽게 생각해도, 인권의 반대 쪽 가치를 옹호하는 활동을 해온 사람들이 인권위원이 될 수는 없다. 정부·여당이 수많은 항의의 목소리를 귓등으로 들었거나 아예 의도적으로 무시한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동안 쉼없이 발전해온 국내 시민사회와 국제 인권공동체의 영향력은 그리 만만한 수준이 아니다. 다만, 그 항의 수준이 정부·여당의 ‘버티기’를 넘어설 수 있는 ‘임계점’이 정치·사회적 환경에 따라 다소 유동적일 뿐이다. 정부·여당이 버틸 때까지 버틴다면, 결과는 최악의 상황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 정권의 정치적 정당성은 심각하게 훼손되고, 인권위는 인권위대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우리가 한 정치세력의 명운까지 걱정해야 할 만큼 한가롭지는 않지만, 민주주의와 인권의 중요한 성과인 인권위의 ‘몰락’을 지켜보는 것은 너무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지금도 인권시민단체들의 인권위 점거 농성은 계속되고 있고, 국내의 조직적 항의는 국경을 넘어 지구촌으로 확산되고 있지만, 정부·여당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다. 그런 가운데 인권위를 되살릴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의 불씨마저 점점 꺼져가고 있다.

글•홍성수
영국 런던정경대(LSE)에서 국가인권기구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법철학, 법사회학, 인권 등을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