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역사는 고요히 흐른 적이 없다

2010-12-03     파블로 장상

 과학은 사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일례로 현재 생명공학 논쟁을 들 수 있다. 생물학자들은 뜨거운 두 논쟁 사이에 끼어 있다. 둘 다 이들이 상아탑 안에 갇혀 ‘기초’ 연구에 몰두한다고 비판한다. 한편에서는 경제권력이 응용을 목적으로 하는 연구를 중심으로 연구비 일부를 지원하며 비밀유지와 특허출원을 요구하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오랫동안 수동적 관망자 입장이던 대중이 그 역할을 거부한 채 일부 과학적 무지, 예를 들어 들판 한가운데에 있는 유전자변형농작물(GMO)의 영향에 대한 과학자들의 무지에 반기를 들고 있다. 과학계는 이런 모순 속에 갇힌 채 고리타분한 순수과학의 이상만을 탓하며 “경제적·사회적 차원의 문제점”(1)을 외면하고 있다.

순수과학은 없다, 사회적 과학일 뿐

미국의 과학사학자 토머스 쿤(2)과 러시아 태생의 프랑스 과학철학자 알렉상드르 코이레가 야심차게 시작한 과학사회사 연구는 최근 몇 년 사이 이런 문제의 접근법을 확 뜯어고쳐, 사회에 더 광범위하게 과학의 자리를 내주는 방식을 채택했다. 우선 이런 과학사회사 연구들은 ‘과학혁명’, 특히 반계몽적 교회에 맞선 이성의 승리로 종종 소개되는 현대과학의 기원에 주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예를 들어 아이작 뉴턴처럼 대부분 독실한 신자던 과학자들은 “물리학의 도움으로 자연법칙을 발견한다는 것은, 형용할 수 없는 지혜로운 신의 섭리가 만들어낸 작품을 발견하는 것이며, 세상의 배열이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것”이라고 여겼다.(3)

우리는 과학혁명의 원천을 갑작스러운 계몽주의 출현에서보다는 예전 지배계층의 쇠락, 즉 인쇄술의 발달로 지식이 대량 보급되며 생긴 현상과 아메리카 대륙 발견의 자극에서 찾아야 한다. 그래서 신과학은 자연을 불가사의한 원칙에 의해 지배받는 경이로운 것으로 보는 개념을 버리고, 마치 거대한 기계처럼 여기게 된다. 이 기계가 수학적 언어로 번역이 가능한 규칙적이면서도 절대적인 법칙을 따랐고, 또 이런 법칙들의 노하우가 과학적 예측을 가능하게 해 이성적 행동의 토대가 됐다. 하지만 이후에도 자연을 경이롭게 여기는 시각은 오랫동안 지속됐다. 그것은 이성적 행동이 재료의 혼합 법칙, 물체의 낙하 법칙, 조수간만의 법칙만큼이나 흔한 현상들조차 설명하지 못한다는 일종의 신앙심 때문이었다.(4)

기술과 종교에서 동시에 영감을 얻은 기계론은 식민지 팽창 및 제1차 산업혁명이 자리를 잡아가던 시점과 때를 같이해, 세상을 컨트롤하는 데 효과적인 지식을 구축하도록 도움을 줬다. 과학과 기술의 세계, 그리고 경제나 정치권은 심하게 뒤얽혀 있어 과학은 국가의 통제 기능과 생산 활동, 그리고 군사작전에 기여하게 됐다. 경험적 연구들은 과학의 발전이 피렌체 공작(학문과 예술을 후원해 르세상스기를 여는데 크게 기여했던 코시모 메티치)에서부터 국제 저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권력과 연관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5)

몇몇 사례는 일반적 학자의 숭고한 이미지, 스스로 성찰하고 모든 배경에서 자유로운 것이 학자(Savant)라는 이미지를 깨는 데 도움을 줬다. 학자가 편입된 자유의 공간이란 갈릴레오가 섰던 법정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갈릴레오는 법정에서 사회적·문화적인 새로운 역할, 즉 토스카나 대공의 전속 수학·철학자로서 그때까지 수용되던 (학문의) 위계질서(아리스토텔레스대학에서 수학자의 봉급은 철학자 봉급의 7분 1밖에 안 됐다)를 뒤흔들고 수학의 사용을 정당화했다. 군대가 운영하는 전후 미국의 과학연구기관인 ‘랜드’(Rand Corporation)의 물리·수학·공학·경제학자들은 상호협력을 통해 현대 경제수학을 정립하고 합리적 시장에 대한 맹목적인 신앙심을 정착시키는 데 혈안이 돼 있다. 영국 과학잡지 <네이처>의 편집자들은 동료 과학자들이 기사를 점검하기도 전에 미리 ‘좋은’ 기사를 선택해 자신의 위엄을 통해 세계 수준의 과학정책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긴장, 놀라움, 그리고 우여곡절

   
 
과학의 발달은 어느 한곳에서 일관성 있게 착수한 계획의 산물이 아니라, 지식 생산자는 물론이고 한시적·정신적 힘에 영향을 받는 전 지구적 변화의 산물이 되어버렸다. 당사자들마다 이익을 추구하며 주위의 변화를 활용하려 든다. 과학의 역사는 지질학적인 무수한 관계가 만들어낸 물줄기 흐름의 역사와 흡사해, 사고·장애물·우회가 많다. 이런 시각은 자연의 점진적 발견을 마치 과학의 발전처럼 묘사하던 상투적인 과학의 역사가 제공하던 시각과는 판이하게 다르다.(6) 이는 마치 강이 발원지에서 하구로 흘러가며 자신의 흐름을 발견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옛날 하구 쪽에 있는 루아르강이 미래에 파리가 될 상류 지역에 물을 댔다는 말만큼이나 황당한 얘기다. 현실적인 과학의 역사는 긴장감·놀라움·우여곡절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때론 과학사회사 연구와 이 연구들의 정치적 결과가 가십거리로 비난을 받는다. 이런 연구는 과학의 핵심으로 간주될 수 있는 원자나 미생물의 발견 등을 건드리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논란에 여러 답변이 가능하다. 첫 번째 답변은, 실질적인 과학실험의 목적은 단순히 세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실험실의 도움을 받아 인공적인 테크노의 세계를 만들어 그곳에서 자신의 개념을 작동하는 데 있다. 현재의 이런 지배적인 경향은 현대과학 초기 때부터 생겼다. 갈릴레오가 마찰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세계 속에서의 운동 연구에 주목하자, 아리스토텔레스 추종자들은 물리학은 “가상 세계가 아닌 실제 세계를 다뤄야 하며, 가상 세계는 수학자들에게 더 잘 어울린다”고 반발했다. 두 번째 답변은, ‘발견’ 개념은 순수하다는 것이다. 발견 개념은 이미 잘 구축된 현상에서는 성과를 내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현실을 놓치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것들이 현실과 우리의 지식장치들을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몸으로 뒤섞어버리기 일쑤인데다, 우리의 지식장치들조차 자신을 출현시킨 사회와 관련 있기 때문이다. 이런 한계를 인정하는 것은, 마치 위에서 거론한 세 요소(긴장감·놀라움·우여곡절)의 조합을 진정한 과학현상으로 인정하는 셈이다. 파스퇴르가 발견한 미생물이 우리 시대의 것이 아닌 것도 그래서다. 오늘날 그것은 다른 기계장치와 다른 이론들을 거치면서 더욱 분화돼, 일부는 바이러스로 분류된다.

원자는 현대 실험실이 재료를 정화해 만들어낸 물질이라는 시각이 강하다. 그렇다고 이런 본질(원자)이 환상이라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물론 이것이 환상이라고 섣부르게 발표한 이론가들도 있었다. 환상은 실험실에서 잘 작동되고 과학적 ‘현상’을 구축하는 데 필수 요소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과학적 현상의 특징들은 자신의 현실을 절대로 드러내지 않는 데 있다. 요컨대 본질들이 스스로 말은 하지만, 이들은 절대로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털어놓지 않는다.

민주적 정치 토론장으로 나와야

30여 년 전부터 성장한 이런 연구들은 연구원들의 일상적 활동을 추적하고, 또 이들이 사물과 각양각색의 사회·정치 세계에서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을 지켜보며 과학은 ‘하나의’ 세계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기계·자연사물이 함께 살아가는 복수의 세계를 건설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한편 순수과학은 절대로 이런 상태, 즉 모든 것인 뒤섞인 상태로 오래 머물러 있지 못한다. 과학자들이 19세기, 정확히 말해 자신들이 사회경제학에 개입을 강화하던 시점에(7) 중립적 지식(순수과학)의 이상, 즉 여타 사회적 세계로부터 자율적 지식이란 논전(論戰)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라고 진작 못박아놨기 때문이다.

이런 여러 환상이 일부 사라져, 과학을 민주적 토론에 좀더 수월하게 끌어들일 수 있게 됐다. 주요 과학 논쟁은 더 이상 합리적인 과학자와 반계몽적 대중 사이에 대립의 장이 아니다. 논쟁은 오히려 있을 수 있는 다양한 사회를 지지하는 사람들 간에 벌이는 정치적 토론으로 이해돼야 한다. 이제 유전자 치료든 나노 기술이든, 아니면 GMO 연구 등 그 어떤 것이든 간에 이런 진보과학이 자신이 몸담고 있는(8) 사회 시스템과 별도로 판단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경제적 압박에서 과학자들의 자율성을 어떻게 보호하며, 더 이상 수동적 관람자 역할에 머물지 않고 기후온난화에 대한 의견 변화에서 봤듯이, 때때로 쉽게 영향을 받고 매우 변덕스러운 시민사회에 과학자들을 참여시킬 수 있을까? 여성 철학자 이사벨 스텐저스는 “과학의 정의를 신뢰할 수 있는 증거 구축에 집중하는 것이 해법이 될 수 있다”(9)고 봤다. 기업가들은 한층 강화된 경쟁력을 요구하며 과학의 신뢰성을 위협하고, 대중은 실험실 밖에서 그런 증거의 확대해석을 요구한다.

비록 “시민토론회나 과학을 권력에서 분리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프랑스 과학사회학자 브뤼노 라투르처럼,(10) 이미 증거 확보에 나선 시민단체나 과학자가 여럿 있지만, 이 증거들의 구체적인 윤곽이 드러나야 광범위한 대중의 참여도 가능해질 것이다.

글•파블로 장상 Pablo Jensen
리옹 고등사범대학 국립과학연구센터(CNRS) 연구원. 주요 저서로 <내 커피 크림에 들어 있는 원자들: 물리학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까?>(Seuil·Coll. Points Sciences·파리·2004)가 있다.

번역•조은섭 chosub@ilemonde.com

<각주>
(1) 웹사이트 http://cip-etats-generaux.apinc.org/IMG/pdf/synthese-finale-EG.pdf 참조.
(2) 알렉상드르 코이레, <무한한 우주에 닫힌 세계>, PUF-63, 갈리마르, 파리, 2005 참조. 토마스 쿤, <과학혁명의 구조>, 플랑마리옹, 파리, 2008 참조.
(3) 시몬 마조릭, <현시대 과학의 역사>, 아르망 콜랭, 파리, 2009 참조.
(4) Mary Midgley, <구원 같은 과학, 현대 신화와 그 의미>, Routledge, 옥스퍼드대학 출판부, 1992 참조.
(5) 도미니크 페스트르, <과학 연구 입문>, La Découverte, 파리, 2006 참조.
(6) 조르주 바르텔레미가 주도한 연구저서 <과학의 연구>, Ellipses, 파리, 2009 참조.
(7) 위의 도미니크 페스트르 저서 참조.
(8) 웹사이트 www.inra.fr/dpenv/pdf/BonneuilD30.pdf 참조.
(9) 이사벨 스텐저스, <성모 마리아와 중성미립자, 혼란스러운 과학자들>, 파리, 2006 참조.
(10) 브뤼노 라투르, <자연의 정치>, La Découverte, 파리, 1999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