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된 뮤지션, 빅토르 최

2019-05-31     외제니 즈본키네 l 파리 8대학 교수

구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 시대, 대중의 인기를 사로잡은 언더그라운드 록 그룹이 있었다. 특히 그룹의 보컬인 빅토르 최에 대한 인기가 뜨거웠는데,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음악은 여전히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그는 좌절된, 그러나 우리가 집요하게 추구하는 희망을 노래한 선구자였다.

 

오만불손하며 고약한 성미에, 어둡기까지 한 빅토르 최(1962~1990)는 독특한 음색의 한국계 러시아 록 가수다. 가공되지 않은 가사를 쓰던 그는 선배가수 기타리스트 싱어 블라디비르 비소츠키(1938~1980)나 이소룡을 추앙하며 짐짓 그 행동이나 몸짓을 따라 하기도 했다. 빅토르 최는 구소련 말기의 유명 록그룹 리더였으나, 페레스트로이카가 이뤄질 때까지 오래 살진 못했다. 그럼에도 빅토르 최와 그의 노래는 오늘날까지도 굉장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러시아 록 음악은 1960년대에 맨 처음 태동했으나, 이후로도 20년간, 대학생이 아닌 이상 러시아에서 록 그룹을 결성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학생이 음악을 할 경우 두 가지 선택의 길이 있는데, 하나는 정부의 통제를 받는 제도권 아티스트가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으로 활동하는 것이었다. 전자의 경우 보컬 파트 및 악기 파트 일체로 이루어진 그룹으로서 모든 곡에 대해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후자는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한 음반을 ‘자가 출판’하는 경우였다. 

따라서 당국이 정한 비속어 사용 금지 및 복장 제한 등의 규정, 그리고 (일부 뮤지션들이 지나치게 서구권 음악의 영향을 받고 있는 만큼) 애국주의 성향을 지녀야 한다는 규칙에 저촉되는 경우라면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으로 활동하는 게 필수적이었다. 러시아에서 아티스트는 타의 귀감이 돼야 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구권 음악이 허용된 팝그룹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이에 언더그라운드 록 음악 뮤지션들은 제도권을 거부하는 여느 아티스트와 마찬가지로 ‘아마추어’라는 호칭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빅토르 최도 그런 뮤지션들 중 한 명이었다. 한국계 엔지니어인 아버지와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난 빅토르 최는 1970년대에 미술학교에서 퇴학당한 후, 목각기술을 익히기 시작하면서 초창기 곡들을 써나갔다. 아직 재학 중이던 시절 빅토르 최는 (안톤 체호프의 단편 <육호실>에서 정신병동을 의미했던 동명의 병실) ‘육호실’이란 이름으로 맨 처음 그룹을 결성한다. 1981년에는 ‘가린의 살인광선’이란 이름으로 새로운 그룹을 만들었는데, 1982년 이 그룹의 이름은 ‘영화관’을 의미하는 독일어 ‘키노(Kino)’로 확정된다. 여타의 비제도권 아티스트들과 마찬가지로 빅토르 최 또한 생업을 병행해야 했는데, 이에 1982년의 상황에선 마리안나 최의 말마따나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유명인이었음에도” 보일러 기사 일을 계속한다.(1) 

그해 여름, 그룹 키노는 (수록곡 전체의 재생 시간이 45분이란 이유로) <45>란 타이틀의 첫 앨범을 발표한다. 이로써 처음으로 인기 그룹의 반열에 오른 키노는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무대에도 서기 시작하고, 홈 콘서트도 개최한다. 이 음반 작업에서 키노는 보리스 그레벤시코프의 저 유명한 그룹 아쿠아리움의 지원 사격을 받았는데, 보리스는 콘서트 후 교외 기차 안에서 다가와 말을 건 빅토르 최에게 그의 노래를 들었던 당시의 소감을 전했다. “그 자체가 좋고, 쓸모까지 있는 노래를 들으면, 남보다 먼저 고대의 유물을 채굴한 듯한 기분이 든다. 오늘 내가 그랬다.”(2)

이후 빅토르 최의 인기는 점점 높아졌다. 사람들은 몰래 키노의 음악을 듣기도 하고, 홈 콘서트 같은 자리에서 이들의 음악을 접하기도 했는데, 특히 레닌그라드 록 클럽 같은 무대를 통해 키노의 음악을 들었다. 1981년에 생긴 록 클럽은 구소련 시대 록 음악의 발달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곳이었다. 

 

구소련의 마지막 영웅

영화 분야에서 본격적으로 개혁의 붐이 일던 1986년에는 빅토르 최도 영화계에 발을 들인다. 특히 맨 처음 그를 영화계로 끌어들인 건 당시 학생감독이었던 라쉬드 누그마노프였다. 누그마노프는 모스크바 영화 학교(VGIK) 재학 중 제작한 단편 영화에서 빅토르 최를 등장시켰다.(3) 젊은 부부와 그 친구들이 빅토르 최의 콘서트에 가길 원한다는 내용의 영화였다. 이후 빅토르 최에게는 출연 섭외가 쇄도했고, 같은 해 그는 다수의 영화 촬영에 참여한다. 

알렉세이 우치텔 감독도 ‘록’이란 간결한 타이틀로 언더그라운드 그룹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는데, 누그마노프 감독과 마찬가지로 보일러실에서 일하는 빅토르 최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키예프 영화학교 학생이었던 세르게이 리센코도 자신의 졸업 작품 <휴가의 끝> 촬영을 위해 빅토르 최와 그룹 키노를 섭외했는데, 키노의 여러 곡을 일종의 장편 뮤직비디오처럼 담아낸 저예산 단편 영화였다. 하지만 당시 빅토르 최를 촬영한다는 것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작업이었다. 

빅토르 최는 검열에서 우선순위에 놓인 인물이었고, 누그마노프의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도 경찰에 체포돼 수차례 구금되는 신세가 됐기 때문이다. 누그마노프 본인 또한 레닌그라드 콤소몰(구소련의 공산주의 청년 동맹) 문화위원회에 소환돼 -이에 수긍하진 않았지만- “적절한 뮤지션 그룹”을 촬영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리센코 역시 학위 발급이 거부됐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은 영화계에서는 1980년대 말 두 편의 장편 영화가 제작됐는데, 먼저 누그마노프의 첫 장편영화 <이글라(혹은 바늘)>(제작연도 1989, 국내개봉 1999년)에서는 빅토르 최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자유분방하고 광기 어린 삶을 담아낸 이 영화는 구소련 시절 2년 만에 1,500만 관객을 동원한다. 이 작품으로 빅토르 최는 1989년 <에크랑 소비에티크>지의 독자들이 뽑은 올해의 최우수주연상을 받기도 했다. 

이어 개봉한 세르게이 솔로비오프의 작품 <아사>는 개혁 개방 시대의 대표작으로, 시대에 순응하지 않는 예술 분야의 대표적 인사들(화가나 뮤지션)을 한데 모아 기존의 규칙과 질서를 강요하는 기성세대에 맞선 젊은 세대들의 모습을 담아냈다. 이 영화에서 빅토르 최는 마지막 한 시퀀스에서밖에 등장하지 않음에도 실질적인 비중은 꽤 큰 편이었다. 흐릿한 실루엣으로 그가 등장한 어느 초라한 식당은 곧 거대한 무대로 뒤바뀌고, 빅토르 최는 군중들 앞에서 그의 히트곡 <우리는 변화를 고대한다>를 들려준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 또한 이 곡에서 정치적 변화에 대한 민중의 의지를 읽었다고 할 만큼 페레스트로이카 시대의 비공식 주제가 같은 곡이었다.(4) 

“우리의 마음이 ‘변화’를 요구한다! / 우리의 눈이 ‘변화’를 추구한다! / 우리의 웃음과 눈물 속에는, 그리고 요동치는 우리의 핏줄 속에서는 / 오로지 변화, 그저 변화만을 고대한다!” 

이렇듯 개혁과 쇄신에 대한 젊은 세대의 요구가 컸던 만큼 구소련의 개혁정책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빅토르 최는 이런 젊은이들의 요구를 대변하는 독보적인 인물이었다. <이제는 우리가 나선다>는 곡에서도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는 신시가지의 비좁은 아파트에서 태어났다 / 당신들이 우리에게 기워준 옷을 입고 / 우리는 이미 마음이 조급해진 듯하다 / 우리가 당신들에게 해줄 말은 / 이제는 우리가 나선다는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 록 음악사를 연구하는 안나 제이체바의 지적처럼 빅토르 최는 개혁을 염원하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자신이 차지하는 이런 입지에 대해 다소 회의적이었다. 물론 그가 현실에 대한 암묵적인 저항과 당대의 답답한 심경을 그 누구보다도 훌륭히 노래로 소화한 건 사실이지만, <편안한 밤> 같은 노래에서는 다음과 같은 가사들이 눈에 띈다. 

“나는 이 순간을 기다렸고, 내가 기다리던 그 순간이 찾아왔다. / 입을 다물던 이들은 더 이상 그 입을 다물지 않았고 / 더 이상 기대할 게 남지 않은 이들은 말 위에 올라타 전장으로 향했다 / 우리가 미처 따라잡을 겨를도 없이 이들은 멀리 떠났지만 / 잠을 청하는 이들이 있다면 부디 좋은 꿈 꾸길 / 편안한 밤이 되기를.”

사실 빅토르 최는 내면을 노래한 가수였으며, 소소한 일상의 감정적 동요를 음악으로 표현해내곤 했다. <우리는 변화를 고대한다>를 포함해 그는 자신이 즐겨 노래하던 우울과 실의의 정서에서 결코 멀어진 적이 없었다. 줄곧 삶의 힘겨움과 더불어 그 안에서 의미를 찾는 작업의 어려움을 노래해 온 것이다. 

“손에는 담배를, 탁자에는 찻잔을/ 문득 우리는 변화하는 그 모든 것이 두려워졌다.”

그가 28세라는 젊은 나이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모스크바 도심 아르바트 거리의 한 벽은 온통 그를 추도하는 메시지로 뒤덮여 오늘날 거의 역사적 기념물에 준하는 곳이 됐다. 벨라루스의 민스크, 우크라이나의 드니프로, 카자흐스탄의 알마티 역시 비슷했고, 1992년부터는 그의 곡 <마지막 영웅>과 동명의 타이틀로 제작된 우치텔의 다큐멘터리를 시작으로 이후 여섯 편의 다큐멘터리가 제작됐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인기가 지금까지 지속될 수 있었던 건 라디오 전파나 온라인 조회, 길거리 버스킹, 그 외 다른 팝 가수들의 헌정 공연 등을 통해 그의 음악이 흘러나온 덕분이다. 그의 곡인 <혈액형>의 경우, 유튜브에서 가장 조회가 많이 된 동영상 세 편의 조회 수를 합하면 무려 2천만 뷰가 넘는다. 

영화 또한 그의 인기가 지속되는 데 한몫했다. 유리 비코프의 영화 <바보>(2011)에서는 주인공이 부패한 시정의 간계에 훼방을 놓아 붕괴가 임박한 건물 주민들을 구하는 대목에서 빅토르 최의 <편안한 밤> 전곡이 흘러나온다. 안드레이 자이세프 감독도 영화 전체를 그의 노래로 구성하는 패기를 보였다. <할 일 없는 사람들>(2011)이란 제목의 이 작품에서는 그의 노래들이 오늘날 러시아의 일상과 어떻게 맞아떨어지는지 보여준다. 

세르게이 로반의 영화 <샤피토 쇼>(2011)의 경우, 프랑스에서는 하계 시즌 동안 슬며시 개봉돼버렸지만, 러시아에서는 컬트 무비로 자리 잡았다. 이 영화에서는 ‘러시아의 엘비스 프레슬리’이자 ‘구소련 최고의 낭만적 영웅’이라 불리던 한 인물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위트 있게 담아낸다. 

하지만 빅토르 최의 전설에 관심을 둔 것은 영화계만이 아니었다. 그의 사후에 관련 도서들도 다수 출간됐으며, 낭만주의의 표상이자 최후의 반항아, 빅토르 최의 모습을 담은 조각상도 여럿이다. 2009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세워진 그의 조각상 외에도 2018년에는 영화가 촬영된 알마티에서 <이글라(혹은 바늘)>에 등장하는 떠돌이 자객 모로의 모습으로 그의 조각상이 세워졌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 도처에 그의 이름을 딴 거리나 공원이 존재한다.

2018년 말 프랑스에서 개봉한 영화 <레토>(5)에서 키릴 세레브레니코프 감독이 빅토르 최의 초창기 시절에 대해 짚어보는 한편, 그의 사망 1년 후 세상을 뜬 언더그라운드 록 가수 마이크 나우멘코와의 만남에 대해 다룬 이유는 단지 과거 속에 잊힌 한 인물을 되살리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모두에게 친숙하고 모두가 아끼는 이 인물이 오늘날 가지는 의미를 재해석하려던 의도가 더 컸다. 우울하면서도 (그의 생전엔 이제 막 시작될 조짐만을 보인) 변화에 대한 열망을 담은 그의 노래는 오늘날 또다시 우리의 마음속을 예리하게 파고든다. 

감미로우면서도 서글픈 순간으로 영화를 마무리한 것 또한, 감독 나름의 의도가 있다. 지난 역사를 돌이켜보면 빅토르 최의 세대가 꿈꾸던 혁명은 미완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빅토르 최는 이제 막 변화의 조짐이 이는 세상(과 조국) 앞에서 무너진 희망을 상징하는 인물이자 자기 안으로 파고들고자 하는 자유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욕구를 표상한다. 

“손에는 담배를, 탁자에는 찻잔을 / 우리가 흔히 아는 간단한 그림이다 / 그 외 나머지는 모두 우리의 내면에 있다.”  

 

 

 

글‧외제니  즈본키네 Eugénie Zvonkine
파리8대학 영화과 조교수. 주요 저서로『러시아 영화의 현재: 혁명과 진화Cinéma russe contemporain, (r)évolutions』(Presses universitaires du Sptentrion, Lille, 2007) 등이 있다.

번역‧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번역위원

 

(1),(2) Alexandre Jitinski & Marianna Tsoï, 『빅토르 최의 시와 기억, 그리고 관련 기록들 Viktor Tsoï. Poèmes, souvenirs, documents(러시아어)』, Novy Gelikon, Saint-Pétersbourg, 1991.
(3) Rachid Nougmanov, ‘야하 Yahha’, Yahha.com 사이트 인터뷰(러시아어).  
(4) Lev Gankin, ‘나는 변화를 원한다! - 키노의 노래는 어떻게 러시아에서 정치적 슬로건이 됐으며, 빅토르 최는 왜 이를 원하지 않았나?’(러시아어), <Meduza>, 2017년 6월 20일, https://meduza.io
(5) 영화 <레토>는 감독의 두 번째 프랑스 개봉작으로, 앞서 2016년 <사제>가 프랑스에서 개봉된 바 있다. 하지만 세레브레니코프 감독이 영화계에 입문한 건 19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작품 <레토>는 2018년 칸 영화제에서 최우수 OST 부문의 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