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사회주의 열풍, 왜 지금인가?
억만장자의 백악관 입성도, 미국의 굳건한 경제성장도 미국에서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이들의 인기를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미국 내 소득불평등과 고용불안정이 사회주의자들을 소환하는 요인이다. 이 같은 사회주의자들의 부상은, 자본주의가 지금처럼 미국의 국가적 모델로 자리잡기 전에도 볼 수 없었던 현상이다.
2019년 5월 6일 미국의 경제방송사 CNBC와의 최근 대담에서, 빌 게이츠는 민주당 내부에서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나 뉴욕주 하원의원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등의 정치인들이 일으킨 ‘사회주의’ 열풍에 별로 개의치 않는다고 언급했다. 이들이 내세우는 사회주의 개념이 세금인상을 지지하는 일부 미국인들의 (납득할 만한) 열망을 표출하긴 하나, 자본주의의 붕괴로 이어질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억만장자들도 인정하는 세금불평등
그러나 빌 게이츠는 억만장자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점진적으로 축소한 누진세나 상속세에 대해, 대폭 확대와 인상을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이런 견해를 보이는 억만장자는 빌 게이츠 만이 아니다. 워런 버핏 역시 “나는 우리 집에서 일하는 가사도우미나 집사보다 상대적으로 적은 비율의 세금을 냈다”고 꼬집어 말한 바 있다. 빈부격차에 대한 우려와 박애정신이 뒤섞인 이런 미국 억만장자들의 감정은 성 아우구스티누스 시대의 로마 부호들과는 구별된다. 로마의 부호들은 기독교가 약속하는 사후세계에 매혹돼, 죽은 다음에도 재산을 지키고 싶은 마음에 개종했다.
빌 게이츠의 최근 발언들은 선한 의도의 표명을 넘어, 일반적이고 급진적인 상황을 보여준다. 물론 ‘민주적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샌더스나 오카시오-코르테스(히스패닉 진보 정치인) 및 이들의 정치적 지지자들도(바스카 순카라의 4면 기사 참조) 주요경제 부문들을 국유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2016년 민주당 예비경선에서 샌더스의 선거유세가 열풍을 불러일으킨 것은 미국 대학의 천문학적인 등록금과, 그에 버금가는 과도한 의료비를 야기하는 미국의 보건시스템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대학등록금이라는 이슈는 자녀들의 미래를 염려하는(그리고 졸업 후 상환해야 하는 학자금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중산층의 고질적인 걱정이다. 또한 상류층을 제외하고, 미국의 전 계층이 엄청난 의료보험료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다.
이례적인 인기를 누리는 사회주의
샌더스가 주장한 학자금 및 의료보험료 지원 공약은 노동문제와 계급투쟁에 치중했던 과거의 사회주의 정책과는 그 결이 다르다. 전통적인 의미의 사회주의에선 직장과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이미지가 더 강했다. 사회주의의 관심사는 환경오염, 지구온난화 등 여러 인류의 문제를 거치면서 변화해 왔다. 이제 샌더스 주변에서 활동하는 사회주의 운동가들은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공장을 미화하지 않는다. 또한 자신들의 희망은 오로지 완전고용과, 셰일가스 개발 및 탄광재개에 유리한 에너지 자립을 위한 것이라고 일축하지도 않는다. 도널드 트럼프와 그를 지지하는 보호주의자들은 생산라인의 재현지화를 염두에 두고 이런 자원 개발을 밀어붙이고 있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사회주의의 메아리는 민주당 내 다른 곳에서도 감지된다. 예컨대 2020년 민주당 경선 후보인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은 임금 노동자들이 대기업 이사진에 대거 포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샌더스나 엘리자베스 워런보다 더 온건한 피트 부티지지 같은 후보들조차 “자본주의는 많은 사람을 기만했다”(1)고 인정함으로써, ‘사회주의’가 현재 누리는 인기를 실감케 했다.
실제 요즘 민주당 유권자들은 자본주의보다 ‘사회주의’에 더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사회주의 57%, 자본주의 47%). 대다수 국민들은 여전히 자본주의를 선호하지만, 미국 역사상 유례없는 그 비율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자본주의 찬성이 56%, 반대가 37%).(2) 사회학자나 역사학자들은 오랫동안 미국 정치권에서 사회주의적 정책이 거의 전무한 것을 미국사회의 특징인 ‘미국적 예외’로 간주할 정도였다.
보수주의 정치학자 시모어 마틴 립셋(1922~2006)의 저작들은 많은 사회과학 학도들에게 필독서로 통한다. 립셋은 이 일련의 저작들을 통해, 유럽전역에서 뿌리내리는 데 성공한 사회주의가 미국에서 실패한 원인을 설명하려고 했다. 그는 이런 특수성의 근거를 크게 네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미국 정치시스템의 특성(민주당과 공화당 양당의 패권주의, 결선투표제 없이 단판 투표로 결정되는 대선, 각 주의 표결을 중시하는 선거인단, 간접 보통선거 등), 둘째 노동계급의 이질성(역사적으로 유입된 이민의 산물), 셋째 정당과 노동조합 간의 견고하고 지속적인 결속의 부재, 마지막으로 사회주의 사상과는 전혀 다른 개인주의적 가치에 대한 ‘문화적’ 애착이다.(3)
애플파이에 굴복한 사회주의 유토피아
립셋은 독일의 사회학자 베르너 좀바르트의 분석을 되풀이했다고 볼 수 있다. 막스 베버의 친구인 좀바르트의 저서 『사회주의는 왜 미국에 존재하지 않는가?』(1906)(4)는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카를 마르크스가 쓴 경제저서들의 해박한 분석가이자 독일 사회민주당 지지자인 좀바르트는, 자본주의 사회의 현재적 특성에 관심을 가졌다.
이를 통해 좀바르트가 내린 결론은, 미국 사회에서 자본주의는 가장 노골적으로 나타나지만, 동시대의 유럽 사회와는 달리 주로 노동계급이 중산계급화되면서 사회주의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게 됐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에도, 정부에도 반기를 들지 않으며, 양당의 독식을 선호하는 주류 정치 시스템에 안주했다고 봤다. 동시대 유럽의 노동자들보다 훨씬 부유했던 미국의 노동자들은, 노동을 통해 자신의 신분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좀바르트의 저서 중 가장 널리 알려진 부분은 다음과 같다.
“임금 노동자는 경제적 여건과 생활환경이 나아짐에 따라 물질적 타락에 빠졌고, 온갖 쾌락을 제공하는 경제체제를 점점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임금 노동자는 정신적으로 점차 자본주의 경제 메커니즘에 순응했고,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질과 자본의 강렬한 매력에 굴복해버렸다. ‘진보’(자본주의)를 향한 도정에서 미국이 다른 국가를 앞서간다고 생각하며 생겨난 자부심은 애국심으로 변모했고, 정점에 달한 애국심은 미국인을 검소하며 계산적인 비즈니스맨으로 만들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상업정신을 바탕으로 형성된 미국인의 이미지다. 이렇게 모든 사회주의 유토피아는 로스트 비프와 애플파이(먹고 사는 문제를 상징함-역주)를 넘어서지 못하고 실패했다.”
지리적 이동성과 더불어 사회계층 간 유동성도 미국에서 사회주의가 뿌리내리는 데 걸림돌이 됐다. 값싼 황무지를 비롯해 언제나 열려 있는 토지가 존재했기에, 산업노동에 불만을 품은 자들은 자영 생산자와 개인 토지 소유자라는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할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노동자 조직화의 걸림돌, 이민
좀바르트에 의하면 미국의 노동자들은 자신이 속한 계급에서 스스로 벗어나려 발버둥 치기 때문에, 계급이나 조직을 통한 사회적 신분상승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집단의 행동이 아니라 개인의 창달관점에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립셋을 비롯해 독일 사회학을 계승한 학자들은 대체로 전투적인 노동자 계급이 조직되기 어려웠던 데는 이민이 주요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20세기 초에 미국으로 건너온 이주 노동자들은 미국에 일시적으로 머물다 갈 것이라고 자신의 상황을 판단했다. 그들의 목표는 빨리 돈을 벌어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당시 대규모 이민은 숙련공과 비숙련공 사이의 결속도 어렵게 했다. 대부분이 미국 태생인 장인 계급의 숙련공들은 조합결성에 적극적이었지만, 대다수가 이민자 출신인 비숙련공들은 비참한 노동현실을 감수해야 했다. 또한, 대도시에 거주하는 이민자들은 계급적 정체성보다는 민족적 정체성이 강했다.
또한 좀바르트는 계급의식의 발전에 걸림돌이 된 매우 높은 수준의 시민통합은 국민주권의 원칙을 헌법으로 명시한 것, 납세자 참정권(일정 정도의 세금을 납부한 사람만 선거권을 가질 수 있는 제도-역주) 폐지, 1812년부터 투표권이 모든 백인 남성으로 확대된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한편 정치학자 루이스 하츠는, 미국인들의 낮은 계급의식은 두 가지 부재에 기인한다고 가정했다. 첫째, 미국에는 과거 봉건시대의 길드가 구축한 사회계급이 부재하고, 둘째 부르주아 계급이 일으킨 사회혁명의 경험이 부재하다는 것이다.(5) 하츠와 동시대인으로서 자주 인용되는 역사학자 리처드 호프스태터의 표현에 의하면, 미국은 어떤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다기보다, 그 자신이 이데올로기라고 믿는다.(6)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바르트의 저서가 출간된 시기와 세계대전 휴전 사이 미국에서는, 유진 빅터 데브스라는 인물이 오랜 세월 구현해온 사회당이 굳건히 명맥을 유지했다. 1910년의 미국에는, 영국의 노동당이 배출한 당선자보다 더 많은 사회당 당선자가 점점 그 수를 늘려나갔다. 1912년에는 밀워키(위스콘신), 플린트(미시건), 스케넥터디(뉴욕), 버클리(캘리포니아)의 시의회를 사회주의자들이 장악했다. 같은 해 대선에서 데브스가 6%의 득표율을 기록하는가 하면, 사회당은 위스콘신(독일 이민자 출신의 노동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아, 사회민주주의 같은 사안에 민감한)이나 뉴욕(폴란드-러시아 출신의 유대계 신흥세력이 다수 거주하는)뿐 아니라, 남부의 일부 농촌지역(오클라호마, 아칸소, 텍사스, 루이지애나)에서도 희망을 품어볼 만한 득표율을 쌓아나갔다.
미국 사회주의, 미래가 있을까?
그러나 초기에 이런 성공을 거뒀음에도, 미국의 사회주의자들에겐 여전히 미래가 없었다. 1917년에 미국이 참전을 결정하자, 이에 반대한 사회주의 지도자들 다수가 투옥됐다. 러시아 혁명은 사회주의 탄압으로 이미 약화된 당 내부의 긴장을 더 악화시킬 뿐이었다. 다수의 혁명 추종자들이 신봉하는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와 레닌의 저서보다는 기독교 복음주의나 독점에 대한 포퓰리즘적 비판에 훨씬 더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2016년 샌더스가 성공을 거뒀고 현재도 인기를 유지하는 비결에 대해, 다수의 관측통은 그가 이미 기반을 확립한 기존 정당 내에서 정치투쟁을 벌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샌더스는 대기업의 야욕과 재정지원에 덜 의존하는 다른 사상을 전달하고자 기존 정당을 변화시키는 데 희망을 걸고 있다는 것이다. 무소속 생태주의자 랠프 네이더도, 사회주의자 데브스도 대선에서만큼은 샌더스만큼 잘 해내지 못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서민 계층의 하향화가 심해지는 현대사회에서는, 좀바르트가 과거 미국 사회주의의 걸림돌이라고 규정한 중산계급화가 이제는 그렇게 강한 호소력을 갖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난 40년간 계층 간 빈부격차가 심해지면서 사회주의를 예방하기 위한 ‘백신’(중산계급화)도 그 효력을 잃었다.
립셋은 유럽 좌파 정당들이 자유주의로 선회함에 따라 미국 사회주의도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또한, 유럽 좌파 정당들이 자국의 기반시설을 민영화함으로써 결국 빌 클린턴의 민주당을 닮아갈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립셋은 미국의 신세대가 자신이 사회주의자임을 발견하게 되는 상황이나, 민주당 지지자들이 샌더스 쪽으로 전향할 거란 사실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들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 재임 시절 2008년의 금융위기가 미국 역사상 가장 큰 빈부격차를 불러일으킬 때까지 두 손 놓고 있던 민주당에 크나큰 실망감을 느꼈던 것이다.
이들은 이제 피부색이나 임금 수준과 상관없이 기술과 서비스에 더 많은 비중을 둔 관점에서 노동계급을 다시 정의하고자 한다. 과거에는 프롤레타리아의 아이콘이었고 현재는 백인 남성 노동자들로 대표되는 제철공, 광부, 공장 노동자들의 투쟁처럼, 교사, 간호사, 가사 도우미, 음식점 직원들의 투쟁도 사회주의라는 행위의 틀 안에서 위엄 있고 정당한 지위를 찾게 되길 기대하고 있다.
그럼에도 현재 좌파 성향이 가장 짙은 민주당 지지자들은 자신들의 계층적 하향화를 우려하는 중산층 젊은이들을 결집시키고자 하고 있다. 과거 데브스의 투쟁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오늘날에는 트럼프의 우민정치에 끌리며, 미국의 새로운 ‘사회주의자’들과는 다른 사람들이, 과연 이 젊은이들의 정치적 급진성을 통해 결집할 수 있을까?
글·에드워드 캐슬턴 Edward Castleton
공저로 『사회주의자들이 미래를 발명했다면, 1825~1860(Quand les socialistes inventaient l’avenir, 1825-1860)』(La Découverte, Paris, 2015)이 있다.
번역·조민영 sandbird@hanmail.net
번역위원
(1) ‘New Day’, CNN, 2019년 4월 16일
(2) Frank Newport, ‘Democrats more positive about socialism than capitalism’, 2018년 8월 13일, ‘The meaning of “socialism” to Americans today’, 2018년 10월 4일, Gallup, http://news.gallup.com
(3) Seymour Martin Lipset & Gary Marks, 『It Didn’t Happen Here : Why Socialism Failed in the United States』, Norton, New York, 2000 참조.
(4) Werner Sombart, 『Pourquoi le socialisme n’existe-t-il pas aux États-Un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s, Paris, 1992.
(5) Louis Hartz, 『Histoire de la pensée libérale aux États-Unis(미국 자유주의 사상의 역사)』, Economica, Paris, 1990(1re éd.: 1995)
(6) 이에 관해서는 ‘Peut-on être socialiste aux États-Unis? Hier et aujourd’hui(미국에 사회주의자가 존재할 수 있는가? 어제와 오늘), 〈Cités〉, n° 43, Paris, 2010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