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사회주의의 부활에는 헌신과 희생이 있었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사회주의는 영향력이 매우 미약했다. 미국 민주적사회주의자(DSA) 회원으로 활동하는 글쓴이는 버니 샌더스가 2016년 민주당 경선에 뛰어든 이후 사회주의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식이 더 우호적으로 바뀌고 있다고 말한다.
최근 정통한 미국 시사 잡지 <뉴욕> 매거진은 “언제부터 다들 사회주의자가 됐나?”라는 제목의 표지기사를 싣고 미국의 많은 청년이 “사회주의자라고 불리는 것을, 어떤 수식어보다 매력적으로 여긴다”라고 보도했다.(1) 이런 변화는 다소 놀라운 측면이 있다. 지난 20세기 후반까지도 미국에서 ‘사회주의자’라고 하면, 사람들은 제일 먼저 모택동주의를 떠올리곤 했다. 무시나 조롱은 약과였다. 사회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정치의 변방에 영영 머무는 숙명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정수기 없이 화장실에서 물을 마시며
나는 아직 십 대였던 2007년 처음으로 사회주의 단체 ‘DSA’(The Democratic Socialists of America: 미국 민주적사회주의자)의 문을 두드렸다. 당시 DSA는 미국에서 유일하게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ocialist International)’에 회원으로 등록된(2017년 탈퇴) 미국 최대의 ‘사회주의’ 단체였으나, 회원은 5,000여 명에 불과했다. 세계적으로 자본주의를 활짝 꽃피운 미국의 인구가 3억 2,700만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극히 작은 규모였다.
그 당시 DSA 정례회의는 주로 회원들의 집이나 무상으로 개방된 공용공간에서 열렸다. 매번 열 명 남짓한 인원이 회의에 참여했는데 내 또래 회원도 종종 눈에 띄었지만, 환갑을 넘긴 활동가들이 주를 이뤘고 장년층은 거의 없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인터내셔널가를 배웠고, 공산주의 인물들의 유년기나 1960~1970년대 신좌익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듣곤 했다. 우리는 늘 같은 어조로 사회주의 투쟁을 외쳤지만, 시대의 흐름에는 한참 빗겨나 있었다.
이후 내가 DSA 뉴욕 중앙본부에서 일하던 당시, 같은 건물에서 일하던 다른 회사 직원들은 여름인데도 하나같이 말쑥한 정장차림이었다. 반면 사무실에 정수기를 둘 여유도 없던 DSA의 직원들은 화장실 수도에서 뜨뜻미지근한 물을 컵에 담아 마셨다. 옆 회사 직원들의 측은함이 담긴 시선을 감수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어렵게 명맥을 부지해온 DSA 직원들은 이미 그런 상황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다.
DSA의 뿌리는 SPA(Socialist Party of America: 미국사회당)이다. 사회당은 한때 유진 데브스를 후보로 배출해 상당한 지지도를 확보하기도 했지만, 1970년대 초에는 당원이 몇백 명에 불과했다. 이후 신좌익, 민주당, 베트남전에 관한 문제를 놓고 당내 입장이 분분해진 사회당은 결국 1972년 세 분파로 나뉘어 해산하는 수순을 밟았다.
우선 우측에는 베이어드 러스틴이 이끄는 SDUSA(Social Democrats USA: 미국 사회민주당)이 결성됐다. 러스틴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고문으로 활약한, 인권운동의 상징적 인물이다. 반공 성향이 강했던 사회민주당은 노동조합 지도부를 통제하려 했지만 아무런 소득 없이 압력단체 수준에 머무는 데 그쳤다. 반대편 좌측에는 SPUSA(Socialist Party USA;미국 사회당)이 생겨났다. 사회당은 유진 데브스의 계보를 잇는 정당으로 남고자 했으나, 좀처럼 당세를 신장하지 못했다. 데브스는 1912년 100만에 가까운 표를 얻었지만, 사회당의 득표수는 1976년 6,038표, 2012년 4,430표에 그쳤다.
“미국 사회주의자, 홀로 우뚝 선 초고층건물”
세 번째 중도분파로는 저명한 정치 이론가이자 골수 사회주의 활동가인 마이클 해링턴 교수가 이끈 DSOC(Democratic Socialists Organizing Committee: 민주사회주의조직위원회)가 조직됐다. 미국 선거법의 비민주적 현실을 직시한 해링턴 교수는 군소정당 출신 후보가 민주당과 대등한 수준에서 경쟁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해링턴은 비록 미국의 정치풍토가 사회주의를 배척하더라도 민주사회주의조직위원회가 다른 사회주의 단체(학생운동, 협동조합)와 노조, 민주당과 동맹을 맺고 유럽식 사회민주 연합을 구축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후 민주사회주의조직위원회는 신좌파의 후신인 NAM(New American Movement: 새미국운동)과 합쳐졌고, 1983년에는 마침내 DSA가 생겨났다.
이렇게 탄생한 DSA는 완전고용 법안의 도입을 촉구하는 운동을 벌였고, 남아프리카 공화국 인종차별정책에 반대하는 활동에 가담했다. 그리고 1980년대 초 프랑스와 그리스의 사회당 정부 수립을 적극 환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활동들도, 뉴딜 정신뿐 아니라 미국을 복지국가로 발전시키겠다는 의지마저 접은 채 급격히 우경화하는 민주당에는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었다.
당시 독일 사회민주당 당수였던 빌리 브란트는, 해링턴을 “유럽 국가 지도자로서도 손색없을 인물”이라고 치하한 바 있다. 반면 보수 언론인 윌리엄 F. 버클리는 “미국의 가장 뛰어난 사회주의자란, 캔자스주 토피카에 우뚝 선 초고층 건물”이라고 냉소했다.(2)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를 불과 몇 달 앞두고 해링턴이 타계하자, 미국 정치지형에서는 한동안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가 자취를 감추게 된다. 해링턴의 빈자리를 채울 지도자를 찾지 못한 채 고군분투하던 DSA는 어렵사리 명맥을 유지해나갔다.
“사회주의는 잘 모른다. 내 처지에 투표할 뿐”
한편, DSA가 본거지를 둔 뉴욕에서 몇백 km 떨어진 버몬트 주에서는 버니 샌더스가 또 다른 저항의 보루를 쌓아가고 있었다. 미국사회당의 잔해 속에서 사회주의를 꽃피운 해링턴처럼 샌더스도 무명 정치인으로 정계에 발을 디뎠다. 1960년대 학생 신분으로 뉴욕에서 노동권과 시민권 운동을 펼치기도 했지만, 자신의 고향 브루클린을 떠나 시골로 불리는 버몬트 주에 정착했다. 1972년, 샌더스는 생애 첫 선거인 상원 보궐선거에서 2.2%의 득표율을 기록해 낙선했다. 혼돈의 늪에 빠져 있던 당시 미국 좌파의 상황을 여실히 드러낸 결과였다.
하지만 이런 실패에도 샌더스는 신념을 꺾지 않고 거센 비난을 이어갔다. 그는 일찍이 “백만장자와 억만장자밖에 없는 리처드 닉슨의 세상” 혹은 “미국은 인구의 2%가 전체 부(富)의 1/3을 소유하는 나라”와 같은 메시지를 던지며 미국 현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3) 단순하면서 명료한 샌더스의 주장은 유권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초기에는 비록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지만, 무소속 사회주의자를 자청한 샌더스는 실패를 딛고 1981년에 마침내 버몬트 주 벌링턴 시장에 당선됐다.
불평등 해소를 끊임없이 주장해온 샌더스는 버몬트 주 연방 하원 의원(1991~2007년)과 버몬트 주 연방 상원의원(2007년~현재)을 거쳐 이윽고 대통령 후보 경선에까지 진출했다. 2016년 민주당 경선에서 샌더스가 힐러리 클린턴과 맞붙을 당시만 해도 전국적인 인지도는 미미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과감한 공약(보편적 의료보험 제도, 공립대 학비 무상 지원, 최저임금 15달러)과 연륜에 기반한 불평등 해소 공약으로 수백만 미국인의 지지를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지지자의 상당수는 사회주의에 대해 잘 몰라도, 자신들의 처지를 대변하는 공약에 기꺼이 표를 던졌다. 사회주의자 상원의원 샌더스는, 비록 상대 후보였던 힐러리에게 패배했지만 1,100만에 달하는 표를 획득했다. 불과 몇 달 만에 계급투쟁과 계급관계라는 사회주의의 근간을 고수하며, 무기력에 빠져 있던 미국의 사회주의에 숨을 불어넣은 셈이다.
이제 막 인공호흡기를 떼어낸 사회주의
미국에서 사회주의가 부활하는 과정에는 사회적 맥락이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2008년 금융위기는 대기업의 무소불위 권력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를 자극했고, 정체된 노동임금은 각종 시위를 촉발한 원인이 됐다. 2011년 위스콘신주 공무원 장기 파업, 월가 점령 운동, 2014년 패스트푸드점 노동자들의 최저임금 인상 요구, 2018년 교사와 간호사 파업 외에도 수많은 시위가 줄을 이었다.
출판계도 민주당 좌익분파의 정치 노선을 명확히 구분해내는 방식을 통해 사회주의의 부활에 힘을 더했다. 샌더스 상원의원이 선거운동에 돌입했던 2016년 당시, 2011년 12월에 창간된 사회주의 잡지 <자코뱅>은 불과 10개월 만에 가입자 수가 3배나 늘어나 1만 5,000명의 구독자를 보유하게 됐다. 신규회원의 대다수는 30세 미만 청년이었으며 실직한 고위 간부나 전문직 부모를 둔 이들이 상당수를 차지했다.
인터넷에서는 사회주의자로 전향한 청년들이, 사회주의 운동의 상징인 장미를 내걸고 민주당과 주류 언론을 비판하는 광경을 심심찮게 목격하게 된다. 지난 민주당 경선 기간 힐러리 클린턴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2016년 11월 4일, 도널드 트럼프와의 결선을 불과 며칠 앞둔 시점에서 (글쓴이 본인을 포함한) 민주사회주의 그룹 수십 명이 민주당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클린턴을 지지하는 선거운동을 펼친다는 것은, 유권자들을 대상으로 지키지 못할 공약(금융분야 부패척결, 자유무역협정 독소조항 반대, 최저시급 15달러 도입, 사회보장제도 확대 발전 등)을 이행하겠다고 약속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우리 사회주의자들은 결코 이런 길을 택해서는 안 된다. 선거가 끝나면 민주당은 공약을 이행하지 않는다. 사회주의 토대를 구축하고자 기울인 노력은 과거에 대부분 이런 식으로 수포로 돌아갔다.”(4)
이 발표는 좌파 진영 내에서 격렬한 논쟁으로 확대됐다. 예컨대, 미국 공산당 진영은 트럼프의 질주를 막으려면 민주당의 클린턴을 지지하는 것밖에는 달리 방도가 없다고 주장했다. 선거 이후, 뜻밖의 상황에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몇 년 동안 민주당 후보 클린턴과 열띤 대립을 펼친 만큼 선거 패배에 따른 책임 추궁이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언론과 민주당 주요 인사들은 러시아에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이후 DSA는 회원 가입이 쇄도해 현재 5만 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 <자코뱅>의 경우, 선거가 끝난 뒤에도 가입자 수가 2배 증가해 2개월 만에 가입자 수가 1만 5,000명에서 3만 6,000명으로 껑충 뛰었다. 이런 긍정적인 결과는 특정 인물을 향해 쏟아진 언론의 관심과 소셜네트워크를 활용한 회원들의 남다른 활약에 힘입은 바가 크다.
정치 단체로서 DSA는 누구에게나 개방돼 있으며 온라인 회원 가입도 가능하다. 우리의 예상대로 오늘날 DSA는 샌더스 의원 지지층과 무정부주의자,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의 안식처가 됐다. 이처럼 다원화된 구조 덕에 지역별 DSA의 독립적인 활동과 다양한 형태의 참여가 가능해졌다. DSA는 지역 협의회를 창설하는 일부터 자동차 헤드라이트 수리, ‘메디케어포올(Medicare for All·모두를 위한 의료보험: 65세 이상 노년층을 위해 연방정부가 제공하는 건강보험 제도)’ 등 국가 단위의 정책 홍보까지 모든 활동을 망라한다.
DSA는 이제 경쟁력을 갖춘 후보를 배출해내기 충분한 정치세력도 확보했다. 최근 시카고 지방선거의 결과, 시카고 시의원에 당선된 60명 중 6명이 DSA 소속이었다. 하원 의원 선거에서도 버지니아와 뉴욕주에서 DSA 회원이 선출됐다. 미연방 상·하원의 의원을 선출한 2018년 미국 중간선거에서도 DSA는 활발한 활동을 벌여 민주당 내 세대교체에 이바지했다. 이에 해당하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는 단연 뉴욕 주 하원의원으로 당선된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즈를 꼽는다.
이니셜이자 애칭인 ‘AOC’로 불리는 오카시오-코르테즈 의원의 성향은 DSA보다는 민주당에 더 가깝지만, 자신의 사회주의 신념을 주장하는 데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카리스마는 물론이고 SNS를 능숙히 다루는 능력까지 겸비한 덕에 전국적인 인지도를 획득했고, 이에 힘입은 DSA는 수적 약세를 극복하고 더 많은 청중에게 다가가 우리의 담론을 전파할 기회를 얻었다. 샌더스 의원의 2016년 대선 민주당 경선 이후 수백만 명의 미국 국민이 우리와 뜻을 함께하게 됐다.
그러나 언론홍보나 홍보효과를 높이는 기술에서는 여전히 한계를 절감한다. 현재 미국에서는 불평등 반대 운동이 크게 확산하고 있지만, DSA는 이런 상황을 십분 활용하지는 못하고 있다. 샌더스 의원은 이런 움직임에 직접 관여하지 않고 있고 오카시오-코르테즈 의원 역시 민주당 내부 개선과 개혁에 힘쓰느라 여념이 없는 상황이다. 아울러 DSA는 백인 중산층을 주축으로 결집한 조직이라는 한계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본격적으로 계급투쟁 운동에 박차를 가하려 한다. DSA 운동가들은 이미 2018~2019년 학교와 병원 파업에 앞장서서 활동을 벌였다. 이들은 노조활동과 사회운동에 박차를 가해 노동자들로부터 더 폭넓은 지지를 확보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오늘날 수백만 명의 미국인들은 근본적인 변혁을 꿈꾼다. 사회주의 운동은 인공호흡기를 떼어내고, 이제 막 회복단계에 접어들었을 뿐이다.
글·바스카 순카라 Bhaskar Sunkara
<자코뱅>(뉴욕) 설립 편집자·발행인. 미국 민주적사회주의자 부의장. 저서『The Socialist Manifesto. The Case for Radical Politics in an Era of Extreme Inequality(사회주의자 선언. 극심한 불평등 시대의 급진 정치)』(Basic Books, 뉴욕, 2019).
번역·이푸로라
번역위원
(1) Simon van Zuylen-Wood, ‘When did everyone become a socialist(언제부터 다들 사회주의자가 됐나)?’, <New York>, 2019년 3월 4일.
(2) 토피카는 고층건물이 많지 않은 캔자스의 주도다.
(3) 1973년 10월 16일자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언급한 발언을 재인용한 기사; Michael Kruse, ‘Bernie Sanders has a secret(버니 샌더스의 비밀)’, <Politico Magazine>, 알링턴, 2015년 7월 9일.
(4) ‘The Left is under no obligation to support Hillary Clinton(좌파는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할 의무가 없다)’, <In These Times>, 2016년 11월 4일, www.inthese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