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변혁에 앞장 선 페미니즘 물결

2019-05-31     프랑크 고디쇼 l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2019년 3월 8일 눈 부신 햇살 아래, 다수의 무장병력과 지방경찰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은 페미니스트 시위는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의 거리를 수놓았다. 그 규모는 작은 파도가 아니라 쓰나미 수준이었다. 칠레 역사상 최초의 페미니스트 동맹파업을 거행하기 위해, 35만 명이 넘는 인파가 노래와 춤으로 수도 중심지를 도배했다. 참여자 중에는 젊은 여성들이 많았다. 여성들은 보디페인팅을 하고 친구 또는 가족과 함께 시위에 참여했다. ‘국제 여성의 날’에 벌어진 분노와 흥겨움이 공존하는 이 시위에는 거리의 개들도 한몫했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1973~1989) 장군의 독재적 억압에서 살아남은 할머니들과 여성인권운동가들도 있었다. 정치적 숙청 희생자 유족 모임 대표인 알리샤 리라를 비롯해, 실종된 가족의 사진을 든 여성들이 열을 지어 행진했다. 

“독재정권은, 오늘 우리가 행진에 나선 이유를 들어 우리 가족을 살해했다. 우리 가족은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들의 사회를 세우고자 했다.”

시위 참여자 수만큼 다양한 슬로건들이 등장했다. 슬로건들은 여성을 향한 폭력,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가 당하는 차별, 이주여성들의 비참한 처우를 규탄하고, 남성과 평등한 임금을 주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비정부기구(NGO) 및 여러 협회와 노조 옆에서, 칠레 원주민인 마푸체족 전통의상 차림의 여성들이 억압에 시달리는 마푸체족의 현실을 성토하는가 하면, 한 여성은 ‘내 난자에게 자유를, 자유롭고 안전하며 무료시술이 가능한 낙태를’이라는 문구가 적힌 팻말을 흔들었다. 우카마우 정착촌 거주민들은 주거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빵과 장미’ 단체가 깃발을 들고 투쟁가를 불렀고, 일부 좌파 국회의원들도 이곳을 방문했다. 여성들로만 구성된 당당한 행렬은 ‘불안한 삶에 맞서 거리로 나선 여성 노동자들’이라는 문구가 적힌 거대한 플래카드를 앞세워 행진의 포문을 열었다.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하는 보수주의 운동가 하비에라 로드리게스는 비난 조로 말했다. “이 시위는 좌파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전형적인 방식이다. 그들은 사람들을 단결시킨다면서 결국 모든 것을 뒤섞어버린다. 처음에는 여성의 날을 맞아 운동을 벌인다. 

그런데 그 운동은 ‘억압에 신음하는’ 여성, ‘노동하는’ 여성을 위한 시위가 된다. 그러다가 결국 시위 참여자들은 연금개혁을 주장하고, 낙태의 자유와 동성결혼의 권리를 주장한다.”

하비에라 로드리게스는 2018년 페미니스트들이 자신이 다니는 대학을 점거했을 때, 이에 맞서 ‘저항행동을 위한 언론’을 설립했다. 하비에라는 페미니스트들이 붙인, ‘가톨릭대학교에 가해자는 없다’라는 비아냥 조의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를 떼어버렸다. “나는 이 슬로건이 우리 대학의 이미지를 훼손하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점거자들은 억지를 부렸고, 나는 플래카드를 떼어버린 뒤 점거자들에게 맞섰다. 그리고 TV 카메라 앞에서 내 생각을 말했다. 나는 질서와 제도를 존중하기에 그렇게 한 것이다. 나더러 ‘파쇼’라고 비난하는 이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개의치 않는다.”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페미니즘

한편, 시위를 주최한 여성들은 3월 8일 시위가 예상 밖의 성공을 거뒀다고 생각한다. 1990년 민주화가 시작된 이후 대중을 거리로 결집한 중요한 시위라는 점에서다. 전국적으로 60개 도시에서 80만 명이 참여한 것으로 추산되며, 여기에는 지난 30년간 이런 현상을 도무지 볼 수 없었던 지방 중심도시들도 포함된다. 
보수적이기로 악명 높은 칠레에서 거둔 이런 성과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칠레는 1855년에야 민법이 제정됐으며, 이혼이 합법화된 것은 2004년이었다(세계적으로 가장 늦은 경우). 또한 자발적 임신중절(IVG)은 2015년이 돼서야 부분적으로나마 처벌 대상에서 제외됐는데, ‘불가피한 3가지 경우’(1)에 한해서였다. 그나마 주요 정당들, 가톨릭교회의 반대에 맞서 수십 년간 투쟁한 끝에 이뤄낸 성과였다.

시위가 열리기 며칠 전부터 대통령은 이에 불편한 심경을 드러냈다. 막대한 부를 소유한 기업가이자, 2010~2014년 대통령을 역임한 뒤 2018년에 재선된 세바스티안 피녜라 칠레 대통령(2)은 그의 입장을 대변하는 여러 개의 민영 TV채널 중 하나를 통해 민심을 누그러뜨리려 했다. “남녀 간 권리와 의무의 완전한 평등이라는 숭고한 명분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나는 파업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정부는 여성들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 칠레 정권이 이렇게 불안해하는 것은, 성희롱에 반대하고 성차별 없는 교육을 요구했던 2018년 여학생 시위에 대한 기억이 깊이 각인돼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5월의 페미니즘’으로 수십 개 대학이 점거됐으며, 이를 계기로 기관들은 어쩔 수 없이 오래전부터 고조돼온 불만을 인지하고 대응했던 것이다. 유명 교수들이 이 사건에 연루됐고, 특히 전직 헌법재판소장을 비롯한 여러 인사들이 정직 처분을 받았다. 심지어 존엄한 산티아고 가톨릭대학교도 점거됐는데(하비에라 로드리게스는 이 점에 분노했다), 이 대학은 피노체트 독재정권의 자문 역할을 한 ‘시카고 보이즈’(시카고대학교 출신의 칠레 경제학자들-역주)와 깊은 관련이 있는 곳이다. 1986년 이후 이런 시위나 점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칠레 최초로 페미니즘이라는 지각변동을 일으킨 이 사건은, 실상 피녜라 대통령의 첫 임기 중이었던 2011년 여학생 시위의 복사판에 불과하다.(3) 당시 거리로 나온 청년들은 3월 8일 여성 파업의 호소에 응답한 이들처럼, 칠레가 독재정권의 저주받은 유산과 연을 끊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90년 피노체트 군사정권이 종식됐지만, 20년간(1990~2010) ‘연립정부’(사회당 및 기독교 민주당으로 구성된 중도좌파연립)의 연속집권으로 독재정권과의 결별은 불가능했었다. 

그러나 이 시대의 페미니스트들은 칠레의 페미니즘이 더 유서 깊은 역사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역사학자 루나 폴레가티는 “페미니스트 운동은 우리 눈에 잘 보일 때도 있고 잘 안 보일 때도 있었지만, 결코 시야에서 사라진 적은 없다. 이 운동은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는, 오히려 어떤 ‘경향’이라고 볼 수 있다. 세기 초부터 1950년대까지는 정계와 시민들의 요구가 중심이 됐다(특히 1949년의 여성 투표권 획득). 다음으로 1980년대는 서민 여성들이 독재정권에 강렬하게 저항한 시기였다. 마지막으로 최근 몇 년 전부터는, 이를테면 성적 정체성이나 퀴어 이론 등의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는 투쟁이 수면 위로 떠 올랐다”고 설명한다. 

1935~1953년 활동했던 칠레여성해방운동(Memch)도 피임 및 낙태 권리, 이혼의 합법화, 균등한 임금 등을 주장하며 영향력을 행사했다. 칠레여성해방운동은 이미, 파업이라는 무기를 휘두른 바 있다. 한편 애초에 이 운동을 이끌었던 엘레나 카파레나와 올가 포블레테 같은 여성들은 1983년에 이 조직을 재건하는 데 참여해 군사정권과 맞서 싸웠다. 이들과 더불어 줄리에타 커크우드와 마르가리타 피사노 같은 여성 지식인들은 암울했던 이 시기에, 지금도 여전히 명성을 잇고 있는 “이 나라와 각 가정에 민주주의를!”이라는 슬로건을 앞세웠다.

피노체트의 군사정권이 막을 내린 1989~1990년 민주화 시기에도, 그가 추진한 헌법뿐 아니라 권위주의적 경제 모델은 그대로 유지됐다. ‘칠레의 재규어’라 불린 기업 경영인들이 침이 마르도록 칭송한 ‘합의제 민주주의’도 비판적인 사회 운동가들의 활동이 약화되면서 날조됐는데, 페미니즘 운동은 이런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점점 결단력을 잃어가고 만 페미니즘 운동은 젠더와 관련한 공공정책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상당수 진보주의자들도 ‘전체 시장’의 이데올로기와 충돌하지 않는 개혁 쪽으로 마음을 돌렸다. 칠레의 지도층에 속한 일부 여성들은 (현상을 급변시키지 않는 한은)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창고 같은 사회적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서민층 및 원주민 출신의 다른 여성들은 그들이 처한 상황이 개선되는 것을 전혀 목격하지 못했다. 

 

최초의 여성대통령도 해결 못한 문제

2000년대에 보건부 장관과 국방부 장관을 지낸 뒤, 2006년 칠레공화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선출된 미첼 바첼레트 역시 독재정권의 희생양이다. 그녀는 또한 사회주의자이자 불가지론자이며 독신주의자다. 2014년 재선에 성공한 미첼 바첼레트는 ‘모든 칠레인의 어머니’라는 이미지를 지니고 있으나(4), 그의 정치적 동지들이 표명하는 사회적 자유주의와 결별함으로써 여성들의 권리를 크게 개선하지는 못했다. 산미겔의 서민 지역 소선거구 사무소에서 일하는 가엘 요만스는 “미첼 바첼레트는 첫 임기 내내 거의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며 격분했다. 

가엘 요만스는, 2011년의 일부 학생운동을 포함한 몇몇 정치 운동(중도에서 급진 좌파까지)이 다시 모여 2017년에 연합 세력을 구축한 ‘프렌테 암폴리오’(광역 전선)에서 활동하고 있다. “미첼 바첼레트의 두 번째 임기에 드디어, 성 평등 및 여성부 신설이라는 긍정적인 조치가 행해졌다. 그러나 이 부서는 모든 사회 영역에서, 실질적으로 활동하는 데 필요한 어떤 예산도, 정계의 주목도 받지 못했다. 심지어 여성에 가해지는 폭력을 막을 법안 발의도 소홀히 하는 바람에, 결국 우파의 수중에 주도권을 넘겨주고 말았다.” 

2018년 5월, 피녜라 대통령은 ‘여성 어젠다’라는 일련의 법적 조치들을 추진했는데, 이는 (흔히 여성을 어머니라는 국한된 역할로만 보는) 보수적 시각과 경제적 자유주의를 뭉뚱그려 놓은 것이다. 이 어젠다는 기업 경영진 구성의 남녀평등, 혹은 고용계약이 보장된 여성 노동자들을 위한 보육시설 설치 등 ‘보편적’ 권리에 중점을 둔 계획이다. 이 어젠다를 통해, 칠레에서 특히 여성들에게 흔히 적용되는 노동 유연성 조치의 범위를 현저하게 줄일 수 있다. 절반 이하의 여성들이 보수를 받는 경제활동을 하고 있지만, 31%는 계약서나 사회보장, 건강보험의 혜택 없이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노조 결성 가능성은 언급조차 할 수 없다).(5)

만약 대통령이 다시금 ‘여성 인권’(여성을 그 자체로 보려는 유일한 권리) 지지를 앞장서서 약속한다 해도, 이제는 아무도 속지 않는다. 현재 칠레 대통령 관저인 라 모네다에 입주해 있는 사람(대통령)은 여성 혐오적인 돌출 행동으로 유명하며, 임기 내내 언론에 그런 생각을 표출해왔다. 또한 오푸스 데이 추종자들, 낙태 반대 운동가들, 피노체트 장군의 오랜 지지자들은 뒷거래를 통해 결탁함으로써(오늘날 의회에서 소수를 차지하는) 여전히 대통령에게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우파 의원들은 꼼수를 부려, 헌법재판소가 자발적 임신중절과 관련해 ‘제도적인’(그리고 오로지 더 개인적인) 양심적 거부 개념을 받아들이게 했다. 칠레의 보건 시스템은 대부분 민영화돼 있고, 다수의 종교기관이 독점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진료소는 국제법과 마찬가지로 현행법의 적용을 받지 않아, 이제 해당 진료소 내에서는 어떤 임신중절 시술도 시행할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칠레를 뒤덮은 페미니즘의 물결은 칠레 자체 내의 상황만을 토대로 자라난 것이 아니다.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된 거리의 집결에 바탕을 둔 이 물결은 2016년 10월 폴란드에서 있었던 여성 파업에 대한 호소, 2018년 봄 성폭행 가해자들이 석방되자 마드리드에서 벌어진 대규모 시위 영상, 또는 실비아 페데리치, 신시아 아루자, 낸시 프레이저, 혹은 티티 바타차르야 같은 여성 지식인들의 저술에서도 그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럼에도 주요한 토대는 여전히 남미에서 뿌리내린 것이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와 차별을 규탄하는 ‘단 한 명도 잃을 수 없어!’(¡Ni una menos!)라는 외침이 아르헨티나에서 들려온 것처럼, 자발적 임신중절의 합법화를 위한 투쟁의 상징이 된 녹색 스카프도 안데스산맥을 가로질러 칠레로 넘어왔다. 남쪽에서 건너온 이 페미니즘은, 1980년대 이후에 조직된(나중에는 비록 분열되고 말지만) 남미대륙 여러 모임의 오랜 경험에서 영향을 받았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에 대해 멕시코의 시우다드 후아레스, 살바도르, 과테말라에서 일어난 저항 역시 모든 이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3월 8일 연합’은 2018년 초에 먼저 산티아고에서, 이어서 다른 지역 조직들과 더불어 구체적으로 조직됐고, 지역 여성 모임들이 시위 프로그램을 확정했다. 1년 뒤인 현재 이 연합은 지역 차원에만 머물지 않고 재정도 그럭저럭 자체적으로 마련하고 있으나, 이 연합에 소속된 단체는 60개에 불과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세대, 성적 지향성, 출신, 관점들을 다양하게 바꿔나가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노동위원회(사회통합, 통신, 물자보급 등)가 설치됐고, 대변인은 각 분야에서 순번제로 선출했다. 우리가 만난 한 젊은 여성 운동가는, “우리는 좌파를 포함해 정계에 존재하는 가부장적이고 남성적인 조직 형태와 관계를 끊고자 했다”고 강조했다. 각 지역의 파업 위원회, SNS, ‘페미니스트 여단’의 거리 활동 덕분에 3월 8일의 파업은 조금씩 성공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연합의 핵심 인물인 알론드라 카리온은, 페미니스트 동맹 파업이라는 발상이 “정확히는 파업할 권리가 누구에게나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계획은 경제활동 중단을 정치적 도구로 복권하려는 데 있다”고 설명했다. 1979년 독재정권이 새 노동법을 공포하면서, 노동조합 결성권을 제한했듯 파업권을 제한했다. 이 시대착오적인 제한법 때문에, 수많은 급여노동자의 파업이 불법행위가 돼버렸다. 게다가, 공공부문 종사자들은 이런 기본적인 권리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 알론드라 카리온 대변인은 “그러나 파업이라는 단어는, 남녀를 차별하지는 않는다. 아직 여성들이 육아나 가사를 주도해야 한다 해도 말이다”라고 덧붙였다. 

투쟁하는 여성들 중에도 여성들끼리 투쟁하자고 주장하는 무리가 있는가 하면, 이에 반대하는 무리가 있다. 또 정당이나 정부 또는 언론과 접촉하자고 주장하는 여성들이 있는 한편, 이런 접근법을 위험하다고 주장하는 여성들도 있다. 이렇게 생각의 차이는 있지만, 수많은 여성이 몇 주에 걸쳐 투쟁 중이다.

 

여성 3명 중 1명이 성폭력을 경험한다

2018년 12월, ‘투쟁하는 여성들의 다국적 모임’은 군중이 일궈낸 업적의 정점을 찍었다. 이 모임은 전국 각지에서 1,200명의 여성을 동원해 3월 8일 파업 참여를 권유하고, 10개 조항으로 구성된 프로그램을 제시했다.(6) 카리요는 이 프로그램의 목적이, 페미니즘이라는 문제를 사회운동 전반에 걸쳐 확산하는 데 있다고 설명한다. 가령 이주여성들의 주장은 ‘반(反)성차별적이고 반식민주의적이며 비종교적인, 상품화되지 않은 교육’을 요구하는 문서에 기재돼 있다. 또한 토착 원주민들의 자기 결정권 인정과, ‘자유롭고 합법적이며, 안전한 무료 낙태시술’의 지지 및 ‘여성에 대한 정치적, 성적, 경제적 폭력의 종식’을 지지하는 내용도 담겨 있다.  

공식집계에 의하면 칠레 여성은 3명 중 1명이 일생에 한 번 이상 성폭력을 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수년 전부터 ‘칠레 여성 폭력 방지 네트워크’는 성폭력 피해를 경험한 이 여성들이 평균적으로 매주, 남성에 의한 구타(법체계 내에서 이런 폭력은 여성 살해로 간주하지 않는다)로 사망하는 현실을 폭로하고 있다.(7) 여성 운동가들은 여성에 대한 이런 신체적 폭력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모델의 폭력과 동일하게 본다. 카리요와 그의 동료들은 엘리트 중심의 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을 거부하면서 젠더, 인종, 계급에 대한 억압 사이에 공통분모가 있음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며, 정부 및 현재 시행 중인 정책들에 정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여성들은 사실상 안데스 지역에 스며든 초자본주의의 첫 희생양에 속한다. 법정 노동시간이 주 45시간이고 급여노동자의 70%가 월 730유로를 받는 이 지역에서, 여성들의 임금은 남성보다 30% 낮은 수준이다.(8) 건강문제와 관련해서도 여성들은 ‘위험’ 요소로 간주되는 임신 가능성 때문에 사보험에서 차별을 받는다. 1980년대부터 전적으로 연기금이 관리하는 연금 관련 사안들도 마찬가지다(여기에는 칠레 현 대통령의 형이자 독재정권 당시 노동부 장관이었던 호세 피녜라의 입김이 작용했다).

그러나 내외적으로 이 여성 연합에 쏟아지는 비난도 만만치 않아, 연합의 단결 의지를 위협하고 있다. 마푸체족 출신의 젊은 여성 시인이자, 식민지 해방 단체 ‘랑기녜툴레우푸(Rangiñtulewfü)’ 회원인 다니엘라 카트릴레오는 “현재 헤게모니를 장악한 페미니즘 운동은 학생운동 및 대학 내 성희롱과 싸우는 문제에 너무 얽매여 있다”고 강조한다. 타협점을 찾을 생각은 없는 듯, 다니엘라는 이렇게 덧붙인다. 

“인종차별을 당한 여성들, 마푸체족의 요구들, 칠레 내 식민지주의는 눈에 띄지도, 고려되지도 않았다. 우리는 페미니스트 ‘동맹 파업’에 대한 호소에도 비판적이었다. 특히 북미와 유럽의 여러 운동에서 건너온 이 슬로건이, 고용이 불안정한 다수의 여성과 이주 여성을 배제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비판한 것이다.” 이런 비판에 대해 카리요는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우리는 네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파업을 추진했다. 상황이 허락한다면 급여노동자들의 직장 내 파업, 가정에서는 육아 및 비급여 노동의 거부, 소비 중단,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공장소에서의 시위가 그것이다.”

마지막 방법인 공공장소에서의 시위가 지난 3월 8일 시위의 핵심이었다. 국가 차원의 주요 노조조직 ‘노동조합 총연합회’(CUT)가 페미니스트의 호소를 지지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시위의 확산에 걸림돌로 작용했다. 노동조합 총연합회 위원장은 공산당의 여성 지도자인 바르바라 피게로아가 맡고 있으나, 지휘부는 연합회가 관할하지 않는 문제들을 통솔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다. 그럼에도 발파라이소 항구 등 일부 도시들에서는 호전적인 노조조직들이 경찰의 강경 진압을 무릅쓰고 과감하게 활동을 벌였다. 교수연합회 및 전국 시(市)보건 연맹 같은 다른 공무원 단체들도 활발히 참여했다.

 

백인·중산층 중심의 페미니즘을 뛰어 넘어

노동법 전문가이자 페미니스트 운동가인 카리나 노알레스는 3월 8일의 성공을 언급하면서, 몇 개월 만에 엄청난 진전을 이룩했다며 반가워했다. 그럼에도 카리나는 특히 산티아고의 수많은 포블라시온(빈민가) 거주 여성들이나 이주 여성들 또는 하급 여성 노동자들에게 다가가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페미니스트 운동’은 백인과 중산층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이미지가 강해 거부감을 일으키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카리나는 연합의 목적에 대해 설명했다. 

“우리는 포블라시온과 일부 노조에서, 그리고 특히 여성 비중이 높은 분야(교육, 보건, 행정)에서 ‘페미니스트 운동’의 보다 큰 통합을 향해 진일보했다. 연합의 목적은 모든 여성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즉 서민층이든 중산층이든, 이주민이든 여성 모두의 기대를 충족시킬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 최초의 여성 파업에는 잡음이 따랐지만, 그럼에도 큰 진전을 이룩했다. 앞으로 이 연합은 프로그램의 기초를 완성해 새로운 논의를 열어가고, 칠레 북부에서 남쪽 끝의 파타고니아, 나아가 국제적으로 통일된 노동조건을 확고히 다지는 행보를 계속할 것이다. 이 연합의 공공연한 목적은 이주여성, 노년층 여성, 미성년 여성 모두를 아우르고, 여성 수감자들까지 포함해 보다 견고한 다리를 놓는 것이다. 카리요는 강조했다. “특히 전국에서 극우 세력과 반대파들이 득세하는 이때, 페미니즘이 현실적인 해결책임을 보여줘야 한다.”

칠레에서 시행된 여론조사는 가톨릭교회가 설 자리를 잃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게다가, 교계 각층에서 내부적으로 증가하는 소아성애 추문은 이런 불신을 심화시키고 있다. 반면 개혁에 우호적인 신교 종파들은 증가 추세로, 여성 목회자 두 명이 이미 페미니스트 모임에 참여한 바 있다. 그러나 일부 파시스트 집단들은 여전히 페미니스트, 레즈비언, 트랜스젠더를 종종 폭력적으로 비난한다. 

한편, 정치판이 새롭게 구성되면서 극우파 인물들이 언론 및 선거에 진출하기가 더 수월해졌다. 일례로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공화주의 행동’ 소속) 의원은 ‘젠더 이데올로기’를 규탄했다. 그는 ‘질 떨어지는 페미니스트’들과 낙태를 강경하게 거부하며, 가톨릭신자에 민족주의자이며 가정을 지키는 여성만이 ‘진정한 칠레 여성’이라고 주장한다. 

 

 

 

글·프랑크 고디쇼 Franck Gaudichaud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그르노블-알프스대학교 라틴아메리카 역사학과 부교수. 프랑스 라틴아메리카 협회 회장. 저서로 『오늘날의 칠레.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지배하고 저항하기(Chili actuel. Gouverner et résister dans une société néolibérale)』, (L’Harmattan, Paris, 2016, 공저)가 있다. 

번역·조민영 sandbird@hanmail.net
번역위원

 

(1) 강간으로 인한 임신의 경우, 산모의 건강이 위태로운 경우, 태아가 생존 불가능한 경우
(2) ‘Un entrepreneur multimillionnaire à la tête du Chili(대부호 기업가, 칠레의 수장이 되다’, <La Valise diplomatique>, 2010년 1월 19일, www.monde-diplomatique.fr
(3) Hervé Kempf,  ‘Au Chili, le printemps des étudiants(산티아고의 봄은 번져간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1년 10월. 
(4) Nicole Forstenzer, 『Politiques de genre et féminisme dans le Chili de la postdictature, 1990-2010(독재정권 이후 칠레의 젠더 정책과 페미니즘, 1990~2010)』, L’Harmattan, coll. <Anthropologie critique>, Paris, 2012.
(5) 칠레 국립통계연구소, 산티아고, 10~12월, 2017.
(6) http://cf8m.cl/encuentros
(7) www.nomasviolenciacontramujeres.cl
(8) ‘Los verdaderos sueldos de Chile(칠레의 실질 임금)’, Fundación SOL, Santiago, 2018, www.fundacionsol.c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