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의 민주화 ‘레포르마시’

2019-05-31     레미 마디니에 l 연구원
지난 4월 17일 인도네시아에서 대선이 실시된 가운데, 조코 위도도(일명 조코위) 현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유일한 야권 대선후보인 프라보워 수비안토를 물리치고 대통령에 재선되자, 일각에서는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대선주자는 5년 전과 동일했지만, 이념적 노선의 경계는 희미해진 것이 이번 대선운동의 특징이었다.

 

프라보워는 전 부인이 육군 참모총장 출신 대통령이었던 수하르토의 딸로, 그 역시도 군인 출신이다. 그는 2014년 대선에서, 1966년부터 1998년까지 집권했던 수하르토의 독재정권 체제인 ‘신질서’(Ordre Baru)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집회에서 강경파 이슬람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은 그는 ‘레포르마시(Reformasi, 개혁)’라는 민주주의적 무질서를 바로잡아 확신으로 가득 찼던 과거로 돌아가고자 했다. 레포르마시는 인도네시아에서 독재정권이 몰락한 뒤 서서히 찾아온 변화의 물결이었다. 반면 조코위는 서민출신으로 개발 과정에서 소외된 이들을 기억하고 프라보워가 야기한 민족적, 종교적 갈등을 완화하고자 했다.(1)   

조코위의 대통령 임기 5년에 대한 평가는 특히 인권에 있어서 엇갈린다. 대통령은 파푸아 주의 분쟁을 종식시키고자 노력했지만,(2) 파푸아 서부에서 도발이 계속되자 정부군을 파견해 반군을 지속적으로 탄압한 바 있다. 진보 진영의 실망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조코위는 인도네시아 최대 이슬람단체인 나들라툴 울라마(NU) 출신의 노장 보수주의자 마루프 아민을 부통령 후보로 지목했다. 반면 프라보워는 경쟁후보에 비해 교양 있는 말투를 사용하며 초대 대통령인 수카르노를 연상시키는 복장을 입었다.(3) 또한, 미국 유학 경험이 있는 젊은 부통령 후보(산디아가 우노 자카르타 부지사)를 내세웠다. 

서구 언론은 조코위의 재선(조코위 56.3%, 프라보워 44.7% 득표)을 반겼다. 대선뿐만 아니라 총선, 지방선거도 같은 날 진행됐기에, 투표에 참여하는 시민들보다, 투표를 조직하고 개표를 담당하는 5백여 명의 자원봉사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더 부각되기도 했다. 물론, 선거에서 드러난 핵심문제를 증언하는 이들도 바로 이 (인도네시아식 표현을 빌리자면) ‘민주주의의 순교자’들이다. 이들에 의하면, 이슬람권에서 흔치 않은 민주주의 국가인 인도네시아는 광적인 포퓰리즘, 극단적 민족주의, 독재적 이슬람주의라는 세 가지 재앙(4)을 피할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는 과거에 걸어왔던 길을 앞으로 5년간 더 묵묵히 걸어갈 것이다. 

참혹했던 ‘아랍의 봄’과 달리, 레포르마시는 레볼루시(혁명-역주)를 소리 없이 꽃피우고 있다. 게다가 인도네시아 국민들은 실수하지 않았다. 80%에 육박한 투표율은 2004년 이후 가장 높은 수치였기 때문이다. 이 높은 투표율과 인도네시아에서 태동하고 있는 변화의 움직임을 이해하려면, 선거기간의 쟁점을 살피는 동시에 과거를 돌이켜봐야 할 것이다. 선거를 1주일 앞둔 시점에서, 프라보워는 수십만 명의 지지자를 자신의 집회에 집결시키고는 본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강경한 이슬람 정체성 확립을 주장하며 “조국을 빼앗겼으며” “울라마들이 박해를 받고 있다“(5)고 지지자들을 선동했다. 

이어서 하비브 리지에크 시하브가 관중석의 열기를 더했다. 그는 사우디아라비아 유학생 시절부터 독설을 일삼았으며, 이후 법망을 피해 인도네시아로 돌아온 원리주의 이슬람 단체인 이슬람수호자전선(FPI)의 지도자였다. 그는 연설에서 “프라보워와 산디아가는 이슬람의 적이 아니며, 공산주의자, 자유주의자, 이단 등의 부적절한 불법행위를 비호하지 않았다”며, 암묵적으로 이 모든 악행에 대한 책임을 조코위에게 돌렸다.

선거 3주 후 프라보워는 국민들의 선택에 불복했다. ‘신질서’ 시대 말미에 지은 악행을 면죄 받는 데 길든 정치인이었던(6) 그는 두 번째 낙선의 고배를 참을 수 없었다. 2년 전 프라보워는 극단주의 이슬람주의자와 결탁해 조코위의 오른팔이었던 바수키 차하야 푸르나마(일명 아혹) 전 자카르타 주지사를 신성모독 혐의로 몰아 투옥시켰다.(7) 

2016년 12월 2일(‘212 재결집 운동’은 여기서 유래한 명칭임-역주)에 있었던 대규모 집회에서 주최 측은 중국계 기독교인, 아혹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8) 투명한 민간자본 시장을 위한 규제정책에 반대해온 몇몇 큰 손들이 이 집회를 후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4년 온라인 선거운동에서 조코위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다고 공격한 프라보워는 조코위의 측근이 이슬람 경전인 코란을 모독했다는 ‘아혹 스캔들’을 다시 한번 들먹이며 차기 대선 구도에서 유리한 입지를 선점하고자 했다. 하지만 두 번째 작전은 성공하지 못했다. 조코위가 선거운동에 흑색선전이 난무하다며 적들의 공격을 저지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 정치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신질서’에서 비롯된 과두정치가 민주주의의 성장을 가로막았다는 점이다. 지난 15년간 이룩한 비약적인 경제성장의 결실은 사회에 고르게 분배되지 않았다.(9) 옥스팜은 2017년 발간한 보고서에서 인도네시아를 세계에서 6번째로 불평등한 국가로 지목했다. 이 나라에서 가장 부유한 4명은 인구의 약 40%(10만 명)를 차지하는 경제적 취약계층보다 더 많은 부를 축적하고 있다. 

정치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하는 소수의 지배자에게 관건이 되는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돈이다. 2004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부패척결위원회(KPK)가 지목한 장관, 국회의원, 공무원, 사업가, 지방자치단체장 등 약 4천 명은 법의 심판을 받았다. 하지만 이 부패척결위원회를 주기적으로 감시하는 곳은 그 나라에서 가장 부패했다는 국회의원, 경찰, 사법관으로 구성된 정체불명의 단체다.

두 번째는 정치권에서 이슬람의 물결이 거세지고 있다는 점이다. 전통적으로 인도네시아의 무슬림은 그 색채가 강하지 않았으나, 최근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속에서 극단주의적 이슬람이 득세하며 정치인들이 이를 악용하고 있다.

조코위는 경제 분야에서 경제적 불평등을 근원적으로 해소하기보다는, 경제적 성과가 모든 이들에게 분배될 수 있는 전략을 세우며 과두 정치권과 차별성을 뒀다. 과두정치와 선을 긋는 몇 안 되는 정치인이었던 그는 5% 대의 비약적인 경제성장률, 8%에서 2.5%로 감소한 인플레이션, 도로, 다리, 공항과 같은 인프라 건설과 같은 성과 덕분에 재선될 수 있었다. 과거의 부패한 정치권에서는 외면했던 부분들이었다. 

국민의 약 40%가 절대적 빈곤층인 인도네시아에서 경제적 취약 계층을 지원하는 정책을 펼친 것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그의 업적이다. 그가 입법화한 최저임금제는 현재 34개 주와 여러 도시에서 시행 중이다. 또한 대통령은 무담보 소액 대출을 장려하고, 아직은 걸음마 단계였던 사회보장제도를 보편화했다. 이는 유권자들이 최빈곤층에게 제공될 푸드쿠폰, 직업교육 및 고등교육의 기회를 공약으로 내건 조코위를 신뢰할 수 있었던 이유다.

조코위는 공개토론회에서 공산주의자로 공격받기 십상인 이데올로기 논쟁에 뛰어드는 대신, 자신의 정책을 차분하게 추진했다. 조코위의 초기 지지층 일부에서는 대통령이 환경오염, 토지 횡령, 인도네시아 학살(1965~1966) 문제(10)에 소극적이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그는 인도네시아에서 최빈곤층을 위해 가장 많은 업적을 남긴 대통령이다.(11)

종교라는 예민한 문제에서도 그의 실용주의 노선은 계속됐다. 조코위는 자신의 오른팔이었던 아혹을 잘라내며 법의 심판대에 세웠고, 이슬람교의 압력에 정치적 결정을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이 위협적인 현실은 조코위 지지층이 결집하는 계기가 됐다. 조코위가 히즈붓 타흐리르 인도네시아(HTI, 극단주의 범이슬람 운동 조직)를 불법화하고 인터넷상에서 민족과 종교적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메시지를 금지하는 강경책을 펼치는 것에 대해서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종교계에선 ‘울레마(이슬람 문화권의 각 마을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훈련된 성직자-역주)를 불법화하고 있다’며 반발했으나 성과는 없었다. 조코위가 러닝메이트로 마루프 아민 이슬람 최고 의결기구 울레마협의회(MUI) 의장을 지목한 것은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마루프 아민이야말로 아혹을 축출한 주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선택에는 세 가지 측면에서 가치가 있었다.

첫째, 총 회원 5천만 명의 인도네시아 최대 이슬람단체인 나들라툴 울라마는 레포르마시 이후 처음으로 선거운동에 거의 전적으로 동참했고, 이로 인해 조코위는 인구가 편중된 자바섬에서 2014년에 비해 훨씬 많은 표를 얻을 수 있었다.(12) 둘째, 나들라툴 울라마는 212 집회를 주도한 이슬람 강경파 세력을 분산시켰고, 조코위는 종교적으로 중도성향인 신흥중산층의 표심을 얻는 데 성공하게 된다. 기득권층과 달리 신흥중산층은 집권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조직을 신뢰하지 않았던 것이다. 신자들과 단체에 소속되지 않은 전도사들은 비방이 난무하고 순교를 신성시하는 극단주의자들에게 등을 돌렸고, 도를 넘는 강경주의자들을 외면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들라툴 울라마는 조코위를 지지하며 종교적 다원주의의 필요성만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올바른 이슬람교도들이라면, 강경파가 주장하는 이슬람교도의 정통성과 극단주의를 공개적으로 비판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이 메시지야말로 2019년 4월, ‘올바른 이슬람교도’들이 조코위-아민에게 투표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아민은 마지막 선거집회에서 “생각이 다른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저에게 투표하고 싶지 않다면, 조코위에게 표를!”이라고 말하며 기타 유권자들을 설득했다.

종합해보면, 나들라툴 울라마를 선택한 것은 이슬람 강경파를 가장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단이라는 점에서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였던 셈이다. 지난 20여 년 동안 무패 행진을 이어가던 인도네시아 이슬람교도들은 그들에게 이정표가 될 패배를 겪은 것일 수도 있지만, ‘혼돈의 세계’(13)에 취약한 인도네시아의 민주주의를 지켜내고자 애쓰는 조코위의 도전에도 의미가 있다.  

 

 

 

글·레미 마디니에 Rémy Madinier
동아시아 연구소(Institut d’Asie orientale-CNRS) 연구진. 최근 저서로는 『현대 인도네시아(Indonésie contemporaine)』(Coédition Les Indes savantes, Paris, 2016)가 있다.

번역·권경아 jaimelapomme@naver.com
번역위원

 

(1) ‘조코위, 과두 정치의 레포르마시 안의 이단아(Jokowi, un trublion dans la Reformasi des oligarques)’, Archipel91호, Paris, 2016.
(2) Philippe Pataud Célérier, ‘파푸아 독립운동에 나선 소수민족 파푸아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5년 2월호‧한국어판 2015년 4월호.
(3) 프라보워는 1950년대 말 독재정권 초대 대통령처럼 검은 정장, 흰 셔츠, 빨간색 넥타이, 검은색 벨벳으로 만든 전통 모자인 ‘뻬찌(Peci)’를 쓴 모습을 자신의 홍보 포스터에서 보여줬다.
(4) Vedi R. Hadiz, 『Islamic Populism in Indonesia and the Middle East』,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6.
(5) <콤파스(Kompas)>, 자카르타, 2019년 4월 8일.
(6) 그는 1970년대 후반 동티모르에서 비리를 저지른 뒤 수하르토 정권이 퇴진할 당시 폭력사태를 선동한 혐의를 받았다. 동료들의 압박으로 군복을 벗고 요르단에서 몇 년을 보냈지만, 자신의 범죄로 민사법정에 서는 일은 없었다.
(7) ‘주지사, 코란과 이슬람의 모독: 아혹 스캔들(Le gouverneur, la sourate et l’islamiste adultère: retour sur l’affaire Ahok)’, <Archipel> 95호, 2018.
(8) Marie Beyer, Martine Bulard, ‘Menaces sur l’islam à l’indonésienne(이슬람에 대한 인도네시아식 위협)’,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7년 8월호. 
(9) Michele Ford 와 Tom Pepinsky, 『Beyond Oligarchy: Wealth, Power, and Contemporary Indonesian Politics』, Cornell University, coll. Southeast Asia Program Publications, Ithaca, 2014.
(10) 50만 명에 이르는 시민이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학살당했다. ‘1965년 인도네시아의 비극, 새롭게 기술된 역사, 여전히 반쪽 자리의 기억(La tragédie de 1965 en Indonésie: une historiographie renouvelée, une mémoire toujours tronquée)’, <Archipel> 88호, 2014. / Lena Bjurström,  ‘Indonésie 1965, mémoire de l’impunité(기억해야 할 인도네시아의 1965년 학살극),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5년 12월호.
(11) 조코위 임기 중 지니계수가 0.2점 하락했다.
(12) Edward Aspinall, ‘Indonesia’s election and the return of ideological competition’, <New Mandala>, 2019년 4월 22일, www.newmandala.org
(13) Thomas Gomart, 『혼돈의 세계. 지정학적 10가지 과제(L’Affolement du monde. Dix enjeux géopolitiques), Tallandier, Paris,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