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호랑이에 불과한 유럽 공동방위군

2019-05-31     필립 레이마리 l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진정한 유럽 공동방위군을 창설하지 않는 한 유럽 시민들을 온전히 보호할 수 없습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2008년 11월 6일 <유럽1> 라디오 인터뷰에서 이렇게 주장하며 “유럽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러시아가 군사적 위협을 가하고 있습니다. 유럽은 주권을 행사하는 방식으로 자체 방위능력을 갖춰야 합니다. 미국만 믿고 의존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설명했다. 며칠 후, 11월 14일 유럽의회에 참석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연설을 통해 “명실상부한 유럽군을 구축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노력을 기울이자”라며 마크롱 대통령의 주장을 지지하는 뜻을 밝혔다. 메르켈 총리는 한발 더 나아가 비상임 윤번 의장국 제도를 갖춘 ‘유럽 안전보장 이사회’를 신설하자고 제안하고 나섰고, 이는 전체 유럽연합(EU) 회원국의 동의를 거치지 않아도 ‘중요한 사안에 신속히 대응하는 방안’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하지만 유럽 공동방위군 창설은 말처럼 쉽지 않다. 현재 ‘유럽 방위체계’는 조직화된 영토방위가 아닌 회원국 간 단순협력 수준에 그치고 있다. EU 회원국 확장세가 현재 진행형이기에 EU의 영토범위 또한 가변적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전방위적 전투병력이나 군사지휘권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탓이다. 여러모로 ‘방위체계’라는 명칭이 무색한 상황인 셈이다. 

최근 EU 내에서 발트 3국, 북유럽 및 동유럽 국가들은 이웃 국가인 러시아의 심상치 않은 행보로 안보 불안을 겪지만, 서남부 유럽에서는 아프리카와 중동지역의 정세불안으로 우려가 고조되는 상황이다. EU 차원의 단일한 방위전략을 수립하기도 쉽지 않다. 위베르 베드린 전 프랑스 외무장관(1997~2002)은 수십 년째 ‘안위와 평화’를 누리고 있는 유럽의 지도자들을 지칭해 ‘전략도 없이 혼수상태에 빠진 이들’이라고 혹평한 바 있다. 같은 맥락에서, 크리스티앙 말리 전 탈레스그룹 전략기획본부장은 지역 방위에 우선순위를 정하고 공통의 적대국을 식별해내려는 EU의 잇따른 시도가 매번 ‘공허한 구호와 뻔한 실패’로 돌아갔다고 지적하기도 했다.(1) 

그 결과, ‘유럽 방위공동체’는 유독 거창한 명칭과는 달리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의 ‘상호협력’과 ‘역할분담’이라는 미명 하에 그저 미국이 주도하는 몇몇 소규모 군사 프로젝트를 수행했을 뿐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2) 관련 사례로는 ‘피터스버그 선언’을 꼽았다.(3)

 

라이언 일병은 유럽 해안에 상륙하지 않는다

그러나 최근 EU는 바야흐로 새로운 도약의 국면을 맞이했다. 다양한 변화의 바람이 불어왔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 뱅상 데포르트 장군은 “미군소속인 라이언 일병이 유럽 해안에 상륙하는 일은 앞으로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4) 이는 과거 장 마리 게노 전 UN 평화유지담당 사무차장의 말처럼 ‘군사사상 및 전술’은 유럽 중심주의를 탈피한 지 오래다. 또한, 미국 외교정책의 중심축도 아시아로 이동한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데포르트 장군은 방위와 안보의 경계가 모호해진 최근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오늘날의 전쟁터는 돈바스 분지(돈바스 전쟁이 발발한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역주), 아프리카 사헬 지대(새로이 부상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본거지-역주), 파리의 바타클랑 극장(2015년 11월 파리 테러 인질극이 벌어진 장소-역주) 등 특정 장소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빈번히 발생하는 테러공격에 노출된 유럽 사회, 급증하는 국방비 지출(장거리 포탄, 해공군 합동 전투, 미사일, 로봇, 드론, 지뢰 전쟁, 수륙작전, 공중폭격, 정보통신, 우주항공 분야 등) 문제도 간과할 수 없다. 현 추세라면 얼마 안 가 전면전이나 장기전에 독자적으로 대응할 방위력을 갖춘 유럽 국가가 전무한 실정에 이를지 모른다.

유럽의 안보망 도처에 균열이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도 27개 EU 회원국의 대응을 부추기는 요인이다. 미국이 불과 몇 달 만에 탄도탄요격미사일조약(ABM)과 중거리핵전력조약(INF)에서 잇달아 탈퇴했고, 러시아도 유럽 재래식무기감축조약(CFE)을 비난하면서 2021년에 기한이 만료되는 뉴 스타트(START. New Strategic Arms Reduction Treaty - 새로운 전략 무기 감축 협정)를 갱신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 사이, 영국의 브렉시트 결정은 EU의 안보국방협력에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과거 수십 년간 영국은 EU 상비군 창설이나 유럽방위청(EDA)과 같이 NATO의 역할을 축소하거나 미국과의 관계를 저해할 우려가 있는 모든 활동을 철저히 견제해왔기 때문이다. 

2년 전부터 상황이 진전되기 시작했다. 7개년 예산 규모가 약 130억 유로에 달하는 유럽방위기금(EDF)이 설치된 것이다. 유럽에 주둔하거나 대외 작전에 투입될 전투 병력도 소폭이나마 증원(2,500명)됐다. 30여 가지에 달하는 개선사항을 규명했고, 이에 따라 향후 다양한 프로젝트를 추진할 예정이다(예: 중고도 장시간 체공 드론). 각각의 프로젝트는 ‘항구 협력체제’라는 틀을 갖추고 회원국의 자발적 참여로 진행된다. 또한, 신속대응군 형태의 방위군 창설을 목표로 기금(65억 유로)이 조성됐고, 유럽평화기금(105억 유로)을 활용해 협력국, 특히 아프리카 지역에서 일어나는 위기사태에 자체 대응하도록 했다. 이 모든 예산은 오는 2021년부터 집행된다.

현재로서 이 계획의 상당 부분은 서류상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2019년 4월 18일 유럽의회가 예산안을 승인했지만, 구체적인 운영방안은 국가 간 협의를 거쳐야 한다. 예를 들어, 유럽방위기금의 사용처를 유럽 기업에 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프랑스의 주권주의 정책 기조를 따를 것인지, 혹은 국가를 불문한 모든 방위산업체를 대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네덜란드 자유당, 독일 사회민주당, 폴란드 지도자, 그리고 미국 관료들의 요구를 따를지 논의해야 한다. 

특히 미국은 과거에 자국 기업이 유럽 시장에서 배제됐다는 이유로 보복조치를 단행하겠다고 유럽을 협박한 전력이 있다. 사회당 소속인 엘렌 콘웨이-무레 상원 부의장은 미국의 이런 관행을 비판하며 “미국은 어떤 국가보다 가장 결연하고 오랜 동맹을 유지해온 유럽 국가들을 대상으로 위험한 게임을 벌이고 있다. 미국은 자주방위 역량을 갖추고자 애쓰는 유럽을 좌절시키려 한다”고 말했다.(5)

 

미국 F-35 전투기를 선택한 벨기에

그러나 영국의 고립을 막고자 유럽방위기금 사용처를 비EU 국가로까지 대폭 개방할 경우, 자칫 유럽 방위산업 연구개발에 투자 중인 미국, 이스라엘, 어쩌면 중국마저도 자체부담하는 자국의 연구개발 예산을 삭감하도록 부추기는 결과(이른바 트로이목마 전략)를 초래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유럽산 군사 장비가 EU 방위산업 시장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하는 현 상황도 감안해야 한다. 현재 EU 국가들은 총 178종의 무기 시스템(미국 산 30종)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20여 종은 장갑차, 3종은 전투기 시스템이 차지한다. 2017년 기준, 유럽군이 지출한 2,270억 유로 중에서 ‘비EU’ 시스템 구매에 쓰인 금액은 250억 유로에 달할 것으로 추산한다.(6)

최근 벨기에 정부가 라팔, 유로파이터, 그리펜 등 EU국 제품이 아닌 미국 F-35 전투기를 선택한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유럽 10개 국가에서 채택한 F-35는 이제 막 운용에 돌입한 모델이다. 이 모델은 독자규격의 폐쇄적 시스템과 기밀유지 의무, 제조사(록히드 마틴)의 특정 소프트웨어 사용의무, 그리고 무엇보다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이 특징으로 국방예산을 잡아먹는 블랙홀로 불린다. 2019년 3월 18일 워싱턴D.C 아틀란틱 협의회를 방문했을 당시 플로랑스 파를리 프랑스 국방부 장관은 “NATO 집단방위 조항 번호는 F-35가 아니라 제5조”라고 꼬집으며 미국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현재 유럽군의 활동은 군사훈련에 그치고 있고 정규군도 아직 편성되지 않은 상태다. 지난 13년 동안 6개월마다 순환배치되는 방식으로 1만 3,000명의 병사가 전투단에 배정됐으나, 이 중 실전배치된 전투단은 하나도 없다. 2003년 콩고민주공화국에서 공정선거를 담보하기 위해 벌였던 ‘아르테미스 작전’이나 2008년부터 인도양에서 펼친 ‘아탈란테’ 소말리아 대해적 작전처럼 정교한 작전은 재원이 부족한 오늘날에는 추진하기 어렵다.

최근 논의는 군사장비 개발에 대한 공동투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적용기준과 추진일정, 제조국과 소비국 간의 전략 우선순위를 조율하기란 쉽지 않다. 유럽 위성항법 시스템 ‘갈릴레오’와 같은 예외사례도 있긴 하다. 2001년에 착수했지만, 발사 연기와 막대한 비용이 추가되는 등 시행착오를 거쳐, 최근에야 본격 가동됐다.(7) 군용수송기 A400M와 유로콥터 타이거 EC665도 같은 문제에 직면한 바 있다.

미국 군수장비를 반강제로 구매하는 EU 회원국은 이중고에 시달린다. 미국 제품을 구매할 경우, 자국이나 타 회원국 방산 업체의 시장점유율이 하락하는 문제도 발생하지만, 동시에 국방비 지출이 증가하면서 고비용을 유발하는 소형 ‘분재군대’를 유지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8) 프랑스군은 유럽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하며 수입 장비에 가장 적게 의존하지만, 항공모함을 추가로 사들이거나, 우주항공 전략을 설계하거나, 독자 항공 전투 시스템을 구축하는 등 군사적 억제력을 현대화할 여력은 없다. 그러려면 현재와 같은 국내총생산(GDP)의 1.6%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및 NATO가 요구하는 2%도 아닌, 무려 GDP의 3%를 국방비에 할애해야 한다.

국가 간 차이에 기인한 EU 정책의 난맥상으로 유럽 방위체계는 발전의 기약도 없이 답보를 거듭하고 있다. 하지만 방위관련 협약을 차치하고 나면, 자칫 유로존 장관 회의체인 ‘유로그룹’의 성격을 본뜬, 허울뿐인 ‘공동방위 그룹’의 선을 넘지 못할지도 모른다. 2018년 6월 25일 ‘공동의 전략모색’을 목표로 총 9개 회원국이 합심해 발족한 유럽방위 이니셔티브를 유럽방위체계의 근간으로 삼는 수도 있다.(9) 더 나아가, 자발적 참여와 가중다수결 방식에 따라 각료 이사회를 구성하고, 국가별로 특화된 기술 분야를 중심으로 기능조정을 거치는 방안도 구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밖에도 EU 타 기관들과는 어떤 방식으로 협력해 나갈지도 검토해봐야 한다.

 

독일과 프랑스의 국방정책 차이

한편, 유럽 방위체계를 주도하고 있는 독일과 프랑스가 국방정책에 있어 서로 매우 큰 차이를 드러낸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전범 국가로서의 과거에서 벗어날 수 없는 독일은 연방의회(Bundestag)의 사전 승인 없이는 교전뿐 아니라 비상상황에서도 연방방위군(Bundeswehr)을 작전에 투입할 수 없도록 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된 독일 육군병사들의 주된 임무는 원조활동이었고, 독일 공군의 토네이도 조종사들도 정찰 임무만을 수행했다.(10) 반면, ‘실행능력’에 초점을 두고 통수권을 가진 대통령의 결정만으로 바로 전쟁에 돌입할 수 있는 프랑스의 국방체계는 유럽 내에서 특수한 사례로 꼽는다. 이런 방식은 신속성을 보장한다는 장점이 있지만, 정치적 사실상 배제하는 단점을 지닌다.

양국의 무기수출 방식도 국방정책과 별반 다르지 않다. 독일은 사회민주당의 영향으로 무기판매에 많은 제약을 가한다. 과거 독일 정부는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한 무기판매 금지조치를 내리기도 했다. 반면 프랑스는 자국의 무기를 수입하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예멘에서 전쟁 범죄를 저지르더라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프랑스 정부는 국가와 유럽 차원에서 최소한의 자주국방과 자치권을 유지하는 방편으로 방위산업을 관리하고자 한다. 유럽 ‘공동방위 그룹’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프랑스 핵 보장 범위 확대 문제가 제기돼 난항이 빚어지기도 했다. 현재 프랑스는 EU 내에서 유일하게 독자적 핵 억지력을 보유한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다. 독일의 일부 정치인은 프랑스가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자리를 유럽의 공동의석으로 내놓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브렉시트와 무관하게 유럽 안보관계에 따라 영국은 EU와의 군사협력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2010년 랭커스터 조약(Lancaster House Treaties)을 체결한 영국-프랑스 양국은 EU 전체 국방연구개발의 80%와 관련 투자의 50%를 점유하고 있다. 또한 공동원정군 구성이나 미사일 설계, 핵 시뮬레이션 등 민감한 분야도 상호협력하기로 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유럽 동맹관계에서 필수적인 의무사항을 규명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회원국은 국방지출을 확대해야 하며, 실효성 있는 상호방위조항도 마련해야 한다”고 역설했다.(11) 마크롱 대통령이 구상하는 방위 안보조약에 영국의 참여를 촉구하는 방안도 모색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동맹관계와 가변적 타협 사이에서 골칫거리로 전락한 데다, 정치수사와 방위산업에 얽힌 첨예한 이해관계에 눌려 평가절하된 ‘유럽 방위체계’가 과연 현상을 타파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글·필립 레이마리 Philippe Leymari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블로그 ‘온라인 국방’ 코너 운영(https://blog.mondediplo.net)

번역·이푸로라 
번역위원

 

(1) ‘Autopsie de l’Europe de la défense. Entretien avec Christian Malis(유럽 방위 해부하기. 크리스티앙 말리와의 대담)’ <Inflexions>, 33호, 파리, 2016년.
(2) Gabriel Robin, ‘Un donjon d’un autre âge(NATO 지난 시대의 녹슨 울타리)’,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9년 3월호‧한국어판 19년 4월호. 
(3) 1992년 6월 19일 채택된 ‘피터스버그 선언(독일)’은 다음의 목표를 담고 있다. ‘인도주의적 구조 활동과 난민구조, 분쟁예방과 평화유지, 위기관리에 대응하는 전투군. 작전수행, 군비축소 공동이행, 군사교육과 지원, 분쟁종식 후 사회안정 도모’.
(4) 1944년 미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그린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를 가리킴.
(5) <파이낸셜 타임스>, 런던, 2019년 4월 12일.
(6) ‘Le glaive et le marché Une union de déense renforcerait l’intération éonomique europénne(검과 시장, 공동방위군은 유럽 경제통합을 강화할 것)’, <Question d’Europe>, 486호, Fondation Robert-Schuman, 파리-브뤼셀, 2018년 10월 1일.
(7) Charles Perragin, Guillaume Renouard, ‘Galileo, vingt ans de cafouillages pour le concurrent du GPS’,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9년 5월호.
(8) Frééic Mauro, Olivier Jehin, ‘Pourquoi nous faut-il une armée européenne?(왜 유럽군이 필요한가?)’, Institut de relations internationales et stratéiques(IRIS), 파리, 2019년 1월.
(9) 독일, 벨기에, 덴마크, 스페인, 에스토니아, 프랑스, 네덜란드, 포르투갈, 영국.
(10) ‘Mais que fait donc l’Allemagne en Afghanistan?(독일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무엇을 했는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1년 2월.
(11) 2019년 3월 5일 EU 회원국 28개 일간지에 발표한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