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리, 축구로 권력에 맞서다

2019-05-31     미카엘 코레이아 l 기자

2월 22일 시작된 알제리 반정부 시위의 열기는 식을 줄 모르고 있다. 시위대의 주축을 이루는 젊은 남성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축구를 매개로 정치적 주장들을 표출시켜 왔다. 알제 시 축구클럽들의 응원가는 현재 시위가(歌)로 사용되고 있다.

 

4월 2일 저녁, 알제 시 도심에는 축제 분위기가 감돌았다. 국민들과 군부의 퇴진압력에 못이긴 압델라지즈 부테플리카 대통령이 결국 사임을 발표한 것이다.(1) 신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알제 시의 랜드마크인 중앙우체국 앞에 모인 군중들이 ‘La Casa del Mouradia’를 소리 높여 불렀다. 현 정부에 반대하는 평화적 시위가 시작된 2월 22일 금요일부터 시위가로 사용되고 있는 이 노래는, 원래 알제리의 대표적인 축구클럽 중 하나인 USM 알제(Union Sportive de la Médina d'Alger)의 응원가다. 

이 노래의 제목은 알제 시의 고지대 엘-무라디아(El Mouradia)에 위치한 대통령궁과 강도 집단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큰 성공을 거둔 스페인의 TV 드라마 ‘종이의 집(La Casa de papel)’을 연상시킨다. USM 알제의 서포터 그룹인 울레드 엘-바드자(Ouled El-Badja, 알제 시의 애칭인 ‘빛의 아들들’을 의미함)가 작곡한 이 노래는 알제리 청년들이 토로하는 역겨움과 절망감을 이야기하고 있다. “새벽이 됐는데 잠이 오질 않아. (마약을) 살짝 해보네. 무엇이 옳은 길일까? 나는 누구를 원망해야 하나? 이 삶이 지겨워.” 다음 구절에서는 부테플리카가 집권한 20년을 가차 없이 비판한다. “첫 임기에는 괜찮았지. 그리고는 10년 동안 암흑기였어.(2) (…) 네 번째 임기 때 인형은 죽었어. 그렇지만 나라는 문제없이 돌아가고 있다네….”

알제리에서 축구팀 응원가는 전에도 있었지만, 15년쯤 전부터는 하나의 음악문화로 자리 잡았다. 수적으로 많은 탓에 ‘Chnawas(중국인들)’라는 애칭도 얻은 MC알제(Mouloudia Club d'Alger)의 서포터들은 ‘토리노(Torino)’라는 전용 음악그룹도 두고 있다. 토리노는 지난 1월 발표한 ‘3am Saïd(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곡을 통해 불명예 퇴진한 부테플리카 대통령의 남동생이자 특별고문인 사이드 부테플리카의 각종 불법행위와 알제리 사법시스템의 부패를 비판하기도 했다. 

알제 시 외곽의 축구클럽인 USMH(Union sportive de Madinet El-Harrach)는 ‘Chkoun sbabn?(누구 탓인가?)’라는 제목의 소책자에서 알제리 청년들의 삶이 불행한 것은 정부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유명세를 탔다. 울레드 엘 바드자는 이 분야의 스타다. 2010년 창단한 이 서포터 그룹은 정부의 부정부패를 비판한 ‘Quilouna(우리를 제발 좀 내버려 두세요, 2017)’와 소형 보트에 몸을 싣고 지중해 횡단을 시도하던 난민들(Harraga)을 떠올리게 하는 ‘Babour ellouh(나무 배, 2018)’로 인터넷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La Casa del Mouradia는 대부분의 알제리 청년들이 정부에 대해 생각하는 바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알제 시 서쪽 외곽에 위치한 아인 베니안에 거주하는 17세의 USM 알제 서포터 메디 말룰은 설명했다. “2018년 4월 유튜브에 업로드된 이후 이 영상은 5백만 이상의 뷰를 기록했습니다. 제가 다니는 고등학교에서도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니, 이 노래가 시위가로 사용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수도 알제 시의 구시가지이자 알제리의 전통 음악 샤비(châabi)가 탄생한 곳이기도 한 카스바에 주로 거주하는 USM 알제의 서포터들은, 아랍과 안달루시아 음악의 이색적인 스타일과 오랑(Oran) 시에 뿌리를 둔 현대 대중음악 장르 라이유(raï)에 담긴 사회적 의미에서 영감을 받아 La Casa del Mouradia를 작곡했다. 1969년 6월에 열린 알제리컵 결승전에서 USM 알제의 서포터들은 골대 바로 뒷자리에서 이 알제리 민속곡의 후렴구를 처음으로 함께 불렀다.(3) 

불법 이주, 청년들의 건강을 위협하는 마약, 독재 정부, 고위 관료들의 부정부패, Hogra(권력층의 부당행위와 무관심), 대량 실업이 오늘날 알제리 대중가요의 주요 소재다. 25세 미만이 전체 인구의 45%를 차지하며, 16~24세의 29.1%가 실업상태인 알제리에서, 축구팀 응원가는 Zawali(빈민층의 청년들)가 잃어버린 꿈과 희망을 담고 있다.(4)

 

감정분출, 권력비판이 이뤄지는 공간

“1962년 독립 이래 축구장은 젊은 남성들의 사회적 요구사항을 수용하고 확산하는 공명상자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파리-낭테르 대학교의 강사이자 알제리 스포츠역사 전문가인 프랑스계 알제리인 정치학자 유세프 파테스는 설명했다. “역사적으로 축구클럽은 언제나 권력을 비판하는 공간이었습니다. 축구클럽에는 저항과 반식민주의 투쟁이라는 사회정치적 의미가 깃들어 있습니다.”

무려 5백만 명이 넘는 서포터들을 보유한 MC 알제는 알제리에서 가장 인기 높은 팀이다. 1921년 MC 알제는 알제리 최초의 이슬람 축구클럽으로 창단됐고 반식민주의의 정체성을 전면에 내세웠다. ‘Le Doyen(최고참)’이라는 애칭도 그 때문에 얻었다. 알제리 국민들에 의해 알제리 국민들을 위한 축구클럽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낀 프랑스 당국은, 축구 분야에서 반식민주의 사상이 자리 잡지 못하도록 1930년대 이슬람 축구팀 내에 유럽 출신의 축구선수들을 일정 수 이상 포함해야 하는 쿼터 제도를 만들었다.

알제리 전투(1957)에서 알제독립구역(ZAA)의 민족해방전선(FLN) 군 지도자였던 야세프 사디, 그리고 1954년 독립 전쟁을 일으켰으며 민족해방전선의 전신이던 ‘22명 그룹(Groupe des 22)’의 일원이었던 주비르 부아드자드는 모두 USM 알제 축구팀의 서포터들이었고 또한 USM 알제를 내세워 조직원들을 모집했다.(5) 독립전쟁의 희생자 중 40여 명은 알제리 축구팀과 관련이 있었다. 민족해방전선은 1958년 ‘독립을 위한 11명’이라 불리는 축구클럽을 창단해 알제리의 상황을 전 세계에 알리는 기수로서의 역할을 하게 했다.

축구장은 오래전부터 알제리 국민들의 감정의 분출구였다. 식민지 시대에 서포터들은 아랍계이자 이슬람교 신자인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 종교곡인 Nachîd를 불렀다. 독립 이후에는 문화적 저항의 한 형태로서, 대부분이 JS 카빌리(Jeunesse sportive de Kabylie) 축구팀을 응원하는 카빌리아의 북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축구장에서 ‘Imazighen(우리는 베르베르인)’을 불렀다. 

1977년 6월 알제리컵의 결승전에서는 당시 축구장에 우아리 부메디엔 대통령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과 정부를 격렬하게 비판하는 이 곡이 당당히 울려 퍼지기도 했다. 1980년대 축구장에서는 서포터들이 우선 샤들리 벤제디드 대통령을 조롱한 후, 1988년 10월 민중봉기 때 공권력에 의해 희생된 시위자들을 기리는 구호 ‘Bab-El-Oued Chouhada!(희생자들의 밥-엘-우에드)’와 이슬람구국전선(FIS) 지지자들의 구호 ‘Dawla islamiya(이슬람 공화국)’를 차례로 외쳤다.(6) 파테스는 말했다.

“2000년대에 들어 ‘울트라’ 문화, 독재정부를 비판하는 슬로건, 그리고 완성도 높은 응원가가 등장하면서 알제리 서포터들의 반체제적 역할이 한층 강화됐습니다. 서포터들은 부테플리카의 측근들이 권력을 유지하려 안간힘을 쓰는 것을 보고 2월 22일 반정부 시위를 벌이기로 결심했습니다.” 

‘울트라’ 문화란 축구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서포터 그룹들이 응원가, 플래카드, ‘티포(Tifo)’라 불리는 대규모 시각적 퍼포먼스 등을 통해 조직적이고 과격한 응원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1986년 이탈리아가 사회적 혼란기를 겪던 당시 등장한 문화로, 극좌파 성향의 청년들로 구성된 ‘울트라 그룹’은 급진적 정치단체들의 관행, 예를 들어 기관으로부터의 독립성, 익명문화, 회원들 간의 연대감, 자체적인 자금 조달 등의 방식을 그대로 따랐다. 초창기의 이탈리아 울트라 그룹은 극좌파 테러 집단의 명칭을 따서 이름을 짓기도 했는데, ‘붉은 여단’을 본뜬 AC 밀란의 ‘붉고 검은 여단’, 우루과이의 과격파 게릴라단과 동일한 이름을 사용한 AS 로마의 ‘투파마로스’가 그 예다.

1980년대에 유럽 전역을 휩쓸었던 울트라 문화는 2000년경 인터넷과 SNS를 통해 북아프리카에 상륙했다. 2002년에 Espérance sportive de Tunis 축구팀을 지지하기 위해 결성된 Emkachkhines(요란하게 치장한 사람들)가 아프리카 최초의 반문화적 축구서포터 그룹이다. 이런 울트라 그룹은 2005년에는 모로코, 2007년에는 알제리와 이집트에서도 만들어졌다. 때로는 지중해를 사이에 둔 유럽과 아프리카의 울트라 그룹 간에 유대감이 형성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USM 알제의 울트라 서포터들은 AC 밀란과 USM 알제의 팀 컬러가 붉은색과 검은색으로 같다는 이유를 들어 AC 밀란을 응원한다.

 

“어머니가 편찮으실 땐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는다”

자체적인 조직을 만들어 활동하고 정부 권력에 불복종하는 청년들의 대변자가 된 울트라 그룹은, 정부 입장에서는 공권력에 대한 위협이자, 큰 골칫거리다. 임의적인 체포, 신체적 폭력, 시위 제한 등 서포터들에 대한 경찰의 억압수위는 날로 높아지고 있다. 공권력에 맞선 방어경험과 집결력을 바탕으로 Espérance sportive de Tunis와 튀니지의 또 다른 유명 축구클럽인 Club africain의 울트라 서포터들은 2011년 1월부터 ‘튀니지의 봄’ 시위를 선두에서 이끌었다. 2011년 2월과 11월에 이집트 혁명이 일어났을 당시 카이로 최대 축구클럽인 Al-Ahly Sporting Club과 Zamalek의 서포터들이 정부소속 민병대(baltaguiyas)에 맞서 타흐리르 광장을 온몸으로 지켜냈다. 그리고 시위 중에는 저항의 의미가 담긴 자신들의 슬로건을 사용했다.

2007년에 설립된 MC 알제의 서포터 그룹 Ultras Verde Leone은 알제리 울트라 문화의 선구자다. “Mouloudia는 예언자의 탄생을 기념하는 축제인 마울리드(Mawlid)에서 비롯된 단어입니다.” Verde Leone의 서포터로 활동하는 30대 남성 카셈이 설명했다.(7) “MC 알제의 팀 컬러인 녹색과 붉은색은 각각 이슬람교와 순교자의 피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조상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저항의 역사를 함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금요일마다 반정부 시위에 참여합니다. 울트라 서포터로서가 아니라 알제리 국민으로서 말입니다.”

울트라 문화가 추구하는 반독재주의 가치관, 공동체 정신, 강력한 남성성은 알제리의 젊은 남성들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했고, 이제 축구장은 알제리 국민들의 감정의 분출구가 돼 정치적인 의미까지 갖게 됐다. 2018년 5월 알제리컵 결승전에서 JSK의 서포터들은 정부와 공권력 그리고 당시 총리였던 아메드 우야히아에 대해 전례 없이 강한 비판을 쏟아냈다. 그로부터 몇 개월 뒤, 시위에 참여한 그 젊은 서포터들은 질서정연하게 대열을 맞추고 반정부 시위가를 합창해, 알제리 국민들을 감동시켰다. 시위가 시작된 초기부터 울트라 서포터 그룹들은 스스로를 Khawa(형제)라 일컫는다. 그들은 스포츠에서의 경쟁관계는 잠시 접어두고 현 정부의 퇴진을 위해 기꺼이 힘을 합치고 있다.

3월 14일, 알제 시의 5-Juillet-1962경기장에서 USM 알제와 MC 알제의 축구경기가 있었다. 두 축구클럽 서포터들의 대부분이 카스바 거리와 밥-엘-우에드 거리 주변에 사는 탓에 ‘영원한 라이벌의 더비 매치’로 불리는 이 두 팀의 경기는 현장의 뜨거운 열기와 화려한 ‘티포’ 덕분에 매번 전 세계적으로 큰 화제가 되곤 한다.(8) 그러나 경기가 열리던 날 아침, 알제 시의 담벼락에서 MC 알제의 도장이 찍힌 익명의 전단지가 발견됐다. “어머니(알제리)가 편찮으신데 결혼식(축구장)에 참석해야 되겠습니까!? (…) 국가와 축구클럽을 위해 축구장을 보이콧합시다. 모든 서포터들이 단 하나의 길을 따르기를, 우리를 분열시킬 그 어떤 생각도 용납하지 않기를 요구하는 바입니다. 내일 (축구장을 대신해) 거리에서 함께 알제리를 응원합시다.”

경기 당일, 8만여 관중석의 3/4이 빈자리로 남았다. 알제리 축구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선수들이 입장할 때 울레드 엘-바드자의 서포터들 몇백 명이 ‘La Casa del Mouradia’를 불렀을 뿐이다. “우리의 티포가 다른 목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티포를 취소했습니다. 이전 경기들에서 티포가 만들어낸 아름다운 관중석의 모습들을, 정부가 알제리의 사회적 현실을 감추고 포장하는 데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울레드 엘-바드자의 설립자 중 한 명이 말했다. “축구가 국민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데 쓰이면 안 됩니다.” 마지막 5분 동안, 두 팀의 서포터들이 정부를 비판하고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구호를 한 목소리로 외쳤다.

축구클럽 서포터들에게는 단 한 번도 인정받지 못했지만, 2010년부터 USM 알제의 구단주이자 회장이었던 알리 하디드는 알제리와 튀니지 국경선을 넘어 알제리 탈출을 시도하려다 붙잡혀 4월 3일 구류를 선고받았다. 부테플리카 측근의 갑부 투기꾼이자 3월 28일까지 알제리 기업인 포럼(FCE)의 회장직을 맡고 있었던 그는, 2015년에는 알제리의 동부와 서부를 연결하는 고속도로 건설사업과 관련된 대규모 부정부패 스캔들에 연루되기도 했다. 반정부 시위가 시작되기 며칠 전인 2월에 울레드 엘-바드자가 인터넷에 올린 글 ‘Ultima Verba(마지막 말)’의 문구가 정곡을 찌른다. 

“우리의 시대가 왔다. 정부는 고속도로를 건설한 자들과 함께 멸망할 것이다.”  

 

 

 

글·미카엘 코레이아 Mickaël Correia
기자, 주요 저서로 『Une Histoire populaire du football(축구와 민중의 역사)』(La Découverte, Paris, 2018) 등이 있다.

번역·김소연 dec2323@gmail.com
번역위원

 

(1) Akram Belkaïd & Lakhdar Benchiba, ‘En Algérie, les décideurs de l'ombre(베일 속에 감추어진 알제리의 결정권자들)’=한국어판 '알제리, 섭정 속으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9년 4월호‧한국어판 2019년 5월호.
(2) ‘암흑기’는 1990년대의 내전을 의미한다.
(3) 가장 저렴한 좌석들이 있는 축구장 골대 뒤의 구역을 의미한다. 
(4) 알제리 통계청, 알제, 2018년 9월.
(5) Malek Bensmaïl의 다큐멘터리 영화 <La bataille d'Alger, un film dans l'histoire(알제리 전투, 역사의 영화)(2017)>에서는 알제리 전투와 영화 제작에 있어서의 야세프 사디의 역할을 조명한다.
(6) Ignacio Ramonet, ‘Le football, c'est la guerre(축구는 전쟁이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1990년 7월호.
(7) 서포터들의 요청에 따라 가명을 사용함.
(8) Théo Schuster & Eric Cantona의 다큐멘터리, Looking for Alger,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