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성을 앞세운 ‘도시계획 2.0’

파리의 재창조

2019-05-31     피에르 파스토랄 l 도시건축가

프랑스 정부는 공공 발주와 문화재 보호 관련 법규를 우회해 노트르담 대성당의 첨탑을 재건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업계의 거센 항의를 불러일으킨 정부의 이번 결정은 10년 전부터 이어져 온 과도한 규제 완화의 연장선으로 해석된다.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건축이나 도시개발 프로젝트 진행에서 공공의 역할이 큰 국가로 정평이 나 있다. 국가와 지방정부가 건설업체, 투자자, 시행사를 엄격히 통제한 결과다. 그러나 최근 몇 년에 걸쳐 프랑스 정부는 규칙의 예외를 적용하는 방식으로 관리와 규제를 엄격히 하는 것보다, 민간의 권한을 살려주는 쪽에 더 주력하고 있다.

‘선분양’ 방식이 그 대표적인 예다. ‘주문주택’으로도 불리는 ‘선분양, 후시공’ 제도는 도입 초기에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2008년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비로소 프랑스 공공주택 시장에서 점차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과거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 재임 시기 경기침체로 인해 3만여 채의 미분양이 발생했을 때도, 정부는 미분양 주택을 공공임대로 전환해 운영할 사업자를 모집하는 조치를 취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민간시행사를 동원하는 선분양제는 위기를 해소하는 대안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일드프랑스 일대에 새로 지어진 공공주택 절반 이상이 ‘선분양, 후시공’으로 거래되고 있을 만큼, 프랑스 선분양 제도가 영세민 임대아파트(HLM) 시장에 일반화됐다.

단기적으로 선분양제는 주택건설자금 확보가 쉬워 주택공급을 늘리는 장점이 있지만, 중장기적 관점에서 본다면 부작용을 간과할 수 없다. 시공사의 역할이 상품을 단순 ‘제조’하는 수준으로 축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선분양 방식을 택할 경우, 시공사는 분양사업자인 시행사에 관리·감독 역할의 일정 부분을 위임한다. 건축물 공사 전반을 책임지는 시공사는 건축자재의 품질과 내구성을 중시하지만, 정작 착공과 동시에 분양보증을 받아 입주자를 모집하는 시행사는 관련 의무를 지지 않는다는 맹점이 생길 수밖에 없다. 당장은 시간과 비용을 절감할 수 있지만, 그로 인해 훗날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

 

주목 받는 건축방식, ‘마크로-로’

건설업계에서 큰 주목을 받는 또 다른 경향은 2000년대 초 파리 서부 근교인 불로뉴 빌랑쿠르에서 탄생한 건축방식 ‘마크로-로(Macro-lot)’다. 당시 르노(Renault) 사는 양차 대전 사이부터 줄곧 가동해온 파리 서부 외곽 생산공장 운영을 중단하면서 약 70헥타르에 달하는 공장부지를 부동산 투자자와 민간개발업자에게 매각한 바 있다. 불로뉴 빌랑쿠르 시청은 해당 부지를 시유화하지는 않았지만, 도시계획의 일환으로 부지 개발을 진두지휘했다. 우선 부지의 구획을 잘게 나누고, 건축 공모전을 열어 각 부지의 용도와 세부 발전 방향을 제시했다. 완성에 이르기까지의 시일을 단축하되, 시에서 요구하는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방안으로 건축가들이 고안해낸 결과물이 바로 ‘마크로-로’다. 

이들은 주차장, 레저, 상점, 사무실, 공공시설, 민간주택과 공공주택을 한데 아우르는 대형건축물을 축조하고자, 시행사(일반적으로 민간대기업)가 여러 시공사와 도급계약을 맺고 프로젝트를 일괄 주도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여러 건설업체는 제각각의 임무를 완수했고 전체적으로는 ‘규모의 경제’를 실현해냈다. 기초자치단체의 권한을 업계에 위임해 도시 재개발이라는 목적을 실현한 색다른 시도였다. 

이후 수많은 도시에서 불로뉴 빌랑쿠르의 시도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프로젝트를 추진했고, 낭트의 트리포드, 리옹의 리옹-콩플루앙스, 파리의 클리시-바티뇰, 몽펠리에의 망틸라 지구 등지에 ‘마크로-로’가 들어섰다. 동시에 이 건축물은 많은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천편일률적인 건축물로 개성을 상실한 도시 풍경뿐 아니라, 개보수 방법도 까다로운 문제로 지적된다. 규모의 경제를 실현해 쌓아 올린 건축물은 토지대장 상 구획 분할 없이 한 단위로 분류되기 때문에 노후에 따른 개보수, 철거, 재건축, 교체가 쉽지 않다. 다양한 사람들이 사는 만큼, 거주자들의 경제력도 다양하기 마련이다.

 

어두운 과거를 지닌 ‘파리의 재창조’

세 번째 예는 ‘민간과 정부 간의 협력’이다. 1990년대 초 영국에서 먼저 시작된 이 협력 방식은 2004년 6월 17일 발효된 행정명령을 통해 프랑스로 전파됐다. 프랑스식 ‘민관협력’ 원칙은 단순하다. 재원의 여력이 없는 정부 당국이 공공시설(학교나 병원 등) 운영자금 조달과 관리를 민간에 위탁하고 반대급부로 임대료나 사용료를 지급하는 방식이다. 당초 이런 위탁방식은 긴급하거나 복잡한 사안에 한정하며, 부득이한 경우라면 구체적인 기준을 준수하도록 정한 바 있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공공투자가 위축되자 이를 보완하는 방편으로 민간위탁방식을 널리 활용하고 있다. 민관협력을 제약하는 규정도 더 이상 없다. 정부가 민간에 의존하는 방식이 단지 더 경제적이기 때문이다. 2016년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UEFA)를 프랑스가 유치하게 되자 프랑스 일부 도시는 민관협력 재원으로 경기장을 개보수하거나 신축하기도 했다. 2018년 8월을 기준으로 중앙정부는 63건, 지방정부는 171건의 민관 연계 협약을 체결해 사업을 추진했다.

민관협력은 단기적으로는 예산을 절감할 수 있지만, 실상 정부는 장기간에 걸친 협력을 약속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는 점에서 정보의 비대칭성에 기인한 일종의 금융상품이나 다름없다. 부이그, 에파주, 방시 등과 같은 건설사와 민관협약을 체결하는 행위는 궁극적으로 정부와 지방정부가 국토개발과 도시발전에 필요한 재원과 역량을 지속해서 축소해 나갈 것을 다짐하는 서약인 셈이기도 하다. 지난 15년 동안 체결한 수십 건의 민관협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음에도 이들 기업은 어김없이 최대한의 이윤을 취해왔다.

방식의 차이는 있지만, 민관협력이라는 관행은 로마 시대부터 존재해왔다. 그 당시 이미 사람들은 민간자본을 동원해 지역사회에 필요한 기반시설(수로, 교통로, 우체국 등)을 구축했다. 19세기 프랑스에서 조르주 외젠 오스만 남작이 주도한 파리 개조 사업 역시 민관협력과 유사한 형태였다. 민간자본은 도로와 공공시설을 구축하고 관리하는 데 쓰였으며, 민간투자자들은 그 대가로 새로 만든 대로에 건물을 세울 권리를 획득했다. 한편 당시 국가는 필요할 경우 민간으로부터 협력을 받더라도 자본에 휘둘리지 않고 엄격한 조건과 기준을 제시해 뜻을 관철할 줄 알았다. 오스만식 건축양식, 공원의 구조 등 파리 도시공간의 일관성에서도 이런 특징이 잘 드러난다.

 

예산 한 푼 없이 홍보활동, ‘파리의 재창조’

앞서 제시한 세 가지 사례는 오늘날 도시개발을 주도하게 된 민간자본에 정부가 어떻게 책무를 위임하며, 어째서 민간자본이 더 큰 혜택을 취하게 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더욱이 오늘날 정부의 규제가 느슨해진 만큼 그 역할도 축소됐으며, 각종 프로젝트 시행을 사전 검토하는 과정 또한 느슨해졌다는 문제가 있다. 2014년 파리시는 대대적인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전격 추진했다. 시 소유 부지를 매각하는 방편으로 ‘파리의 재창조(Réinventer Paris)’ 공모전을 발표했다. 이는 공모전이라기보다는, 자산매각과 공공프로젝트 발주를 뒤섞어 놓은 듯했다. 

이 프로젝트는 장루이 미시카 파리시 도시국장의 주도로 진행됐다. 미시카 국장은 베르트랑 들라노에에 전 파리시장 재임 시기(2001~2014)부터 줄곧 혁신사업을 도맡아 추진하면서 벤처 업계의 사정에 밝은 인물로 통한다. 이 공모전은 그가 부동산 분야에 산업계의 연구개발(R&D) 외주 방식을 적용해 얻어낸 산물인 셈이다. 파리시는 22개 부지를 ‘공모전’을 명목으로 ‘후보자’라고 명명한 잠재 구매자에게 매각하는 방식을 고안해냈다. 이에 따라 ‘혁신적’인 기획안을 공모했고, 수요보다는 공급에 초점을 맞춘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파리시는 공모전에 참가하려면 건축가, 조경사 등 각 분야 전문가로 이뤄진 팀을 구성해야 하며, 최종 당선작으로 선정될 경우 시행사나 대형 건설·토목 업체의 후원을 받아 프로젝트를 추진하게 된다고 밝혔다. 이 공모전의 생소한 운영방식은 보수적 성향이 강한 건축계와 도시개발 업계의 눈총을 샀다. 이들 업계는 ‘우버(Uber)’와 같은 온라인 플랫폼에서 소비자와 공급자가 직접 만나는 4차 산업혁명의 공유경제보다는, 엄격한 규범과 철저한 관리감독에 더 익숙하기 때문이다.

미시카 국장이 공공발주 형식으로 제시한 ‘파리의 재창조’ 프로젝트는 1985년 도입된 ‘공공건축 사업 운영’에 관한 법망을 교묘히 빗겨나갔다. 공모전 선정팀에 지급될 용역비에 관한 언급은 참가규정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게 해서 총 650팀이 지원서를 제출했고, 그중 75개 팀이 최종선정됐다. 일반적인 건축공모전의 경우, 최종선정된 팀에 상금을 수여하기 때문에 선정될 경우 공모전 준비과정에서 지출한 비용을 상당 부분 충당할 수 있다. 

그러나 미시카 국장의 기획 의도에 따라, 선정된 팀 대부분은 용역의 대가를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참가규정은 철저히 준수하며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했다. 한편, 파리시는 참가규정에 기획서를 평가하는 기준도 명시하지 않았을뿐더러, 기획서 평가 결과나 제안가격을 공표해야 할 의무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결국, 파리시의 최종 참가팀 선정 주된 기준이 ‘혁신성’인지, 혹은 (자산매각 관행대로) 단순히 최저가를 제시한 팀을 선정했는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어느 건축가 조합은 공모전 명칭을 패러디해 ‘비리의 재창조(Réinventer Pourris)’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실로 지혜롭고 양심적인 자산매각 방식을 기획한 미시카 국장은 좋은 취지와 혁신으로 똘똘 뭉친 이번 공모전이 파리시의 위상을 드높일 것이라고 밝혔다. 공공발주 의무에 관한 법은 우회하되, 예산 한 푼 없이 떳떳이 대외홍보를 벌이다니 가히 타의 추종이 불허하는 천재적인 정책이다. 하지만 고난과 절망 속에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건축가들의 처지를 악용하는 줄도 모르고, 아무 대가도 없이 공모전을 빙자한 연구용역인 줄도 모른 채, 혁신을 외치는 정체불명의 제단 앞에 순진무구하게 몰려갔던 우리는 결국 다 함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애석하다. 그때는 왜 몰랐던가?”(1)

파리시는 22개 부지 매각으로 5억 유로 이상을 벌어들일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기획용역비를 책정할 혁신적인 발상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파리 시장은 “이번 ‘파리의 재창조’ 공모전 참가규정을 처음부터 널리 공지했다. 그렇게 해서 지원자들은 특전뿐 아니라 제약조건까지 숙지한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지원을 결정했다”라고 설명하며 획기적인 공모전 기획 방식에 스스로 만족을 표했다.(2) 공공프로젝트 발주에 더 가까운 이 공모전은 대단히 ‘간결하고 공평하다’. 복잡한 행정절차도, 서류도 필요 없다. 선정된 팀에게 주어지는 용역비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선정절차에서도 투명성을 찾아볼 수 없다.

 

도시민의 삶에, 조경 미학이 최우선인가?

그 후 파리에서는 ‘제2회 파리의 재창조’, ‘그랑파리 광역권의 재창조(총 2회)’, ‘센 강의 재창조’가 개최됐고, 타 도시에서도 ‘앙제를 상상하라’, ‘툴루즈를 그려줘’ 등의 프로젝트가 줄을 이었다. 절차는 매번 같았다. 지역사회가 매각용 부지에 관한 민간의 아이디어를 공모하고, 선정된 팀은 은행이나 보험사, 시행사의 재정 지원을 받아 프로젝트를 실행한다. 민관협력의 경우처럼 정부가 감수해야 하는 위험과 비용은 거의 없다. 

선출직 공무원들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멋진 이미지에 기뻐한다. ‘위키 빌딩’, ‘콜빙(공동주거)’, ‘코워킹’, ‘크라우드 펀딩’, ‘패브랩(제작 실험실)’ 같은 개념을 접한 각 도시의 시장들은 상상도 못 했던 기발한 구상이라고 생각한다. 참신한 발상은 평소 시도조차 해본 적 없을 이들의 이런 반응은 자연스럽다. 과거에는 기초단체 차원에서 공공발주 내용을 정확히 정의하고 명백한 과제 범위와 방향을 제시하고자 고민을 거듭하면서 외부에 주제 연구를 의뢰하던 시절도 있었다.

이렇게 해서 선정된 건축 프로젝트는 특정한 성격을 드러낸다. 언뜻 보기에 각각의 프로젝트는 매우 독특하고 독창적인 듯하지만, 실은 서로 아주 많이 닮아있다. 초기 단계의 간략한 협의나 조사 방식으로는 기획 내용에 깊이를 더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는 이로부터 동경심을 자아내는 작품을 요구하다 보니 과도하게 많은 녹지를 조성하는 등 내실보다 외양에 과도하게 치중한 피상적이고 가벼운 시도가 주를 이루게 된다. ‘파리의 재창조’에 선정된 작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청과물 코너에 서 있는 기분마저 든다. 안 이달고 파리 시장은 “부속품으로만 여겨지던 도시 조경의 위상이 한층 높아졌다”라고 호평하기도 했다. 하지만 허심탄회하게 말해보자. 날로 치솟는 부동산 가격, 줄을 잇는 교통 체증, 대형상점이 들어서 소상공인이 설 자리가 없어진 오늘날의 도시 생활에서 과연 조경 미학이 최우선 순위를 차지하는가?

불명확하고 느슨한 규제를 지적하고 공공의 책무를 강조하는 조직적인 움직임이 생겨나고 있다. 시민들이 서로 힘을 합친다면 공공주택 임대사업자들은 에두아르 필리프 총리의 조세정책을 반박할 힘을 키울 수 있으리라. 점차 많은 지방정부와 국토 개발 전문들이 과거 공공분야에서 오랜 기간 누적한 역량을 민간이 쉽게 능가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민관협약으로 파리시 외곽에 있는 코르베이에손느병원을 설립하고 관리하던 에파주사가 3년만인 2014년에 해당 협약 이행을 중단했던 것처럼, 규제와 재정, 기술 기준을 엄격히 규제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민관협력을 선도하던 영국마저도 2018년에 들어 그동안 민간에 위임하던 교도소와 철도의 관리 권한을 정부가 되찾기도 했다. 

오늘날 재정여건이 녹록지 못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언젠가는 본연의 역할을 되찾으리라 믿는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는 원칙을 적용하고 재원과 관심을 쏟는 공공의 역할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글· 피에르 파스토랄 Pierre Pastoral
도시건축가, 정부 및 자치단체 사업 시행

번역·이푸로라
번역위원

 

(1) ‘Ré-inventer Pourris(비리의 재창조)’, Le Courrier de l’architecte, 2017년 6월 18일, www.lecourrierdelarchitecte.com
(2) Sébastien Chabas, ‘L’appel à projet, un format de concours qui dérange(제안요청, 불편한 경쟁방식)’, <BatiActu>, 2016년 2월 8일 www.batiactu.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