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연재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가 새로 쓰는 ‘비판경제 교과서’(6)-시장을 따를 것인가 명증된 법칙을 세울 것인가?

『비판경제 교과서』 연재순서 (1) 경제학은 과학인가? (2) 생산 증대, 무조건 더 많이! (3) 노사관계(다리와 버팀목의 관계) (4) 부의 분배 희망과 난관 (5) 고용, 어떠한 대가를 치러야 하나? (6) 시장을 따를 것인가 명증된 법칙을 세울 것인가? (7) 세계화, 국민 간의 경쟁 (8) 화폐, 금전과 현찰의 불가사의 (9) 부채 협박 (10) 금융 지속 가능하지 않은 약속

2019-05-31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오늘날의 주류 경제학자들은 세르조 레오네 감독의 ‘스파게티 웨스턴’ 시리즈의 등장인물을 연상시킨다. 이들의 시각에서 ‘세상은 이분법적’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한편에 효율성과 절제 그리고 발전을 의미하는 ‘시장’이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굼뜨고 관료적이며 시대에 뒤처진 ‘정부’가 있다. 이들에게 사회의 ‘개혁’이란 시장의 번영을 도모함과 동시에, 곪아터진 정부의 부상을 견제하는 하는 것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서구 국가들은 1970년대 초부터 이들의 주장을 따라왔으나, 그 결과는 별로 신통치 않았다. 과연 시장은 경제주체들이 상호작용하며, 자연적인 조정을 통해 균형을 이루는 영역일까? 시장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그리고 시장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 일일까?

 

 

1. 편견: “경쟁은 효율을 보장한다”

“시장경제는 정부주도 경제보다 사실상 더 효율적이다.”

1984년, 프랑스 비평가 기 소르망이 『자유주의적 해법(La Solution libérale)』이라는 저서를 통해 밝힌 내용이다. 그는 결론을 내리기에 앞서 “외부의 개입은 형태를 막론하고 시장경제의 활동을 저해한다”라고 단정했다. 공공담론을 지배하는 “시장은 효율을 보장한다”라는 생각에 대해서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유럽 집행위원회는 공식 웹페이지를 통해 “경쟁정책은 기업가 정신과 생산성을 높이고, 공급을 확대해 소비를 용이하게 하며, 가격을 낮춤과 동시에 상품과 서비스의 질을 높인다”고 설명하고 있다. 시장의 미덕에 대한 믿음은 유럽연합 형성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굳은 믿음에 의하면, 민간기업 간의 자유로운 경쟁은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작용하도록 하며,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최적의 자원 배분’이 성립하게끔 한다.

신고전주의 학파와 고전주의 학파는 시장이 자율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므로,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함을 인정했다. 바로 공공재, 독점, 그리고 외부효과다. 이 세 가지 용어를 정의해보자. 공공재의 전형적인 예로는 등대를 들 수 있다. 모든 배는 등대의 혜택을 누리지만 등대 사용비를 지불하지는 않는다. 이런 조건은 민간분야의 동기를 유발하기 어렵다.

 

돈으로 가치를 환산할 수 없는 경우에도, 가격을 책정하면 만사가 형통하다?

자연독점의 완벽한 예로 대규모 설비구축이 필요한 철도수송을 들 수 있다. 소규모 업체가 분야별로 운영에 참여하기에는 철도 수송의 고정비용(철로나 철도, 건널목 자동차단기 설치 등)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외부효과란, 한 경제주체의 행위가 아무런 금전적 보상 없이 다른 경제주체들에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뜻한다. 그러나 민간기업은 기초연구와 같이 즉각적이고 확실한 이윤을 담보하지 않는 긍정적 외부효과에는 도통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반면 대량의 부정적 외부효과를 유발(오염물질 배출)하는 데는 거리낌이 없다. 비용 부담을 수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정부의 시장개입은 당위성을 확보한다. 긍정적 외부효과의 경우, 부분적인 보조금이나 정부가 비용을 부담해 과소 공급 문제를 해소하되, 세금이나 규제를 부과하는 방법으로 부정적 외부효과를 줄여나가야 한다. 많은 경제학자가 이 점에 동의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 즉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정부의 실패를 시장의 실패보다 더 부정적으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시장의 실패는 시장의 역할 강화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1970년대를 기점으로 정부는 신자유주의에 근거해 공공재를 민영화하고, 독점 분야에 경쟁을 도입하며, 외부효과에 가격을 책정해 시장에서 상품으로 거래하도록 하는 방안을 두루 모색해 왔다. 근대 이후 공공재의 민영화 추진과 동시에, 독점 분야에 경쟁 도입을 최초로 시도한 사례는 1996년에 진행된 영국의 철도민영화다. 과연 그 결과는 어땠을까? 철도 이용료는 상승한 반면, 설비 투자와 유지비 지출은 감소했다. 게다가 그 후 몇 년 동안, 네 건의 심각한 열차사고가 발생했다. 또 다른 예로는 오염을 감소시키기 위해 유럽연합이 2005년 도입한 탄소시장을 들 수 있다.

유럽연합은 오염물질 배출 총량의 한도를 설정해 기업에 배출권을 할당했다. 이산화탄소에 단위를 매겨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적용했기 때문에 탄소 배출량 감축 목표치에 부합하는 지점에서 탄소 가격이 형성돼야 했다. 그러나 기업에 너무 많은 배출권(미리 정해진 배출량)이 할당됐음이 뒤늦게 밝혀졌고, 탄소 배출권의 가격은 정기적으로 하락을 거듭해 배출량 감소를 유도하기에는 너무 낮은 수준에서 가격이 형성됐다. 탄소시장의 효과는 예측이 어렵지만, 규제를 통한 문제해결의 효과는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만일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감소했다면 그 이유는 경제위기와 대체에너지 개발 장려정책에서 찾아봐야 할 것이다.

이런 생각의 이면에는 돈으로 가치를 환산할 수 없는 경우에도, 가격책정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있다. 물론 이런 주장에 대한 반박도 만만치 않다. 영국의 사상가 리처드 티트머스의 조사에 의하면, 1970년 수혈에 대해 보상금을 지급한 국가들에서는 수혈관련 전염병이 증가한 반면, 수혈은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이타심’이라는 헌혈의 동기를 ‘금전적 보상’으로 대체함으로써, 헌혈 행위를 평가절하하고 잠재적 기부자들의 동기를 저하하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2. 시장영역의 확장

돈으로는 살 수 없던 것들이, 돈이면 다 살 수 있게 됐다?

영국 록 밴드 비틀스부터 『비트 세대(Beat Generation)』의 저자 잭 케루악까지, 많은 이들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예찬해왔다. 그러나 예술가들이 시장에서 예술적 감성의 우월함을 칭송하는 동안에도 시장은 조용히 새로운 영역을 정복하고 있었다. 이제는 시장에 속하지 않은 영역을 찾아내기가 대단히 어려운 지경이 됐다.

돈으로는 무엇이든, 거의 무엇이든 살 수 있다. 예컨대 50만 달러면 미국 영주권을 살 수 있다. 35만 달러면 나미비아에서 멸종 위기에 놓인 검은코뿔소를 사냥할 권리를, 약 6,250달러면 인도인 대리모의 고용할 권리를 살 수 있다. 모든 것이 판매 대상이다. 건물 외벽을 대여해 옥외 광고물을 설치하는 비용은 777달러, 제약회사의 임상시험에 몸을 내주는 대가는 7,500달러, 국회 청문회에 참석하려는 로비스트 대신 밤새 줄을 서는 대가는 시간당 15달러다.

물론, 자본주의가 생겨나기 훨씬 전부터 시장은 이미 존재했다. 예컨대 기원후 2세기의 로마 사회는 노예제 생산 양식에 기초해 이미 고도로 발달한 상업경제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시장은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비로소 급격한 성장을 기록한다. 

칼 폴라니에 의하면, 19세기 후반 산업혁명과 함께 새로 등장한 대형기계는 소모돼 감가상각이 발생하는 특징이 있으므로, 지속적인 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노동, 토지, 화폐 세 가지를 산업의 필수요소로 간주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관해 폴라니는 노동, 토지, 화폐가 ‘판매를 목적으로 한 상품’이 아닌 ‘허구의 상품’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이 세 요소가 시장을 이룬다는 생각 자체가 허구적이라고 주장했다. 

“인간 활동의 또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 ‘노동’은 인간의 생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 이 활동은 생명의 다른 활동영역에서 분리할 수 없으며, 비축할 수도 공출할 수도 없다. 아울러, 자연의 또 다른 이름인 ‘토지’는 인간이 생산해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화폐’는 구매력을 나타내는 징표에 불과하다.

모든 것을 상품화하려는 움직임 속에서 ‘시장사회’로서의 자본주의가 탄생하게 됐다. 통일, 확장, 해방이라는 세 가지 단계를 거쳐 사회에서 분리돼 나온 시장은, 유럽사회 처음으로 모든 사회적 기준을 경제논리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1980년대 가속화된 상품화

이처럼 실력행사로부터 시작된 자본주의의 역사는 지속적인 시장 영역의 확장, 다시 말해 자본의 영역을 끝없이 확장해내는 잉여가치의 추구로 이어졌다.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 신자유주의 경제는 시장논리를 더욱 강화해나갔다. 그 명백한 예로 1980년대 프랑스 국영기업의 민영화(오늘날까지도 대부분 공영기업으로 잘못 알고 있음), 그리고 경제와는 무관한 문제를 해결한다는 명분으로 창출된 각종 신규 시장을 꼽을 수 있다.

이런 배경에서 각국의 정부는 늘어만 가는 오염문제에 대처하는 방법으로 이산화탄소 배출권 거래시장을 도입했다. 모든 것을 상품화하려는 시도는 그동안 생명과 관련 있거나 사적 영역이라는 인식으로 시장논리와는 무관하다고 믿어왔던 영역에까지 깊숙이 파고들었다. 가령 지식(특허출원 건수의 폭발적 증가), 교육, 문화, 그리고 자연(유전자기술, 날씨정보의 금융상품화)이 ‘무형 상품’으로 시장에서 거래되고 있다.

그렇다면 도덕·윤리적 마지노선을 구축해 돈으로 사고팔 수 있는 대상을 정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시민의 투표권이나 명예를 부여하는 상을 돈으로 사고판다면 그 고유한 가치를 훼손하고 마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 밖에도 상품화가 가치를 저해하지는 않더라도 거래행위 자체가 윤리적 문제를 초래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신체 장기 거래를 합법화하는 정부는, 궁극적으로 판매자의 궁핍한 경제형편을 악용하는 셈이다. 자신의 장기를 내놓는 판매자가 자유로운 선택을 한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의 철학자 마이클 샌델은, 특정 재화는 돈으로 사고팔면 본질이 왜곡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런 사회 전체의 상품화는 이제 화폐의 범위를 넘어, 모든 인간행위와 사회활동에 일반규범으로서 경쟁논리를 적용하기에 이르렀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피에르 다르도와 크리스천 라발은 시장이나 상품이 존재하지 않는 프랑스의 공공 연구기관에서까지 신자유주의 관행에 따라 평가제도를 도입해 연구자 간의 경쟁을 유도하고 시장의 제재원리를 모방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3. 보이지 않는 손을 보조하는 국가의 주먹

일반적으로 시장에 대한 옹호는 굼뜨고 비경제적이며, 부패한 정부에 대한 비판을 근거로 한다. 따라서 시장이 배의 키를 잡고 돛을 올리면 정부는 그 물결에 편승할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독일의 자유주의 경제 사조인 질서자유주의(Ordoliberalism)의 주장대로 시장경쟁은 정부가 구축한 일련의 제도의 틀 안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유럽 집행위원회는 2016년 2월에 프랑스의 슈퍼마켓 체인 ‘앵테르마르셰(Intermarché)’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시장 간 거래’를 뜻하는 이 기업의 상호 때문일까? 프랑스 축산업자들은 앵테르마르셰가 경쟁업체인 ‘르클레르(Leclerc)’와 가격을 담합해 돼지고기 매수가격을 하한선에 맞춰왔다고 주장했다. 가격담합 행위는 ‘제3국에 대한 차별’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역내 시장의 경쟁 질서를 무너뜨리는 행위인 것이다. 유럽연합의 창설목표 중 하나인 ‘자유롭고’ ‘왜곡되지 않은’ 경쟁은 유럽 집행위원회가 취한 조사 조치와 같은 개입이 필요하며, 그렇게 해야 비로소 경쟁이 정상적으로 이뤄지고 또 유지될 수 있다.

질서자유주의는 1929년 세계 대공황 이후의 독일에서 생겨난 경제·정치사상이다. 한편, 자유주의의 또 다른 개념은 ‘신자유주의’라는 이름 아래 세계경제 현상으로 확대 및 재편됐다. ‘질서’자유주의의 두 가지 기본원칙은 자유경쟁 보장과 안정적 통화관리다. 그러나 질서자유주의 사상가들은 19세기의 고전자유주의 방식대로 정부의 개입 없이 자연적 흐름에 맡겨 두는 ‘자유방임’ 방식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봤다. 

발터 오이켄이 질서자유주의를 주창했다면, 빌헬름 뢰프케는 이 학설을 구체화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1939년, 뢰프케는 “시장경제에서 시장진입을 방해하는 요인과 규제를 완전히 없애면 완전경쟁시장이 ‘저절로’ 나타나 효율적으로 작동할 것으로 굳게 믿었다”라고 기술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우리는 그동안 어리석게도 계몽주의 세기의 연장선에서 문명의 인위적이고 취약한 속성을 지닌 결과물을, 저절로 이뤄진 것이라고 속단해왔다.”

질서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봤을 때 시장은 정책적 선택으로 만들어진다. 따라서 독점을 막되 경제적 혼란을 방지하려면, 최소한이지만 충분히 강력한 정부의 역할이 필요했다. 정부는 법률·기술·사회·윤리·문화적 근간을 확립하고, 민간과 공공이 모두 원칙을 충실히 이행하도록 관리함으로써 ‘경쟁질서’를 수립해 물가와 임금을 안정적으로 유지해야 한다. 그렇게 경쟁질서가 확립되고 나면, 정부의 역할은 경쟁질서의 관리에 한정된다.

 


노사문제에 대한 이해를 반영하는 경제사조인가?

이 이론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독에서 실시됐는데, 서독은 1920년대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겪었고 패전 이후 미국의 분할통치를 받은 바 있다. 이렇게 질서자유주의의 정신은 ‘사회적 시장경제’의 형태로 경제헌법의 기본원리가 됐다. 그러나 여기서 ‘사회적’이란 말은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다. 사회적 시장경제 이론을 정립한 알프레드 뮐러-아르막은 1948년 ‘사회적’ 성격은 소비재에 대한 통제를 해제함으로써 시장 수요에 의해 가격이 결정되게 하는 데 있음을 밝혔다. ‘사회적 시장경제’ 역시 여타 시장과 마찬가지로 노사문제(고용, 노동조건 등)에 관해서는 굳이 관심을 두지 않는다.

 

경쟁질서를 보장함으로써 예외적인 권한을 누리는 유럽 집행위원회

사실상 독일 내에서 질서자유주의의 영향은 시대별로 차이를 나타낸다. 예를 들어 1969년 사회 민주당 빌리 브란트 총리(1969~1974)의 집권 시기에는 질서자유주의가 후퇴하는 양상을 보이지만, 1998년 게르하르트 슈뢰더(1998~2005) 정부 시절 다시 주목 받기도 했다. “공동시장 내에서의 경쟁이 왜곡되지 않도록 경쟁정책이 마련돼야 한다”는 내용과 함께 상품, 사상, 자본, 서비스의 자유로운 이동을 규정한 1957년 로마조약에는 질서자유주의의 정신이 잘 녹아있다. 

이후 유럽공동체가 유럽연합으로 개편되면서 탄생한 유럽 집행위원회는 경쟁질서의 준수를 보장하고 있다. 유럽통합의 주동력인 질서자유주의 논리는 정책기관인 집행위원회 앞으로 공동체의 목표를 규정하고 원칙을 적용하는 권한을 부여한다. 이후 잇따른 각종 조약은 같은 논리에 따라 경쟁질서 확립을 저해하는 요인을 제거해나갔다. 과거 유럽연합이 보호주의의 마지막 보루로 고수했던 ‘공동농업정책(Common Agricultural Policy·CAP)’은 경쟁질서 확립과 재정 준칙의 헌법화라는 완전무결한 질서자유주의 원칙에 위배되는 오점으로 여겨졌고 점차 수정돼왔다. 

향후에는 2012년 비준된 ‘안정, 조율 및 거버넌스 조약(일명 신재정협약, Treaty on Stability, Coordination and Governance·TSCG)’ 등의 시행에 따라 유로화 역시 질서자유주의의 안정적 통화 관리 원칙을 적용받게 될 것이고, 공동농업정책의 전철을 밟아가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4. 계획경제에 사활을 건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계획경제는 이제 어디에서든 쓸모없는 퇴물 정도로 인식되지만, 과거에는 여러 국가들에서 오랜 시간 명증된 이치로 받아들여졌다. 당시에는 그 누구도 개별 경제주체들이 자발인 상호작용으로 질서를 유지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옛 소비에트연방(소련)은 사회가 시장으로부터 해방되도록 계획경제의 논리를 보다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그 결과, 부정할 수 없는 성과와 함께 적잖은 실패를 남겼다.

지난 2015년, 사회분담금 감면혜택을 십분 누리는 기업들이 고작 최소한의 일자리만을 창출해내고 있는 모순된 상황을 언급한 자리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당시 경제부 장관은 “정부가 일자리 수를 결정하는 계획경제 체제가 아니니 어쩔 수 없지요”라고 답했다. 사실 이 같은 해석은 무엇 하나 새로울 것이 없다.

1929~1991년 소련이 시도한 가장 급진적인 형태의 계획경제 사례는 오늘날 시장경제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비판하는 근거로 대부분 인용된다. 당초 계획경제는 확증된 하나의 사실과, 하나의 의문에서 의문에서부터 시작됐다. 우선 그 사실이라 함은 심각한 경제위기를 유발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주로 생산수단을 소유한 계급에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의문은, ‘시장에 대한 과학적 접근법이나 이윤의 논리에서 벗어날 수 없을까?’라는 생각이었다.

소련 체제의 핵심에는 국민경제 5개년 계획(매년 경제 상황에 맞게 계획을 조정)을 구상하던 국가계획위원회(일명 Gosplan·고스플란)가 있었다. 국가계획위원회는 소련 공산당의 최고 정책 결정기관인 정치국(Politburo)에서 결정한 ‘예비과제’에 따라 계획을 수립했다. 예를 들어 200만 켤레의 신발 생산량이 결정되면 국가계획위원회의 기술설계사들은 이를 실행에 옮기는 방안을 세웠는데, 어떤 재료를 조달할지(고무, 가죽, 실 등)부터 시작해 어느 정도의 노동력, 전력, 설비를 어떤 방식으로 투입해야 할지를 일일이 계획했다. 국가가 처리할 정보의 범주와 양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중앙계획청에 보고하기에 앞서 사전에 결정된 수익의 비율

정보야말로 소련 경제의 주된 고민거리였다. 그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격과 수익률 기능에 있어 자본주의와 계획경제가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 되짚어봐야 한다. 자본주의의 경우를 살펴보면, 기업이 자율적으로 설정한 가격이 신호탄이 된다. 부츠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 부츠의 가격도 덩달아 증가한다. 그렇게 되면 제조업자들은 더 많은 이윤을 예상할 수 있다. 생산자 간에 서로 상의를 거칠 필요 없이, 제각각 자율적으로 더 많은 부츠 생산량을 결정한다. 

마찬가지로, 투자자들은 수익률에 따라 가장 높은 수익을 보장하는 분야에 출자를 결정한다. 반면, 계획경제 체제 안에서 경제 동향을 나타내는 것은 가격이 아니다. 가격은 정부가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윤, 즉 제품의 판매가격과 생산비용의 차이는 이윤의 형태를 취하는데, 계획경제에서는 이윤의 규모 역시 상부 보고에 앞서 미리 계산 하에 결정된다. 그렇게 결정된 이윤은 중앙계획청의 결정에 따라 대부분 투자에 다시 반영된다.

 

품질의 저하 초래

단기적으로는 생산적으로 경제에 우선순위를 부여해 정치적으로 결정된 이 방식은 생산성을 높이는 데 효과적이었다. 그러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 들어 외국에서 유입되는 자본에 더는 의존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자, 소련 정부는 급진적인 방식의 산업화를 단행했다. 억압적인 무력(징벌, 강제이주, 강제노역)을 동원해 농업분야의 경제적 가치를 산업분야로 전환했다. 그렇게 해 몇십 년 만에 소련은 제철소, 발전소, 군사산업단지, 그리고 훗날 항공우주 분야까지 갖춘 국가로 거듭났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계획경제는 그릇된 결정을 내리게 된다. 계획된 숫자는 조작돼 협상도구로 악용되기 때문이다. 경제계획은 과학적으로 설계돼야 한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국가계획위원회와 (분야별) 경제부처, 그리고 낮은 생산성에 대비해 더 많은 인력을 요구하며 느슨한 정책을 꾀하는 기업 경영인들의 흥정과 야합의 상징으로 둔갑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계획경제는 구조적 결함을 나타낸다. 기업 경영자는 목표치를 달성하지 못할까 전전긍긍하면서 초과인력을 고용하고, 원자재를 비축하고, 더 많은 투자를 요구했다. 계획경제 체제는 소비재보다는 생산재(설비, 건물)를 우선했다. 아울러, 소비수요에 구애받지 않는 생산여건은, 제품의 품질 저하를 초래하기도 했다. 소련의 이런 쓰디쓴 실패는 과연 경제에 대한 정부의 개입이 불필요함을 역설하는 것일까?

 

5. 알려지지 않은 서구의 비영리 공공 서비스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된 생각처럼, 오늘날 우리는 실질적인 ‘시장경제’ 세계에서 사는 것일까? 그렇다면 오늘날 경제에서 공공의 역할이 차지하는 비중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오늘날 경제의 특징은 시장 그 자체보다는 시장과 공공의 조화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정부의 시장개입은 네 가지 축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바로 사회보장제도, 공공 서비스, 노동권, 그리고 거시경제정책(재정, 통화, 산업, 규제, 교역, 소득재분배 등)이다. 시장의 규모(그리고 경제의 사회화 정도)가 서로 다르더라도 시장에 대한 정부의 역할은 모든 국가에서 대동소이하다. 예를 들어 프랑스보다 더 자유주의적인 미국이나 영국도 전적으로 ‘자유시장 경제’를 추구한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공적 연금제도(물론 사적연금이 활성화돼 보완적 기능을 수행함)는 공립 초중등 교육서비스만큼이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아울러 미국에서 수자원은 프랑스와는 달리 근본적으로 공공재로 구분된다. 영국은 매우 사회화된 성격의 의료서비스인 국가보건의료서비스법(NHS)을 시행하고 있다. 게다가 미국 정부와 영국 정부는부 모두 유로존의 여느 국가보다 재정과 통화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잠식당하는 유럽 복지국가의 전통적 4대 축

신자유주의는 사회보장제도와 공공 서비스의 민영화, 노동법의 유연화를 통해 복지국가의 실현을 방해한다. 국가별로 정도의 차이를 보이지만, 1980년대 초반부터 점차 확산된 신자유주의에 따라 네 가지 축에서 정부의 역할은 두드러지게 축소됐다. 그렇다고 복지국가가 아예 자취를 감춘 것은 아니다. 예컨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경우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공공지출의 비중이 1980년대 수준을 훌쩍 넘어섰다. 1980년대에는 그 비중이 17%에 그쳤지만 2013년에 들어서는 평균적으로 국내총생산(GDP)의 1/3에 달하는 24% 수준까지 증가한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도 공공지출은 증가추세다. 2014년 프랑스의 공공지출은 국내총생산의 57%(1980년 기준 46%)에 달하는 양이었다. 이 수치가 의미하는 바를 종종 오해하기도 하는데, 민간의 활동이 국내총생산의 43%만을 차지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유의해야 한다. 공공지출(2014년 기준 1조 2,260억 달러)의 규모를 가늠하기 쉽도록 가장 일반적으로 쓰이는 국가 경제 지표인 국내총생산의 양과 비교해 설명하지만, 공공지출이 국내총생산에 포함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이해를 돕기 위해, 어떤 지역에 수영장을 건설한다고 가정해보자. 지방정부는 측량사, 건축사, 건설사에 용역을 의뢰할 것이고, 이 사업에 참여한 민간기업과 지방정부의 지출을 모두 합산하면, 그 총액은 수영장의 가치를 크게 웃돌게 된다. 따라서 경제에 대한 공공의 기여도를 측정해보려면, 공공지출과 민간지출(국내총생산의 200% 이상에 달하는 규모)을 함께 따져 봐야 한다.

 

의료비 환급

공공지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영역은 사회수당 지출이다. 다른 국가와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도 사회수당 지출은 장기간에 걸쳐 증가세를 나타내고 있다. 먼저 ‘현금으로 지급되는 사회수당’을 살펴보면, 연금, 가족수당이나 실업급여(1980년에는 가계 총소득의 23%를 차지했지만, 2014년에는 34%를 나타내는 4,300억 유로에 달함)를 꼽을 수 있다. 여기에 의약품비와 진료비 환급, 주택 수당(현물 이전의 형태의 제공하는 재화)이 추가된다.

이처럼 다양한 사회수당은 사회분담금과 일반사회분담금(CSG)에서 자금을 조달하며, 개별가계에 직접 지급해 지출을 보조한다. 공공지출의 또 다른 주요 기능은 비영리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있다. 종종 간과되지만, 공무원들도 국내총생산에 이바지한다. 공무원이 창출하는 부가가치는 연간 3,600억 유로에 달한다. 이는 개인을 대상으로 하는 공공 서비스(교육, 병원 등)의 절반에 해당하며, 집단 대상 공공 서비스(사업, 치안 유지 등)에 비교하면 절반에 다소 못 미치는 수준이다.

프랑스에서는 전체 소비(총 수요의 80%)의 절반이 공공지출로 충당되고 있다. 이 소비는 승수효과를 통해 대부분 다시 투자(총 수요의 20%)로 이어지며, 이 중에서 20%는 공공투자에 해당한다. 이것을 모두 “시장경제라고 했던가?”

 

광기의 경제, 테러의 종말 

“왜 굳이 시리아와 이라크를 폭격하는가? 이슬람국가조직(ISO)을 척결하려 한다면 현지에 기업인을 파견해 기업의 명분인 이익을 내세우면 문제를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 이 담대한 질문을 던진 이는 페루 경제학자 에르난도 데 소토다(2015년 12월 30일 <르 피가로>). 그는 “유럽과 아시아에서 공산주의 경제 체제의 실패를 경험한 사람들은 기업의 이윤추구에 지대한 관심을 가질 뿐, 테러 문제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라고 말했다. 또한 “아랍의 봄은 사실상 현대화와 시장을 요구하는 민중의 봉기였고, 그 바탕에는 충족되지 못한 열망이 깔려있었다. 일찍이 서구에서는 이 사실을 깨달은 이가 별로 없다. 

테러범들은 그 틈새를 교묘히 파고들어 자신을 ‘국가’라고 주장하며 가난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방법으로 영토확장을 꾀하지만, 재화와 상품의 재산권을 확대하는 일은 안중에 없다.” 이에 관해 그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간단명료하다. “평화를 사랑하는 서구인들과 아랍인들은 이제 주권을 건 영토분쟁이 아닌 재산권을 지키는 일에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테러의 종말을 가져올 수 있다.” 테러 다음 순서로는 보나 마나 말라리아, 기생충, 두통, 티눈…(등을 치료하는 의약품)에 관한 각종 재산권 분쟁이 잇따를 테지만 말이다.

 

6.힘으로 강요된 사유재산

개인, 한 뙈기 땅, 부동산 권리증서. 하나 같이 지극히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이다. 그러나 늘 그렇듯, 오늘날 우리가 당연시하는 것들이, 실상을 파헤쳐 보면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된 역사의 결과물임을 알 수 있다. 영국 역사학자 에드워드 파머 톰슨은 연구를 통해, 사유재산의 개념이 탄생하기까지는 체계적인 노력에 따라 관습법을 타파해야 했으며 때에 따라 무력이 동원되기도 했음을 설명했다.

철학자 존 로크(1632-1704)는 “사람들은 토지에서 수확한 생산물의 잉여분을 금과 은으로 교환할 수 있으며, 더 많은 토지를 정당한 방식으로 소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암암리에 깨우쳤다. 그 결과, 일반인들은 지배계층의 불평등한 토지 점유를 그저 받아들이고 묵과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를 통해 사유지에 대한 소유권이 영국(잉글랜드)에서 저절로 생겨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농민들은 지배계급이 무력으로 사유지를 점유하는 불평등한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는커녕 관습법을 유지하고자 지배계급에 단호히 맞섰다.

18세기 초까지만 해도 영국의 왕실과 교구의 임야(삼림, 광야, 경작지 등)는 복잡한 규제의 대상이었다. 봉건 권리에 바탕을 둔 임업경제의 중심에는 귀족만 사냥할 수 있는 사슴이 있었다. 동물이 번식할 수 있도록 소작농(소작료를 지급하며 영주의 장원을 경작하는 농민)의 무기소지를 금했고, 농토 내에서 숲 경비원의 허락 없이는 나무를 벨 수도 없었다. 

그러나 실상 농민들은 예로부터 전해지는 규칙에 따라 작은 들짐승을 사냥하고, 가지를 주워 모으고, 토탄을 긁어모으는 등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숲을 활용했다. 사실 오랜 규칙이란 구전돼 내려온 내용이지만 지방 법원에서 내세울 수 있는 논거로 작용할 정도의 효력이 있었다.

 

사유지를 봉쇄하고 더 높은 소작료를 부과하는 새로운 지주층

토지 이용을 둘러싼 아슬아슬한 균형은 18세기 초에 이르러 결국 무너지고 만다. 임업 이외의 분야에서 부를 축적한 지주층이 새롭게 부상해 기존의 왕실과 교구 소유의 임야를 대거 사들였다. 탐욕스럽게 이윤을 좇는 이들 지주 세력은 그동안 별 탈 없이 유지해온 관습을 뒤엎었다. 외부인의 사유지 출입을 막고, 더 높은 소작료를 부과했으며 그동안 농민들에게 빌려준 땅을 모조리 거둬들이고, 영내 거주민들이 목재를 더는 줍지 못하도록 하는 금지령을 내렸다. 당시는 빠른 성장을 구가하던 조선업의 영향으로 대량의 목재 수요가 발생하던 시대였다. 지주들의 목표는 산림을 최대한 개발해 이윤을 극대화하는 데 맞춰져 있었다.

새로운 지주세력은 하노버 출신의 새로운 국왕 조지 1세를 지지하는 휘그당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조지 1세는 당시 영국의회의 힘을 빌려 스튜어트 왕정을 몰아내고 왕위를 얻었다. 이런 배경에서 정치적 힘을 얻은 지주들은 봉건적 권리와 무장 세력을 동원해 오랫동안 통용되지 않던 관료적 방식으로 다시금 숲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1720년, 말을 탄 14명의 남자와 그레이하운드를 동반한 두 명의 남자가 ‘밀짚모자에 허름한 복장’으로 검게 얼굴을 칠하고서 윈저성의 사냥터 빅샷워크에 나타났다. 이들은 사냥터 관리인을 위협하고 사슴 네 마리를 사살했다. 보복의 의미였다. 당시 상황에 관해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파머 톰슨은 “문제는 사냥당한 사슴 자체가 아니었다. 사슴은 지주들의 권위를 상징했으며, 그들의 사유재산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라고 해석했다.

처음에는 개인 차원에서 시작된 영내 주민들의 저항은 밀렵, 양식장과 사유지 울타리 파괴처럼 더 조직적이면서 선동적인 성격을 띠어갔다.

자칭 ‘존 왕(王)’이라는 이가 무장한 기병대 한 무리를 이끌고 햄프셔에 나타나 그곳에서 헌신적으로 일하며 현물로 적지 않은 보수를 받는 사냥터 지기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이 기병대 무리는 정의를 실현하고자 한다고 밝히며, 부자들에게 빈자들을 모욕하거나 억압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이에 따라, 하노버 왕정에서 총리로서 내각의 지휘를 맡았던 로버트 월폴 경과 그의 처남 찰스 타운센드는 1723년 ‘블랙 법(Black Act)’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이 잔인한 법은 교수형에 처할 수 있는 50개 죄목을 담고 있었는데, 그 죄목은 단순밀렵이나 기물파손 등이었다. 에드워드 톰슨은 유럽사회 이래 처음 “어류 양식장의 가치가 사람의 목숨과 동등해진 셈”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블랙 법’의 적용 범위는 실제로 선고된 교수형의 건수가 무색할 만큼 포괄적이었다. 이 법은 지주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다모클레스의 검으로써 사유지의 소유권을 공고히 하는 데 이바지하는 한편, 그 밖의 모든 권리는 철저히 배척했다. 인간들을 위해 아낌없이 베풀던 자연은 이렇게, 소수가 독점하는 소유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7. 하이에크? 신자유주의 볼셰비즘!

‘신자유주의’라는 단어가 너무 흔히 통용되다 보니 어느덧 대중들 사이에서 ‘시장 이론’의 학술용어 정도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여느 지배 이데올로기와 다를 바 없이 신자유주의는 마치 자생적으로 생겨나 영구적으로 존재해왔던 양 행세한다. 그리고는 그 기원을 사람들의 뇌리에서 지우려고 부단히 애쓴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 후에 생겨난 신자유주의도 사실 초기에는 학계의 변방을 겉도는 소수학파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신봉자들의 적극적인 노력에 힘입어 비로소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1956년, 경제학자인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는 “경제밖에 모르는 경제학자는 위험이나 재앙을 초래하기에 십상이다”라고 말했다. 1899년에 빈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하이에크는 정부의 적극적인 시장개입 이론을 구현한 케인스에게 맞서 신자유주의 사상을 창시한 인물이다. 두 사람 모두 상류층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 밖에도 케인스와 하이에크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다. 둘 다 학문 간의 경계를 아우르는 학제적 접근을 시도했고, 이성 만능주의를 신봉했으며, 서민의 삶에 무관심했다. 두 사람은 서로 대립했으며, 20세기 초 시대적 조류와 패권의 변화 양상에 발맞춰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1944년을 기점으로 서구 국가들은 케인스가 제시한 경제해법을 대대적으로 채택하면서 자유주의 접근법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같은 해에 하이에크는 정치 비평서 『노예의 길』을 출판해 사회 정의에 기초한 정책은 나치즘이나 공산주의로 이어진다고 단언했다. 하이에크는 유독 ‘사회’라는 단어를 싫어했는데, 이 사회를 좌우하는 것은 사회 계층이나 거시경제 변수의 크기(총공급과 총수요)가 아닌 시장의 ‘자생적 질서’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개인의 합리적인 행동이라고 봤다.

이 개념에 의하면 정부의 역할은 자원의 재분배가 아닌, 시장의 역할만으로는 불충분한 서비스(안보, 설비, 통계, 최저소득)를 생산해내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국가권력이 분산되고 자유를 보장할 수 있게 된다. “처음부터 시장이라는 비인격적인 힘이 있었고, 그 힘에 인간이 복종함으로써 문명은 발전할 수 있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문명은 결코 발전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일상적인 복종을 기반으로 해 우리는 통념을 초월하는 보다 위대한 업적을 이룰 수 있다.” 

대중의 요구로 사회보장 체계를 구축해나가던 유럽의 당시 상황에서 하이에크의 이런 원칙은 그저 분별없는 소리로 비쳤을 뿐이다. 자유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물론 이런 주장은 이상향이나 다름없었다.

 

타협을 모르는 소수 신념가들의 결집

하지만 하이에크는 쉽사리 포기하지 않았고, 오히려 “당연지사다. 새로운 개념이 정립되면 적어도 한 세대는 지나야 비로소 정치적 행동에 영향을 미칠만한 힘을 얻을 수 있다”라고 평가했다. 새로운 개념의 실행이 사회적 권력의 작용과 호의적 정책에 좌우된다고 한다면, 개념의 확산은 조직력에 달려있다. 1938년, 하이에크는 파리에서 개최된 ‘월터 리프만 컬로퀴엄(Walter Lippmann Colloquium)’에 참석했다. 

전통적인 자유주의가 무너지고 정부주도 경제가 우위를 점하는 상황에서 자유주의 사상을 재정립하고자 하는 인사들이 한 데 모인 자리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지식인들을 결집하는 데 총력을 기울인 하이에크의 전략은 흡사 볼셰비키의 혁명 전술을 떠올리게 한다. 그 전략이란, 타협을 모르며, 당장은 생경한 관념이지만 장기적으로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 확신하는 소수의 영향력 있는 인물들을 모으고 엄선하는 일이었다


대중매체를 통한 영향력 증대

그리하여, 1947년 하이에크가 창설한 것은 정당이 아니었다. 국제 학술회인 ‘몽페를랭회(Société du Mont-Pèlerin)’였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 대학교에서 교수가 돼 학생들을 가르쳤고, 그 사이 1955년에는 영국의 ‘경제문제연구소(Institute of Economic Affairs)’ 설립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는 “우리의 목표는 특정 정치사안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담보하는 답을 찾는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의 목표는 최고 지성들의 지지를 얻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사적 소유의 철폐를 주장한 공산주의자들의 경우에 비해 신자유주의자들이 맡은 당면 과제는 손쉬운 편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경제 질서를 전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유재산은 그대로 유지한 상태에서 비틀어진 사회 민주적 오류를 바로잡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1960년 하이에크가 『자유의 헌법』에서 발표한 로드맵은 (이후 프랑스 경제학자 질 도스탈러가 요약본을 발표) 당시로써는 야심에 넘치는, 다음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규제완화, 민영화, 사회보장제도 축소 및 간소화, 실업보호 축소, 주택보조금 제도 및 임대 규제 폐지, 농산물 가격 및 생산량 조율 제도 폐지, 노동조합의 권한 축소.”

그의 주장은 언론, 대학, 고위 공무원, 고용주들 사이에서 점차 퍼져나갔다. 2차 대전 이후 유지된 복지국가가 1970년대 중반에 들어 위기를 맞이한 것이 하이에크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했다. 그는 1974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으며, 이듬해에는 영국 보수당의 젊은 정치인이었던 마거릿 대처가 하원 토론에서 하이에크의 저서를 치켜들고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고 역설하기도 했다.   

 

 

 

글·<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편집부

번역‧이푸로라 poorora@daum.net
번역위원